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으로서의 매국역할 담당(2004.3 ~ 2006.8)
가.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항할 수 있는 단체를 2004년 3월에 정부가 만들기로 하였는데 명칭을 고구려연구재단으로 모호하게 정하여, 중국을 의식한 처사였다.
나. 고구려사를 전공해서인지 모든 사업이 고구려사에 치우친 면이 많았다. 더구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기사 중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두산 일대에서 만주는 우리 땅이라 외치고 다니는 것과 일본인이 서울에 와서 서울은 우리 땅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적절하지 않은 비유를 하여, 정확한 간도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다. 즉 1962년 한일협정시에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전제”하에 마련한 ‘간도회복을 위한 정부지침’인 “청·일 간도협약 무효 지침”과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모르는 무지를 드러내었다,
다. 김정배는 중국학자들과 수차의 비밀학술회의를 개최하였지만 간도문제 제기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국회에 “간도협약의 무효화 결의안”이 2월과 9월에 제출된 상태였으며, 중국의 우다웨이 부부장이 방한하여 “간도 땅의 요구”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8월 23일 “5개항의 한·중 구두양해”에 합의한 후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인 윤휘탁이 중앙일보(중앙일보, 2004.9.21) 기고문에서 “간도문제의 제기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배성준은 경향신문(2004.9.25)에 “간도문제에 대한 환상”을 기고하여 “간도가 명백한 우리 땅이라는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여 배성준 자신이 “간도영유권 분쟁”의 본질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어 ‘고구려연구재단’이 동북공정의 대응에 미온적임을 알 수 있었다.
라.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고구려연구재단의 김정배 이사장은 중국의 “학술적 차원의 해결” 전략에 말려들어 2년 반 동안 동북공정을 막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추진한 ‘백두산공정’, ‘장백산문화론’, ‘요하문명론’, ‘만리장선 연장론’을 방조하여 우리의 역사와 혼을 중국에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마. 한국의 역사와 간도영유권 분쟁을 왜곡시키는 중국의 학자들을 학술회의 등에 초청하고, 여 국비를 낭비하였다, 동북공정이 공식화되기전의 중국의 주요 이론가는 양소전과 손진기였다, 이들을 국내에 초청하여 논문을 발표케 하고 논문집에 게재토록하여 국비의 낭비를 가져왔다. 특히 양소전은 국내 초청기회에 국내 학자들의 문헌을 수집하여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손진기와 그의 딸인 손홍은 고구려연구재단의 논문집인 “북방사논총” 창간호(2004.12.15)에 논문을 발표하여 "고구려를 중국의 약소변방민족‘으로서 고구려의 토지, 인민, 문화를 중국이 계승하였다고 왜곡시켰으며, 손홍 역시 고구려가 중국과 신속관계를 맺고 일개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보았으며, 700년간 중국의 한자를 사용하여 고구려 문화의 내용은 漢文化 중심이었다고 왜곡시켰다.
바. 2004. 8월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의 내한시 합의한 “5개항의 한중구두 양해” 의 굴욕적인 내용, 즉 “고구려사 문제의 정치화 방지, 학술적 교류를 통한 해결” 등을 묵인하였다. 중국의 “간도문제 제기 자제 요청” 등에 강력 대응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이후 진행된 비밀 학술회의와 추후 전개된 동북공정의 심화를 방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