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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초석을 놓다 – 고대 세계에서 일어났던 선택과 혼합
자료출처
http://www.jesusneverexisted.com/syncretism-korean.html
Jesus Never Existed – The Imaginary Friend email the author – Kenneth Humphreys 23.11.11 Home Section Complete list of articles Site Search 종교적 혼합주의의 발생지: 서기 전 4세기부터 서기 전 1세기까지.  로마가 카르타고(Carthage) 와 세력다툼에 전념하고 있을 때 톨레미(Ptolemy)는 동부 지중해권의 주인이었다. 300여년간 희랍계 에집트인들은 종교적 혼합주의의 제국을 통치했다. 이 기간에 특급의 영웅적 신인(神人)의 개념이 창안(創案)되었고 이후 기독교인들에 의해 역사화(化) 되었다. 호러스-‘세상의 빛’의 원조  초기 미스테리 종교는 혼합주의적이었다…페르샤의 미트라교(Mithra-cult)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에집트화했다: 에집트의 아이시스교(Isiac cult)는 대부분 희랍화 했다. – 앵거스 (S. Angus, The Mystery Religions, p20.) 세라피스 신을 위한-“유대교”의 뿔달린 제단!  희랍의 섬 델로스(Delos): 이오니아 동맹의 중심지. 서기 전 3세기. 그리고 야웨신을 위한?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 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열왕기 상 (1장 50절) – 1 Kings 1.50. 모든 특색을 망라한 신  뒤케(Tyche운명의 여신 로마에서는Fortuna)여신 -전통적으로 여신의 인도를 받는 도시의 성벽을 표현하는 뮤랄 왕관을 썼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초승달 모양의 장식까지 달린 완전한 모양의 아이시스(Isis ) 여신의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그녀의 왼쪽 팔로 그녀는 풍요의 뿔나팔 (풍작의 상징)을 들고 있고 오른 손에는 방향타(方向舵)를 들고 있다(행운과 바다의 지배권을 안내하는) 그녀는 또한 승리의 여신 나이키(Nike, Victoria)의 날개를 달고 있고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 , 로마 신화에서는 Bacchus)신의 사슴가죽을 입고 있다. 그녀의 오른 팔을 뱀이 감고 있는데 이는 치유의 신 에스레피우스(Aesclepius)의 딸중의 하나인 하이쥐어(Hygieia ,Salus , 건강의 여신) 특징이다. 도대체 한 여신이 이 보다 더 성스러울 수 있을까? (제국의 초기 작품.. Staatliche Museen, Berlin) 호러스가 로마 신이 되고 기독교 신이 되면서 이름을 “예수”로 바꾼다…  군복 망토와 장갑판(裝甲板)을 갖춘 로마화(化)된 호러스, 혼혈신  아피스(Apis)는 원레 멤피스(Memphis)의 수호신이었다 황소는 그 몸의 독특한 표적 때문에 선택되었고 그 지방의 창조신인 프타(Ptah)에 의해 임신된 처녀암소에 의해 태어났다고 믿어졌다. 그 지방의 삼위일체는프타-소카-오시리스(Ptah-Sokar-Osiris)다.  아피스 – Apis  오시리스 – Osiris 오시리스는 에집트의 주신중의 하나였고 지하세계의 왕이다 그는 제5왕조(기원전 2465 - 2323 ) 기간에 농사와 자연의 신으로서 그의 장기간의 경력을 시작했다.  디오니소스( – Dionysus 희랍의 농사와 포도주의 신  희랍의 헤르메스신으로 동방의 영향 (Petra 지금의 욜단에 있었던 고대도시:역자 주)을 보여준다. 아콰바(Aqaba)로부터의 트라얀(Trajan)의 행로는 인도의 향료와 동시에 종교사상을 가져왔다. 거대한 발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토된 초대형 대리석 발-아마도 세라피스(Serapis) 신상의 일부인 듯(대영 박물관) The "Holy Family"? The Whole Nativity Sequence, Luxor 1700 BC ! 안티노우스: ‘죽은 후에 나타나다’  정의의 신 오시리스-안토니우스를 기념하는 오벨리스크(2세기 로마) 비문에는 안티노우스가 ‘죽은 후 꿈에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시대: 서기1세기- 4세기 화장(火葬)은 더 이상 없다! 미이라에 붙여있는 초상화는 로마식의 의복과 장신구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스타일은 희랍식이다.  로마 혹은 희랍인들의 에집트식 미이라 에집트. 페에염(Faiyum) (서기 3세기)) 양쪽에 내기를 걸다.  