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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 전해오는 충무공 남이장군 이야기
남이 장군은 세조 때 뛰어난 장수였다.
그는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꾸민 어이없는 사건으로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 무속에서는 구천을 떠도는 그의 영혼을 불러 신으로 받드는 남이 장군 신이 아직까지도 이어내려 오고 있다.
남이 장군은 태종 이방원의 외손자로 태어나서 1457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무과에 장원급제했다. 그는 당시 왕이었던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다.
남이는 세조 때 최대의 국난인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이 되어 적들을 토벌하였다.
이런 공으로 남이 장군은 나라에서 최고가는 공신이 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나라 서북 변에 살면서 자주 못된 짓을 하던 여진족을 토벌했다.
그의 직책은 날로 높아만 갔다.
이런 계속되는 승진으로
1468년 오위도총부총관(현 참모총장)에 이르러 곧이어 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병조판서(현
국방부장관)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가 소년 시절에 큰 길에 나가 놀고 있었다.
어느 작은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보자기 위에 요사한 잡귀가 붙어 있었다. 남이 장군은 슬그머니 그 사람 뒤를 따랐다.
그 하인은 재상 권람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문 밖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있으니까 집 안에서 구슬픈 곡성이 들렸다.
남이 장군은 집안사람들에게 어찌된 영문인가 물었다.
"하이고, 세상에 별 일도 다 있지 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네."
남이는 잡귀의 짓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집 하인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 그 처녀를 살리겠소!"
그 말을 전해들은 재상집에서는 어처구니 없었으나 행여나 하는 마음에 남이 장군을 들어오도록 허락하였다.
남이가 처녀의 방에 들어가 보니 과연 어여쁜 처녀가 숨을 거두고 죽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까 보았던 잡귀가 처녀의 가슴에 눌러 앉아 있었다.
그 잡귀는 용맹한 어린 남이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는 처녀의 가슴에서 황급히 일어나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처녀가 차차 소생하였다.
그러나 남이가 나오면 처녀는 또 숨을 거두게 되고 남이만 다시 들어가면 처녀는 다시 소생하곤 하였다.
"그 보자기에 싸온 물건이 무엇인지요?"
남이가 그 처녀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건 홍시네만...
그 걸 먹자마자 기절하였네."
남이는 아까 보았던 잡귀의 이야기를 권재상에게 하고 적합한 약을 처방하게 하였다.
그래서 남이는 죽었던 처녀를 살려냈는데, 그 처녀가 바로 권재상의 넷째 딸이었다.
권재상은 자신의 딸을 살려준 남이 장군이 이를 수 없이 고마웠다.
그는 남이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
병조판서까지 오른 남이 장군의 권력을 오래가지 못했다.
용맹하고 강직한 남이를 남달리 총애했던 세조가 얼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신세력으로 등장한 남이장군에게 위협을 느낀 한명회 등 조정에서 기존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남이 장군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느 날,
지중추부사 자리에 있던 한계희를 통해 당시 왕이었던 예종에게 이렇게 고했다.
"남이는 그 사람됨이 좋지 못하여 우리 군사를 다스릴 자가 못되는 줄 아뢰오."
예종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는 편이었다.
결국 남이 장군을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남이에게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예종의 집권 기간에 '남이의 역모사건'으로 최대옥사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남이가 궐내 숙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 혜성을 보고 남이는 혼잣말을 하였다.
"혜성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로다."
이때 이 말을 유자광이 엿듣고 말았다.
그리고 왕에게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을 하였다.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의금부에 문초를 받게 되고 말았다.
그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라고 말을 보태어
거짓 진술을 하였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남이는 결국 역모사건을 시인하게 돼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계략에 뛰어났다.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를 시기하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할 계략을 세웠던 것이다.
남이가 그렇게 죽자 유자광은 익대공신 1등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폭정을 도와 나라의 정사를 어지럽힌데
앞장섰던 인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세조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남이를 시기하던 예종이 훈구대신들의 비판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해임한 것이 아니냐는 뒷말도 무성하지만, 과연 믿을만한가 하는 문제도
회의적이라는 견해다.
북한강 자락에 있는 강원도 춘성 군에 '남이섬'이라는 섬이 있다.
예로부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사실도 아닌데 남이 장군이 이 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해 내려왔다.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는 남이섬에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남이 장군의 무덤은 화성군 비봉면 남전 2리에 부인과 나란히 쌍분으로 묻혀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간악한 간신배로 유자광이 비판되면서 남이의 역모사건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다.
순조 18년(1818년)에는 그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관직과
벼슬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는 젊은 나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 맺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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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征歌(북정가)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석 마도진)
頭滿江水 飮馬無(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돌은 칼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말리리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뒷날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남이 장군의
북정가(北征歌)에서 개가(開歌)의 영적(靈的)인 영감(靈感)을 얻었다고 보여진다.
여러 보도에 의하면,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현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 안창호, 김인식, 민영환, 남궁억, 최병헌 등 다양한 설이 있으나 결정적인 근거나 사료가 제시되지 못하여 작사자는 현재도 미상으로 남아 있다.
애국가의 수면(首面 ; 첫장), 서두(序頭 ; 첫머리)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는 남이 장군의 북정가 '백두산 돌을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의 대비에서 초입(初入) 부분인 두만강수와 동해물이 대체되어 떠오른 영감으로 작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애국가 개가(開歌 ; 가사가 열리는 들머리) 부분에 남이 장군의 북정가의 웅지(雄志 ; 웅대한 뜻)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남이 장군의 북정가는 애국가 작사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다.
충무공 남이장군 용산구 사당제
첫댓글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