동계선생집 서(桐溪先生集序)
조경(趙絅)
동계(桐溪) 정 선생(鄭先生)이 세상을 하직하자, 내가 글을 지어 곡을 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에 그 가장(家狀)을 참고하여 돌에다 새길 명(銘)을 짓고서, ‘내가 선생에게 나중 죽는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선생의 후손인 성현 독우(省峴督郵) 기수씨(岐壽氏)가 새로 간행할 선생의 이 문집(文集)을 부쳐 보내고 또 서문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부(先祖父)의 문집에 서문을 받기 위하여 집사(執事) 말고는 찾아갈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어 향을 피우고 손을 닦고서 문집을 살펴보니, 4책으로 되어 있는데, 시(詩)가 374수, 서(書), 서(序), 기(記), 전(傳), 논(論), 제문(祭文)이 36편, 소차(疏箚)가 31편, 신도비(神道碑), 묘지(墓誌), 발문(跋文)이 22편이었다. 양이 매우 방대하니, “덕(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라는 말이 어찌 빈말이라 하겠는가.
아, 삼대(三代) 이후로는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의리(義理)를 주장하는 글이 있고 형식만을 추구하는 글이 있게 되었다. 선생의 문장은 맹자(孟子)와 한퇴지(韓退之)를 근본으로 하였으니, 의리를 주장하는 글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나는 문집(文集)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모른다. 중국의 성대한 문헌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으므로 접어 두고, 우리나라에서 고려(高麗) 때부터 국조(國朝)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형식이나 추구하고 입으로만 외우는 무리들 중에 나무에 재앙을 주지 않고 문집을 만든 자가 있었던가. 그러나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성대한 사업이 반드시 그 사람들에게 있었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정몽주(鄭夢周),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 이언적(李彦迪),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 같은 분들은 문장을 일삼은 바가 없었지만 가슴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모두 의리(義理)였다. 그 뒤로 1백여 년 사이에 세 선생의 기풍을 듣고 기뻐한 자를 말하자면, 어찌 선생이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근대에 간행된 문인(文人)이나 재자(才子)의 문집은 알맹이도 없이 문장만 번지르르하거나 혹은 진부한 글을 표절한 것이고, 혹은 명위(名位)가 귀하고 치성한 것에 힘입거나 혹은 성세(聲勢)를 배경으로 하여 문집을 만든 것이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근원이 없이 길바닥에 고인 물과 같고 아침에 나서 저녁에 시드는 버섯이 초하루와 그믐을 모르는 것과 같아서, 호응하는 바가 얼마 가지 않아 끊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들과 함께 불후(不朽)의 대업(大業)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지금 동계(桐溪)의 이 문집을 보니, 비유하자면 마치 강물이 근원이 있어서 마르지 않는 것과 같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사계절이 다 가도록 잎이 시들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더구나 한 글자 한 구절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들이 아닌 것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생은 본래 문예(文藝)를 말단으로 보고 치중하지 않았으며, 대대로 선비의 집안이었으므로 가장 먼저 접한 것이 도(道)였다. 문장(文章)을 하는 데에 미쳐서는 육경(六經)에 근간을 두고 맹자(孟子)와 한퇴지(韓退之)를 표본으로 삼았으며, 도(道)가 있는 곳에 나아가 질정을 구한 분으로는 조월천(趙月川 조목(趙穆))과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 두 분 선생이 있다. 바야흐로 공부를 할 때에는 쉬지 않고 글을 읽어 밤을 지새기도 하였는데, 《창려집(昌黎集)》의 가죽끈 매듭이 몇 번이나 끊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읽었다. 옛말에 “공력을 많이 쏟는 자는 원대한 효과를 거둔다.” 하였는데, 선생의 이 문집은 필시 위현성(魏玄成)의 간림(諫林)이나 육경여(陸敬輿)의 주의(奏議)와 함께 천년토록 읽힐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니 어쩌다 한마디 말이 도리에 근접한 자와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일찍이 직언(直言)을 올렸다가 제주(濟州)에서 10년이나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선생은 이를 편하게 여겨 글을 읽고 도(道)를 담론하기를 평소보다 더욱 많이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들이 모두 선생이 비록 기구한 인생길을 걸었지만 실제로는 천리(天理)에 부합하였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하늘이 선생의 명을 액운에 시달리게 하여 선생의 문학을 성장시켜 주려고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섬에서 지은 선생의 작품이 분명하게도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마치 소 장공(蘇長公)의 영외(嶺外)의 작품이나 두 공부(杜工部)가 기주(夔州) 이후에 지은 작품과 유사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선생은 문장(文章)에 대해서 실상 직도(直道)로 인하여 터득한 것이 있었고, 운문(韻文)의 경우는 실로 촉주 자사(蜀州刺史) 고적(高適)의 만절(晩節)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두 공부나 한퇴지 문장에서 득력(得力)한 것이 많았다는 것은 역시 특이한 일이라 하겠다.
