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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이 -
미래에서 온 편지
≪나비일지 1 ≫
- 앞날에서 온 편지-
당신을 초대합니다. 당신이 가슴에 묻어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동반자 두 명과 함께 올 수 있습니다. 이 초대는 당신에게만 전하는 비밀 편지입니다. 2021년 5월 4일, 바람의 광장입니다. 이 편지를 비행기 접어 날리시면 됩니다. 바람의 광장, 유리도서관, 음악회, 전사들, 그리고 숲과 깃털의 이야기입니다. 하루하루 견뎌 주시는 당신을 위한 작은 선물입니다.
언젠가 이야기의 진원지를 궁금해 할 당신에게 전합니다.
이 편지를 읽는 당신은 어떠신가요? 당신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당신의 ‘고뇌의 온도’는 몇 도나 되는지요? 나는 중요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은 당신의 앞날에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당신이 누구든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든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당신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제부터 인생에서 중요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바람의 광장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이야기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아이가 사라졌다. 한줌의 재도 되지 않을 13년의 인생이다. 아이는 수십 번이나 접속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누구와도 접속하지 못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아이는 세상과 접속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접속을 시도하던 아이는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었다. 아이의 심장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는 그의 호흡과 함께 천상으로 이동했다. 아이의 영혼은 개구리나 도롱뇽만큼이나 세상에 때 묻지 않았다. 세상의 문턱에 있던 13살의 아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고뇌에 접속하여 온도를 가늠하라”
천상의 제왕은 수심이 가득한 채 말했다. 왕국의 정원에 수국의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수국의 생기는 지상의 고뇌가 전해주는 원기로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한다. 천상 에너지의 근원은 정원에 핀 ‘수국의 생기’였다. 정원위원회는 근래 지상의 고뇌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다각도로 감지했다. 천상왕국을 흉내 낸 불빛, 소음, 그리고 탁한 공기와 현란한 파장들, 사람들은 서로 대면하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며 자신을 가늠하여 살아가고 있다. 아름드리 왕벚나무 밑으로 뱀의 똬리가 도시를 노려보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도시의 사람들은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보면 ‘고뇌의 온도’는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었다. 인간의 고뇌를 앗아간 것들은 지금 도시 한가운데 가로등 불빛아래에서 밤을 하얗게 파먹고 있었다. 밤을 틈타 겨우 목숨을 부지한 동물들과 곤충들은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바람의 광장으로 몸을 숨겼다. 이렇게 바람의 광장은 야생의 동식물이 집결된 능선을 이루었다. 수많은 야생의 동식물들이 신도시개발로 죽거나 뽑혀나갔다. 인위적으로 옮겨 심은 수목과 갈 곳을 잃어버린 동물과 곤충들은 서둘러 생명을 부지하고자 광장아래로 숨어들었다. 왕벚나무아래 똬리를 튼 뱀의 눈빛이 달빛에 빛난다.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진원지에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바람의 광장이 위치한다. 광장 한켠에 위치한 유리도서관으로도 ‘수맥의 온도’가 감지된다. 도서관 서편 아래쪽으로 학교가 들어섰다. 뜨거운 수맥이 흐르는 곳이었다. 수맥은 바람의 광장 입구에서 시작되어 학교건물 밑으로 흐르며 학교전체를 감싸고 흘렀다. 아이는 이 학교 신입생이었다. 아이가 입학하면서 광장입구와 학교, 유리 도서관을 연결하는 곳에 높은 ‘고뇌의 온도’가 감지되고 있었다. 바람의 광장 중앙부분에 세 개의 봉분이 있었다. 봉분주변 평탄면에는 할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아이는 호흡이 막힐지경에 이르렀을 때 알수 없는 분노에 속이 메쓱거려올 때, 써내려가던 이야기가 멈출 때 마다 이곳에서 햇볕을 쪼였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질때는 숨을 참고 이곳까지 걸어와서 조용히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람의 광장이 조성되기 전 이 언덕은 왕벚나무 군락지였다. 무덤은 왕벚나무숲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능선을 산책하면서도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벌에 쏘였던 아이가 친구들이 놀려대는 소리를 피해 무심코 발걸음을 옮기다 찾아낸 안식처였다. 이 안식처에서 아이는 심호흡을 하며 겨우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온통 논과 밭뿐이었던 마을에 신도시 개발이 시작되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던 왕벚나무 숲은 자연이 살아있는 유일한 터전이 되었다. 도시의 개발로 황폐해진 도심을 살리기 위해 왕벚나무숲에 광장이 조성되었다. 산을 타고 넘어오는 구름이 산속의 온기를 만나 구름이 둥실둥실 머무르는 곳,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의 광장이라 불렀다. 천상의 왕국은 이곳에서 전해지는 강력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 기운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같은 것이었다. 왕벚나무숲은 모두 밑동이 잘려나갔지만 당속깊이 온수가 흐르는 곳에 닿아있던 뿌리들은 그들의 생명을 유지할수 있었다. 그곳에서 신비한 기운이 감돌았다. 바람의 광장 조성공사가 마무리 될 무렵 천상에서는 서둘러 유리도서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급격히 하락하는 퇴락은 인간들에게 “고뇌의 온도”를 쇠락하게 하였다. 천상의 화원 한귀퉁이가 시들시들한 수국으로 갈색이 되어 버렸다. 급격히 하락하는 “고뇌의 온도”를 관리하기 위하여 유리도서관이 건립되었다. 도서관 건립을 위해 천상의 디자이너들이 총동원 되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 지상에서 1미터이상 떠있을 것, 투명한 유리로 세워 지상의 햇살을 고스란히 받을 것,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에게만 보일 것 등. 천상에서는 도서관을 마주한 광장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여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통로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최적의 기운이 바람의 광장에서 스물거리며 움직였다. 신도시개발로 번식을 위해 생존경쟁을 벌이던 동식물들과 곤충들은 광장에 숨어들어 그들의 번식력을 최고조로 높였다. 멸종을 피하기 위한 피나는 분투였다. 천상에서 준비한 광장음악회 행사는 그들의 생존본능을 한층 고조시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생명들이 뿜어내는 고뇌에 관하여 천상에서는 오랫동안 숙고했다. 광장의 음악회는 그렇게 준비되었다. 유리도서관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지어졌다. 밤이 되면 광장 한편에 지상으로부터 1미터 이상 위쪽으로 유리도서관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도서관은 몽환적인 모습이어서 사람들은 꿈인 듯 생각하며 무심코 지나쳤다. 유리도서관에는 천상에서 급파된 집사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고뇌의 온도’를 가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천상의 집사는 음악회에 초청할 사람들 명단을 작성하거나 앞으로 임무를 부여받게될 전사들의 방을 정비하고 있었다. 천상의 정원위원회는 인사위원회에 지상으로 파견할 전사를 양성할 것을 청원했다. 인사위원회는 이 사안을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논의했다. 그결과 ‘정원의 생기’를 되살리는 방법을 조사한 종합보고서를 제왕께 제출했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상의 화원은 왕국의 에너지 원이다. 이 에너지의 출처는 지상에서 전해오는 ‘고뇌의온도”다.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는 고뇌의 온도를 증폭시킬 비상조치가 필요하다. 제왕은 전사의 파견이 불가피 하다』 지상을 떠난 영혼는 누구도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수 없었다. 특별한 훈련을 연마한 전사들만이 지상과 접속할수 있었다. 전사양성의 전권은 ‘용선’이라는 훈련가 에게 주어졌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① 세상으로 가는 문턱에서 이야기를 가득품은 13세의 순수한 영혼이 죽음으로 지상을 떠난다. ② 천상의 정원관리위원회는 “고뇌의 온도”에 관한 기준을 법으로 정한다. 