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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다녀오면서
Ⅰ. 서 론
2006년 1월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추위를 뒤로 한 채 열대지방인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친구들과 처와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2006년 1월 11일부터 16일까지 5박6일간 베트남 북부인 하노이와 캄보디아의 씨엡립 지방을 다녀왔다. 이 곳 베트남은 월남전이 한창인 때에 파월 장병으로 남쪽 지역인 옛 월남공화국의 수도인 싸이공시 지금은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이 곳에서 군인으로 2년을 근무하였던 곳으로 이곳을 가지는 못했지만 아쉬움을 남긴 채 여행을 하게 되었다. 호치민시와 하롱베이 지역의 아름다운 섬 지역과 씨엡립에 위치한 앙코르 왓 사원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메콩강 삼각주 지대를 따라 형성된 경치가 좋고 문화재가 산재된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
베트남 국적 비행기로 인천에서 약 4시간 30분이 소요되며 시차는 2시간 빠른 곳으로 2시간의 비행 후 중국 상해지방을 지날 때부터 비행기 탑승의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비행을 하면서 내가 군복무 중에 갔던 도시들이 기억이 되살아 났다. 한국군의 주둔지인 다낭(백마), 퀴논(맹호), 나트랑(해병대인 십자성 부대 및 야전군 사령부-내가 처음 도착한 곳),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비둘기 부대 주둔지로 사이공과 인접한 지역임. 내가 근무하던 사이공(호치민)의 주월한국군 사령부와 숙소, 공항인 탄스누트 공항, 메콩강 등이 머리 속을 스쳐가곤 하였다.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나 일정에는 하나도 없어 아쉬움만 더했다. 어느덧 하노이의 노바이 국제공항에 도착 이국의 정치가 눈앞에 나타나 여행의 기분이 났다. 당시 여정을 일정별로 정리하며 내 인생의 한 발자취로 정리하여 보고자 하였다.
Ⅱ. 여행의 개요
1. 일시 : 2006년 1월 11일부터 16일 까지 5박 6일
2. 동참자 : 박승수, 김천식, 권혁진, 유용준, 이동철, 한중희, 한재선, 최범진, 장경례, 정숙녀, 임기범, 김왕회, 이완수, 최신효, 조영상, 이평기, 김수남 교장님 등 내외 32명은 (주)라이코스투어 관광회사에 위탁 여행(백기동 차장 인솔)
3. 여행지
1일차- 인천국제공항출발(대한항공),하노이의 노바이국제공항도착, 하노이시내, 하롱베이로 이동
2일차 -하롱베이 관광, 하노이 시내관광 및 씽글로 타기
3일차 - 하노이 시내 관광 후 야간 캄보디아 씨엡립 공항 도착
4일차 - 앙코르 톰, 남문, 바이욘사온, 바푸욘사원. 앙코르 왓 사원, 압사라 민속디너쇼 관람, 쑈핑
5일차- 톤레삽 호수, 수상촌 및 수상족 관관광, 쑈핑 발마사지, 씨엡립 출발 하노이 공항에 야간에 도착
6일차- 하노이 출발, 인천국제공항도착 귀국
Ⅲ. 여행지에서 본 곳
1. 1일차 여정- 인천, 하노이, 하롱베이
▲ 인천공항에서 오전 10시 베트남 국전기인 VN939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이륙 하노이로 출발하였다. 비행기 탑승자는 모두 우리나라 관광객이다. 추운 날씨로 외투를 입고와 비행기 안에서 더운 지방의 기후에 알맞은 옷으로 하나하나 벗기 시작하니 몸이 아주 가벼웠다. 4시간 30분의 긴 비행 끝에 하노이의 노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 인천공항과는 비교할 정도는 아니나 그런대로 공항의 모습을 갖추웠다.
공항을 빠져 나온 우리는 하노이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하였다. 도로는 우리나라 지방도와 같은 2차선 도로로 양쪽에 펄 쳐진 베트남 국민들의 주거지인 가옥과 열대지방의 야자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고 한쪽에서는 모내기 다른 곳에서는 벼 베기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방목하는 소들이 풀을 뜨는 전원 풍경이 매우 인상적이다. 하노이시는 홍강의 강줄기에 위치한 삼각주에 형성된 베트남의 수도로서 물론 승용차들도 있으나 오토바이는 이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괭음을 내며 도시를 질주하였다.
