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102/여운을 남긴 채 잔치는 끝났더라
1년에 한번 있는 제대로 된 ‘소풍’이 끝났습니다. 돌아오는 길, 문득 미당의 ‘행진곡’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잔치는 끝났더라/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빠알간 불 사르고/재를 남기고/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결국은 조금씩 醉해 가지고/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모가지여/모가지여/모가지여/모가지여//멀리서 서 있는 바닷물에선/亂打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이천 임금님표 쌀밥집에서 막걸리 한잔과 함께 저녁끼니를 해결한 후 어둑한 음식점 마당에서 50명이 넘는 중년의 남성들이 40년 전의 고등학교 교가를 부르며 잔치는 끝났습니다. 2008년 야유회 때에도 우리는 하조대 근처 식당에서 120여명이 교가를 합창했습니다. 당시 회장단도 오늘의 최규록 회장과 마남일 총무였습니다.
<노령에 푸른 줄기/고덕산 솟아/전주천 맑은 물도 굽이 도는 곳/내 나라 내 겨레를 이어갈 우리/새롭고 즐기롭게/닦고 빛내자/전라고/구원한 이상>
참 보기 좋고 보기 드문 광경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한 전라고녀생은 “이렇게 재미지다니, 시집을 잘 온 것같다”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행사를 끌어가는 몇 명의 수고는 그렇다치고, 소풍을 나온 선남선녀들은 모처럼 동창친구들을 만나 서로 안부를 묻기도 바쁘고, 여기저기에서 얘기꽃, 웃음꽃이 피어 올랐습니다. 지난 3월 시산제 축문을 낭송할 때에도 그런 구절이 있었습니다만, 대한민국 어느 고등학교 출신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연출’을 10년이 훌쩍 넘게 하겠습니까? 전국에 고등학교가 3000개가 넘는다지만,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죽하면 기록을 좇는 중앙일간지 기자가 ‘냄새’를 맡아 한 면에 “우리는 왜 이리 좋아할까?”라는 제목으로 대서특집을 했겠습니까? 행사때마다 명사회, 명가수로 우리에게 웃음을 한아름 안겨주는 한 친구는 “그때는 후기고여서 2등 콤플렉스에 시달렸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소위 명문이라는 전주고등학교를 떨어져 전라고 오기를 참 잘했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2호선 잠실운동장역 2번출구 근처에는 7시도 안돼 '드림관광버스‘ 3대가 기다리고 있고, 삼삼오오 반갑게 악수를 한 후 정담을 나누기 바쁩니다. 한쪽에서는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멀리 지방에서도 착착 도착합니다. 한 친구는 함께 하지 못하는데 너무 미안하다며 안부인사차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최대의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버스는 8시도 안돼 53분에 세 대가 출발했는데, 그만 근처 집에 물건을 가지러 간 우리의 회장님이 차를 놓치고 SOS를 쳤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대장을 놔두고 출발을 하는 실수를? 3호차는 하남 만남의 광장에서 20여분을 기다려 큰아들이 급하게 모신 회장님 부부를 맞고 멋쩍어서 모두 웃었습니다.
문제는 해마다 겪은 교통체증 스트레스가 말끔히 가신 것은 좋은데, 예정시간보다 1시간 더 빨리 화담숲에 도착한 것입니다. 점심 식당 등 시간을 당기는 등 소동을 피웠습니다. 하여 80여명을 먼저 입장시키고 회장단은 전주와 포항에서 올라오는 친구들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백 번 칭찬을 해도 부족할 ‘노력봉사’를 소개해야 합니다. 부회장인 마남일 부부는 화담숲 산책을 하면서 먹으라고 일요일 방울토마토와 거봉포도를 20여만원어치 사갖고 씻은 후 지퍼백 70개에 일일이 담았다고 합니다. 선풍이를 틀어놓고 말려야 했고, 새벽 3시까지 양주(兩主)가 그 일을 하느라 손가락에 물집까지 생겼다니, 얼마나 눈물나게 가상한 부부인가요? 그런가하면 회장님 사모님은 전라고녀생들의 얼굴이 탈까봐 알록달록 최고급 양산을 사러 남대문시장을 6시간 동안 발품을 팔아 60개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이 쌓여 ‘전라고 6회’는 해마다 신화와 전설을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담숲 산책길은 부부끼리 ‘평화로운 얘기’를 나누며 정을 돈독히 하라는 뜻으로 ‘평화 화(和)’자와 ‘말씀 담(談)’자입니다. 10여개의 테마로 나뉘어진 6km의 길은 걷기에 그만입니다. 유모차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도 있고, 모노레일로 편하게 갈 수도 있습니다. ‘미완성 소나무정원’을 보셨나요? 기기묘묘한 ‘분재원’은요? 규근석이라는 ‘나무화석’은요? 남근석, 여근곡도 보셨나요? 눈이 다 시원해지고 가슴이 뻥 뚫린 듯 환한 기분이 들지 않던가요? 적어도 2시간 반은 모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걸을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1시간여만에 정문에 도착하면 행사를 진행하는 집행부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12시 집합인데, 11시에 나와 ‘빨리 가자’고 하면 곤란하지요. 하하. 혹자가 농담을 하더군요. 본부인하고 걸으니까 그렇다구요. 다음에는 불륜녀하고 꼭 같이 와야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친구도 있었답니다. 애인하고 함께 하면 3시간도 모자랄 길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설마요? 우리 ‘전라인’들은 그런 사람 한 분도 없으리라고 봅니다.