지상에서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의 흐트러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③ 천상의 규칙에 의하면 선발된 전사들만이 지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을 깨부순다. 사람들은 예고 없이 갑자기 도달한 메시지 앞에 세속적인 고뇌로 흔들린다. 세상은 편리해 졌지만 사람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탐욕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숭고한 고뇌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사들의 역할은 천상제국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 되었다. ④ 부조리와 탐욕 앞에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소중한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다. 고뇌를 감당하지 못한 아이는 세상과 작별한다. 그러나 고뇌의 온도를 증폭시키지 못한 죽음은 고통의 시작이었다. 어둠의 제국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고통과 방황을 멈추지 못한다. ⑤ 마음속에 존귀한 꿈을 키우던 아이들은 중요한 작업을 시작한다. ⑥ 천상에서는 마침내 세상을 구원할 전사들의 경연이 시작된다. ⑦ 경연의 마지막 단계로 전사들의 음악회가 펼쳐지고 음악회에 초대된 가족들은 가슴속에 묻어둔 전사들을 애도하며 고뇌의 온도를 극도로 증폭시킨다. 한껏 즐기며 세상을 구원할 전사들이 귀환한다. ⑧ 음악회가 끝나고 초청받은 사람들은 광장옆 유리도서관에서 고뇌의 온도를 깨닫게 된다. 서로 침묵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깊은 애도와 겸허함 그리고 자신감을 회복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2. 수국의 정원
≪나비일지 2≫
- 고뇌의 온도 –
자기기만을 멈추고 자신을 배려하자
자기기만을 멈출 때 온도는 상승합니다. 어디쯤 바닥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면 바닥은 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번 가보겠다고 결심했다면 당신이 체득한 교만은 비로소 ‘어둠의 제국’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고뇌의 온도가 추락한다면 교만은 커지고 불안은 증폭됩니다. 불행하게도 지상에서 고뇌의 온도는 추락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기를 알아채고 비워낼 용기가 있는 자만이 고뇌의 온도를 증폭시킵니다. 특별히 자신의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들과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들은 천상의 화원에 생기를 전달합니다. 자기를 알아차리는 경계는 용기로 측정합니다.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한 자들은, 천상의 화원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둠의 제국에 배속됩니다.
천상의 화원은 정원관리위원회에서 관장했다. 천상의 왕국은 “고뇌의 온도”에 관한 기준을 법으로 정하였다. 지상에서 흐트러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정원관리위원회임무 제1조 (고뇌의 온도 기준) 고뇌의 온도(이하 에너지관리기준)는 아래 다섯 가지의 기준에의하여 측정하며 온도는 유리도서관에 있는 가죽장정의 책을 통하여 화원에 전달된다.
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찬사보다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② 삶의 기준을 보통사람들 보다 훨씬 높은 곳(자기가 정한 가치기준)에 두고 행동하는 자기를 보는 것 ③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지킬 용기를 내는 것 ④ 자기를 비워내는 것 ⑤ 질서에 완전한 믿음을 갖는 것
태초에 정원의 수국은 별처럼 빛났다. 그 빛은 천상에 기쁨과 평온을 전파하였다. 빛의 제국에는 숲과 생명수 그리고 은은한 바람으로 가득했다. 빛의 제국은 깊은 강을 경계로 어둠의 제국과 공존했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영혼들은 어둠의 제국에서 매일 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고뇌의 온도는 지상에 있는 유리도서관의 가죽 장정된 책속에 정리되어 정원으로 전달되었다. 수치심과 두려움, 분노를 뛰어넘을 용기가 책으로 기록되면 에너지는 증폭되었다. 책속에 자신의 생명을 버려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을지라도 ‘실천과 견딤’의 시간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의 온도는 상승하지 않았다. 고뇌의 온도는 위원회의 규칙에 따라 천상의 깃털로 보상되었다.
3. 천상 제국
≪나비 일지 3 ≫
-어둠의 제국-
지상에서 어리석은 시절과 단절하지 못하면 어둠의 제국에 배속됩니다. 어둠의 제국은 지상에서도 확인해 볼수 있습니다. 화려한 불빛과 육신이 감당할 수 없는 쾌락으로 눈이 멀었던 일, 도박장 앞 다리에서 새벽마다 대롱거리던 시체들, 자녀를 자신의 탐욕수단으로 키워낸 부모, 인간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권력욕,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기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그대로 땅속에 묻어둔 채 일생을 보낸 인간은 어둠의 제국에서 고통 받게 됩니다.
사자(死者)들은 누구나 먼저 어둠의 숲으로 떨어진다. 빛의 제국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깃털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깃털은 고뇌의 온도에 따라 지급된다. 시련 앞에서 수치심과 두려움, 분노를 이겨내지 못한 영혼은 어둠의 제국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 그곳은 매일 매일 불화산과 유황비가 내린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속에서 후회와 불안을 안고 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끝이 없는 살육의 전쟁. 지상에서 생명의 존귀함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깃털을 지급받지 못한다. 깃털은 성품과 같다. 천상에서 깃털은 겸손과 자신감의 기준이 된다. 높은 평정심과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즉 고뇌의 온도가 충만한 사람들은 최고의 깃털을 받을수 있었다. 고뇌의 온도를 높여 천상의 에너지를 증폭시킨 사람들은 평온함을 유지한다. 지상에서 고뇌를 견뎌내며 살아간 사람들은 천상의 백성이 되어 평정심과 깨달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천상의 백성들은 쉬지 않고 숲을 산책하며 명상을 생활화하여 생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천상의 백성들은 그들의 성품을 연찬하기 위하여 매주 정원옆 도서관에서 열리는 기도회에 참여했다. 기도회는 연중 읽기와 낭독, 쓰기, 토론, 기도 등으로 진행된다. 뜻이 있다면 누구나 도서관 앞의 넓은 광장에서 마음껏 뛰어놀수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은 항상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정원위원회가 소집되었다. 화원은 최근 부쩍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화단 동편의 수국은 뿌리째 말라가고 있었다. 자연과 동식물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인간의 불손함으로 고뇌의 온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도피처로 죽음을 선택한 인간들은 즉시 어둠의 제국에 배속되어 한철을 보내고 나서야 정원관리위원회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어둠의 제국에서 한철을 보내고 난 자들은 더 이상 빛을 볼 수가 없었다. 어둠의 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깃털, 스승의 도움, 빛의 제왕의 은총’이 세가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깃털은 지상에서 살아낸 ‘고뇌의 온도’로 보급되기 때문에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지급되지 않았다. 스승의 도움과 빛의 제왕의 은총은 ‘고뇌의 온도’를 기준으로 부여 되었다. 그러므로 게으은 자들은 결코 어둠의 제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어리석은 시절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사실을 기록하는 자는 없었다. 인생의 바닥을 용기 있게 차고 일어서 시련을 견뎌낸 사람들만이 어리석은 시절을 단절하고 일어섰다. 이들이 높은 고뇌의 온도의 댓가로 지급받는 깃털은 구름처럼 부드럽고 별처럼 윤이났다. 빛나는 깃털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어둠의 숲을 단숨에 벗어 날 수 있었다.
어둠의 제국은 빛의 왕국과 깊은 강하나를 두고 인접해 있다. 세상의 짐이 된다는 생각에 출구를 찾을 요량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 죽음은 고통의 시작이다. ‘고뇌의 온도’가 높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인구(人口)에 번잡하게 회자(會子)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인내는 사람들의 심장 한가운데에 조용히 자리하여 ‘기쁨과 사랑’을 선사한다. 자신에 대한 수치심, 죄책감, 증오,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 자부심 등을 가진 자들은 ‘고뇌의 온도’를 상승시키지 못한다. 기도가 체화된 사람들 만이 높은 온도를 발산할 수 있다. 천상과 지상에서 공통적인 미덕이 있다. 그것은 기도다. 어둠의 제국이 두렵지 않다면 기억해야 한다. 시련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을.