희랍과 에집트의 전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장례장식판 위의 그림은 순수한 ‘파라오’식으로 아누비스( Anubis), 아이시스(Isis), 그리고 네프티스(Nephthys)가 죽은자의 사후생애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아래그림은 순수한 희랍식으로 하데스(Hades)신이 퍼르시포네(Persephone)를 납치하고 있다. 아르테미스(Artemis)는 활을 가지고 있고, 아테나( Athean)는 창을 가지고 있다. 아프로디테(Aphrodite)도 보인다. Kom el-Shoqafa (Mound of Shards)의 지하묘지. 서기 1세기. 회의론자가 협잡꾼들을 주목해 보다. 3세기의 네오 풀라톤 학파의 철학자였던 풀로티누스(Plotinus)는 희랍, 시리아, 에집트, 그리고 인도를 두루두루 여행하면서 특히 종교 현황을 관찰하였다. 그는 무수한 성직자들이 얼마나 기꺼이 사기에 빠져 들고, 가짜 기적을 행하며, 진실을 변경하는 지를 기록하고 있다. 언듯 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많은 신들을 전시하고 있는(고대) 에집트의 만신전(萬神殿)은 기독교 신인(神人)과는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보면 많은 고대 에집트 신들은 도시나 지역에 따라 변화를 준 ‘같은 주제의 변종’들일 뿐이다. 이들의 운명은 인간들의 권력 다툼이나 왕조의 흥망성쇠의 결과에 따라 상승하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했다. 싸움에서 승리한 성직자들은 추락해 버린 경쟁자들의 신에서 유용한 점이 발견되면 이들을 자신들이 내세운 신들에게 융화시킨다. 이 흡수, 동화, 그리고 적응의 과정은 희랍과 로마시대를 거쳐 기독교 시대까지 계속되어 왔다. 기본적인 그리스도의 전설은 그들의 지속적인 메시아를 향한 염원과, (자신들에게 동조해 준) 이방인 개종자들과,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 하는 태양신의 이야기들로 무장한 유대인 변절자들(전통적 유대 신앙을 버린: 역자 주)에 의해서 형성되었지만, 에집트는 구약에서는 볼 수 없는 사상들: 영혼의 불멸성, 죽은 자에 대한 심판, 상과 벌, 삼위일체, 등등의 사상을 기독교에 공급했다. 고대 에집트 종교는 발생단계의 그리스도 신앙에 그들 신조의 많은 부분들을 불어 넣어 주었다. 마법으로 기독교를 불러내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에집트, 팔레스타인, 그리고 싸이프러스 지방들은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톨레미(Ptolemy (323-282 BC))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수도는 에집트의 부를 희랍세계의 북부와 동부 방면으로 교역하는 알렉산드리아였는데 이 도시는 나일강의 범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레오티스(Mareotis) 호수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갑(岬)에 건설 되었다. 그 항구는 유럽, 아시아 그리고 인도와 그 넘어 지방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정착민들 가운데는 고대 희랍도시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은 이주와 함께 희랍(Hellenic)문명을 들여왔다. 톨레미 자신은 각 나라에서 온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이 국제적인 도시에서 그들의 일을 계속하도록 고취시켜 주었고 왕가의 후원에 힘입어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의 지적 수도가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혼합주의적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무역을 통해 많은 물자가 유입됨과 더불어 알렉산드리아에는 모든 철학과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모든 종류의 신조들도 함께 유입되었다. 이 가장 국제적인 도시속으로 종교들이 서로 어울리고 혼합되었으며 많은 고대 에집트의 종교적인 사상들이 자유롭게 차입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지하묘지에는 로마시대 당시의 문화적 융합을 실증하는 벽화를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로마 군복을 입은 에집트 신이 희랍식으로 조각한 석관(石棺)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혼합주의적 전통v 희랍인들이 보편적 신을 창조하다. 희랍인 장군 톨레미는 자신을 에집트의 파라오식으로 맞추고 자신의 직함을 ‘소터’(Soter, 구원자)로 했다. 