버스 안에서 가이더의 월남말 몇 가지를 소개했다. 씬자우(안녕하십니까), 신깜언(고맙습니다), 막 꽈아(비싸다), 레 띠엔((싸다)라는 말을 알려주었다. 이곳의 여행중에 안전사고에 주의하라는 것이다. 무질서한 오토바이 행렬에 안전사고와 날치기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물은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고 미네랄 물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즐거운 건강 여행을 당부했다. 이 나라는 열대지방으로 고무생산이 유명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도 이곳의 고무를 수입한다고 한다.
이 곳 하노이는 메콩강 줄기인 홍강으로 용이 승천하였던 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흙탕의 물이 흘러 붉은 강이라고도 한다. 하노이는 바로 이 홍강의 삼각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어느덧 점심을 들기 위해 식당에 도착하였으나 이곳은 신시가지 형성지구라 잘 다듬어진 곳이나 저개발국의 모습은 곳곳에 눈에 보였다. 아시아 정상회의가 내년에 이곳에서 있기 때문에 큰 건물을 신축한다고 가이더는 밝혔다. 이 곳 사람들은 깔꿈하지 못한 그들의 옷차림이나 아오자이를 연상해서 인지 두문 두문 옷차림을 관찰하게 되었고, 햇볓에 그을은 얼굴의 모습은 초라한 모습이나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의상과 주거 및 식습관이 잊기 마련임을 우선 이해야했다.
점심으로 이들의 토속 음식인 쌀 국수를 먹게 되었다. 물론 이국의 음식이니 맛은 우리의 국수와 별 차이는 없으나 그런대로 괜찮았다.
점심을 든 후 일행은 시내를 향하여 하롱베이로 향하였다. 무절제한 오도바이 행렬은 장관이다. 우리나라는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들이나 이곳은 울창한 숲으로 가로수가 형성되어 아름답기는 하나 거리는 깨끗해 보이지 않고 어수선한 분위기이나 먹고 살기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활기가 넘쳤다.
우리는 하롱베이로 가기 위해 홍강의 복합철교를 지나니 한가로운 농촌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봄과 같은 날씨로 곳곳에서 공사현장이 보였다. 베트남은 8400만 정도의 인구로 비옛족이 85%를 차지하고 크메르족, 참족, 화교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고 한다.
종교는 천주교가70%이고 소승불교, 남방 불교, 흰두교, 민간 신항이 존재한다고 하는 국가이다. 이들은 믿음으로서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한말이 연상된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이 말은 생활의 진리가 아닌가?
오토바이를 소유한 것에 따라 그들의 경제적 능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도시의 구조는 프랑스풍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 발전되는 도시의 형태이나 근대 문명의 발달과 외국과의 활발한 외교로 외래 문물이 많이 유입되어 그들의 전통 양식이 현대화 되어 간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하노이로 부터 2시간의 여행에 끝에 동양 3대의 절경이라 하는 하롱베이의 호텔(Sigon Honong ba Hotel)에 야간의 조명을 받으며 호화 찰란한 5성급 호텔 현관에 도착하였다. 스카이라운지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 곳 역시 한국인 관광객뿐으로 우리의 입맛에 맞는 식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화지역 선생님들도 먼져와 식사를 하고 있어 매우 반가웠다. 라운지의 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빛의 조명 쑈를 관광하게 되었다. 예술에 둔 한 나로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는 없으나 빛의 조화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의 생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만 해석이 되었고 그저 빛의 조화가 아름답다는 느낌으로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이렇게 하롱베이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2. 2일차 여정- 하롱베이, 하노이
▲ 우리는 조식후 호텔 정원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하롱베이로 가기위한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하롱베이는 3000여개의 바위섬으로 대한항공 광고와 영화 인도차이나 주 촬영지로 정말아름다운 곳이다. 이 곳 역시 한국인 관광객으로 붐 볓다. 베트남의 특유한 배를 타고 30분후 도착한 하롱베이 섬 우선 석회 동굴을 관광하게 되었다. 연희 동굴과 차이는 없으나 석회 동굴로 규모가 웅장하였다.