어찌 됐튼, 우리의 거창한 일행은 이제 ‘황금옻닭 느티나무집’으로 향했습니다. 식당마당에 그득히 모인 선남선녀 100명은 기념단체사진을 찍고 시원한 수박조각과 파지토마토를 먹으며 토종닭백숙을 기다립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옻닭’이라고 하니까 ‘죽어도 못먹겠다’며 ‘집행부는 누구 마음대로 메뉴를 하나로 통일하냐’고 종주먹을 들이댑니다. 비상조치를 취하여 7상(床)은 옻을 넣지 않기로 했습니다만, 정말 맛있고 영양가 있는 황칠나무의 닭백숙을 안겨드리고 싶었거든요. 목동의 명한의사 친구가 “걱정없다”고 해도 소용이 없더군요. 하하. 30상(床)이나 차려야하지, 이럴 때는 배려와 인내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마침 그 식당은 한 친구의 사돈이 운영하는 집이었고, 시집간 둘째딸도 서빙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일행은 여주의 ‘목아박물관’으로 향합니다. 1시간여 동안, 우리의 재담꾼 친구의 ‘이빨’은 녹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유쾌한 1일여행을 해보신 적이 몇 번이나 있나요? 모두 싫지 않는 표정입니다(집행부만의 생각일까요?). 예정대로였다면 세종대왕릉을 참배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아침부터 서두른 덕분에 40여분 여유가 있어 영릉(英陵)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졸지에 나타난 ‘사이비 왕릉해설가’가 정자각 앞에서 30여분 동안 ‘조선의 왕릉문화’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능침공간에 올라 혼유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호, 석양, 석마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유익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합니다. ‘도락’이라는 집의 종업원들이 불친절하다는 여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집행부의 약간의 ‘미스’도 한몫했습니다. 예약관계로 티격태격한 때문이었는지,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렇게 몽땅 모여 함께 밥 먹는 것만도 얼마나 축복입니까? 한 친구가 ‘기적의 주름제거제’인 붙이는 바이오패치 2세트를 기증했습니다. 누구에게 줘야 할까요? 순간적으로 최고령과 최연소 전라고녀에게 주자는 아이디어에 모두 박수를 보냈습니다. 물경 13만2000원짜리 수출용품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 이렇게 끝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날이 이미 어두어졌습니다. 잠실운동장까지 찍해야 한 시간. 기념품을 나눠주는 타임. 광주유기농토마토 1상자씩 안겨줍니다. 2만원짜리인데, 70개 산다고 할인값을 고집한 분도 간식팩을 만드느라 ‘쌩똥’을 싼 마남일부부였습니다. 오늘의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은 순전히 그분과 회장 사모님 덕분입니다. 박수 좀 쳐주세요. 짝짝짝-.
교가 합창. 내년에 다시 만나요. 아무래도 회장님은 미련이 남은 듯합니다. ‘6산회’와 ‘천렵’ 행사의 참여를 독촉한 후, 가을 모교를 방문하는 등의 40주년행사에 적극 동참을 호소합니다. 유흥시간을 갖지 못해 유감인 한 친구의 익살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오늘 아침 나온 ‘구멍’으로 갈 길을 재촉합니다.
6일 하루 해피하셨나요? 그동안 자주 못본 친구들도 만나 회포도 푸셨나요? 내년에도 꼭 나오실 거지요? 믿습니다.
한 친구는 음치 주제로 1, 2, 3호차를 돌아다니며 돼지 목따는 소리로 노래를 했다고 하여 화제더군요.
<사색을 먹고 사는/눈푸른 운수납자/구름에 쌓여 있는 인간사 속진을 떠나/나 여기 한 마리 꾸밈없는 푸른 학 되어/무심천을 날아가리/뜬 구름 같은 인생/청산을 닮아가며/자연의 순리따라 한 삶을 사르다가/어느 날 문득 지는/석양에 내 모습을 불태우리리->
* 후기 1 : 1호차 기사분이 깜박했나 봅니다. 잠실운동장역에서 출발할 때 1차에 1박스씩 캔맥주(24개?)를 실었는데, 트렁크에 그대로 놓고 풀지 않았나봅니다. 그럼 아이스박스는 뭐하러 가져왔나요? 진짜 1호차 친구들은 캔맥주 구경도 못했나요? 그렇다면 집행부의 또 하나 잘못입니다. 그리고 드림관광 기사분들만 맥주파티를 벌였겠군요. 그것 참.
후기 2 : 다음날 집행부 4명이 만나 행사에 오지도 않고 찬조금만 낸 6명의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에 대해 모임을 가졌습니다. 양산이 딱 2개 남았으니 정확했습니다. 43쌍 싱글 15명. 이것이 바로 ‘전라고의 정신’입니다. 모자란 것은 추가로 구입에 택배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이상 쌍륙절 야유회 글뒤풀이였습니다. 날씨도 무척 더운데 건강 조심하며 잘 지내시길. 7월 산행과 8월 천렵에서 반갑게 또 만나길 고대합니다. 집행부를 대신하여 심부름꾼 우천(알록달록) 최영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