4. 고뇌의 온도
≪나비 일지 4≫
-진이 13살 -
문맹이던 우리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 나는 그 증거로 어머니의 말을 기억한다. “이야기 주머니를 간직한 사람은 죽지 않는다.”며 도깨비 이야기를 끊없이 지어내셨던 어머니. 어머니의 사갑(死甲)때였다. 바람보다 가벼운 당신의 뼈를 추슬러 모을 때 보관할까 망설이게 했던 틀니, 동치미를 마음껏 씹고 싶던 그 틀니를 쥐고 있어도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다. 도깨비 방망이, 뿔, 그리고 외로울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 아프지마라 뚝딱 .
인간의 교만은 천상제국을 넘보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지상 여기저기에서 탁한 빛이 감지되었다. 탁한 빛은 인간의 수치심과 증오로부터 발현되었다. 세상 곳곳에서 고뇌의 온도는 급격히 하락했다.
어느 날 천상의 수국이 우수수 꽃잎을 떨구었다. 소담스런 수국의 꽃잎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천상의 왕국이 술렁거렸다. 마침내 지상으로 전사들을 파견할 때가 되었다. 순백의 죽음을 맞이하라! 정원위원회는 바람의 광장에 자리 잡은 유리도서관, 천사의 정원 등에서 활동하게 될 전사들을 양성해 줄 것을 ‘인력위원회’에 건의했다. 제왕은 인력위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지상에 파견할 전사를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경연에서 선발된 전사들만이 지상으로 통할 수 있었다. 바람의 광장에 위치한 유리도서관에 고뇌의 온도를 가늠하는 장서가 준비되었다. ‘바람의 광장’근처에 그 아이 ‘진이’가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 아이의 집은 광장에서 걸어서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지상에서는 진이가 사라졌다고 아우성이었다. 화장을 위해 관을 열었을 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천상제국에서 집사 용선이 아이의 안내를 맡았다. 용선은 눈이 투명하고 표정은 파랗게 빛났다. 어둠의 제국에 별 하나가 떨어졌다. 아이는 눈을 떴다.
“누 누구세요?”
“나는 빛의 왕국 집사 용선이라 한다. 너를 구하기 위해 어둠의 제국에 도착하였다. 매우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군. 네가 이 왕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왕께서 특별히 나를 보내셨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이곳을 마음으로 보고 느껴야 한다. 율법은 그렇게 체득된다.” 진이는 지난기억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죠?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너의 고뇌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는 전사의 경연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어둠의 숲을 무사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깃털이 필요했다. 깃털만이 어둠의 전쟁과 유황불을 뚫고 빛의 제국으로 갈수 있었다. 죽음을 맞이한 그 누구나 처음에는 어둠의 숲에 떨어진다. 정원의 생기에 기여한 사람들만이 깃털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태초부터 수국의 생기는 고뇌의 온도로 유지되었다. 생명을 존귀하게 유지하기 위한 분투가 온도를 상승시켰다.
진이가 목을 맨 그네 앞에 이런 메모가 있었다.
“누구든 이 노트를 보게 된다면 전해주세요. 이건 진심이예요. 엄마, 죄송하지만 제가 허락할게요. 엄마는 이제부터 자유예요. 엄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예요. 한번도 엄마를 구속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짐이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걸었던 기대, 희망, 그리고 꿈은 모두 엄마의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엄마가 뺨을 맞았을 때 엄마가 한 여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가 아닌 ‘여자’ 엄마에게 줄 수 있는게 이것밖에 없어요. 누구든 이 편지를 보신분이 있다면 저를 기억해 주세요. 저는 다시 돌아올꺼예요. 약속해요. 또래상담반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싶었는데 뽑아주지 않으셨어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고. 나는 ‘아무나’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반에만 또래상담자가 없었어요. 어른들은 모두 바빠요. 우리 엄마를 포함해서 모두들 너무 바빠요. 이제는 이곳을 떠날 시간 이예요. 기억해 주세요. 나는 다시 돌아올꺼예요. 할...... 말이 있거든요. 엄마에게든 아빠에게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 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어요.”〈도원 결의〉라는 제목하에 이런 글도 씌여 있었다. 『복사꽃이 눈처럼 날리는 날, 현수는 칼을 탁자에 놓고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사람들은 현수를 바보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수는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나와 만날 때만큼은 아니다. 현수의 훤칠한 키와 호수 같은 눈 속에는 관우와 장비의 의리가 숨어있었다. 현수의 어머니는 머리를 잘라 오늘 만남을 위해 피자와 콜라 그리고 치즈게잌, 내가 좋아하는 마시멜로와 떡볶이를 준비했다. 엄마는 상을 차려놓고 ‘너와 현수를 믿는다. 너희들이 이 가난한 집안을 세우고 큰일을 하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여행을 떠났다………….』『오리너구리의 여행, 무창포 바닷길, 어른들이 모르는 10대들의 속내, 짐작과 다른 인생, 파티와 팡파레가 없는 종착역, 잠깐 저세상에 다녀올께요. 내가 세상에 전할수 있는 세가지, 내가 볼수 있는 세상, 그리운 아버지, 마법은 없다, 팽이의 온도, 용기를 내도 할 수 없는 것들, ... ... ...』책상 위에는 쓰다만 일기장이 “눈부신 5월이다.”에서 멈춰져 있었다. 책꽂이에는 작품목록이라 써있는 종이가 다트판에 붙어 펄럭펄럭 흔들리고 있었다. 진이의 서랍 속에는 켜켜이 수호지, 바람과 구름과 별과 시,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 자살백과 등 원고뭉치가 뒤엉켜있었다. ‘연둣빛 이파리와 분홍 꽃들이 넘실대는 오월이었다. ‘이젠 오월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진이는 촉촉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눈부신 하늘이 싫어’ 철물점에서 노끈을 사고 13층의 계단을 오르는 내내 반복한 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를 한숨짓게 하지 않을 테야. 세상에 짐이 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어. 진이는 엄마가 지친 허리를 펴던 조립식철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끈을 꼼꼼하게 묶고 며칠 연습해둔 올가미를 만드는 동안 진이는 두려움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설렘과 안도감이 느껴졌다…………. 노끈이 만들어낸 올가미 너머로 눈부신 하늘이 보였다. 고장 난 형광등처럼 세상이 깜박거린다. 귓전에 포피가 짓는 소리가 형광등 불빛처럼 불규칙하게 들린다. ‘애가 뭘 안다고 징징거려! 오죽하면 애비가 버리고 갔을라고.’ 엄마의 뺨에서 철썩 소리가 들렸다. 그때 문득 세상의 짐이 된다는 확신을 했다. 그 시간에 일찍 잠이 들었으면 못 다한 이야기를 좀 더 쓸수 있었을텐데. 이야기가 어디쯤에서 멈추었더라,에 생각이 미쳤다. 승전보가 울려퍼지면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쓸 때가 가장 신이 났었지. 조금만 견딜 수 있다면 이제 막 시작인 이야기를 좀 더 써보리라 생각했다. 말을 타고 대륙을 달리며 의리, 우정, 그리고 사랑과 축제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진이는 목을 감싼 노끈 너머로 이야기의 말미를 기억해 내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열세 살 진이가 죽었다. 수련회를 떠나기 전날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담임과 동료교사들은 그의 영정 앞에서 꾸역꾸역 개피떡을 먹고 있었다. “시발 떡이 넘어가? 어른이 이렇게 많은데 애하나를 못살려... ...” 한마디를 던지고 나서 나는 진이의 목을 조인 노끈을 끊어내던 사내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문이 열려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찬바람이 불어 닥치더라고. 바람소리에 섞어 개가 짖는 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았는데 창문이 온통 열려있었지. 커튼이 정신없이 펄럭이고 있는 사이에서 개가 목이 터져라 짖고 있었어”. 사내는 말했다. 