베트남을 찾아와 하롱베이를 구경하지 않으면 베트남을 제대로 관광했다고 할 수 없다고 한다. 하롱베이는 하노이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진 쾅닌성에 있다.
하롱베이 일 때의 섬은 1천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많은 섬 하나에 이름이 있다고 한다. 이들 섬을 합쳐 하롱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름 없는 섬을 합친다면 3천여 개가 넘는다고 하니 정말로 장관이었다. 중국의 계림을 연상하게 되었다.
하롱베이는 깊고 푸른 바다에 불쑥 불쑥 솟아오른 기기묘묘한 바위의 석굴들이다. 이런 바위와 석굴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았다. 19세기말경 이곳을 찾은 유럽 관광객들은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빼앗겨 기암괴석과 수많은 석굴에 경이와 신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993년 하롱베이를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적인 경치로 인정을 받았으며 하롱시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개발한다고 한다.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섬 한곳에 우리는 배에서 내렸다. 이곳에 오니 또 한국인 특히 인천의 낯익은 얼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잊는 힘을 다해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섬의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하롱베이의 섬을 배경으로 정자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잠시 여행의 피로를 풀며 내려와 수상 음식을 즐기며 뭍으로 돌아왔다. 무려 3시간 그러나 모두 관광하려면 하루도 모자란다고 하니 얼마나 넓은 섬 바위로 이루어졌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나는 섬 태생으로 배를 타는 것과 섬을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왜 옛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여 보면 말이다. 그래도 이곳은 추억으로 오래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하롱베이에서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하노이로 돌아왔다. 저녁의 야경은 서울을 연상하듯 어딘진 모르지만 호화찬란하였다. 그들의 유명한 교통수단인 시클로를 타고 30분 정도 시내를 달렸다, 마스크를 써야만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공해가 아주 심했다. 그렇게 복잡한 시내를 잘도 빠져 다니는 그들의 운전 솜씨에 놀랐다. 공해가 심해도 그래도 즐거웠으며 시장인 것 같은 곳에서 야간 퇴근 후 한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우리의 음주 문화나 그들의 음주 문화는 매우 흡사한 것 같다. 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같으면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맛있게 먹고 있었다. 시장의 상점들은 많은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고 어깨에 나무로 줄을 달아 물건을 나르는 그들의 운반 모습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녁을 춘하추동이란 식당에서 한정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하노이의 명물 수상인형극을 관람하게 되었다. 이 수상인형극은 10세기 델타의 홍강에 둔 독득한 예술로서 이 지역 농민들이 주변 자연환경을 자연재료로 이용해 예술의 형태로 바꾼 것이란다. 옛날에는 수학을 끝낸 후 연못과 논둑이 그들의 즉흥 쇼 주무대였다고 한다. 이러한 예술의 형태는 북부 베트남의 고유예술로 전 세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예술이라고 한다.
현재의 수상 인형극은 물이 고인 무대가 있는 곳에서 행하여지며 인형을 조정하는 배우들은 무대 뒤에서 긴대나무 막대와 수면 아래 숨겨진 끈으로 인형을 조정한다
꼭두각시 인형은 나무로 조각되고 전통 베트남 오케스트라가 배경음악을 연주해주고 우리나라의 창처럼 북베트남에 기원을 둔 전통오페라 체오가 이러한 소극의 주제는 시골생활 모습으로 베트남 민요가 짙게 묻어난다. 역시 이곳에는 모두 한국인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인천의 신정관광 관광객 팀을 만났다.
우리는 시내 관광과 수상인형극 관람을 마치고 쉬라튼 하노이 관광호텔(Sheraton Hanoi Hotel)에 투숙하여 하노이에서 또 하루를 보냈다.
