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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 임공(林公) 신도비명
공은 휘는 담(墰), 자는 재숙(載叔), 성은 임씨이니, 나주(羅州) 회진인(會津人)이다. 그 선대에 비(庇)란 분이 있었으니, 여조(麗朝)에 벼슬하여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공을 세웠다. 4대를 전해 판도 판서(版圖判書) 수(秀)에 이르고, 또 7대를 전해 전라 병마우후(全羅兵馬虞候) 평(枰)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좌승지 휘 붕(鵬)이고, 조부는 승문원 정자 휘 복(復)이고, 부친은 황해도 관찰사 휘 서(㥠)이고, 모친은 평택 임씨(平澤林氏)이니, 구성 부사(龜城府使) 식(植)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 29년 병신년(1596) 9월 18일에 태어났다. 채 돌도 안 되어 집안이 왜구를 피해 섬으로 들어갔는데 왜구를 만나게 되었다. 왜구 가운데 관상을 보는 자가 공을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귀인(貴人)이다.” 하고 병화를 피할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 덕분에 집안이 온전할 수 있었다. 14세에 남곽(南郭) 박공朴公 박동열(朴東說))에게 수학하였는데 동학한 선비로 박공 황(朴公潢), 구공 봉서(具公鳳瑞) 및 세당(世堂)의 선친, 홍공 명구(洪公命耉), 이공 기조(李公基祚) 같은 분들은 후에 모두 세상에 이름이 났다.
광해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생원에 뽑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미쳐 관찰공이 해서(海西)를 안무(安撫)하였는데, 공이 모친상을 당하여 귀장(歸葬)하였다. 이듬해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부친을 문안하기 위해 급히 달려가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관찰공이 여러 차례 수급(首級)을 바쳤는데 공이 곁에서 도운 것이 많았다. 이해 겨울에 또 부친상을 당하여 선산(先山)에 반장(返葬)하였다.
인조 7년 기사년(1629)에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가 시직(侍直)과 부솔(副率)로 전직하였다.
신미년(1631) 겨울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천전되었다가 동복 현감(同福縣監)이 되었는데 아전은 두려워하였고 백성은 귀부(歸附)하였다.
계유년(1633) 겨울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을해년(1635)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636)에 예조 좌랑으로 이배되었고, 정언에 배수되었으나 나덕헌(羅德憲) 등의 일로 체차되었다.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사서(司書)와 정언을 역임하였다. 겨울에 지평에 배수되었다. 당시 북쪽 오랑캐가 갑자기 침입하여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공이 총융사(摠戎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남격대(南格臺)를 지켰다. 오랑캐가 포(砲)를 설치하고 성을 공격하여 성가퀴가 다 파괴되자 공이 불사(佛寺)의 재목을 뜯어 파괴된 곳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성가퀴가 지탱하지 못하자, 또다시 멱둥구미를 가져다 흙을 채워 높이 쌓고서 겉에는 석회를 바르고 안에는 물을 뿌리니, 포로 공격해도 파괴할 수가 없었다. 적이 운제(雲梯)로 성을 핍박하자 공이 자루가 긴 큰 낫을 이용하여 운제를 걷어 올리고 이어 석거(石車)와 화포(火砲)를 어지러이 쏘아대니 오랑캐들 가운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도 적이 공격을 그치지 않자 다시 유황(硫黃)과 염초(焰硝)를 많이 가져다가 두꺼운 종이로 싸고 횃불을 묶어 아래로 던지니, 적들이 비로소 조금 후퇴하였다. 후퇴하였다가 적이 다시 이르자 공이 상황에 따라 대응하여 운제를 많이 탈취하니, 적들의 기세가 다소 꺾였다. 이때부터 성안 사람들이 공에게 크게 의지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수가(隨駕)하여 경사로 돌아왔다. 진휼어사(賑恤御史)로 호남(湖南)에 가서 폐막(弊瘼) 10여 조목을 올렸는데 채납(採納)된 것이 많았다. 가을에 정언으로서 조정에 돌아왔고, 홍문관 수찬으로 이배되었다. 당시 막 난리가 끝나 인심이 쉽게 동요되었다. 어느 날 저녁 도성에 귀병(鬼兵)이 이르렀다는 소문이 퍼지니, 도성 백성들이 다투어 일어나 몰려다니는 바람에 밤 2경(更)에 포성과 북소리가 어지러이 울리고 화광이 충천하였다. 금중(禁中)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그 단서를 추측할 길이 없었고 상(上) 또한 놀라 뜻밖의 사태를 막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는데, 공이 옥당에서 입직하고 있다가 명을 받고 금병(禁兵)을 지휘하여 여러 문을 방수하고 침착하게 조처하여, 사태가 진정될 수 있었다.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천전되었고, 장령에 배수되어 상소하여 아뢰기를, “김상용(金尙容)과 이시직(李時稷)의 순절에 대해서는 달리 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 유독 심현(沈誢)만 포장(褒獎)하였으니, 오늘날 시급한 것은 오직 표창과 출척(黜斥)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비가 뒤섞이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매우 칭찬하였다. 겨울에 사간으로 이배되어 심기원(沈器遠)을 양이(量移)하는 문제로 간쟁하다가 특별히 체차되어 사복시 정에 제수되었다. 비변사 낭청을 겸관하였는데, 대소의 일에 대해 제공(諸公)이 자문을 구하는 것이 많았다.
무인년(1638, 인조16)에 다시 사간에 제수되어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대한 수천 자의 상소를 올렸다. 당시에 남쪽의 왜구를 근심하여 상하가 흉흉하였으나 공만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였는데 끝내 역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직강과 사인(舍人)을 거쳐 부응교로 천전되었다. 남이공(南以恭)이 유심(柳淰)을 전랑에 의망(擬望)하여 심동귀(沈東龜)가 남이공을 논핵하고자 하니, 양사가 인피(引避)하였다. 이에 공이 수찬과 의논하여 양사를 체차하고 지평 김진(金振)을 파직하는 것으로 논하자 상이 노하였는데, 재상이 전적으로 옥당만 탓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여 드디어 일이 해결되었다. 8월에 문학에 제수되었다. 당시 세자가 심양(瀋陽)에 있었다. 대신이 공에게는 관장하는 일이 있다고 하여 보내지 않으려고 하자, 대각(臺閣)이 가는 것을 꺼린다고 공을 논핵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겨울에 교리, 전적,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가례(嘉禮) 때의 공로로 규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자급이 올랐다.
