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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조 도관찰사(都觀察使) 수(脩)공은 문정공의 여덟째 아드님으로, 일찍이 음사(蔭仕)로 관직에 올라 문종(文宗) 2년(1452) 3월 28일 수직(守職:품계보다 높은 직위에 보임)으로 종 3품인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고, 단종 원년(1453) 2월 8일에는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세조1년(1455) 12월 27일에는 통예원(通禮院) 지통예(知通禮)인 공이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세사에 3등으로 기재는 착오임)에 책록 되었다. 세조 5년(1459) 7월 3일에 공은 행 첨지중추원사(行 僉知中樞院事) 겸 황해도 도관찰사(黃海道 都觀察使)가 된후 세조 6년 6월 19일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임명 되면서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삼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서거정(徐居正:후에 대제학)을 부사(副使)로 삼아 명나라에 갔다. 동년 7월 11일 다시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되고, 동년 10월 7일 명나라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비가 오는 중에도 말을 멈추고 친히 술을 내려 주었다. 그후 세조 11년 광주목사(廣州牧使) 재직시 왕에게 상서(上書)한 기록 외에는 그후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없다. 초배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동복 오승(同福 吳陞)의 따님이요, 후배는 진주 유양식(晉州 柳陽植)의 따님이다. 본 파는 총 14개 종중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그 손세가 현존 17개 파중에서 제3위에 있는 큰 파(派)일뿐 아니라 조선조(朝鮮朝) 초에서부터 조정의 요직을 제수받기 시작하여 중종조(中宗朝)에 와서는 연창부원군 감(勘)공의 영귀와 대사성 협(協)공의 당상관에 이어, 11세 근사(謹思)공이 영의정이라는 최고위 직에까지 올랐으나, 간신배의 모함을 입어 좌의정인 희락당(希樂堂) 안노(安老)공과 함께 실각 했을 때부터 일족의 대부분이 분산 낙향(落鄕)의 비운에 빠진바 있으나, 국중대성(國中大姓)으로서의 체통과 사대부 가문의 세업(世業)인 학문과 덕행을 쌓은 관계로 각기 살고있는 고장에서 추앙(推仰)을 받는 지위를 견지(堅持)해 왔다 파시조 도관찰사(都觀察使) 수(脩)공은 4남3녀를 두셨으니 1자는 가선대부 행 안동도호부사(嘉善大夫 行 安東都護府使) 원신(元臣)공, 2자는 조봉대부 재령군수(朝奉大夫 載寧郡守) 창신(彰臣)공, 3자는 별좌(別坐) 한신(漢臣)공, 4자는 개신(愷臣)공 이다. 1녀는 세종(世宗)의 왕자 의창군 이공(義昌君 李玒)에게 출가하여 사산군(蛇山君)을 낳고 그딸은 참판 신종호(申從護)에게 시집갔다. 2녀는 부사(府使) 한양 조순(漢陽 趙純)에게 출가 하고, 3녀는 감찰(監察) 고령 신희패(高靈 申希沛)에게 출가 하였다. 도관찰사공의 제1자 안동도호부사 원신(元臣)공이 5형제분의 아드님을 두셨으니 1자에 남원부사(南原府使) 면(勉)공, 2자에 영월군수(寧越郡守) 거(豦)공, 3자에 대사성(大司成) 협(協)공, 4자에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 감(勘)공, 5자에 참봉(參奉) 훈(勛)공 이시다. 장계(長系)로 남원부사 면(勉)공이 또 3형제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제1자가 중종30년(1535) 3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권간 윤원형 형제의 참소로 유배를 가셨던 11세 근사(謹思)공으로 그 후손이 태인종중(泰仁宗中)이 되고, 2자 현감 신사(慎思)공은 다음 대에서 끊겼으며, 3자 광주목사 경사(敬思)공의 후손을 창원종중(昌原宗中)이라 하여 파(派)중에서는 손세(孫勢)가 가장 많은 종중인데, 그 가운데 목사공의 제3자 현감 풍(渢)공의 후손이 부여종중(扶餘宗中)이 되었다. 9세 원신(元臣)공의 제3자 대사성 협(協)공은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민사(敏思)공 만을 낳았으나 전첨공은 관(瓘)‧ 숙(潚)‧경(璟)공등 3형제를 두었는데, 제1자 집의 관(瓘)공은 다음 대에서 절손되고, 2자 통덕랑 공은 자녀가 없어 동생인 선교랑 경(璟)공의 제2자 참봉 호선(好善)공을 입양했는데, 그에게서 독자 부사과(副司果) 해(垓)공을 낳았고 그는 또 3남5녀를 두었다 그의 제1자 석보(碩寶)와 2자 우보(宇寶) 양공의 후손을 광주종중(廣州宗中)이라 하고, 3자 통덕랑 극보(克寶)공의 후손을 당진종중(唐津宗中)이라 한다 11세 전첨공의 제3자인 선교랑 경(璟)공의 장증손(長曾孫)인 15세 정보(鼎寶)공의 후손을 이천종중(利川宗中)이라 한다 9세 원신(元臣)공의 제4자는 중종반정공신으로 연창부원군의 작호를 받은 감(勘)공으로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으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까지 