아, 선생의 사업이 유독 문장뿐이겠는가. 안자순(安子順)이 이르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며, 이영백(李令伯)의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효자가 아니다.” 하였는데, 나도 역시 이르기를, “정동계(鄭桐溪)의 갑인소(甲寅疏)를 읽고 나서 두어 줄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역시 충신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의 그 사람 됨됨이며, 선생의 그 문집 됨됨이라 하겠다. 경자년(1660, 현종1) 8월 상한(上澣)에 75세 노인 오봉거사(於峯居士) 조경(趙絅)이 쓰다.
[주1] 덕(德)이 …… 있다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지만, 훌륭한 말을 하는 자가 반드시 덕이 있지는 않다.”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덕이 있는 자는 화순(和順)이 속에 쌓여서 영화(英華)가 밖으로 발(發)한다.” 하였다.
[주2] 위현성(魏玄成)의 간림(諫林) : 현성은 당(唐)나라 위징(魏徵)의 자이며, 간림은 그가 당나라 태종(太宗)에게 올렸던 수십여 만 언(言)에 달하는 간언(諫言)으로, 그 상소 내용을 말한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주3] 육경여(陸敬輿)의 주의(奏議) : 경여는 당나라 사람 육지(陸贄)의 자이다. 주의는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의 문체를 말하는데, 그가 제고(制誥), 조유(詔諭) 등의 글을 모두 담당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적어 올린 수많은 글들이 여기에 속한다. 22권본과 12권본의 《육선생주의(陸先生奏議)》라는 책이 세상에 전한다. 《舊唐書 卷157 陸贄列傳》
[주4] 선생이 …… 하였는데 : 공이 46세 되던 갑인년(1614, 광해군6) 2월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 해 가을에 제주도 대정(大靜)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그 후 55세 되던 계해년(1623) 3월에 있었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그 해 4월에 풀려났다. 《桐溪集 年譜》
[주5] 소 장공(蘇長公)의 영외(嶺外)의 작품 : 소 장공은 소식(蘇軾)을 말하며, 영외의 작품이란, 그가 귀양 간 이후에 지은 작품으로, 〈범증론(范增論)〉과 같은 글을 말한다. 우재(迂齋)는 〈범증론〉 주에서, “이 글은 동파가 멀리 귀양 갔을 적에 지은 글인데, 필력(筆力)이 노련미가 있고 건장하다.”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주6] 두 공부(杜工部)가 …… 작품 : 두 공부는 두보(杜甫)를 말하는바, 당나라 현종(玄宗)이 파천(播遷)할 당시에 기주(夔州)로 갔는데, 그 이후의 작품이 두드러지게 돋보인다는 것이 일반적인 품평이다.