기묘년(1639)에 동부승지에 배수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천전되었으며, 사은 부사(謝恩副使)에 차출되었다. 8월에 복명(復命)하고 외직으로 나가 해서(海西)를 안찰하였다. 난리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온 도가 피폐되었는데 공이 온 마음을 기울여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고 북사(北使)에 대한 책응을 모두 상황에 맞게 적절히 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화약(和約)이 이루어져 무비(武備)를 모두 철수하였는데 공이 수렵을 핑계로 병사를 점고하고 군사를 호궤하여 약간이나마 훈련을 하였다.
경진년(1640) 가을에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와 참지에 배수되었다가 우승지로 이배되었다.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으며 비국을 겸관하였다. 또 예조 참의에 배수되었다가 좌부승지로 이배되었다. 겨울에 또다시 예조에 제수되어 일로 입대(入對)하였다가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갔다.
신사년(1641) 봄에 참지 및 승지에 배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무주현(茂朱縣) 서쪽 몇 리 되는 곳을 택하여 정자를 짓고 산수와 벗하며 지냈다. 여름에 판결사(判決事)로서 조정으로 돌아와 또 비국을 겸관하였다. 가을에 말미를 청하여 돌아갔다.
임오년(1642, 인조20) 봄에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안동은 평소 일이 번극한 고장으로 일컬어졌으나 공이 있는 동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고을의 어진 사대부들과 영호루(映湖樓)와 서악사(西岳寺) 사이를 자주 왕래하면서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였지만 부중(府中)이 크게 다스려졌다. 겨울에 본도의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영남은 지역이 가장 넓은 데다가 풍속이 송사를 좋아하고 또 일본과 이웃해 있어서 옛날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졌는데 공이 도임하자 묵은 폐해가 말끔히 제거되고 흉포하고 오만한 무리가 마음으로 귀복(歸服)하였다. 선비에게 시험을 보여 학문을 권장하고 효자와 열녀를 포장(褒獎)하여 정문을 내리니, 그렇게 한 지 한 해 만에 정사를 베푼 효과가 나타났고 송사가 드물어졌다. 일찍이 서원의 폐단을 진달하여 논하기를, “서원은 가정(嘉靖) 연간에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총수가 10군데가 되지 않았고 모두 조정에 보고되었습니다. 그런데 후대에 내려와서 벼슬이 높거나 집안이 크면 스스로 서원을 세우는 것을 내버려 둔 탓에 세월이 감에 따라 수가 점점 늘어나 사당(私黨)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 조정의 사전(祀典)에 따라 일도(一道)가 함께 논의한 다음 감사를 통해 조정에 아뢰어 해부(該府)의 승인이 난 뒤에야 허락하소서.” 하니, 공이 아뢴 바를 제도(諸道)에 반포하여 법으로 삼았다. 당시에 남쪽 변방을 근심하여 대책을 진달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간쟁하기를,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한준겸(韓浚謙) 등이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도(閑山島) 일로 인하여 이미 세워 놓은 방책이 있으니 지금에 와서 바꿀 수 없고, 또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장수를 편의에 따라 육지로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인하여 묘당에 문서로 보고하기를, “남쪽 변방에 목전의 위급함이 없다 하여 수군을 통제하는 장수를 육지로 옮기고자 하는데, 이는 일의 완급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고로 수사(水使)와 병사(兵使)를 나누어 방비하게 한 데에는 다 그만한 뜻이 있습니다. 수군을 통솔하는 장수와 육군을 통솔하는 장수는 각각 싸움터가 다르고 총독(總督)하는 임무는 원수(元帥)와 체찰사(體察使)가 있으니, 육군을 통솔하는 장수에게 수전(水戰)의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되고 수군을 통솔하는 장수에게 육전(陸戰)의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거느리는 사졸 또한 각기 능력이 다릅니다. 통제사(統制使)가 삼도의 수군을 거느려 해로(海路)의 원근(遠近)이 모두 그 관할하에 있으니,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물러나 적(賊)으로 하여금 수로(水路)로 경사(京師)를 핍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입니다. 지금 수전이 불리하다고 하여 물러나 육지의 성을 지키게 한다면 배를 탄 적들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곧장 올라올 것이니, 바닷가의 외로운 성을 지킨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의견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21) 겨울에 임기가 차 조정으로 돌아와 병조 참의에 배수되고 비국을 겸관하였다. 상소로 영남의 여러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채택되어 시행된 것이 많았다. 원공 두표(元公斗杓)가 공을 대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상(親喪)을 당하자, 베푼 은덕이 크다고 하여 공을 다시 영남 관찰사에 제수하는 명이 내렸다.
갑신년(1644) 봄에 관찰사에 부임하였다. 영남은 3월부터 9월까지가 바람이 잔잔한 계절인데, 연변(沿邊)의 열진(列鎭)에서 입방(入防)을 위해 마련하는 식량이 수만 석에 이르렀다. 원근에서 식량을 운반하느라 수고로움과 폐해가 매우 크거늘 공이 전후로 들어가는 비용을 헤아려 모두 관찰부觀察府에서 내도록 하니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었다.
을유년(1645) 봄에 조정으로 돌아와 일로 인해 법사(法司)의 조사를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자 즉시 산협(山峽)으로 돌아갔다. 겨울에 충청도 관찰사에 배수되었다.