3. 3일차 여정- 하노이, 캄보디아 씨엡립
▲ 호텔을 나와 하노이 시내 관광에 나섰다. 호텔의 전원을 기념으로 남기고자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버스에 오르면서 가이더는 하노이시에 대한 내력을 설명하였다. 이 하노이시는 서기 1010년 리(Ly)왕조의 초대왕인 리공온이 수도로 선정해 오늘에 이른다. 당시 수도 공식 명칭은 탕롱으로 승천하는 용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러다가 1802년에 왕위에 오른 느웬아인은 일족의 기반인 중부 베트남의 후예를 왕도로 정함으로서 탕롱이 하노이로 개명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1945년에 설립된 호지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다시 하노이를 수도로 결정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하노이를 얌전한 처녀에 비유한다. 화장을 하지 않지만 얌전한 매력을 지닌 미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노이는 춘하추동의 4계절이 잇다. 호치민시가 강의 도시라면 하노이는 호수의 도시라 불린다. 수백년전에 지어진 옛 탑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는 또한 고전적인 프랑스식의 건축물과 우거진 가로수로 멋진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먼저 간 곳은 바딘광장과 호치민 묘소이다. 바딘광장은 베트남 독립의 선언문을 낭독한 유명한 광장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호치민 묘와 베트남 정부의 중요한 청사가 위치해 있다.
호치민 묘는 불행하게도 오늘은 개방하는 날이 아니어서 외부만 관람하게 되었다. 1969년 사망한 호치민의 묘소는 노오란 색의 베트남 국회의사당과 공산당 본부 건물의 광대한 바딘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모든 대리석 조각물들은 다낭에서 운반해 지은 건물로 레닌이나 모택동, 스탈린처럼 호치민의 유해가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 묘소에 들어가려면 200미터 전방에서 차에서 내려 걸어가야 되며 슬리퍼, 반바지 등의 차림으로 카메라나 가방을 갖고는 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입구에는 엄숙한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호치민 묘소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호치민이 생전의 저택과 호치민 박물관을 살펴보았다. 울창한 나무숲으로 조경이 아름답게 꾸며진 이곳은 노오란 색으로 치장을 하고 5층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접근이 금지되어 내부는 볼 수 가 없었다.
호치민 박물관은 하얀 건물로 구소련의 원조를 받아 레님 박물관의 전문가가 설계한 예술적이다.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있게 꾸며진 이곳은 호치민이 생존에 사용하던 집기와 유품들을 볼 수 있고 전쟁의 앙금이 남아 있는 방공호도 볼 수 었었고 엄패물로 건물 구조가 짜여져 있었으며 정원의 호수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호치민 묘의 우측에 있는 한기둥 사원을 둘렀다. 이곳은 이태종이 왕자를 낳았는데 이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의 기둥 위에 연꽃 모양의 정자와 같았다. 그 옆으로 많은 상인들이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기념품과 열대과일을 사서 먹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 곳을 나와 시내로 향하였다. 호안 키엠호수 근처를 차로 달렸다. 매우 넓고 아름다우며 시민들과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란다. 이 호수를 끼고 있는 길에는 오토바이와 시클로, 자전거가 붐비고 있었다.
이 곳을 빠져 나오면서 베트남은 고무생산으로 유명한 국가로 물건 구매를 독려하였다. 가이더의 안내로 이들이 자랑하는 고무로 만든 벼게. 침대 등 물건을 파는 쇼핑쎈타에 둘러 물건을 구매를 하였으나 나는 집의 구조로 보아 관심이 별로 없어 구매를 하지 않았다. 여행 중의 물건 구매는 항상 자제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암의 예방 치료에 좋다는 버섯 쇼핑쎈타로 안내되었다. 가격은 참 비싼 편이나 질이 좋은 것 같았다. 몇 일행만 구입하고 나머지는 구경하는데 만족하였다.
어느 덧 점심시간이 되어 허스름한 사이공 하롱 센 레스토랑 뷔페에서 점심을 했다. 갈대로 지붕을 하고 통풍이 잘되게 벽이 트인 이국의 정취이나 마치 우리나라의 방랄로와 같은 노천 식당과 같았다. 다양한 베트남 음식이 있어 취향에 맞는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가 있었다. 주변은 호화롭지 못한 도시의 외곽인 것 같았다.