책상위에 편지 1통이 놓여 있었고 서랍에서는 수많은 원고뭉치가 발견되었다. 그날 진이는 장애우 현수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현수는 진이가 떡볶이를 사준다는 말에 밤이 늦도록 진이의 말에 귀기울여 주었다. ‘노끈으로 그네에서 해치울 거야’ ‘내일은 너를 볼 수 없겠지.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하지 마 그냥 너만 알고 있어. 이곳은 너무 힘들어. 어쩌면 엄마가 너를 불러 물어볼지 몰라. 그러면 그냥 모른다고 해’ 철물점에 들러 노끈을 사고 13층 아파트를 한발 한발 올라가는 단발머리의 뒤통수를 생각할 때마다 우물우물 개피떡을 먹던 목젖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신물이 목젖을 타고 넘어온다. 진이는 수련회에 함께할 팀이 없었다. 반 아이들 누구도 진이와 한 팀이 되기를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임은 애가 말이 없고 조신하여 ‘그런 애’인줄 몰랐다는 한마디로 답변을 대신했다. ‘둘이 꽤 다정해 보이던 걸’ 밤늦게 현수와 현관을 벗어나는 모습을 지켜본 당직자가 한 말이다. 태어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가출을 한 후 엄마는 뼈다귀감자탕, 김밥집, 단란주점 이렇게 세 곳에서 일하며 버텨냈다. 전날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엄마 나 시험 못 봤어’했을 때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너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알지. 너 어쩌려고 그래. 너까지 도대체 왜이래.’ 그날, 진이는 엄마에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할 참이었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잔치 장면을 미리 뽑아 형광펜으로 표시해 두었다. 엄마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때 문 밖에서 엄마가 뺨을 맞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의 꺼질 듯한 한숨소리와 함께 애완견 포피에게 사료를 쏟아주는 소리…….를 가뭇가뭇 들으며 잠이 들었다.’
5월은 기념할 만한 일도 많은 달이다. 우선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기념일이 많다. 야외 수련회 전날 게임 진행을 위해 자율적으로 팀이 구성되었다. 진이는 소속팀을 알 수 없었다. 누구도 진에에게 팀을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일 너 어느 팀이야? 너 내일 뭐 싸올 거야? 우리 내일 수련회가지 말고 공원에 가서놀자’ 단, 한사람도 물어오지 않았다. 진이는 주변에 적지 않은 메시지를 던졌다. 현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마지막 확인 작업이었다. ‘선생님 드릴말씀이 있어요.’ 하는 말을 열 번도 넘게 했다는 사실이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오늘도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투명인간이다.’ 물론 사이버 상담실에도 몇 번이나 올렸다. ‘친구의 호감을 얻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라는 질문은 ‘나대지 않으면 됩니다.’라는 답변으로 돌아왔다. 입학한지 두 달이 되었지만 같은반 누구도 진이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식당에 가거나 말을 꺼내면 아이들은 우웩,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너무 느리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다. 진이는 짐, 세상에 짐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애비 얼굴도 모른다며 그냥 애비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살면 되지 않겠어?’ ‘애가 학교에 적응하면 사실대로 말하고 살아요. 이해해 줄거예요.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아니까’. 철썩 뺨을 때리는 소리가 한번 더 들렸고 “누구나 다 아퍼 나는 살고 싶어 사는 줄 알어?”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몇 번의 흐느낌이 이어졌다. 진이는 창틈으로 그장면을 모두 볼수 있었다. ‘없는셈 치면 된다’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5월의 하늘이 흔들린다. 현수의 입술에 묻어있던 떡볶이 국물이 주르륵 떨어져 하얀 셔츠를 물들이는 모습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진이의 장례식은 끝내 치러지지 않았다. 시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진이의 몸은 그네 한편에 눕혀있었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진이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뱀 껍질문양의 손칼과 노트 그리고 편지 한 통이 놓여있었다. 진이가 없는 수련회는 변함없이 시끌벅적했다. 세상은 평온했고 사람들은 하루를 넘기지 않고 진이를 잊었다. 진이는 일기의 후미에 이렇게 적었다. “현수에게 떡볶이를 사주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어주던 유일한 친구였다. 앞으로 나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말도 했다. 오늘 나는 떠날거라고. 현수는 사슴같은 눈망울로 내 말을 들어주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13년동안 내 말을 들어준 사람은 현수 한사람 뿐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못다한 말을 현수에게 털어 놓았다. 현수는 양념을 잔뜩 묻히며 맛있게 떡볶이를 먹어주었다. 오뎅국물을 마실 때 유난히 멋이 있었다. 나는 현수를 마지막으로 꼭 안아 보았다. 현수는 무심한 표정으로 지니지니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진이가 떠나간 날, 진이 어머니가 절규하며 진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묻는 질문에 현수는 눈을 꿈벅거리며 ‘지니안와’ 하고는 ‘지니지니’중얼거리며 바람의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현수의 손에는 진이가 남긴 뱀껍질 문양의 손칼이 들려있었다.
떠난 사람을 깊이 애도할 것. 떠날때는 애도거리를 남기지 말 것. 어떤 흔적도 흉측하니 세상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질 것. 부조리에 담대하게 맞설 것. 작가 눈을 부릅뜨고 부조리한 세상에 외쳐라.
5. 중요한 작업
≪나비일지 5≫
-전사의 비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업을 찾아라. 심장의 박동에 맞추어 리듬을 타라. 리듬과 선율을 타지 못하면 생명은 멈춘다. 심장의 호흡을 놓치지 말 것. 자기를 기만하지 말 것. 쉬지 말고 “나”를 견지할 것.
전사의 선발과정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우선 1차 ‘나(자아)’찾기 2차 ‘기도, 명상, 호흡 다스리기’ 3차는 ‘음악회’의 단계였다. 지상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애도를 마치고 모든 것을 비워낸 자만이 최후의 전사로 태어날 수 있었다. 전사들에게는 각자 성품에 맞는 깃털이 지급되며 최고의 전사는 빨간색 깃털을 부여 받는다. 깃털의 용도는 이동, 방어와 공격 수단이었다. 자신에 맞는 깃털을 만났을 때 비로소 전사는 자신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1차 선발은 수많은 신청자 중에서 깃털의 지명을 받는 사람이 선발된다. 전사로 태어나기위해 거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지원자들은 각자의 이름과 비전을 기록하여 커다란 조가비 안에 넣어두고 기다린다. 정원으로부터 색색의 깃털이 날아와 전사들 앞을 선회한다. 자신이 기록한 비전과 일치하는 전사들은 깃털이 펜이 되어 전사의 머리위에 “이름”을 수놓는다. 이렇게 이름을 부여받은 전사들은 깃털을 타고 날아올라 깃털의 호흡에 맞추어 수국의 정원을 한 바퀴 돌아 나와야 했다. 선회도중에 평정심을 잃어버리면 정원 근처의 숲으로 나뒹굴곤 했다. 한번 깃털에서 떨어진 전사들은 성난 깃털을 길들이기가 매우 힘겨워진다. 자기를 기만하는 참가자들은 깃털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다. 몇 번을 다시 시도해 보아도 깃털과 접속하지 못한 전사들은 숲으로 돌아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통곡의 계곡에 이끼낀 바위, 깃털의 선택을 받지못한 전사들이 머물러야 할 곳이었다. 수국의 향기와 빛으로 정원 에너지의 힘을 체득한 전사들이 선발되었다. 용선은 1차 예선을 통과한 전사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름은 전사들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표시하였다. 깃털이 정원을 선회하여 조가비앞에 안착하면 전사들의 이름이 그려졌다. 전사들은 조가비 안에 서있고 조가비 위로 전사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이 공중에 새겨졌다.