기민한 통치자로서 그는 공식적 종교의 정치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의 합성된 신, 모든 신앙체계를 포용하는 하나의 신은 아마도 다국어가 통용되고있던 그의 제국의 다양하고 흔히 상호 적대적인 국민들을 통합하게 하고 지상에서의 신의 대변자인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최초의 희랍인 파라오는 그의 다양한 피 통치민들을 통합하기 위해 하나의 합성된 신을 원했다. 이 고전적 혼합과정의 사례에서 몇몇 고대신들의 성품과 특질을 하나의 신으로 통합시켰는데 이것이 세라피스(Serapis)신이다. 모든 파라오-희랍의 합성신들 중에서 세라피스는 최장기간- 로마시대로 진입할 때 까지- 생존했다. 그렇게 많은 초기 신들의 성품들을 유일 신 세라피스에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실효적 일신론 사상”(virtual monotheism)이 수 백년 간에 걸쳐 알렉산드리아에서 확립되었다. 이 새로운 신은 에집트 신 오시리스(Osiris) 와 아피스(Apis), 희랍신 디오니소스(Dionys)와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희랍신 하데스(Hades) 등을 포함한 많은 초기 신들의 면면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톨레미는 이 새로운 신이 점진적으로 국제화가 되어가는 나라에서 대 다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보편적 신이 되도록 의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세라피스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포함해서 (according to correspondence of Emperor Hadrian) 200이 넘는, 해당 지방에서만 통용되는, 이름들을 가지게 되었다. 서기 전 3세기에는 세라피스에 대한 숭배가 에집트 전역에서 국가적 후원을 받는 종파가 되었다. 로마 정복과 함께 이 종파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신이 보편적인 인정과 헌신을 받기 위해서는 초기 신들의 권능과 양상들을 모두 갖출 필요가 있다. 이런 대 융합을, –수 세기 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조치를 예기한 과정으로-창조하기 위해 톨레미는 이 공인된 종교를 널리 장려하고 후원하는 데에 모든 국가적 자원을 투입했다. 이 신을 위한 주요 신전들이 알렉산드리아와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세라피 신전(Serapeum)은 에집트식의 거대함과 우아하고 아름다운 희랍식을 혼합해서 지어졌다. 이 세라피 신전은 대단위 복합단지로 커져서 이교도 문화에서 가장 장려한 기념물중 하나가 되었다.  Serapis at Petra 세라피스-희랍/에집트 의 “제우스” “이 운 좋은 찬탈자는 오시리스의 옥좌와 침대속으로 끌어들여졌다.” 기본 (Gibbon) 복합적 신으로서, 세라피스는 오시리스(Osiris)와, 지하세계의 왕, 그리고 멤피스의 성물(聖物)로 우신(牛神)인 아피스(Apis)의 양상들을 취했다. 이 신의 머리위에 있는 바구니는 풍작을 나타낸다. 로마로 부터 존경을 받다. “베스파시안 (Vespasian)….에집트로 진입하는 길목을 지배하가위해 알렉산드리아까지 진군한다. 거기서 그는 모든 측근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자신에 대한 전조(前兆)를 알아보고 자신의 통치가 얼마나 지속될지를 알아보기 위해 단신으로 세라피스 신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환상을 본다… – 수에토니우스 Suetonius, Vespasian, 7. “베스파시안이 법관석에 않아 있는데, 하나는 장님이요 다른 하나는 절름발이인 일꾼 두명이 함께 다가와서 자신들을 치유해 주기를 간청한다. 알려지기로는, 세라피스 신이 꿈속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만일 베스파시안이 장님의 눈에 침을 뱉어주고 절름발이의 다리에 (배스파시안의)발 뒷꿈치를 대 주면 그들의 병이 낳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다는 것이다. 베스파시안은 자신의 치유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요청을 받았을 때 매우 망서렸지만 그의 측근들은 일단 시도를 해 보라고 설득한다. 그것도 수 많은 군중들 앞에서.- 그리고 신통하게도 이 마술은 작동(作動) 되었다.” – 수에토니우스 Suetonius, Vespasian, 7.  혼합된 장례식 전통 혼합주의-에집트 거주 희랍인들의 토착화 서기 전 4세기 톨레미의 첫 치세로부터 희랍인들은 에집트에 헬레니즘 문화를 이식해갔다. 