[주7] 고적(高適)의 만절(晩節) : 고적은 당나라 사람으로, 성격이 활달하였으며 절의를 숭상하였다. 만절은 그가 나이 50이 넘어서 시(詩)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新唐書 卷142 高適列傳》
[주8] 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이 출정하기에 앞서 한(漢)나라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인데, 전후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전출사표〉는 선제(先帝)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국가에 대한 충성 및 후주(後主)에 대한 간절한 부탁을 담고 있으며, 〈후출사표〉는 위(魏)와 촉(蜀)이 양립할 수 없음을 피력하고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여 싸워야 함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古文眞寶 後集》
[주9] 진정표(陳情表) : 이 글은 진(晉)나라 때 이밀(李密)의 작품이다. 무제(武帝)가 조칙을 내려 태자 세마(太子洗馬)로 임명하자, 90세 조모가 홀로 계시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는 지극한 효심을 구절구절 담아 피력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주10] 갑인소(甲寅疏) : 공이 46세 되던 갑인년(1614, 광해군6) 2월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복위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적어 올린 상소를 말한다. 이 상소로 인해 그 해 가을에 제주도 대정(大靜)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그 후 55세 되던 계해년(1623) 3월에 있었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그 해 4월에 풀려났다. 《桐溪集 年譜》
桐溪先生文集序[趙絅]
桐溪鄭先生旣歿。不佞爲文以哭。旣葬。摭其家狀。爲樂石之銘。吾以爲吾得盡後死之責於先生。今先生后孫省峴督郵岐壽氏。以新刊先生是集。又請弁首之文曰。敍吾先祖父。舍執事無適也。不佞義有不可辭者。遂薰盥而閱其集。爲秩四。詩三百七十四。書,序,記,傳,論,祭文三十六。疏箚三十一。神道碑,墓誌,跋二十二。富哉言乎。有德者必有言。其可誣歟。於乎。三代以後。文與道二致。於是有義理之文。有藻繪之文。先生之文。原於孟韓。則謂之義理之文者非耶。余不知文集之行自何世起。中原文獻之盛不說。吾東自麗及國朝累百有餘年。凡操觚呻佔之徒。有不災木而行其集者乎。然大業不朽之盛事。必在是人也則吾未知其可也。若圃隱若晦齋若退陶先生。無所事於文。而流出胸中者。盡義理也。其後百有餘年。聞三先生風而悅之者。先生庸非其人哉。近代文人才子之集之刊行者。或以文滑稽。或盜竊陳編。或以名位貴盛。或借助聲勢。而成其集者。夫如是者。 擧皆潢汚之水。朝菌之晦朔也。其影沈響絶。可立而待也。惡足與論於不朽之大業哉。今見桐溪文集。則譬如江河之有源而不窮也。譬如松柏之貫四時而柯葉不改也。而況一字一句。有非格君憂國之語者乎。先生本不屑文藝之末。家且世儒。聞道最蚤。及其爲文。根柢於六經。鎔範於孟韓。就有道而正焉。則趙月川,鄭寒岡兩先生是已。方其刻厲也。伊吾不輟。焚膏繼晷。絶昌黎韋編。不知其幾也。古語曰。見功深者收功遠。先生此集。必與魏玄成諫林。陸敬輿奏議。竝行千載也無疑。肯與夫僥倖一言之幾乎道者。同日語哉。先生嘗坐直。栫棘耽羅者十年。先生夷然安之。讀書譚道。比平昔有加。談者咸以爲先生雖畸於人。其實合於天。天其或者阨先生命。而長先生文學歟。不然。何先生島中述作。分明長一格價。殆類蘇長公嶺外。杜工部夔州以後作者。信先生於文。實有因直道而得者存。而至於有韻之語。則實不免高蜀州之晩。而得力於杜韓者多。亦異哉。噫。先生事業獨文也乎哉。安子順之言曰。讀諸葛孔明出師表而不墮淚者。非忠臣。讀李令伯陳情表而不墮淚者。非孝子。不佞亦曰讀鄭桐溪甲寅疏而不泣數行下者。亦非忠臣也。是乃所以爲先生其人。而所以爲先生其集也。上章困敦南呂上浣。七十五歲老人柱 峯居士趙絅。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