생명의 에너지 하늘정원, 잃어버린 건반 피아노의 숲, 속 깊은 통로 흐르는 강물처럼, 꺼지지 않는 열정 움직이는 불빛, 천상의 날갯짓 오리의 꿈, 창조하는 유발자 여왕개미의 서식처, 한껏 즐거운 말괄량이의 파티, 5월의 축제 춤추는 진달래, 축제의 탑 내 이름은 로큰롤, 산등성이 아우라 산사의 포효, 우정의 물결 친구야 기다려라, 속깊은 서슬 에머랄드빛 바다, ... ... 선발된 전사들 앞으로 책갈피 하나씩 전달되었다. 책갈피에는 경연을 시작하게 될 전사들의 비전이 적혀 있었다. 생명의 에너지 하늘정원의 경우 이렇게 적혀있었다. “아버지와 상처게임, 관계의 에네르기, 정원의 연못속에는 5월의 하늘과 구름다리. 올챙이, 물방개, 소금쟁이, 연못을 둘러싼 수국이 청보라색을 뽐내며 탐스럽게 피어있고 그 사이사이로, 청포, 봉숭아, 나리꽃, 사루비아. 몸을 부대끼며 수천의 동료들이 자라고 있었다.” 잃어버린 건반 피아노의 숲에는 “소리와 빛, 영혼의 선물, 악보 없는 선율, 바람소리 빛의 냄새 그리고 숲의 속삭임. 나비와 다람쥐 낮잠에 빠진 뱀. ……. ” 전사들은 책갈피를 손에 쥐고 다음경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연을 관장하는 용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비전을 찾는 일은 전사의 첫걸음이다. 이제 두 번의 경연이 남아있다. 한 치의 의심이 있어서는 않된다. 지상에 돌아가는 일은 최고의 전사들 만이 가능한 일이다. 지금 천상의 정원은 생기를 필요로 한다. 남아있는 두 번의 경연은 깃털의 역할이 한껏 증폭된다. 이제 두려움과 마주해야 할 경연이 남아있다.
6. 경연장에서
≪나비일지 6≫
-전사의 경연장-
“기도, 명상, 호흡”을 다스려라. 천상에서 열리는 경연의 두 번째 과제다. 천상에서는 붉은 깃털의 선택을 받을 한사람의 전사가 필요했다. 붉은 깃털은 “평정심”을 유지한 단 한사람의 전사에게 주어졌다.
첫 번째 과정을 통과한 전사들 몇몇은 감상에 젖기도 하였다. 지상에서 열리는 마지막 경연에 참여할 전사들은 완전에 가까운 평정심이 있어야 가능했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가는 길은 그 반대의 길보다 훨씬 험난했다. 잊고 싶었던 모든 두려움에 맞서야 했다.
‘경연을 시작하라!!’ 용선이 경연의 시작을 알리며 오른손에 있는 지팡이를 하늘높이 던졌다. 지팡이는 팔색조가되어 색색의 깃털을 공중에 날려보냈다.
기도의 시험단계다. 수국의 정원에서 참가자들은 얼굴에 가득 꿀을 바르고 시작한다. 전사들은 두 손에 단지를 내밀고 기도를 시작한다. 벌떼가 달려들어 독침을 쏘아댈 때도 기도의 제목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단지에 가장 많은 꿀을 모은 전사가 남는다. 기도를 통하여 전사들은 꽃을 본다. 꽃가루의 미동과 향기를 맡고 달려드는 수많은 벌들이 앞발에 꽃가루를 묻혀가며 모은 꿀 술이 전사들의 인내를 평가한다. 꿀단지에 가장 많은 꿀을 모은 전사가 선두다. 몇몇 수련자들은 기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거나 가슴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아린 통증을 참지 못하고 단지를 던지고 정원으로 내달린다. 꽃을 헤집거나 꺾어버리기도 한다. 그들은 미친 듯 날뛰다 정원 한켠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벌의 독침을 맞고도 기도제목을 잊지않고 자리를 지킨 전사들 앞으로 벌들이 꿀을 모아주었다. 평정심을 유지한 전사들만이 꿀을 모았다. 문득 진이는 지상의 생각이 스쳐갔다. 학교의 아지트에서 벌집을 깔고 앉았던 일, 처음 벌에 쏘였던 일이 욱씬 되살아 난다. 이마, 콧등, 그리고 겨드랑이와 쇄골, 목덜미와 입술을 찌르고 가슴한 가운데로 지나가던 통증, 그러나 그 통증보다 ‘세상의 짐’이 된다는 생각이 더 두려웠었다.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기도 ‘세상의 붓이 되게 해주세요’ 그 기도를 다시한번 박힌 못처럼 되뇌였다. ‘하나님, 세상의 붓이되게 해주세요’ 순간 정원의 수국이 움찔 흔들리며 빛을 발했다.
다음은 명상의 단계다. 명상은 영혼이 절규를 멈추고 숲을 가로지를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두려움과 증오, 집착을 털어낼 때까지 명상은 이어진다. 자신의 참모습과 일치될수록 영혼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영혼은 어둠의 숲 덤불의 유혹을 견뎌낼 수 없다.
몇몇 전사는 명상이 진행되는 동안 육신을 가누지 못하고 숲 이곳저곳을 미친 듯 헤메기도했다. 육신의 감옥에 갖힌 영혼은 두려움과 증오 분노와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육신, 피투성이가 된 육신이 바위산을 기어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통곡의 계곡으로 나뒹굴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숲을 헤메던 육신은 죽음의 강에 몸을 던졌다. 죽음의 강에는 어둠의 숲에서 보낸 수많은 혼령들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다. 죽음의 강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영혼을 다스리지 못하고 전사의 경연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면 각오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에 빠진 사람들은 피를 토하는 괴성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숲을 가로질러 살아 돌아오는 전사들은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광채가 서렸다. 영혼의 빛이 누더기가 된 육신을 안내하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를 확인한 깃털들은 자신의 주인에 맞는 색으로 바뀌며 주인을 맞이했다. 공작새의 꼬리 같은 환영인사와 안락한 안장으로 명상의 과정을 통과한 주인을 환영했다. 깃털은 상처난 육신을 깨끗지 치유했다. 전사들은 명상의 마지막 단계인 하늘 사다리를 왕복해야 했다. 하늘 사다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머무는 애도의 박물관으로 이어져 있었다. 목숨을 스스로 던진자들의 도피처, 전사들은 이곳에서 애도의 박물관을 견학하게 된다. 박물관 안에는 지상에서 애도하지 못한 영혼들이 소리를 지르며 영상으로 떠돌고 있었다. 박물관 한켠에는 죽은 자들의 왼손문양이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손바닥에 손을 댈 때마다 그들은 실루엣으로 나타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이 요청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전사들은 그들 중 단 한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은 짧게 주어졌다. 사연을 듣고 화자와 접속에 성공한 전사는 등에 상대의 손바닥 문양을 받을수 있었다. 전사와 접속한 자는 박물관을 빠져나와 숲의 돌이 될 수 있었다. 이끼낀 계곡의 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갈수 있는 가장 평온한 외출이었다. 빛과 공기, 바람과 비는 그들에게 가장 큰 호사였다. 명상의 단계를 마친 전사들은 마지막으로 깃털과의 호흡을 검증해야 했다. 자신의 성품을 다스려 일체된 자기를 발견한 전사만이 깃털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기도와 명상을 마친 전사들은 이제 열 명 남짓 이었다. 호흡은 천상에서의 마지막 경연이었다. 전사들은 호흡을 통해 깃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이는 깃털에 몸을 싣는 훈련이었다. 경연이 시작되기전 깃털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안내문이 전달되었다.
