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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③ - 화평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약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지난 시간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두 번째 열매인 희락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희락의 열매는 믿음의 성도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킬 때 성령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증거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성도가 믿음의 눈으로 환경을 바라보게 되어 희망의 기쁨이 넘쳐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에 그 영혼 속에 맺혀지는 것이 희락의 열매입니다.
오늘을 성령의 열매 세 번째 시간으로 화평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성전에 나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를 5대 제사라 하는데요.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거나 또는 맺어주신 모든 관계에 대한 감사를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물론 화목 제사 역시 제물을 태워서 나는 냄새를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입니다. 화목 제사는 사람이 그 필요를 인정하고 드리는, 즉 사람이 선택하는 제사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화목제의 제사를 사람의 형편과 처지와 상황에 따라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드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드리겠다고 자원하는 제사입니다. 때문에 다른 제사들과 달리 정기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아닙니다.
번제나 소제는 매일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제사인데 반하여 화목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맞춰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번제로 드리시므로 하나님과 믿음의 성도는 화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화목을 이루었다는 징표로 희락을 주셨다고 하면 화평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구원에 감격하여 표현할 때 얻어지는 열매가 바로 화평입니다. 사랑은 표현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화평은 하나님께 감사로 고백할 때 얻어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약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기서 화평은 에이레네(εἰρήνη)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샬롬이라고 사용하였는데 이는 관계성이 좋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샬롬을 외치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참 좋습니다.” 라는 의미이고 이웃에 대하여 샬롬! 하면 “나는 지금 당신과의 관계가 참 우호적입니다. 당신도 내게 좋은 감정 갖기를 원합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 는 영어로‘Peacemakers’ 라고 하였고 이 사람은 “평화를 심은 사람”(Who sow in peace) 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심은 다음에 거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불한당(不汗黨) 즉 땀을 흘리지 않고 무엇을 거두려고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을 잘못 알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습니다.”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주인에 대하여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은 다음에 거두게 하십니다. 화평의 열매도 반드시 평화라는 씨앗을 심은 다음에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평화를 심지요? 성경에서는 구약시대의 화목제의 내용을 말씀하면서 평화의 씨를 심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화목제 안에는 감사제(감사(感謝祭, Thank Offering)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고 내 삶에 축복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예배드릴 때 마다 감사하고 절기 때마다 감사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두 번째는 서원제(誓願祭, Vow Offering)가 있습니다. 서원제는 두 가지 의미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가절한 마음의 소원을 드릴 때와 내가 하나님께 구하였던 것을 응답받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세 번째는 낙헌제(樂獻祭, Free-will Offering)데 이는 즐거운 마음과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신약에서는 압축하여 로마서 12: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 생명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분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성과 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내게 베푸시는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성령은 내게 감동을 주십니다. 그 감동으로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행하여야 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성령의 감동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Living sacrifices)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읽고 믿음이 생겼지만 성령의 감동은 제 각각입니다. 이를 무시하고 획일적(劃一的)으로 이 말씀은 이렇게 적용하여 이렇게 행하여야 합니다. 하면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律法主義)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제사를 어떤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구나 생각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 하나님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라고 생각하여 모든 공적인 예배를 나는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령께서 각 사람의 믿음대로 행하시는 성령의 감동입니다. 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를 산제사를 드릴 때 우리에게 나타는 열매가 화평입니다.
이 화평의 열매는 하나님과 하나 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괴어 있는데 여기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기도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하나가됩니다. 하나라는 의미는 생명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소유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모든 영광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대통령의 부인이 되면 대통령과 똑같이 청와대에서 살고 해외로 갈 때는 전용기를 똑 같이 타고 환영인파에 둘러싸여 환영을 받을 때는 똑같이 환대를 받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단 한 가지 대통령의 부인 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부름 받고 그 분을 믿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하나님이 누리는 모든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화평의 열매는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내게 임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저는 종종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를 생각해 봅니다. 극과 극의 두 사람이 나옵니다.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눅 16: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그런데’라는 단어를 유의해서 보십시오! 부자와 얼마나 상반(相反)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잖습니까? 그러나 죽음 뒤에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그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의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도 그가 의를 이루게 된 배경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의롭게 되어 하나님나라를 차지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된 나사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데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해서 불평할 것이 없다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발바닥은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신체의 맨 밑에서 아무런 불평 없이 그 임무를 감당합니다. 그럼에도 발바닥이 손바닥 보다 못할 수 없습니다. 내 신체 어느 곳도 그 위치가 다를 뿐 몸의 주인 입장에서는 어는 부위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사실이 깨달아 지는 순간 그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부잣집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먹고 개들이 그에게 다가와 헌데를 핥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냥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의 열매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이 깃들어 있는 생명이 자라나고 그 생명이 온전하게 되어 질 때 하나님께서 베푸실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기뻐 춤추며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 되었기에 내가 드리는 기도 나의 몸짓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마음들이 화평의 열매입니다.