그러나 이 고대 국가를 헬레니즘화(化)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상당한 정도에 이르기 까지 희랍인들이 오히려 피 정복자들에 의해 에집트화(化)된 점이 많다. 이 과정은 희랍인들이 그들의 세력을 잃고 로마가 발흥하게 되어서는 더욱 가속화 되었다.  장례의식 기름 등잔 등잔안에서는 희랍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목욕을 하고 있다. 그 입구는 희랍식 기둥이 버티고 있지만 이 기둥들의 상부는 코부라 뱀과 (에집트의) 호러스 신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 서기 전 2세기).  조각이 있는 석관(Sarcophagus) (전면) 희랍식 석관(石棺) (포도넝쿨과 디오니소스(Dionysus)의 사로티스( satyrs, 반인반수의 신)) 에집트식 배경이 이채롭다 (에집트신들인 아누비스(Anubis), 호러스(Horus), 그리고 토트(Thoth). (알렉산드리아 Kom el-Shoqafa의 지하묘지) 에집트로부터 “ 에집트의 불가사의(不可思意)에 감추어진 품성들은 유데인들의 것들과 매우 비슷하다” –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v7 iii p56). 처음 2세기 동안 그리스도 추종자들은 그들의 신에 대하여 어떤 확실한 영상이 없었다. 유대교로부터 갈라져 나왔던 관계로 그들은 “우상숭배”를 싫어했다. 그들은 무신론자 취급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유대교로부터의 분리가 완료된 후 그리스도 숭배자들은 이교도들의 신상, 예식, 성지와 상징들을 그들의 용도에 맞게 적응시킴으로서 급속히 그들에게 부족한 점들을 보상해 나갔다. 이 과정은 특히 성상들로 뒤덮인 땅, 에집트에서 매우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다. 3세기 이후로 부터 에집트 기독교 종파인 콥틱(Coptic)미술은 혼합주의적이며 융합된 전통을 보여준다-기독교의 박판(薄板)위에 붙여진 로마식, 희랍식, 그리고 파라오식- 이런 미술은 심오한 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란 새로운 외관(外觀) 내부에서 세차게 흐르고 있는 고대 종교 신앙으로부터의 역류현상을. 삼위일체와 구원자 신 기독교 시대의 첫 4세기간의 예술작품들이나, 사상, 표현, 그리고 기독교적 이단사상들은 호러스(Horus) 전설의 성격과 그 영향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서는 연구할 수 없다. – 쿠퍼 (W. R. Cooper, (The Horus Myth in its Relation to Christianity, p49)) 아이시스(Isis)는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일부이다. 에집트인들은 흔히 삼위일체로 분류된 (실상은 여러 계층의 삼위일체가 존재한다) 소위 지고의 존재로 부터 발산하는 감화적인 영향력, 인간의 지혜로는 알수 없는 신격을 신으로 삼았다. 그래서 아이시스-오시리스-호러스( Isis-Osiris-Horus), 아문-레-묻-콘스(Amun-Re-Mut-Khons),아툼-쉬-태프눗-마헷( Atum-Shu-Tefnut-Mahet), 등등의 삼위일체 신들이 영원한, 진화하는 신격으로 40세기 동안을 군림했다. 결정적으로, 에집트의 성직자들은 당대의 통치자인 왕을 신과 직접 연계시켰다: “4000년간의 에집트 역사에서 모든 파라오들은 젊은 호러스신의 화신(化身)이었고 따라서 호러스 신에게 젖을 먹여 키워준 어머니 여신인 아이시스 여신의 아들로 취급되었다. 죽을 때는….오시리스처럼 그는 컴컴한 죽음의 왕국에 있는 차안의 존재들을 지배했다. – 위트(R. E. Witt (Isis in the Ancient World, p15))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본질’이며 지속적으로 변신하는 동일한 요소이다. 파라오는 지상에서(호러스 처럼)삼위일체 안으로 발을 들여 넣고 죽은 후에는 (오시리스 처럼)천상의 존재가 된다. 이 끊임없는 순환과정에서 아이시스는 자매로서, 배우자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일종의 ‘성령’으로 이 모든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역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어디서 빌려 왔을까? 호러스가 뜬다   Harpakhrad 하르파카라드(Harpakhrad): 경이로운 소년 호러스가 자신의 손가락을 빨고 있다. 본래 하늘의 신(그래서 송골매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인 호러스는 에집트 신들 중 가장 중요한 신의 하나다. 세월이 지나면서 호러스는 많은 다른 신들의 품성을 흡수했다. 이 종파가 상부 에집트로부터 북으로 전파되면서 호러스는 많은 그 지방만의 특별한 이름이 붙여진다. 하로에리스(Haroeris)로서 그는 빛의 신이되고 하르마카스(Harmakhis)로서 그는 새벽의 신이 되며 하르파카라드(Harpakhrad)로서 그는 어린이 호러스가 된다. 