병술년(1646) 3월에 도적이 양호(兩湖) 사이에서 일어나 용계(龍溪)에서 도당을 모아서 먼저 전주(全州)를 깨뜨리고 다음으로 공주(公州)를 친 다음 그대로 대궐로 쳐들어가기로 약속하였는데 그 일을 발고한 자가 있었다. 공은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으로 절도사 배시량(裵時亮)을 불러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게 하되, 군교(軍校)를 파견하여 정예병과 제읍의 병사를 나누어 용계로부터 유치(杻峙)로 들어가 적을 끝까지 추적하여 체포하게 하였다. 영하(營下)에는 친병(親兵)이 없어 공주의 병사를 발동하였는데 적에게 투항한 자가 반을 넘었다. 군중(軍中)이 밤새 크게 놀라 혼란스러웠으나 공이 동요하지 않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되었다. 적당(賊黨) 유민달(劉敏達)이 판치(板峙)에 있었는데 공이 사로잡아 적괴(賊魁) 안익신(安益信)과 권대용(權大用)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호남으로 이동하여 권대용을 체포하였는데 안익신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즉시 유민달 등을 참수하여 효시(梟示)하니, 이때부터 호령이 먹혀들고 민심이 안정되었다. 배시량이 군사를 일으켜 진격하니, 유탁(柳濯), 홍영진(洪英振), 안익신 등 수백 인이 속속 체포되었다. 여당(餘黨)이 드디어 평정되자 공이 스스로 관내에 난적(亂賊)이 있는데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였다고 대죄(待罪)하니, 우악한 비답이 내렸다. 도적을 평정한 공을 논하기 위해 경사(京師)로 와서 공훈을 감정(勘定)하라고 공을 부르니, 공이 간곡히 사양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작은 도적 때문에 공(功)을 논하면 훗날 전례가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하였고 대간도 녹훈(錄勳)이 지나침을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소명(召命)이 재차 내리매 공이 또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로가 있는 사람을 구록(具錄)하고 아울러 감히 공훈을 감정할 수 없음을 진달하였고 간관이 다시 한 달이 넘도록 논계하니, 마침내 상이 따랐다. 공이 “머물고 있는 감영에 적을 막을 장애물이 없으니, 유근(柳根)의 옛일대로 하소서.”라고 치계(馳啓)하여 산성(山城)으로 치소(治所)를 옮겼다. 9월에 평안도 관찰사에 배수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이 올랐는데 도적을 토벌한 공으로 또다시 가의대부로 자급이 오르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하직하고 떠날 때에 상이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권면한 다음 유시하기를, “양서(兩西)는 성곽과 해자가 무너지고 군졸이 지치고 늙었는데도 일을 맡은 자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성루(城壘)를 완성하기를 자기 집 울타리처럼 하고 군사들을 보충하기를 자기 노복을 보충하듯이 한다면 비록 군사를 동원하여 싸움을 익히지 않더라도 성곽과 해자가 무너지는 일과 사졸들이 지치는 일이 없게끔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난리 뒤에 양서는 물력(物力)이 피폐되고 북사(北使)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수령들이 주전(廚傳)을 사치스럽게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니, 오늘날 공을 선발하여 맡긴 것은 그 뜻이 공연한 게 아니다.” 하였다. 공이 사양하고 나서 본도(本道)의 몇 가지 폐막을 진달하니, 상이 부임하여 갖추 아뢰게 하였다. 이어 물품을 넉넉하게 하사하고 물러갈 때에 선온(宣醞)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에 관서(關西)에 이르니, 청나라 사신이 마침 도착하였다. 공이 이전에 군읍(郡邑)에서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에 공평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고 하여 도로의 원근과 재력(財力)의 다과를 참작하여 법식을 정하니, 온 도가 편케 여겼다. 또 관찰사가 양서(兩西)의 관향(管餉)을 겸관(兼管)하여 곡식의 매매를 주관하므로 삼경(三京)의 부상(富商)과 대고(大賈)가 영하(營下)에 폭주하여 출납하는 즈음에 좋지 못한 소문이 파다하였는데 일절 금단하였다. 오랑캐에게 투항한 정명수(鄭命壽)가 세력을 빙자하여 침학을 부렸으나 공이 흔들리지 않으니, 정명수가 노여움을 품어 갖은 방법으로 핍박하고 모욕하였는데 중화(中和)에 이르러 은산(殷山)과 강서(江西) 두 고을의 수령에게 과실이 있다고 하면서 좌중에서 무겁게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공이 그렇게 하지 않아 정명수가 더욱 노하였는데 이 때문에 조정에서 공을 해직하였다. 여름에 형조 참판에 배수되었다. 겨울에 예조로 이배되었고 부총관과 비국 제조를 겸하였다.
무자년(1648) 봄에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고 병조로 이배되어 진휼을 겸관하였다. 3월에 사은 부사(謝恩副使)에 차임되었는데 정사(正使) 이공 행원(李公行遠)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자, 조정에서 공이 그대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8월에 돌아와 예조 참판에 배수되었고 대사간으로 이배되었다. 당시에 재이(災異)로 인해 구언(求言)하자 성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말이 매우 개절(剴切)하였고, 또 혼조(昏朝) 및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의 일을 경계로 삼게 하였다. 겨울에 좌윤에 체배(遞拜)되었다.
기축년(1649)에 비국을 겸관하였고 호조로 이배되어 동의금부사를 겸하였으며 도승지로 이배되었고 또 이조 참판으로 이배되어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5월에 인조가 승하하자 공이 염빈(殮殯)하는 일을 담당하여 모든 일을 예에 맞게 하니, 조정의 모든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9월 대행왕(大行王)의 발인(發靷) 때에 공은 도보로 영은문(迎恩門)에 이른 뒤에야 말을 탔다. 그 수고로움에 대한 포상으로 자헌대부로 자급이 올랐고 동지경연성균관사를 겸하였다. 《맹자》를 시강(侍講)하였는데 강이 끝나자 상의 말이 시사(時事)에 미쳤다.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양 혜왕(梁惠王)이 일전(一戰)에 대패하고는 기필코 승리를 얻고자 하여 끝내는 백성의 골육이 썩어 문드러지도록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형세와 대략 흡사하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당시에 김공 집(金公集)이 대궐에 나아왔는데 많은 이들이 그에게 전형(銓衡)의 직임을 맡겨야 한다고 여겼으므로 공이 극력 사직을 청하여 해직되고 대사헌에 배수되었다. 시강 때에 공이 아뢰기를, “천명은 일정하지 않다〔天命靡常〕는 《시경(詩經)》의 말을 인용한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천명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왕(文王)과 같은 성인도 오히려 조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상(喪)을 당하여 슬픔 속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경학(經學)에 독실하시니, 이 마음이 식지 않는다면 태평성대를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세 차례 정고(呈告)하여 말미를 더 받았으며 간곡히 사직을 청하여 마침내 체직되었다.
효종 원년 경인년(1650) 봄에 형조 판서에 배수되었으나 병으로 면직되었다. 당시에 청사(淸使)가 이르렀는데 공이 접빈(接賓)하라는 명을 받고 일정을 서둘러서 다녀왔고 이내 곧바로 반송사(伴送使)로서 서도(西道)로 내려갔다. 3월에 우참찬에 배수되었고 종백(宗伯)으로 이배되었다. 도헌(都憲)에 천전되었으나 상피(相避) 문제로 체차되었다. 6월에 부사(副使)로서 연경(燕京)에 갔는데, “십 년 동안 세 차례 구련성을 지났네.〔十年三過九連城〕”라는 시구가 있다. 9월에 돌아와 《역대군감(歷代君鑑)》을 올리니, 상이 가상히 여겼다. 겨울에 도헌에 배수되고 종백으로 이배되었으며,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찬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공이 시강하는 기회에 아뢰기를, “여염에서 혼인할 때에 혼수가 너무 사치하니, 풍속을 바꾸는 길은 위에서 솔선수범하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가례(嘉禮)를 당하여 의당 간소하게 하는 쪽으로 힘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12월에 북사(北使)가 이르니, 공이 접빈을 맡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을 모두 행하였다.