이곳을 나온 우리는 지저분하고 길이 좁은 도로로 달리다 보니 거리의 전주와 통신줄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으며 금방이라도 끊어지거나 위험스럽게 보였다. 주변 상가들은 초라하기만 보였다. 이곳을 통과한 우리는 캄보디아로 가기위해 공항으로 향하였으나 시간이 남아 쇼핑 쎈터와 분재원에 들러보게 되었다. 이 곳은 주로 농산물 전시품과 정원에 고가의 분재들이 있었다.
공항에서 잠시 시간의 여휴가 있어 공항 청사와 밖의 모습을 둘러 보며 기념 촬영을 하고 젊음을 이곳 월남전 당시의 싸이공 모습을 상상하며 일정에 이곳이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어느덧 캄보디아 행 비행기 시간이 되어 노바이 공항으로 이동하여 탑승 수속을 마치고 베트남 국적기인 항공기에 올라 2시간의 비행 끝에 캄보디아 씨엡립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팁을 주워야 입국 수속이 빠르다고 한다. 공항은 마치 초라할 정도로 아주 작았다. 그러나 이곳은 문화유산이 많이 있어 외국인 항상 붐비는 공항이라고 한다.
공항 대기실에서 가이더가 웃으며 팀을 주고 우리는 곧바로 공항을 나와 2대의 버스에 분승하였다. 우리 차는 2호차로 현지 여자 가이더가 승차하여 안내하였다. 식사를 위해 바로 북한에서 운영하는 평양랭면 식당에 도착하였다. 기후의 차이를 느꼈다, 열대지방의 전형적인 날씨였다.
평양랭면 식당에서 모든 운영은 북한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모두 평양에서 온 아가시들이 써빙을 하고 있으며 식사 후에는 노래와 가야금 연주, 무용 등을 공연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의 단장 박승수교장이 나서서 우리는 같은 민족임을 강조하며 그들과 한때 즐거운 여흥을 즐길 수 있었다. 이들은 북한에서 선발된 미인만 파견한다고 한다.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초특급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장을 푼 후 잠시 동료들과 호텔 밖을 나왔으나 현지인들이 달려들어 무서운 마음으로 황급히 호텔로 들어와 하루를 보냈다.
4. 4일차 여정- 씨엡립 문화유산 탐방(앙코르 왓 사원 등)
▲ 아침에 왠지 잠이 오지 않아 일찍 일어났다. 처와 아침 산책이나 할까 해서 호텔로비로 나와 보니 벌써 한재선교장 내외는 벌써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호텔 뒤 정원의 호수에 자리를 잡고 아침 식사를 했다. 정원이 참 아름답다. 이곳 저곳의 조경물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였다. 처는 왠 사진만 찍느냐고 투정이 아닌 투정을 하였다.
오늘의 일정 모두는 앙코르 툼, 남뭄, 바이욘 사원, 바푸욘 사원, 구 왕군, 피메나카 사원, 코끼리 테라스, 리퍼킹 테라스 타프롬 사원, 앙코르 왓 사원, 앙코르 왓 일몰 감상 들등이 일정에 들어 있다.
호텔를 나와 버스에 승차하였다. 가이더는 이곳에 대한 많은 설명을 하였다.기억이 없어 자세한 것은 글로 남길 수는 없으나 북으로는 라오스, 동으로는 베트남, 서쪽으로는 태국 등의 국가가 위치하여 이들 국가의 침입을 받아 국토를 많이 잃은 것 같아 이웃 국가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인구의 90%는 크메르인, 나머지는 중국계, 베트남계, 참 무슬람 민족으로 구성되었고 흰두교에 바탕을 둔 불교 신앙으로 유교적 생활양식과 보수적이고 남존 여비적 사상의 생활상이 강하다고 한다.
어느덧 바이욘 사원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은 모두 크메르 왕조의 유적들로 돌로 축조된 미룩불로 톰, 사원. 왕궁, 성벽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규모가 웅장하였으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어디를 가든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여서 나의 느낌과 기억에 남는 것만 정리하여 보았다.