레(Re) 신과 합병하여 그는 그의 지배권을 계승하면서 레-호라크티(Re-Horakhty)가 된다.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면서 호러스는 점차 더 인간으로 형상화 된다. 그래서 그는 지상에서 처음에는 파라오로 대표되었고 후세에는 기독교 신화속의 영웅이 되었다.  젊은 사람의 신체를 가진 호러스(옆머리 타래를 보시라)가 두 마리의 악어(악마)를 발아래로 으깨버리고 있다. 이 소 조각상에는 뱀과 전갈을 쫓아내는 주문이 새겨있다; 이 조각상 위로 쏫아 부어진 물은 성수(聖水)가 된다.  전설에 의하면 호러스는 아누비스(Anubis)에 의해 이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호러스는 전통적으로 사람의 몸에 송골매나 다른 매의 머리를 가진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시대의 혼합주의는 이 신이 완전한 사람의 신체를 가진것으로 표방하였다. 그래서 아이시스 신 -혹은 ‘마리아’로도 알려진- 앞에서는 어린아이도 된다.  에집트, 4세기 여기서,호러스( Horus)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세스(Seth)를 짓밟아 뭉개버린다. 오시리스 (Osiris)는 악어로 표현되어 있다.  에집트 7세기 태피스트리  에집트, 18세기 말을 타고 있는 호러스상은 희랍 시대 이전의 에집트에서는 알려진 일이 없다. 그러나 전설은 오래되었다: 선이 악을 이긴다. 콥틱 기독교에서, 예술적 기교는 퇴보 되었지만 이야기는 그대로 이다: 호러스는 이제 기도교인이고 악인들은 이방인들이다. 기독교화가 완성된 후 세기에서는 악어는 용이 되고 신은 기독교 기사가 되었다. 역류된 이야기들과 ,재 사용된 상징들과, 되풀이 사용된 신령한 공간 “그의 어머니 아이시스가 없었다면 ‘어린이 호러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에집트 전설의 사실에 입각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고집스럽고 음험한 적들을 상대로 그렇게 혹독한 싸움을 벌렸던 발생 당시의 기독교의 고군분투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 위트(R. E. Witt, Isis in the Ancient World, p279.)  어린이와 함께 있는 아이시스(Isis) 신  아이시스(Isis) – 원형 어디서 이런 생각들을 빌려왔을까? 어머니와 어린애 – "Isis Myrionymos" 아이시스(Isis): “천상의 여왕” 고대 여신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암소의 머리를 가진 하늘의 신 하토르(Hathor)(그래서 아이시스 신도 뿔이 있고 태양쟁반을 가지고 있다)의 대부분의 특성을 흡수했다. 에집트의 초대 왕인 오시리스(Osirus)신의 자매이며 동시에 아내이다. 뱀의 신을 먹는 태양. 세스(Seth)의 자매이기도 하다. 형제간의 경쟁의식(카인과 아벨?)으로 인해 세스는 오시리스의 몸을 여러 부분으로 잘라 죽인다. 아이시스는 세스의 진노를 피해 갖난 아기 호러스를 데리고 도망을 친다; 그녀는 오시리스의 신체부분을 찾아내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거듭나게 하고 오시리스의 영생불멸성을 회복시킨다. 아이시스의 보호를 받으며 호러스는 안전하게 성장하여 마침내는 왕이 된다. 아이시스는 칭찬받을만한 여성적 미덕의 인격화이다. 이는 후세에 ‘마리아’에게 계승된다. 축복받은 처녀와 마찬가지로, 아이시스도 산고를 치르는 여인들을 도우며,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비를, 죽어가는 사람에게 ‘빛’을, 선원들을 보호해 주고, 순결을 방어해 주며, 풍요와 치유를 보장해 준다.  어린 호러스와 함께한 아이시스: 로마 판, 서기 전 20년  흠… 자 이게 누구일까~요?  아이시스(Isis)의 희랍 판 아이시스의 이름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이교(異敎)로 부터의 전이과정은 은밀히 그리고 느끼지 못할 만큼 서서히 그 혼합과정을 연장시켰다 – 위트 (R. Witt, Isis in the Ancient World, p274.) 로마시대의 에집트: 고대의 멜팅 폿 서기 전 30년에 로마가 에집트를 합병하면서부터 희랍인들은 국가를 통치하는 엘리트로서의 위치를 잃었다. 따라서 희랍인들은 통치자 계급이 아닌 관료계급의 일원으로 점증적으로 에집트 원주민들의 관습을 채택한다. 에집트 거주의 희랍인들은 전통적으로 영혼의 불멸성만을 믿었지만 점차로 화장(火葬)을 피하고 –육신의 부활이라는 낙관적 신앙을 갖게 되므로서 에집트식 미이라화(化)를 택한다. 이 사상은 초기 기독교에 주입된다. 항상 사회계층의 밑바닥을 형성해 온 에집트인들은 희랍인들의 치하에서 보다 로미인들의 치하에서 더욱 가혹한 세금을 부과당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온 나라가 ‘가이사르’라 불리는 비(非)거주 지주들의 개인적 영지가 되면서 에집트인들은 그들의 파라오 신왕(神王)을 박탈당했다. 