신묘년(1651) 봄에 북사가 또 이르니,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맞이하였다.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고 훈국 제조(訓局提調)를 겸하였다. 공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 재주가 있으면서 낮은 관직에 오래도록 적체되어 있던 자를 발탁하니, 공의(公議)가 흡족해하였다. 북사가, 앞서 나온 자가 막 돌아가면 다음 사행이 뒤를 이어 이르렀는데, 공이 맞이하고 보내는 일을 모두 행하였다. 4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좌빈객(左賓客)을 겸하였다. 당시에 가뭄이 오래 계속되자 공이 야대(夜對)하는 기회에 친히 기도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전선(銓選)의 어려움을 말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처음 제수하는 음관(蔭官) 자리에 반드시 생원, 진사 및 공신, 호종인(扈從人), 충효인(忠孝人),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을 쓰고, 임금에게 관안(官案)을 올릴 때에 그 내력을 기록하는 것이 선대(先代)의 고사입니다. 그런데 혼조(昏朝)에 이르러 급기야 폐지되었으니, 지금 만약 옛 제도를 회복한다면 부정한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또 《서경》〈상서(商書)〉를 강(講)하는 기회에 아뢰기를, “임금의 일념이 만약 천지신명에게 제사하듯 경건하고 정성스럽다면 무슨 일을 하든 길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근자에 보건대,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친히 기도하시자마자 곧바로 큰비가 왔으니, 하늘의 마음이 임금의 마음과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8월에 대비전(大妃殿)에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 책보(冊寶)를 봉진(奉進)한 일로 자급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랐다.
임진년(1652, 효종3) 봄에 비로소 전장(銓長)에서 해면(解免)되어 휴가를 청해 분황(焚黃)하였다. 3월에 참찬에 배수되고 또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헌으로 이배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차되고 좌참찬에 배수되었고 종백(宗伯)으로 이배되었다. 기도가 응험이 있으면 보사(報祀)를 행해야 하는데 예(禮)를 폐지한 채 시행하지 않았다. 공이 아뢰기를, “저번에 교단(郊壇)에서 친히 기도하여 비가 왔으니, 하늘과 사람 사이의 미더움에 조금의 빈틈도 없습니다. 포상하는 일은 두루 미쳤으되 보사의 예만 유독 행하지 않으니, 의당 예대로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에 북사가 또 이르니, 공이 빈접하는 일을 맡아 서도로 나갔다. 판의금부사에 배수되고 숭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이에 앞서 상국(相國) 정태화(鄭太和)가 상에게 아뢰기를, “재상의 배수를 너무 갑작스레 하면 안 됩니다. 상께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을 일찌감치 등용하여 경력을 쌓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니, 이에 중외가 상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공이 겸대하고 있는 제사(諸司)의 관직이 15, 6가지였으므로 파루(罷漏) 때마다 관아에 나와 밤이 깊도록 휴식하지 못하였고, 북사가 끊이지 않고 나와 또 접반할 때마다 수고로움을 혼자 감당하여 몇 년을 분주히 일하였다. 이해 봄부터 정신이 지치고 기운이 빠졌는데 돌아가는 북사를 전송해야 할 때에 근력이 부치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제공(諸公)의 권유로 포기하였다. 도중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의 흉보(凶報)를 들었는데 청음은 공의 부친의 벗으로 공 형제가 아버지처럼 섬겼다. 이에 앞서 청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에 이르기를, “꿈에 선장(先丈) 및 대감의 형제들과 산중에서 모여 각자 시를 읊었는데 내가 지은 것만 생각이 난다네. ‘숲의 향기 한창 좋은 때에 만날 약속을 하였으니, 가을 산으로 돌아와 고인을 기다린다네.〔林香正好佳期在 歸去秋山待故人〕’라는 구절이라네.” 하였다. 7월 8일에 공이 숙천(肅川)에 이르렀다. 도중에 절구(絶句) 하나를 지었는데,
임금의 은혜는 하늘처럼 크고 이 한 몸은 가벼우니 君恩天大一身輕
조습도 마다않고 사생을 내맡긴 채 분주히 일했네 燥濕奔忙委死生
허나 부끄럽게도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却愧涓埃無所補
백발이 된 지금 헛되이 상서의 이름만 훔쳤네 白頭虛竊尙書名
하였다. 10일에 더위를 먹어 기(氣)가 고르지 못하더니 이날 밤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갑자기 임종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경악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관찰사와 병사(兵使)에게 명하여 염습하고 입관하는 등의 제반 절차를 반드시 정성을 다하게 하고 2등(等)의 예법을 쓰게 하였으며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공의 두 아들 종유(宗儒)와 굉유(宏儒)가 관을 메고 관서(關西)로 돌아오니, 사민(士民)이 모여들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상여가 남쪽으로 돌아오자 삼도(三道)에 별유(別諭)하여 호송하게 하였다. 그해 10월에 용담성(龍潭城) 남쪽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기국과 흉회가 진중하고 심원하였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도 깊었다. 타고난 자품이 명민하고 풍도가 활달하였다. 평소에 몸가짐이 점잖고 묵중하였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때에 맞았고 희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선한 것을 좋아하고 남을 사랑하였으며 호오에 따라 치우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볼 때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나 막상 가까이 다가가서는 온화함을 느꼈다.