제 나이 또래의 주변 사람들은 이제 손주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손주들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입니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스마트폰에 담아 아이가 웃으면 같이 웃고 어르고 뽀뽀하면서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사람은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아 주십니다.
전도서 9:7에서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하였고
로마서 14:3에서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기쁨으로 받으시고 나의 헌신을 생명책에 기록하여 상급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행한 일들을 기쁨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42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베푸시는 화평의 열매로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내 주어진 환경도 사람도 화평으로 받아 들여야 된다는 것이지요. 화평의 열매를 맺는데 방해하는 요소는 시기심과 질투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심과 질투를 구분해서 설명하였는데요. 질투는 이웃이 가진 걸 자신이 갖지 못해 슬퍼하는 것이고 시기심은 자기가 갖지 못한 걸 이웃이 가지고 있어서 슬픈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질투의 초점이 본인에게 있다면, 시기심의 초점은 타인에게 있습니다. 시기심은 언제나 밖을 향한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듯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시기심과 질투를 느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의 내 감정은 어떠하던가요? 화평이 깨어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정도 손상이 되어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이게 뭡니까?”라는 불평이 나오지 않던가요? 그 불평이 순간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산산조각 내지를 않았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 온 탕자 둘째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기쁨으로 잔치를 벌입니다. 풍악을 울리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밭일을 마치고 돌아 온 맏아들이 돌아 와 이 소리를 듣고 크게 노여움을 발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항변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때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가 내 안에 들어 온 순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이 더 커 보이고 그래서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느냐?”
시기심과 질투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 평생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던가요?
영국의 대 부흥사였던 <존 웨슬레>의 묘비에는 이렇게 그의 삶을 요약하였습니다. “내 평생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좋아합니까? 그 좋아 하는 것을 쫓다 헛된 것을 잡지는 않았던가요? 잠언서 21:4에서는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하였습니다. 죄 아래서 형통하고 이름을 날리고 부유한 것이 그렇게 좋아 보여서 질투를 하셨나요
잠언서 24:1에서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시기하고 질투한 죄들을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합시다. 내게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9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에도 화평을 누립니다. 지난 주간에 MBC TV에서 방영한 <리얼스토리 눈>이라는 프로에서 개그맨이었던 서세원씨와 그의 아내 서정희 씨가 이혼하게 된 배경을 다루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목사 안수를 받아 서울 청담동에서 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하였다는 서세원씨가 담배를 입에 물고 그 아내를 윽박지르는 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넘어진 아내의 발목을 질질 끌어 엘리베이터에 태웁니다. 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주위에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내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19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집이 있는 복도로 끌어갑니다. 언제는 한시라도 보지 못하면 죽을 듯이 19살의 꽃다운 처녀를 꼬여서 결혼하고는 이제 30년이 넘어서는 그렇게 잔인하게 아내를 대할 수 있는지 정말 남자인 저로서도 용납 못할 행위였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피신하여 들어간 서정희씨는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토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이혼을 결심하는 인터뷰였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생명의 나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어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과 내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었기에 그렇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연합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자기의 생명을 나눠주었더라면 아내는 어떠한 경우에도 헤어지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 아내 안에 내 생명이 있는데 어떻게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 수 있으며 고통을 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었는지를 안 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던 것처럼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을 감싸 안아 주고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낄 때 내 남편이 나를 생명처럼 아끼는구나 하고 알아챕니다.
가수 하춘화씨가 1971년 1월에 발표를 해서 히트를 <잘했군 잘했어>는 가요가 있습니다.
영감 (왜불러)
뒷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 할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마누라 (왜 그래요)
외양간 매어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 (보았죠)
어쨌나 (친정집 오라버니 장가들 밑천으로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생명을 나눈 사이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나눴는데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은 아내와 남편으로 시작됩니다. 이웃과의 화목을 누리기 위해서도 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내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화목을 누리도록 나를 내어 줄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게 보이려고 하고 잘나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잘났다고 으스대는 사람이 편합니까? 나를 받아주고 겸손한 사람이 편합니까? 나를 깨는 것 이것이 나의 생명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화평의 열매는 뿌리고 거두는 것입니다. 평화를 심은 다음 성령을 통하여 맺는 열매가 화평입니다. 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사람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에서 화목을 누리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