앙코르 툼은 크메르 왕조의 도웁지로 거대한 석조물로 형성된 옛 사원들이다. 1천년전에 축조된 석조 사원들로 나무뿌리에 휘감기고 석축 돌들이 무너져 내려 이곳 저곳에 나 뒹글고 있으나 4명의 미륵불상의 큰 머리는 하늘로 솟아오를 듯 웅장하였다.
주변 나무들은 돌의 영양분을 먹고 사는 특유한 나무들로 불상과 건물 내부, 벽, 성벽 등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거목들로 사원들과 조화를 이루어 그런대로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 할 수 있었다. 이들 문화유산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뛰고 있으며, 이들 국민은 관광 수입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하고 국민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앞으로 입장료를 더 인상한다고 한다.
입구에는 전쟁으로 지뢰로 인해 부상을 당한 젊은이들이 노상에 앉아 그들의 변변치 못한 악기로 연주를 하였다. 이는 우리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연주라 하여 몰래 2달러를 주었다. 나의 월남전 당시 많은 부상병을 보아온 나로서는 그냥지나치지 못했다. 그때 부상병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전우들이 서쪽 계곡을 모두 차자하여 잠들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성한 몸으로 이곳에 온 것을 다행으로 국가의 부름으로 군복무를 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보았다.
우리는 비아욘 사원의 울창한 숲으로 걸었다. 웅장한 모습에 감탄하였다.
바이욘 사원의 정방형의 대각선으로 왕자 자신의 얼굴과 미륵불의 얼굴을 합성하여 얼굴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건축 년대는 12세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래도 보존이 잘된 앙크로 톰 내부를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는 입구의 정원과 연못이 석조 건물과 어우러져 있었다. 가이더를 따라 많은 설명을 하였으나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지만 조각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었다. 건물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주변 경치와 어울리어 아름답고 고풍스럽게도 조화를 이루고 내부에는 이곳 현지 주민들이 기도를 하고 있으며 아름다움을 오래 간직하고자 많은 기념 촬영을 하였다.
점심을 하기 위해 이 곳을 나와 톤레샆 뷔페로 하였다. 아담한 건믈로 다양한 전통음식들이 있어 입맛을 돋우었다. 우리는 겨울인데 이곳은 더운 여름으로 오침을 하기위해 잠시호텔에서 쉬었다. 이곳 모든 국민들은 점심때 1시간의 오침을 즐긴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광활한 앙코르 왓의 여러 사원을 찾았다. 어디를 간들 석조 건축물들이 였다. 화장실도 가기 힘들 정도였다. 많은 관광객이 붐비기 때문이다.
앙코르 톰은 큰 도시를 의미하며 이 곳에 100만명의 주민이 이 곳 톰 안에서 생활하였다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특히 바욘 사원은 앙코르 톰 정 중앙에 위치하고 200여개의 얼굴로 구성된 54개의 탑들로 사원의 안팎 총 길이가 1,200미터나 되는 곳에 각종 부조물을 장식한 사원이다. 특히 코끼리 테라스는 테라스 벽면에 세계의 머리를 가진 코끼리상이 부조되어 잇고 뒷면에는 5개의 머리를 가진 말이 부조된 것이 아주 인상적이 였다.
복원을 위해 석조물 하나하나에 벟를 벼하여 복원을 하려 하였으나 전쟁으로 기술자들이 사려져 정원에 그대로 방치되고 잇는 피맨 아카스 궁전의 정원에서 열대 과일인 야자수를 사서 일행은 더위를 식히고 왕궁 안의 거대한 운동장을 통과하고 이 곳에서 높다는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작은 산에 올라보니 모든 관광객이 저녁에 몰린다고 하여 발붙일 틈도 없이 붑볐다. 정상에 오르니 씨엡립의 정글이 눈앞에 펄 쳐 졌다.
앙코르 왓은 1860년 프랑스의 탐험가에 앙리 무오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되었다며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하나로 인류의 값진 문화재이다. 잘 보존하고 복원하여 길이 후손에 영원히 남겨 보도록 캄보디아 정부가 노력한다고 하니 정말 우리나라로선 부러운 문화유산이다. 우리의 문화유산도 잘 보존하여 외국 관광객이 많이 왔으면 하는 바램을 하여본다.