효종의 지우를 입어 총애와 예우가 융숭하고 특별하였다. 일이 많은 때를 만나 군국(軍國)의 제사(諸事)를 모두 공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공은 강건하여 결단을 잘하고 명달(明達)하여 계책을 잘 만들어 일을 당해서는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하였고 참작하는 것이 사리에 맞았다. 북사가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공갈하였으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니, 흉악하고 교활한 짓이 용납될 여지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도맡아 한 해 동안에 대여섯 차례나 왕래하였으니, 공이 아니면 적임자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 공정함을 견지하여 사심을 두지 않고 인재를 발탁하였다. 보거나 들은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그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 국량을 헤아려 관직을 제수하였고, 혹 청탁하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지워버리고 등용하지 않으니, 청탁하러 집으로 찾아오는 이가 없어 문 앞이 적막하였다. 당시에 조정의 논의가 여럿으로 갈려 반목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이 홀로 초연히 소신을 견지하니, 사람들이 감히 편당(偏黨)으로 지목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귀공(貴公)이 공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말이 대관(臺官)의 주의(注擬)에 미치자 공은 정색하고 말하기를, “저는 서료(庶僚)를 임명할 때에도 감히 남들의 평가하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대관을 의망하면서 부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공께서는 지위가 중하신데 남을 위해 벼슬자리를 주선하십니까.” 하였는데, 사람들이 듣고는 탄복하였다. 직무가 매우 번극하여 일찍이 휴가를 청한 적이 없었고 조정 관원 가운데 궐원(闕員)이 생기면 편히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간혹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다. 외직으로는 다섯 차례 중요한 번진(藩鎭)을 맡았고 내직으로는 제사(諸司)를 겸대하여 녹봉을 넉넉하고 후하게 받았으나 모두 궁핍한 자들에게 흩어 주어 집에 쌓아 둔 재물이 없었다. 벼슬이 높았으나 집이 없어 남의 집을 빌려서 거처하였는데, 형 승지공(承旨公)이 웃으며 공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네 아비는 벼슬이 높은데도 몸 둘 곳조차 없다.” 하고 드디어 성 서쪽에 있는 집을 사서 공에게 거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집 또한 누추하고 협소하여 손님이 오면 먼저 온 손님이 물러나야 뒤에 온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공이 살아 있는 동안 기왓장 하나도 바꾸지 않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편안하게 여겼다.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여 형을 섬기기를 아비를 섬기듯 하였으니,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도 일찍이 태만한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손위 누이 하나가 일찍 과부가 되어 가난하게 살았는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 먹었다. 어느 날 손위 누이가 공을 찾아왔는데 마침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공이 몸소 우산을 펴서 맞이하여 당에 오르니, 누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1품 재상을 우산을 잡고 걷게 합니다.” 하였다.
평소 산수를 사랑하여 젊었을 때에 소양(昭陽)에 터를 잡았고 만년에 주계(朱溪)에 집을 지었다. 일찍이 시를 지어 벽(壁)에 쓰기를,
서울과 호향을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洛社湖鄕謾去來
한평생 정처 없이 떠돌다가 수염만 하얗게 세었네 生涯無着鬢成皚
하찮은 재주로 벼슬함은 애당초 원하던 바 아니요 才微干祿初非願
외떨어진 곳에 몸 편히 있으니 누가 시기하랴 地僻便身孰見猜
천명을 어이 의심할까 거친 밥이면 족하고 天命奚疑疎糲足
그윽한 심사 즐거워라 물과 구름뿐이네 幽懷可悅水雲堆
이제부터는 영원히 주계의 늙은이가 될 터이니 從今永作朱溪老
한바탕 꿈 같은 세상사에 대한 온갖 미련 사라지겠지 一夢人間萬念灰
하였으니, 공의 뜻을 알 수가 있다.
양조(兩朝)의 사랑을 입어 어려운 세상을 만나 차마 과감히 떠나가지 못하였으나 가까운 벗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말이 거취에 미치면 슬픈 얼굴로 망연해하였다. 일찍이 〈이주헌기(易疇軒記)〉의 말미에 쓰기를, “나는 세상에 이바지할 만한 재주와 힘이 없으므로 젊어서부터 산수(山水)에 마음을 두어 20세에 소양(昭陽)의 하류에 집을 엮었는데 그 뒤로 줄곧 세속에 얽매였다. 금년 봄에 병으로 소명(召命)에 달려가지 못하고 도리어 주계(朱溪)로 들어와 언덕 하나를 얻어 깃들어 살 곳을 정하고 나물 캐고 물고기 낚으니, 자못 재미가 있다.” 하였다. 공의 오랜 친구로 이를테면 서공 원리(徐公元履), 신공 량(申公湸), 박공 호(朴公濠) 형제가 모두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한가한 날이면 번번이 말에 멍에를 하도록 명하여 찾아가거나 혹 말을 보내 맞이하여 종일토록 환담하였는데 벼슬이 높고 낮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의 초취(初娶)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사인(舍人) 광세(光世)의 따님이고, 재취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휘(煇)의 따님이고, 마지막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현령 진현(震賢)의 따님이다.
심씨 부인은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종유(宗儒)는 백부(伯父)의 후사로 들어갔는데 벼슬이 부솔(副率)이고, 맏딸은 윤극(尹克)에게, 둘째는 부사(府使) 이흥직(李興稷)에게, 막내딸은 성창수(成昌秀)에게 시집갔다. 박씨 부인은 아들과 딸이 각각 1명이니, 아들 굉유(宏儒)는 찰방이고 딸은 신석관(愼碩觀)에게 시집갔다. 김씨 부인 역시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정유(定儒)이고 딸은 홍득주(洪得周)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종유는 4남을 두었으니, 세온(世溫)은 찰방이고, 세량(世良)은 현감이고, 세공(世恭)은 진사이고, 세검(世儉)은 참봉이다. 두 딸은 박태도(朴泰道), 이의한(李儀漢)에게 시집갔다. 이흥직의 두 아들은 수필(秀弼)과 수형(秀衡)이고, 네 딸은 권흡(權恰), 박필명(朴弼明), 안윤희(安允禧), 생원 조윤벽(趙潤璧)에게 시집갔다. 성창수의 1남 수웅(壽雄)은 금부도사이고, 두 딸은 생원 윤언명(尹彦明), 진사 이재필(李載泌)에게 시집갔다. 굉유의 3남은 생원인 세양(世讓), 세겸(世謙), 세집(世諿)이고, 두 딸은 진사 김성신(金聖臣), 윤세헌(尹世憲)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자가 100여 인이다.