“깃털은 그대들이 여행하는데 필수품이다. 깃털이 없이는 천상의 왕국은 물론 지상으로 왕래할 수도 없다. 깃털은 마음의 징표이며 비움의 무게이다. 깃에 자신을 올려놓을 수 없는 자는 전사가 될 수 없다. 한 가닥의 오만과 적개심, 분노가 있는자, 살의가 있는 자는 깃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깃털을 얻는 방법은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모든 것을 비우고 자신의 성품을 알아채고 깃과 하나가 될 때만이 그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깃털의 가벼움으로 수평을 유지하는 자만이 천년왕국을 순례할 수 있다. 지상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 과정을 통과한 전사만이 지상의 음악회에 참여할 수 있다. 붉은 깃털을 얻은 전사가 리더가 된다. 그 한사람의 전사가 지상음악회에 참석할 전사를 선택할수 있다. 단 한사람의 전사만이 붉은 깃털의 선택을 받는다. 붉은 깃털은 최고의 전사에 걸맞게 ‘이동, 방어, 공격’ 모든 면에서 영험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오직 최고의 전사 단 한사람 에게만 주어진다.”
지상으로 가는데는 단 한 사람의 전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는 여럿을 위한 하나이어야 했다. 지상을 여행할 수 있는 단 한명의 전사를 선발하는 마지막 경연이다. 한명의 전사도 깃털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한해의 경연은 끝이 난다. 천년왕국에서 처음 실시되는 전사 경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제왕을 포함하여 천상의 모든 백성들이 광장에 모여 마지막 경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국의 알림 터에서는 시들어가는 정원을 온종일 방영하고 있었다. 이 실황은 빛의 제국은 물론 어둠의 제국까지 실시간으로 방영되었다. 용선이 신호를 보내며 외쳤다.
“자! 천상의 깃이여 전사와 접속하라 !!!”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전사 몇은 깃털에 한 손을 잡고 허공중으로 날아오르다 수직으로 빠르게 하강하여 땅에 허리를 접으며 나뒹굴었다. 키가 크고 뚱뚱한 전사 한명은 깃털이 움직이기 전에 두 손으로 덥쳐 스노보드처럼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사방에서 새떼처럼 날아든 깃털들이 분주하게 전사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깃털은 펜처럼 글씨를 써대며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진이는 깃털을 한참 응시했다. 지상에서 그러했듯 견디고 바라보는 것은 진이가 잘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애완견 포피와 밥을 먹을 때도,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엄마가 돌아오던 골목길의 호박꽃......탐스럽던 호박꽃에 눈을 빼앗겨 꿈속에서 조차 아른 아른하던 호박꽃을 볼 때도, 한 살때 집을 나갔다던 아버지를 기억해 보려고 애쓰며 그림을 그릴 때, 눈 코 입이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궁리하며 들여다보던 도화지 앞에서도 진이는 견딜수 있었다. 바람이 불고 초록이 그 색깔을 감당하지 못하여 연두빛으로 덧칠하던 5월, 그 눈부시게 시리던 초록과 함께 빛나던 햇살, 그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때도 진이는 그렇게 견디는 연습을 했었다. 진이 앞으로 날아온 깃털이 가는 솜털을 날리며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옆으로 넓게 펴지며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내렸다하였다. 좌우로 흔들던 털을 쭈뼛 세우다가 허공중에 한꺼번에 수십개의 깃털이 화살처럼 날아오르기도 했다. 진이는 허리를 굽혀 땅에 손글씨를 썼다. “너를 믿어, 나는 세상의 붓이 될꺼야” 고개를 들자 허공중에 깃털이 “내가 너를 알아”라고 썼다. 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웃던 진이는 “너를 믿어”하며 양팔을 하늘을 향해 치켜올렸다. 순간 깃털이 진이의 심장을 향하여 돌진하여 심장을 헤집고 들어왔다. 진이는 사자의 포효와 같은 비명을 질렀다. 심장에서 검붉은 핏물이 튄다. 진이의 등 뒤로 빠져나간 핏물은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핏물을 머금은 깃털은 포르륵 날아오르며 핏물을 털어냈다. 깃은 허공을 향하여 다시한번 ‘내가 너를 알아’하며 진저리를 치고 진이앞에 섰다. 깃털은 이제 허공중을 타원형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깃털은 한결 커지고 우아했으며 가는 솜털은 부풀어 올랐다 폈다 하며 그 기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문득 깃털은 조명처럼 붉은 빛을 발사하며 진이 앞으로 살폿이 내려 앉았다.
“붉은 깃이다!”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진이는 붉은 깃털위에 펄쩍 뛰어 올랐다. 깃털은 조가비 위로 높이 날아오르며 붉은 자국을 수놓았다.
“전사들이여 한껏 즐기며 세상을 구원하라 !!!” 용선이 외쳤다.
진이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쳤다. “전사들이여 한껏 즐기며 세상을 구원하자 !!!”
진이는 지상으로 함께갈 전사들을 지목했다. 지목된 전사들의 심장으로 연이어 깃털이 통과했다. 깃털이 전사들의 심장을 통과할 때마다 뿌연 물안개 같은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천상제국에서 마지막 경연이 끝났다. 지상의 음악회를 위해 지상으로 올 때 제왕은 예비전사들을 모아놓고 교지를 낭독했다. “천상제국 정원의 생기는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 수국의 빛을 기억하라. 한껏 즐기며 세상을 구원하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 노래하며 춤추는 나비가 되라!” 교지가 낭독되자 각자의 조가비에 서있던 전사들 앞으로 깃털이 하나씩 날아와 섰다. 전사들은 색색의 깃털에 올라타 각자의 임무가 적힌 교지를 받아들었다. 교지에는 전사의 이름과 임무가 기록되어 있었다. 진이의 이름은 “여왕개미의 서식처”였다. 용선은 최종 선발된 전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하늘정원, 피아노의 숲, 흐르는 강물처럼, 움직이는 불빛, 오리의 꿈, 여왕개미의 서식처, 말괄량이의 파티, 춤추는 진달래, 내 이름은 로큰롤, 산사의 포효, 친구야 기다려라, 에머랄드빛 바다.』
7. 광장음악회
≪나비일지 7≫
-초대장-
“당신을 음악회에 초대합니다. 당신의 가슴에 묻어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두 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비밀입니다. 2021년 5월 4일, 장소 : 바람의 광장, 방법 : 광장에 도착하여 입구에서 초대장을 종이비행기로 접어 광장 앞의 골담추 나무를 향해 날리세요. -예술위원회- .”