깊이 종교적인 이들은 그들의 고대 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신격(神格)을 찾는 종교적 수정주의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에 대한 (아마도 저항의) 반작용으로, 전통적인 종교적 해석은 좀 더 ‘민주적’이 되었다. 에집트인들은 ‘죽음 후 부활’이 오시리스 신의 운명이라면 사람에게도 같은 운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 하였다. 이전에 왕들에게만 보장되던 영원불멸의 축복도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된다는 것이다…” – 부라운 (Lewis Brown (This Believing World, p84))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수 세기 동안 불안정한 소수 집단인 유대인들이 이 무모한 혼합체 속으로 들어갔다. 서기 70년 유대 성전이 무너진 후 이민으로 형성된 유대 공동체는115년-117년간의 반란 이후 전 공동체가 멸살되었다. 그리고 유대 이민자들과 노예들의 새로운 파도가 132년-135년간의 팔레스타인 전쟁이후 에집트에 도착하였다. 이 추방당하고 방향 잃은 민족 속에서 다양한 종파와 ‘미스테리 종교’의 대행자들이 교인을 대상으로 경쟁하거나 서로 간의 종교적 사상을 표절하며 활동했다. 이들 중 가장 성공적인 종파가-혼합주의의 최적 사례가 된-기독교였다. 로마 지배하의 평화-팍스 로마나 ‘콥틱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예수가 그의 유년시절을 에집트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예수의 탄생’은 아나스(Ahnas (Heracleopolis Magna))의 페이염(Fayum) 이라는 곳인데 이곳은 바로 다름 아닌 아이리스(Isis)신의 아들인 아르사페스(Arsaphes)을 숭배하는 종파의 중심지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 일가의 에집트 망명’은 아마도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저술되어 성경이야기 속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나사렛으로 귀환했다는 이야기와도 모순된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환상은 에집트의 종교적 환경에서 그 지방 고유의 것이었다. 4세기의 감독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손을 거쳐 에집트 신과 인간 사이의 접촉면에서 가장 열쇠가 되는 측면 -‘만들어 진’이 아닌 ‘(아버지가) 낳은’, ‘아버지와 한 본질’ 이라는 사상들이 기독교 신학에 주입 되었다. 아타나 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말씀이, 그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항시 존재하고 있는 지구에 오시고… 신으로 그리고 인간으로 오시고… 그 자신을 나타내시고, 죽음을 극복하시고, 부활하셨다” – 강생에 대하여(On the Incarnation). 이렇게 해서 파라오의 종교가 기독교적 형태로 개주(改鑄)되었다-신학, 성상(聖像)학, 그리고 모든 영광스러운 사제술(司祭術)의 모든 소품들까지. 로마인들이 창조해 낸 신: 안티노우스(Antinous) 안티노우스를 위해 종파에 요구되는 모든 장치-성전과 성직자, 성상과 제단, 신탁(神託)과 신비, 놀이와 주의 깊게 개발된 신화 등등이 징발되었다. 그는 황족이 아닌 사람으로 동전면에 얼굴이 찍혀진 유일한 존재다. – 램버트(R. Lambert (Beloved and God, p147)) 깊이 경건한 사람인 하드리안은 그의 애인의 익사 사고를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에집트의 전통에 의하면 나일강에서의 죽음은 하드리안 자신의 지속적인 복지를 보장해 주는 ‘구원의 희생’이었다. 안티노우스의 시신은 화장되지 않았고 방부처리 되었다. 그 후 얼마있지 않아서, 서기 130년에 안티노우스에 대한 숭배는 제국의 전역에서 국가가 후원하는 종파가 되었다. 이 동안에 기독교 필자들은 그들의 복음서를 집필하였다… 안티노우스(Antinous):  예쁘장한 희랍소년… 하드리안(Hadrian)황제의 애인으로 130년에 나일강에서 익사하였다. 미혹에 빠진 하드리안은 그를 신으로 격상시키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한 도시 전체-안티노폴리스-를 건설했다. More about Antinous .. 로마의 신이 되다  ... 에집트의 신이 되다  ... 