공은 선친의 벗이 되시는데 내 나이가 어린 탓에 미처 찾아뵙지 못하였다. 훗날에 굉유와 함께 공부하였으나 지금은 그 또한 이미 죽었고, 이처럼 늙고 병든 나도 머지않아 죽을 몸이다. 세양이 와서 공의 신도비명을 부탁하니, 이는 두 대에 걸친 교분이 있기 때문이다. 감히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행장에 의거하여 공적과 행적을 차례로 기술하고 그 끝에 시를 붙인다. 시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훌륭한 재목을 냄은 惟天生材
세상에 쓰이도록 하기 위함이니 蓋爲時用
가래나무 소나무는 杞梓松柏
배의 재목이 되고 대들보로 쓰인다네 乃舟乃棟
대들보에 의해 큰 집이 지탱되고 大廈待扶
이 배로 큰 내를 건널 수 있으니 巨川能涉
국사를 위해 부지런히 힘써 勞勤家邦
죽백에 찬란히 이름을 빛낸다네 輝暎簡牒
임공 같은 분은 有若林公
타고난 자질 우뚝하니 生資挺特
양조에 벼슬하면서 出入兩朝
간고한 시운을 만났네 遭運艱厄
남한산성에서 적을 막자 南城拒敵
사다리로 공격하던 적이 격파되었고 梯衝破斷
북궐에서 한밤중에 경계하자 北闕宵戒
요망한 귀신의 장난 사라졌네 妖厲消散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는 嶺海開府
백성들이 덕정을 구가하였고 歌騰來暮
수군과 육군을 별도로 통솔하자는 제의는 水陸之議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대비하기 위함이었네 牖戶陰雨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어서는 曁授湖臬
또다시 도적의 난리를 만났는데 又値盜亂
주도면밀하게 계책을 세워 審計定算
끝내 위난을 평정하였다네 卒平危難
뒤에 평안도 관찰사를 맡게 되어서는 後鎭關右
민막을 제거하여 백성들 웃게 하였고 回顰爲笑
오랑캐에 투항한 자가 능욕하였으나 降虜見凌
강건히 대처하여 굽히지 않았다네 剛不屈撓
전형을 맡게 되어서는 지극히 공정하였으니 秉銓大公
뭇사람들의 마음이 흡족해하였고 群心洽然
재상에 발탁하고자 미리 경력을 쌓게 하였으니 調羹預儲
임금의 관심과 사랑이 매우 융숭하였다네 上眷隆焉
공이 맡은 자리를 돌아보건대 觀公地處
크든 작든 내직이든 외직이든 小大外內
충성을 다하고 절의를 다하여 竭忠殫節
기어이 신명을 바치고자 하였네 期以身斃
누구인들 종사하지 않았겠는가마는 誰不從事
어찌하여 홀로 노고하였는가 乃胡獨賢
십 년 동안에 무려 十年之中
세 번이나 연경에 갔네 三走遼燕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히 왕래하여 星奔宵馳
가는 자를 전송하고 오는 자를 맞이하니 去送來迎
바쁘게 접반에 종사하느라 儐接不暇
길 위에서 몸이 늙었다네 身老于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였더니 世所同愍
마침내 상여에 실려 돌아왔네 竟以喪返
빗돌에 명문을 새겨 놓으니 刻銘于石
지난 행적이 어찌 잊혀지리오 往迹何遠
밝게 빛나고 빛나 炳炳昭昭
천만년을 이어지리니 載祀千萬
훗날 사람들이 보면 後之視之
권면할 바를 알리라 尙知所勸
[주1] 두 딸 : 원문에는 ‘一女’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54집에 수록된 《명곡집(明谷集)》의 〈이조판서임공시장(吏曹判書林公諡狀)〉에 ‘二女’라 한 것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吏曹判書林公神道碑銘
公諱墰。字載叔。姓林氏。羅州會津人。其先有庇。仕高麗。從忠烈王于元有功。四傳至版圖判書秀。又七世至全羅兵馬虞候枰。是公高祖。曾祖左承旨諱鵬。大父承文正字諱復。父黃海道觀察使諱㥠。母平澤林氏。龜城府使植女。公生宣祖二十九年丙申九月十八日。未期。家避倭海島而遇寇。倭有相者。見公曰。兒貴人也。爲指避兵之所。家以得全。年十四。受業南郭朴公。同學之士如朴公潢。具公鳳瑞及世堂先公。洪公命耇。李公基祚。後皆名于世。光海丙辰。選生員。及仁祖反正。觀察公按海西。而公丁內艱。歸葬。明年。逆适反。公疾馳覲省。及於平山。觀察公屢獻馘。公多左右。是冬。又丁外艱。返葬先山。仁祖七年己巳。除洗馬。轉侍直副率。辛未冬。遷宗簿主簿。爲同福縣監。吏畏民懹。癸酉冬。棄歸。乙亥。擢文科。除刑曹佐郞。丙子。移禮曹拜正言。以羅德憲等事避褫。兼知製敎。歷司書正言。冬。拜持平。時北寇猝至。大駕幸南漢。公爲摠戎從事。守南格臺。虜置砲攻城。城堞盡壞。公毀佛寺材補壞。堞不能支。又取藁篅。實土積高。外塗石灰。內灌以水。砲擊之而不能破。敵以雲梯逼城。公用長柄大鎌。