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白白敎)는 천도교에서 파생된 백도교(白道敎)라는 종교단체에서 연유한다.
민중을 위해 봉기를 일으켰던 전봉준과는 달리 양아치들을 모아 백성을 약탈하고 피를 빨아 먹던 전정운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데리고 백도교를 세우고 종말론을 내세우면서 신도들로부터 재물을 긁어모았다.
1919년에 전정운이 죽자, 그의 아들인 전용해와 전용주가 교주직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 동생 전용해가 형을 밀어내고 교주직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자 전용주는 백도교를 떠나 인천교(人天敎)를 세워 새롭게 교주로 나섰으나 결국 동생 전용해에게 살해되고 만다.
전용해는 형 전용주의 인천교까지 흡수하고, 이 때부터 명칭을 백백교로 바꾸게 된다.
백백교 교주 전용해는 허무맹랑한 교리로 우매한 사람들을 현혹하여 재물을 편취하고, 여신도들과의 간음을 일삼았다.
전용해는 변태성욕자로서 많은 여신도들이 보는 가운데서 정사를 벌이기도 했으며,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하였다.
이같은 사실을 은폐하려고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는 많은 신도들을 죽여 암매장하였다. 이 일을 책임진 자를 벽력사(霹靂使)라고 하였는데, 특히나 동침한 여신도에 싫증이 나면 이들을 폐광에 몰아 넣고 폭약으로 발파하여 죽였다고 전해진다.
신도들 중에는 못 배운 노동자, 농민 등 하층의 백성 뿐만이 아니라, 지식인이나 일본인들도 있었던 것 같다.
이같은 악행을 저지른 백백교 사건의 전말은, 열성 신도였다가 뒤늦게 이 종교가 사기라는 것을 깨달은 한 노인의 유언에서부터 드러나게 되었다.
"할애비는 약방을 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모았으면 천석꾼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할애비와 너의 애비가 백백교를 믿는 바람에 오늘 이같은 파산 지경을 당하고 말았다."
황해도 신천에 사는 유곤용이라는 한 젊은이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눈을 감으면서 유언으로 남긴 말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백백교의 수렁에 깊이 빠진 자신의 아버지가 18살 먹은 누이동생 유정전을 전용해의 첩으로 바쳤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유곤용은 복수를 결심하고 교주인 전용해를 찾아가 신도가 되려는 척 하면서 면담을 청하게 된다.
교주는 신변을 염려해 누구나 만나 주지는 않지만, 3대에 이은 열성 신도이면서 자신과 처남이 되는 유곤용인지라 만나 주게 된다.
전용해는 유곤용에게도 거액 헌금을 요구하지만, 유곤용은 이를 거부하고 백백교를 성토한다.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이냐? 그런 얼치기 종교가 어딨느냐?"
그러자 전용해가 칼을 빼들어 둘은 결투를 벌이게 된다.
이 용감한 젊은이는 제법 체격이 좋았고, 싸움 실력도 뛰어났던지라, 전용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때려 눕히고,
교주 전용해의 경호를 맡아 칼을 들고 덤벼들던 백백교 간부 양만호까지 때려눕힌 다음 그의 칼을 빼앗아 달아난다.
전용해의 경호원 10여명이 무기를 들고 유곤용을 추격하자, 유곤용은 막다른 골목으로 피하여 이들과 맞섰다.
유곤용이 휘두른 칼에 백백교 간부인 이경득의 손가락이 잘리면서 큰 소동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 일본 순사들이 나타나자 이들 백백교 간부들은 도주하고 만다.
유곤용은 일부러 왕십리의 주재소(일제 시절 파출소를 이르는 말) 앞을 결투 장소로 택했던 것이다.
유곤용은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 순사들에게 백백교의 갖가지 만행을 진술하게 된다. 그의 말을 들은 일본 순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백백교는 살인 종교이고, 백백교를 믿는 신도들 중에는 일본인도 많이 있으며, 일본인들도 적잖게 살해당했다고 이야기한다.
백백교로부터 뇌물을 받으며 백백교의 사기를 묵인해 왔던 주재소의 간부들도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 중에 일본인도 있었고, 더구나 살인까지 저질러졌다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1937년 일제 경찰에 의해 백백교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
전용해는 이미 도주했고, 몇몇 간부들은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당시 무려 346구의 뼈가 나왔고 기모노도 27벌이 나왔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당황했다. 조선인들 외에 일본인들도 살해당하고, 살인 종교로부터 뇌물을 받고 눈감아준 일본 순사들이 연루된 것이 국외로 알려지면 일본 정부로서도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이를 무마하고 숨기기 위해 해당 주재소의 간부들은 모조리 좌천 파면시키고, 전용해를 공개 수배했다.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던 전용해는 경기도 양평 용문산 능선의 솔밭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부하를 죽인 다음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백백교에 대한 관심이 멀어진 틈을 타서 일제는 그 동안 숨겨온 백백교와 그 간부들에 대한 재판을 벌여 백백교의 주요 간부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가두거나 징용을 보낸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된다.
당시 일제의 발표로는 뼈가 346구 나왔다고 했으나, 실제 살해당한 사람은 2~3천명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껏 전용해의 머리는 포르말린에 담겨져 일제 시대를 거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지하실에 보관되어 왔는데, 2010년 봉선사 승려 김영준씨 등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일제가 뽑아낸 인체 표본의 보관을 중지하라'며 낸 소송에서 법원은 "국가는 '장사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인체 적출물을 처리하라"는 내용의 화해권고 결정을 내린 바 있어 폐기된 걸로 알려진다.
(JMS 정명석을 생각하면 이 사건이 생각나 정리해 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