그리고 그리스도가 되다 안티노우스 종파는 4세기에 더욱 강경해진 기독교에 꺾였다.  4세기의 안티노우스: 한손에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디오시소스의 포도송이를 들고 있다. (안토니오폴리스의 석비, Staatliche Museen, Berlin)  6, 7세기의 콥틱 그리스도 옷을 입고 있지만 위의 안티노우스와 비교해 보시라! 그리고 기독교는 신을 파괴한다… 거대한 세라피스 동상과 그의 신전이 391년에 (성이나서) 날뛰는 기독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곳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서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테오필리스(Theophilus)가 세라피스의 성소(생튜어리) 위에 (세라피스의 머리가 왼 쪽 아래에 보인다) 서서 반대편의 승려들에게 돌을 던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4세기의 안텍산드리아 세계연대기)  Sources: William Dalrymple, From the Holy Mountain (Flamingo. 1998) Michael Walsh, A Dictionary of Devotions (Burns & Oates, 1993) Dom Robert Le Gall, Symbols of Catholicism (Editions Assouline, 1997) Leslie Houlden (Ed.), Judaism & Christianity (Routledge, 1988) Norman Cantor, The Sacred Chain - A History of the Jews (Harper Collins, 1994) R. E. Witt, Isis in the Ancient World (John Hopkins UP, 1971) Alison Roberts, Hathor Rising-The Serpent Power of Ancient Egypt (Northgate, 1995) Timothy Ware, The Orthodox Church (Penguin, 1993) Barbara Watterson, The Egyptians (Blackwell, 1997) P. H. Newby, Warrior Pharaohs (Faber & Faber, 1980)  Related articles Home From Apollo to Jesus Christ! – How the Godman is Made and Remade Christianity's "civil war" Arian vs Catholic – The Struggle for Power Hearts & Minds? – The "Conversion" of the Tribesmen 1000 Years of Carnage & Barbarity in the name of Christ The Papal Princes– Christian Lords of Hell on Earth MAJOR SECTIONS  Do you really think it all began with a sanctimonious Jewish wonder-worker, strolling about 1st century Palestine? Prepare to be enlightened.  Jesus – The Imaginary Friend  Still holding to the idea that some sort of holy man lies behind the legend? Better check out... Godman – Gestation of a Superhero  A closer look at the glib assertion that the Jesus story "got off the ground quickly and spread rapidly."  What DID the Early Christians Believe?  Many currents fed the Jesus myth, like streams and tributaries joining to form a major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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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chest, most powerful nation in history has a psychotic infatuation with Jay-a-sus the Lawd!  The Christianizing of the Americas     Some fifty articles are now available as a book. For your copy order:    Copyright ? 2004 by Kenneth Humphreys. Copying is freely permitted, provided credit is given to the author and no material herein is sold for prof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