鉤取雲梯。隨以石車火砲亂投。虜死者甚多。進猶不止。復多取硫黃焰硝。包以厚紙。縛火擲下。賊始少退。退而復至。公隨機以應。多奪雲梯。賊氣稍挫。自此城中倚公爲重。丁丑。隨駕還京。以賑恤御史往湖南。上弊瘼十數條。多見採。秋。以正言還朝。移弘文修撰。時新去亂。人心易撓。一夕。都下傳鬼兵至。競起逐夜二鼓。而砲鼓亂發。火光燭天。禁中皆懼。莫測其端。上亦驚焉。使擇可禦非常者。公直玉堂。應命指揮禁兵。防守諸門。措處從容。事以得定。遷濟用正。拜掌令。疏言金尙容,李時稷之死。人無異辭。而獨褒沈誢。今所急。唯旌黜之明。是非混淆。人心不服。上優奬。冬。移司諫。爭沈器遠量移。特褫除司僕正。兼備邊郞事。大小諸公。多以咨。戊寅。改司諫。疏君德時政累千言。時南憂倭。上下洶洶。公獨謂不然。卒亦無事。歷直講舍人。遷副應敎。南以恭擬柳淰銓郞。沈東龜欲劾以恭。兩司引避。公與修撰褫兩司。而論罷持平金振。上怒。宰相言不可專咎玉堂。事遂解。八月。除文學。時世子在瀋。大臣以公有所管。欲勿遣。臺閣劾公憚行不從。冬。歷校理,典簿,掌樂正。用嘉禮勞。例進通政。己卯。拜同副承旨。轉右。充謝恩副使。八月。復命出按海西。經亂未久。一路凋弊。公專心撫摩。策應北使。動合於機。民情皆悅。和約之成。盡撤武備公托獵。點兵犒軍。稍存練習。庚辰秋。期滿。還拜參知。移右承旨。爲遠接使。兼籌司。又拜禮曹參議。移左副承旨。冬。又還禮曹。以事就對。罷官南歸。辛巳春。拜參知及承旨。不赴。卜居茂朱縣西數里搆亭。倘佯山水。夏。以判決事還朝。又兼籌司。秋。乞暇歸。壬午春。赴安東之除。安東素號煩劇。公居之若無事。數與邑中賢士大夫。往來映湖樓西岳寺之間。嘯詠自適。府中大治。冬。就授本道觀察使。嶺南幅員最廣而俗好訟。又隣日本。自古以爲難治。公至而宿弊盡空。暴傲歸心。試士勸學。表旌孝烈。朞年而政成訟稀。嘗陳論書院之弊曰。書院始嘉靖間。摠數不過十。而俱聞于朝。至末流。或官貴或族大。任自建置。歲增月盛。轉成私黨。請依中朝祀典。一道通議。轉稟得準。乃許以公啓頒諸道爲法。時以南邊爲憂。有陳策者。公爭以爲李德馨,李恒福,韓浚謙等。因李舜臣閑山事。已有成算。今不可撓易。又水將不可取便登陸。因書報廟堂曰。南邊無目前之急。欲令舟師將移陸。不念緩急之宜。自古分使防備。意有在。水將陸將。各有死所。而摠督則有元帥體察。陸將不可責水戰。水將不可責陸戰。所領卒。又各異能。統制使領三道舟師。海路遠近。皆其所管。且進且退。不使賊由水路逼京者。乃其職耳。今令水戰不利。退保陸城。則乘船之賊。一帆直上。海邊孤城。守之何益。議遂寢。癸未冬。秩滿還朝。拜兵曹參議。兼籌司。疏陳嶺南衆弊。多採施。元公斗杓代公未久。丁憂。以公有遺愛。復有嶺南之令。甲申春。赴鎭。嶺南。自三月至九月。風和節。沿邊列鎭。入防資糧。至數萬石。遠近轉輸。勞弊不訾。公前後籌其費。皆自使府出。民蒙其賜。乙酉春。還朝。以事就吏奪職。卽歸峽。冬。拜忠淸觀察使。丙戌三月。賊起兩湖間。聚黨龍溪。約先破全州。次攻公州。因犯闕。有發其事者。公聞于朝。招節度使裴時亮以兵來會。遣軍校分精銳及諸邑兵。由龍溪入杻峙窮捕。而營下無親兵。發公州兵。投賊者過半。軍中一夜大驚亂。公不爲動。少時而定。賊黨劉敏達在板峙。公擒致。得賊魁安益信,權大用所在。移湖南捕大用。而益信已逃。卽斬敏達等。懸首示衆。田此號令行而人心定。裴時亮發兵進勦。柳濯,洪英振,安益信等數百人。續就捕。餘黨遂平。公自以封內有亂賊而不能早覺待罪。優答論平賊功召公。至京勘勳。公懇辭。因曰。以小寇而紀功。恐他日爲例。臺諫亦論錄勳之過。上不聽。召命再下。公又力辭不許。乃具錄有勞人。兼陳不敢勘勳。諫官復論閱月。竟從之。公馳啓留營無關閡。請依柳根舊事。移治山城。九月。拜平安觀察使。進階嘉善。論討賊功。又進嘉義。賜田民。及辭行。上引見慰勉。因諭以兩西城池頹圮。軍卒疲老。任事者不爲意苟能完城壘如垣墻。補卒伍如奴僕。雖不動衆習戰。可以無城池之頹廢。士卒之老疲。況亂後兩西。物力凋殘。而北使絡繹。守令侈廚傳以爲能。今日簡寄。意非偶然。公辭謝。因陳本道數弊。上令至鎭具聞。因厚賜賚。及退宣醞。丁亥。至關西。西使適至。公以在前郡邑迎候供待事。多不均。酌其道路遠近貲力豐儉以爲式。一路便之。又觀察兼兩西管餉糴販爲事。三京富商大賈輻輳。營下出納之際。醜聲播聞。一切禁絶。降虜鄭命壽憑勢凌虐。公不爲撓。命壽銜怒。窘辱多端。及至中和。言殷山江西兩邑官有過犯。請於座重治。公不肯。命壽益怒。故朝廷爲解公職。夏。拜刑曹參判。冬。移禮曹。兼副摠管,備局提調。戊子春。兼同知義禁。移兵曹。兼管賑恤。三月。充謝恩副使。正使李公行遠。至義州病卒。朝廷聽公因進。八月。還拜禮曹參判。移大司諫。時以災異求言。應旨進箚。言甚剴切。又以昏朝及崇禎爲戒。冬。褫拜左尹。己丑。兼備局。移戶曹。兼同義禁。移都承旨。又移吏曹參判。兼同知成均。五月。仁祖昇遐。公當殮殯事。無不中禮。在廷咸目屬焉。九月大行發靷。公步至迎恩門而後乃乘。以勞賞進資憲。兼同知經筵,成均。侍講孟子。講訖。上語及時事。公進曰。梁惠王一戰大敗。必欲取勝。終至糜爛骨肉。此與今形勢