천상의 화원에는 수국이 만발하다. 그러나 수국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용선은 형제봉 불곡산 영장산, 대지산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를 바라본다. 나는 불곡산 자락아래 둥지를 트고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봉우리는 신도시를 가슴에 품고 완만하게 연결되어있다. 이 봉우리를 따라 걷다보면 바람의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도시의 불빛과 사람들의 소음을 피해 수많은 동물과 곤충들이 숨어들었다. 산은 밤새 곤충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여름 장맛비에 영장산으로 가는 길목, 길이 끊어진 곳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산의 절개면을 따라 인공 폭포가 생겨났다. 폭포의 물줄기는 흙을 실어 아스팔트로 옮기며 끊어진 능선을 이어가고 있다. 작업은 비가 쏟아지는 틈을 타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다. 밤에는 산속에 서식하던 수많은 곤충과 양서류, 파충류들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끊어놓은 능선을 연결하는 일은 바람의 광장을 지키는 일이다. 능선을 막힘없이 연결하는 일은 빛의 제국과 어둠의 제국 모두에게 절박한 작업이었다. 능선의 연결 작업을 두고 두 제국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날목과 들목을 연결하는 산등성이에 천상의 화원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에너지들이 하나 둘씩 감지되고 있다. 고뇌의 온도가 바람의 광장을 중심으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천상의 예술위원회는 지상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음악회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천상의 명운을 가늠할 모험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말괄량이의 파티”라는 이름을 가진 수련생이 맡았다. 깃털을 가장 안정적으로 다루고 비행속도가 빠른 아이였다. 무엇보다도 축제를 준비하는 눈썰미가 뛰어나고 흥이 많은 아이였다. 예비전사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첫 번째 음악회다. 음악회는 초대받은 사람과 동반자 2명이 추가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음악회에 초대할 사람들은 예술위원회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로서 심도있는 협의를 거쳐 결정되었다. 위원들은 오랜시간동안 정원을 순회하며 지상으로부터 전해오는 ‘고뇌의 온도’에 주목했다. 고뇌의 정점에서 견디며 존귀하게 생명을 유지해 가는 사람들. 그들은 ‘상실과 예기치 못한 이별’앞에서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애도하지 못한 응어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잊지않고 수용하며 그렇게 기도하며 생명을 유지해 나갔다. 살아가는 나날들이 그들에게는 눈부신 햇살도 눈물이 돋게 하였다. ‘팡파레가 울리고 환영인파가 몰리고 마침내 가슴에 쌓아둔 말을 전해줄 수 있는 날은 앞날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들에게는 적지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음악회가 열리는 날이다. 바람의 광장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초대장을 비행기 접어 날릴 때마다 바람의 광장 입구가 열렸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입장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무대가 펼쳐진 광장과 유리도서관이 보인다. 평소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입구와 유리도서관이 광장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평소에는 누구도 진입할수 없었던 유리도서관이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리 도서관의 화려한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입장객이 들어설 때마다 유리도서관에 별빛조명이 반짝이며 수많은 책장과 내부의 풍경이 펼쳐진다. 유리도서관 뜨락의 휴게공간에 무지개가 떠있다. 처음 보는 신비한 광경 앞에 참석자들은 크게 놀란다. 리도서관은 음악회가 열리는 날에 한하여 참석자들에게 개방했다. 도서관 안에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 천상의 역사, 영혼의 순례지, 정원의 근원, 깃털의 진원지, 제왕의 말씀 등과 관련된 장서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물론 어둠의 왕국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리도서관은 마치 비밀의 숲과 같았다.
저녁노을이 지면 달빛 조명이 광장을 환하게 비춘다. 광장앞 탁 트인 숲으로 깃털을 탄 전사들이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는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광장에는 풍성한 과일과 음료등 만찬이 차려져 있고 전사들이 깃털을 타고 날아와 단상 앞에서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는 축하비행을 시작한다. 숙연한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어 주는 화려한 비행이다. 비행이 끝나면 전사들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초대받은 사람이 지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사람의 이름을 크게 호명하는 것으로 음악회는 시작된다. 순서는 초대장에 기록되어 있는 번호 순서로 진행된다. 초로의 한 남자가 쾡한 눈으로 무대를 향하여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친다.
“준서야~~ 아빠가 왔다.”장내는 작은 풀벌레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하다. 일순간 바람의 광장에 모든 불이 꺼지고 별과 달빛만 남는다. 하늘 저 편에서 갈색 깃털을 탄 아이가 날아올라 무대로 내려앉았다.
“저는 김준서입니다. 김준태 씨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요, 준서의 아빠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빠가 걱정하시던 모습을 뛰어넘어 그 이상으로 자랐습니다. 덕분에 나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노래를 시작합니다. 저의 이름은, 김준서. 이곳에서는 하늘정원으로 불립니다.” 준서의 아버지는 얼어붙은 채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 사회자가 행사의 집사인 “용선”을 소개한다. 용선은 짙은 수염을 나부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만남으로 여러분의 가슴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깊은 애도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고있는 모습은 모두 진실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일을 시작합니다. 부디 음악회를 축제로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용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광장에는 멋진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지며 축제의 축포가 터진다. 준서의 첫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음악회의 시작이었다 (중략) 바람의 광장에는 1년에 한번 전사들의 음악회가 열린다. 참석자들은 천상에서 경연을 통과한 전사들이다. 전사들은 광장음악회에서 마지막 경연을 마치고 임무를 부여 받는다. 전사들은 이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자신들의 소식을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전한다. 이 음악회는 전사들의 최종 경연이다. 이곳에서 지상의 사람들과 애도를 마치고 끝내 비워낸 수련생들은 전사로 탄생한다. 전사들은 천상의 제왕에게 임부를 부여받는다. 전사들의 음악회는 지상의 고뇌를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음악회를 통하여 탄생한 전사들은 고뇌의 온도를 증폭시켜 천상의 화원에 생기를 부여하는 임무를 시작한다. 』
내가 쓰고 있는 그 아이 “진이”이야기다. 세상에서 삶의 관성을 벗어나고 싶을 때 나는 매일 진이를 만난다.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나는 “쓰는 자”의 자세를 세우고 분투하며 견디는 사람들의 고뇌를 주목한다. 잠자리에 들면 꿈속에서 바람의 광장에 올라 동네를 내려다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는 이곳에서 노래하며 춤추는 나비가 된다. 광장에서는 전사들의 노랫소리와 율동 그리고 유리도서관의 불빛을 본다. 저물녘이 되면 나는 음악회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느낀다. 진이는 전사들과 함께 당신을 바람의 광장으로 초대하게 될 것이다.
8. 유리도서관
≪나비일지 8 ≫
-나비의 처소-
깊은 애도가 없이는 누구도 지상을 떠날 수 없다. 천상제국에서도 그들의 처소는 준비되어있지 않다. 속 깊은 만남과 통곡이후에 비로소 민낯을 볼 수 있다.
『음악회가 끝났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리도서관을 견학했다. 유리도서관에서 방문객들은 그들이 견뎌온 고뇌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속절없는 이별과 관련되었다. 애도하지 못한 이별. 견학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다. 유리도서관 3층, 신도시 쪽을 향하고 있는 사다리를 오르면 “나비의 처소”라는 간판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가죽 장정된 책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책표지에는 초청자들의 가슴속에 있던 전사들의 이름이 보인다. 책을 꺼내들기 위해 손을 대는 순간 참석자들은 각자의 책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전사들의 처소에 당도해 있었다. 하늘정원, 여왕개미의 서식처, 말괄량이의 파티, 춤추는 진달래……. 책속에서 그들은 전사들의 활동상을 지켜볼 수 있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들은 전사들의 모습을 지켜볼수 있다. 그러나 전사들은 그들을 볼수 없다. 서로에게 10분의 만남시간이 주어진다. 전사들의 임지와 활동상, 세상을 구원할 중요한 일, 시간의 변화, 미처 나누지 못한 궁금증, 무엇보다도 미처 건네지 못한 작별인사 그리고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이지만 10분은 수많은 말을 대신하였다. 방문객들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뇌의 온도를 증폭시킨 삶과 죽음의 경계선. 하늘이 쿵하고 내려앉는 순간을 당신은 어떻게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그 순간이 책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전사들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수국의 화원, 하늘전망대에서 임무를 부여받은 천상의 파수꾼들은 천상에서, 유리도서관, 바람의 광장에서 임부를 부여받은 지상의 추수꾼들은 지상에 위치해 있다. 전사들은 다음과 같은 임무를 배속받았다.