저녁에 압사라 민속디너쇼를 관람하며 뷔페식의 석식을 즐기는 것도 여행에서 매우 유익한 추억의 거리로 생각되었으며, 이곳 역시 한국인 관광객으로 붐볐으며, 이곳을 나오니 주변이 네온사인으로 휘엉 찬란하여 마치 소도시의 모습이 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녁 늦게 호텔로 돌아와 묶었다.
5. 5,6일차 여정- 돈레삽 호수와 수상촌, 귀국 마무리
▲ 2일간 묵은 호텔을 나온 일행은 캄보디아 제2대 호수인 톤레삽 호수로 향하였다. 이 곳에 도착하고 보니 현지 어린이들이 우리의 아리랑을 부르며 원 달러하며 달려들었다. 참 불상하였다.
가난으로 허덕이는 모습이 역역했다. 초라한 가게로 내부의 진열 물품은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불우 이웃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용도도 모르는 물건을 구입했다. 내부의 주거 공간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모습이 였다.
톤레삽 호수는 씨엡립에서 15키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넓은 호수는 바다와 같았다. 이 호수를 생활 근거지로한 수상족 들이 살고 있으며, 주변에는 가난한 빈민촌인 것 같았다. 호수의 어족자원은 풍부하다고 한다. 우리는 둑에서 넓은 호수의 모습을 관찰하고 씨엡립의 전형적인 야시장을 관람하였다.
제법 큰 시장으로 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정육점의 고기들은 그냥 상품 진열대에 놓여 파리들이 들 끌었다. 제법 보석상들은 제모습을 갖추었으며 얼굴의 모습도 중류로 혈색이 아주 좋았다. 열대과일의 진 모습과 역시 오토바이 주차장이 인상적이고 교통질서는 무질서하였다. 시장의 모습은 매우 낡았으나 이들의 생활의 터전이다. 시장 내부를 돌다보니 근1시간 정도로 이들의 음식문화와 의류 문화 등 생활수준을 단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점심으로 마스터 수끼 전문점에서 4명이 한 조가 되어 점심을 즐겼으나 마치 한국인을 위해 만든 음식점 같은 분위기로 계속 식당 내로 몰려오고 있었으며, 잠시 자유롭게 시내 골목을 다니며 이국의 생활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국인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경제부흥을 일으킨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에 고마움을 느꼈다. 왜 나의 어린 시절은 매우 이들과 같은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자랑할 만하지 않는가?
다시 여정이 시작되었다. 씨엡립의 교외로 버스는 달렸다. 비포장의 도로를 달리며 메콩강의 수상 가옥을 관광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물은 참 더러워 악취가 풍겼다. 그래도 이들은 이물로 밥과 빨래 등 생활용수로 활용한다고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메콩강의 하구에 정박한 수상 카페에 올라 잠시 휴식을 즐기며 캄보디아 주민과 베트남 난민들이 주거한다는 수상 가옥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강과 육지는 구분이 되지 않으며 물 위의 정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이곳에도 아크릴 바구니로 배를 삼아 물놀이를 하며 그들 나름대로 쇼를 보여주고 배위로 향하며 원 달러를 달라고 배에 달려들었다. 이들에게는 원 달러가 큰 돈인 것 같았다. 물위로 던져 주는 모습이 가슴 팠다.
이곳에서 2시간을 관광하고 다시 뭍으로 올라와 쇼핑 전문점과 이들의 아픈 전쟁 전시물인 포탄 박물관을 견학하게 되었다. 6.25의 아픈 상처를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나로서 또 월남전에 참전 한 나로서 각종 폭탄을 보니 가슴 아픈 일이였다. 그런가하면 킬링피드 왓트마이 사원에 크메르 루즈에 학살된 사람의 머리 즉 해골을 탐에 넣어 전시한 모습에 머리의 피가 용솟음 칠 정도로 써늘한 감정을 느꼈다.
이러한 모습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엔 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해골을 전시하여 그들의 아푼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는 크메르 루즈와 같은 폭군이 이 땅에 나오지 못하도록 국민 정신교육용으로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곳을 뒤로 한 채 캄보디아의 전통 발마사지를 받았다. 중국이나 태국 등의 발마사지와 별 차이는 없었으나 피곤한 몸을 푸는데 아주 시원하고 피로감을 풀어 주었다.