略同。不可不深慮也。上曰。卿言甚好。拜吏曹判書。時金公集赴闕。衆以銓衡屬意。公力辭得解。拜大司憲。侍講。公曰引詩天命靡常。有深意。命靡常。故文王之聖。猶栗栗危懼。聖明哀疚之中。猶篤經學。此心不息。治平不難。上嘉納。三告加由。懇辭乃褫。孝宗元年庚寅春。拜刑曹判書。病免。時淸使至。公受命儐接。倍道往返。旋以伴送西下。三月。拜右參贊。移宗伯。遷都憲。嫌褫。六月。以副使赴燕。有十年三過九連城之句。九月。還進歷代君鑑。上嘉之。冬。拜都憲。移宗伯。參修仁祖實錄。公因侍講。言閭閻嫁娶。資粧太侈。移風易俗。在於導率。今當嘉禮。宜務從簡。 上嘉納。十二月。北使至。公爲儐接。迎送皆行。辛卯春。北使又至。因留迎。拜吏曹判書。兼訓局提調。公在銓。振拔淹滯。公議洽然。北使前者方去而後者續至。公送迎皆行。四月還朝。兼左賓客。時久旱。公因夜對請親禱。從之。又言銓選之難。因曰蔭官初授。必用生進及功臣扈從與忠孝淸白人子孫。進御官案。錄其來歷者。先代故事。而至昏朝始廢。今若復舊制。則無濫僞矣。上稱善。又因講商書。言人主一念。常若對越。則豈有動而不吉。臣近觀虔誠親禱。卽致大霔。可知天心與君心不遠矣。八月。以大妃尊崇。奉進冊寶。進正憲。壬辰春。始解銓。請暇焚黃。三月。拜參贊。又兼守禦使。還朝。移大司憲。俄褫拜左參贊。移宗伯。祈禱有應。當行報祀。而禮廢不行。公言向日親禱郊壇而得雨。天人交孚。間不容髮。賞例徧及。報禮獨缺。宜依禮擧行。從之。五月。北使又至。公爲儐西出。拜判義禁。進崇政。前此。鄭相國太和言於上拜相不宜大驟。上所注意。當早登進。以爲夙儲。故有是命。於是中外知上意所嚮矣。公所兼諸司十五六。每罷漏赴衙。夜深不得休息。北使相屬。又每有獨賢之勞。奔走數年。自是春神氣憊頓。及當送歸使。自揣筋力不支。欲無行。爲諸公所勸而止。在途聞淸陰凶報。淸陰爲公先執。公兄弟父事之。先此得書曰。夢與先令及台兄弟會山中。各吟詩。只記吾作云。林香正好佳期在。歸去秋山待故人。七月初八日。公到肅川道中一絶曰。君恩天大一身輕。燥濕奔忙委死生。却愧涓埃無所補。白頭虛竊尙書名。初十日。因觸熱氣不平。是夜疾增劇。遽屬纊。訃聞。上震悼。爲之涕出。下觀察節度。棺殮諸事。必致謹。禮用二等。特贈領議政。公二子宗儒,宏儒。扶櫬還關西。士民相聚。操文設祭。及喪南歸。 別諭三道護送。其年十月窆于龍潭城南負酉之原。公器宇凝遠。識量弘深。天資敏悟而風儀曠然。平居簡重。語默有時。喜怒不形。樂善愛人。好惡無偏。人望之敬畏。就之溫然。受知孝宗。寵遇隆異。値時多故。軍國諸事。悉以咨公。公剛毅能斷。明達善謀。當事決疑。參酌得宜。北使絡繹。恐喝百端。而應之中機。凶狡不得其間。用是專任儐事。一歲中至五六行。以爲非公莫可也。在銓秉公無私。甄拔人才。凡有所見聞。輒錄其名。量器授職。或有屬託。輒抹去不用。門庭寂然無車馬。時朝論岐貳。推奪不已。公獨超然自立。人不敢以偏黨指目。嘗有貴公來詣。語及臺官注擬。公正色曰。某於庶僚。亦不敢聽人低昂。況擬臺官。可以受託乎。公位重。乃爲人奔競。聞者歎服。職務鞅掌。未嘗休告。朝政有闕。夜不安寢。或至明燭達曙。性儉約。服無華美。外則五典重藩。內則兼帶諸司。俸請優厚。散之窮乏家。無宿儲。官位隆顯。未有第宅。借屋以居。兄承旨公笑謂公之子曰。汝父官高而置身無所。遂買屋城西。俾公定居。然亦堂宇狹陋。客至。先者退而後者方入。終公之世。不易一瓦。處之晏如也。孝友篤至。事兄如事父。年高位顯。未嘗有怠慢之色。一姊早寡居貧。旨甘必分。一日。姊詣公適小雨。公自張傘迎之升堂。姊笑曰。吾能使一品宰相。執傘而行。雅好林泉。少卜昭陽。晩築朱溪。嘗題詩壁上曰。洛社湖鄕謾去來。生涯無着鬢成皚。才微干祿初非願。地僻便身孰見猜。天命奚疑疏糲足。幽懷可悅水雲堆。從今永作朱溪老。一夢人間萬念灰。可以見公之志。兩朝眷注。遭世之艱。未忍決退。而每與親友語及去就。悵然自失。嘗書易疇軒記後曰。余才力未堪供世。少志山水。年二十。結舍昭陽下流。邇來出入塵網。今年春。病未赴召。轉入朱溪。得一丘定棲息。採山釣水。頗有味焉。公舊交如徐公元履。申公湸。朴公濠兄弟。皆未顯。暇日輒命駕或遣騎以邀。歡笑終日。不間升沈。公先娶靑松沈氏舍人光世女。再娶潘南朴氏煇女。最後娶慶州金氏縣令震賢女。沈夫人一男三女。男宗儒。後伯父。官副率。女適尹克。次適府使李興稷。次適成昌秀。朴夫人男女各一。男宏儒察訪。女適愼碩觀。金夫人亦一男一女。男定儒。女適洪得周。幷早沒。宗儒四男。世溫察訪。世良縣監。世恭進士。世儉參奉。二女。適朴泰道,李儀漢。李興稷二男。秀弼,秀衡。四女。適權恰,朴弼明,安允禧生員,趙潤壁。成昌秀一男。壽雄禁 府都事。一女適生員尹彥明,進士李載泌。宏儒三男。世讓生員,世謙,世諿。二女。適進士金聖臣,尹世憲。內外孫曾百餘人。公爲先友。而稚幼未及拜床。後與宏儒得共筆硯。今亦已亡。顧此老病。朝暮且死。世讓來屬公墓道之銘。蓋有再世之感。不敢復辭。謹據狀敍次功行。系之以詩曰。惟天生材。蓋爲時用。杞梓松柏。乃舟乃棟。大廈待扶。巨川能涉。勞勤家邦。輝映簡牒。有若林公。生資挺特。出入兩朝。遭運艱厄。南城拒敵。梯衝破斷。北闕宵戒。妖厲消散。嶺海開府。歌騰來暮。水陸之議。牖戶陰 雨。曁授湖臬。又値盜亂。審計定算。卒平危難。後鎭關右。回顰爲笑。降虜見凌。剛不屈撓。秉銓大公。群心洽然。調羹預儲。上眷隆焉。觀公地處。小大外內。竭忠殫節。期以身斃。誰不從事。乃胡獨賢。十年之中。三走遼燕。星奔宵馳。去送來迎。儐接不暇。身老于行。世所同愍。竟以喪返。刻銘于石。往迹何遠。炳炳昭昭。載祀千萬。後之視之。尙知所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