받아 영귀(榮貴)가 일세에 떨쳤던 어른이었으나 자녀간 혈육이 없어 동생 참봉 훈(勛)공의 2자 참봉 달사(達思)공을 입양 했다 그러나 달사공이 1녀만 낳고 후사가 없어 또다시 생가 예산종중의 동생인 철사(哲思)공의 제2자 진사 집( )공을 입양 했는데 진사공도 자손이 없어 생가의 백형(伯兄)인 진사 용(溶)공의 제2자 도사(都事) 종길(終吉)공을 입양 했다 그런데 3대째 양자로 들어간 종길공 마저 적자(嫡子)가 없자 4대째는 광주종중의 13세 참봉 호선(好善)공의 2자 부사과(副司果) 게( )공을 입양하여 1남5녀를 낳아 혈손이 이어지는가 했더니 그 2대후 16세 호군(護軍) 성(晟)공이 후사가 없게 되자 광주종중 16세 휘(徽)공의 1자 종윤(宗潤)공을 입양했고 또 3대후인 21세‧ 22세‧ 23세‧ 24세 민기(敏基)공까지 계속해서 4대가 양자로 이어져서, 10세 연창부원군으로부터 24세 민기(敏基)공까지 15대(代)를 내려오는 사이 9대(代)를 양자 했으니 명조(名祖)는 손이 귀하다는 격언이 헛말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되어 14세 게( )공의 후손을 평택종중(平澤宗中)이라 하고 종길(終吉)공의 2자 장(墻)공의 후손을 용인종중(龍仁宗中)이라 한다. 9세 원신공의 5자 참봉 훈(勛)공의 후손을 예산종중(禮山宗中)이라 하는데 그 손세가 창원종중의 버금가는 종중이다. 이상 8개 종중은 도관찰사공의 제1자 안동도호부사 원신(元臣)공의 후손이어서 본파(本派)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도관찰사공의 제2자 재령군수 창신(彰臣)공의 후손중 13세 서연(瑞연)공의 1자 시채(時彩)공은 무후이고, 2자 시빈(時彬)공의 후손이 벽성종중(碧城宗中)이 되고, 3자 시남(時南)공의 후손을 해남종중(海南宗中)이라한다. 도관찰사공의 제3자 별좌 한신(漢臣)공의 후손을 철원종중(鐵原宗中) 도관찰사공의 제4자 개신(愷臣)공의 후손을 전동종중(全東宗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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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연혁
1954년 10월 제2회 화수회 총회(청주)시부터 참여, 양평선산 위토복구 및 죽성부인(나복산인공 배위) 묘비 중수사업을 위해 사윤(思胤;광주) 찬기(讚基) 종원(鍾元) 종협(鍾協;예산) 및 예산종중 명의로 헌성도 하였으며, 56년 3월 제3회 화수회시 사은(思殷;당진) 현기(玄基;예산)등이 지방간사로 선임되고, 동년 9월 30일 제1회 대종회 창립총회시 종익(鍾翊) 종완(鍾完) 종필(鍾弼;예산), 1957년 3월 17일 정유대동보 시보식에 도관찰사파에서 사은(思殷)씨외 27명이 대거 참석한 것을 비롯, 이후 71년 4월 제14회 대종회 총회시 사은(思殷)씨가 부회장에 선임되고, 75년 4월 제18회 총회에서는 현기(玄基)씨가 부회장으로 선임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파종회가 성립 된 것으로 추측되나 공식적으로는 도관찰사파보(78. 5. 10) 발간시 위원장인 사은(思殷)씨가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나. 조직
본 파종회의 임원은 회장 1명, 부회장 5~10명, 총무이 사 1명, 이사 10~20명, 감사 2명, 고문 약간명으로 구성 하고 임기는 3년으로 하되 회장은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
다. 현 임원
회 장 : 웅기(雄基;광주) 부 회 장 : 복기(福基;광주), 영덕(泳德;부여), 사석(思奭;당진), 수윤(守胤;태인), 종택(鍾澤;창원) 총무이사 : 신기(信基;광주) 이 사 : 무웅(武雄;창원), 재영(在泳;창원), 병기(炳基;용인), 종찬(鍾纘;예산), 진영(進泳;예산), 병기(炳基;이천), 재영(在泳;이천), 사갑(思甲;광주), 상섭(商燮;해남), 공섭(共燮;해남) 감 사 : 완기(完基;당진), 우영(宇泳;예산)
라. 역대회장
제1대 : 사은(思殷;당진) 제3대 : 찬기(讚基;예산) 제4대 : 사덕(思德;당진) 제5대 : 종원(鍾元;예산) 제6대 : 종훈(鍾勳;태인) 제7대 : 웅기(雄基;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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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관찰사(脩)공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현산에 유좌(酉坐) 세분 합폄(合窆)으로 모셨고, 바로 밑에 제1자 안동도호부사(元臣)공을 쌍분으로 모셨으며, 그 아래 부분에 연창부원군(勘)공을 비롯하여 역대세장지지(歷代世葬之地)가 되었으며, 태인종중의 중시조인 남원부사(勉)공과 영의정(謹思)공의 묘소도 이곳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제단을 봉설하고 향화를 올리고 있으며, 음력 9월 27일에 숭경재(崇敬齋: 04. 11. 12.준공)에서 도관찰사공과 도호부사공 향사(享祀)후 차례대로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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