이 곳에서 나오면서 3일간 우리 가이더에게 우리가 같고 간 비상용 일용품, 옷, 약품 등을 모두 주었다. 왜 이곳에서는 구입하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 같다. 참 똑똑하고 친절하며, 장래가 희망적이며 건실한 아가시로 한국인의 참 모습을 이 곳에서 발휘하며 생활하고 있으니 대견스러웠다.
발 맛사지를 받고 고려정가라는 식당에서 한정식인 반찬과 둑베기에 밥을 해서 주는데 마치 우리나라에서 식사하는 모습과 같았다. 이 식사가 여행의 마지막 식사였다. 이제 집으로 가기 위해 씨엡립 공항으로 이동하며 가이더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하노이 노바이 국제공항으로 2시간의 비행 끝에 밤11시경 도착하였다. 공항의 활주로에 괭음을 내고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모습이 요란하였다.
이곳 공항 청사 안에서 2시간 정도를 기다리며 공항 안의 상점에서 쑈핑과 각종 고가 물품을 구경하며 지루함을 달래였다. 공항 대합실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주로 많았고 서양인들도 간혹 눈에 뛰었다.
여행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국적기인 대한항공기나 아시아나 항공기는 여행일정의 시간이 맞지 않아 부득이 베트남 국적기를 이용하였다.
인천국제공항행 베트남 국적기인 항공기에 올라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기내식도 나왔으나 사양하였다.
인천에 아침 7시경에 도착, 5박6일간의 베트남과 캄보디아 여행의 막을 내렸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물론 입국자들도 많지만 출국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또 골프채를 갖고 가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여행경비로 외화를 낭비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광수지 적자라고 TV뉴스에서 들리니 말이다.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하였다.
Ⅳ. 결어
이번 베트남과 캄보디아 여행을 통해 우리나라의 국력에 대해 새삼 실감하였다. 과거 37년 전 젊을 베트남 남쪽 지역인 싸이공에서 파월국군 장병으로 근무한 일이 새삼 실감하였다.
그러나 내가 근무하던 싸이공 지금은 호치민시 남북으로 갈려 월남과 월맹으로 분단된 이들의 땅에서 조국의 부름을 받고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모습이 새로 실감하였다. 언제 전쟁을 하였던 나라인가 평화로운 현제의 이곳 하노이 평화로운 모습이다.
근무하던 주월 한국군사령부의 정훈참모부 사무실과 사령관 비서실, 그리고 사령관의 숙소인 사령관 공관, 자주 다니던 탄순누트 공항과 인접한 군수물자 보급처인 미국군과 한국군 합동 PX건물 메콩강의 아름다운 정글의 모습. 아름다운 월남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 앞의 모습, 전쟁 중인 나라의 평화로운 공원 등의 모습과 같이 공관과 사령부의 월남인 군속과 관리인들의 친절한 모습이 선하였다.
매일 연설문을 작성하고 군수 및 원호품 보급 계획을 수립하는 가하면 야간에는 공관 경비 업무를 대행 할 때도 있었다. 월남의 시내 모습은 바둑판처럼 잘 정비된 도시로 전쟁터인지 관광지인지 구분이 당시에는 데지 않았다. 그러나 시내에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고 아이들과 부녀자, 전쟁 부상자, 노인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 전쟁 당시의 군복차림의 바랜 사진을 지금 보면 와 참 많이 늙었구나 인생 연륜의 이마 계급장과 검은 머리는 하나 둘 사라지고 흰 머리만 늘어나고 있어 환갑을 넘긴 노인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리에 힘도 빠지고 언덕을 오르면 숨이 차니 말이다.
이러한 젊음을 군복무로 2년간 보냈던 호치민시를 가보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통일된 베트남 우리도 하루 빨리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한 캄보디아의 우수한 문화유산 부러워 보였다. 베트남, 캄보디아 모두 경제개발로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고, 우리의 현재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적 안정으로 더욱 전진하는 도약의 국가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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