① 수국의 화원 : 음악, 물 공급, 이동식재 전지등 화원을 생기 있게 살리는 일을 하는 곳으로 하늘정원, 피아노의 숲, 흐르는 강물처럼이 배속되었다. ② 유리도서관 : 지상의 고뇌의 온도(스토리가 보관된 가죽장정된 책)수집, 아침산책, 명상, 기도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불빛, 오리의 꿈, 여왕개미의 서식처가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다 ③ 바람의 광장(음악회) : 천상제국으로 가는 통로로서 매년 음악회를 개최하며 전상제국과 지상을 연결하는 천상의 선율과 깊은 애도를 유발하는 장소로, 말괄량이의 파티, 춤추는 진달래, 내 이름은 로큰롤이 임무를 수행한다 ④ 하늘 전망대 : 어둠의 제국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정원의 수국을 노리는 어둠의 전사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임무는 어둠의 제국 군사들과 대결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임무다. 산사의 포효, 친구야 기다려라, 에머랄드빛 바다가 천상의 파수꾼으로 하늘 전망대에 배속되었다.
전사들은 경연을 통하여 최고의 전사로 태어났다. 깃털의 이름을 부여받은 전사들은 어떤 싸움도 이겨낼 수 있다. 경연이 시작되면서 수국의 생기는 최고조로 상승했다. 화단은 오랜만에 별빛 생기가 돌고 있었다. 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전사들을 칭송했다. 전사는 천상의 왕국에서 최고의 명예다. 전사가 된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제국의 평온을 유지하고 지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임무였다. 진이가 최고의 전사로 선발되는데 있어서 심사위원들은 적지 않게 고민을 하였다. 명상, 호흡, 깃털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최후에 2명의 전사가 남아있었다. 진이와 수련이었다. 수련의 깃털이 부르르 떨며 선택을 망설이다 그의 심장을 몇 번이나 통과하였지만 수련과는 접속하지 못하고 허공중으로 날아갔다. 수련앞에서 붉은 빛을 띠던 깃털은 보라색으로 변했다. 수련은 마음 한 구석에 분노를 내려놓지 못하고 끝내 수평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수련의 눈에서는 푸른빛이 역력했다. 수련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숲으로 돌아갈 때 보라색 깃털은 날카로운 모습으로 수련을 태워 날아갔다. 순간 수국의 정원에 거센 광풍과 함께 찬바람이 일었다. 정원위원회는 위험신호를 감지했다. 수련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어둠의 숲으로 날아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분노와 수치심은 천상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들이었다
진이의 깃털은 보란 듯이 호수를 선회하며 전사의 제복을 레이스로 장식하며 최고의 전사임을 입증시켜 주는 징표를 어깨에 찍어주었다. 진이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툼벙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단지 천상의 제왕만이 눈물의 의미와 수국의 온도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감지하였다. 바람의 광장에 배속된 전사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지상의 전사들은 5월 한달동안 바람의 광장에 머물며 활동했다. 진이는 “여왕개미의 서식처”라는 이름으로 유리도서관에서 전사들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광장 음악회, 새벽산책, 기도, 명상, 호흡 프로그램 진행” 전사들이 활동하는 동안 지상의 ‘고뇌의 온도’는 급격히 상승했고 수국의 정원은 생기를 띠었다. 말라비틀어진 수국의 뿌리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유리도서관의 장서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여갔다. 음악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자신에 충실하며 겸손과 자신감을 겸비해 갔다.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음악회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할 일을 실천할 뿐이었다. 주변에 그들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궁금증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은 소중하지요. 균형은 자연의 질서에 맡기고 즐겁게 살아가세요.” 그들이 얻은 평온은 음악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랏빛 깃털이 바람의 광장에서 멀지않은 능선에서 발견되었다. 5월에도 떨어지지 않는 대왕참나무의 가랑잎이 작은 생명체로 움직이고 있었다. 절망과 고뇌의 정점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높은 고뇌의 온도가 감지될 때마다 진이는 붉은 깃털을 타고 날아가 혼탁하고 가쁜 호흡들을 도서관의 장서에 넣어두었다. 가죽장서 한켠에는 6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방이었다. 이 방에서는 자신을 거울 보며 고뇌의 온도를 가늠하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명상, 새벽산책’의 업무는 움직이는 불빛이 맡았다. 오리의 꿈은 “기도와 자기 돌아보기”의 과정을 운영했다. 이들의 활동은 5월 한달 동안 진행되었다. 그것은 천상의 약속이었다. 세상의 정원이 가장 생기있는 시절에 천상의 정원도 생육이 번성했다. 도서관의 가죽장서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칼날처럼 버티는 영혼들의 이야기가 쌓여갔다. 지상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음악회에 초청받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접속했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고뇌의 온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음악회에 다녀온 사람들은 다른 정도의 온도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전사, 오리의 꿈과 움직이는 불빛은 수시로 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죽음과 조우한 사람들과 만남의 시간을 주선했다. 조용하고 깊은 만남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번잡스럽지 않으며 흐르는 물과 같이 고요했다. 전사들은 그렇게 만남의 통로가 되어갔다. 진이는 전사들의 리더로 중요한 결정을 주선했다. 붉은 깃털은 눈이 부시게 붉고 윤이 났다. 수탉의 그것보다 더 짙고 장엄했다. 천상을 왕래하는 일은 진이의 붉은 깃털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전사들은 정원위원회에서 정한 규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유리도서관에서 바라본 지상은 아름다웠다. 5월의 하늘을 선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전사들은 하루를 천년같이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도시 한가운데에 보랏빛 불빛이 하늘을 치솟아 올랐다. 여왕개미의 서식처는 보라색 불빛을 보며 말했다. ‘수련아, 네가 결국 이곳에 돌아 왔구나’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손이 곱고, 피부에 온통 검버섯이 내렸어도 사랑하는 마음은 꽃이다. 세상에 할 말을 못 다한 꽃들이 지천이다. 책을 써서 꽃들의 사랑을 전하는 나비가 되자. 글은 사랑을 전하는 힘이 있다.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도 하나 둘, 돌처럼 지푸라기처럼 무심히 구르고 흩어져 간다. 그 불씨를 가슴에 담아놓고 화톳불처럼 키우자. 전하지 않는 사랑은 세월의 먼지가 쌓여간다. 가슴에 묻어둔 사랑이 넘쳐나 눈으로 쏟아져 나와야 탁한 눈을 씻을 수 있다. 연못은 장맛비가 차고 넘쳐야 연을 키울 수 있다. 고인 물을 퍼내고 뿌리에 생수를 공급하듯 눈물이 솟아야 눈동자가 투명해 진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알몸으로 추운겨울을 나야 한다. 어떤 숭고한 사랑도 작가의 섬세한 감각과 표현 없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통로이며 연결자다.
그 어느 누구도 깊은 고뇌의 눈물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 그곳이 바로 생명으로 가는 임계점이다. 아주작은 애벌레들이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 터득한 말들이 있다. “깨달음” 그리고 “깨달음을 전하는 일” 비로소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애벌레가 뼈속깊이 새겨둔 말이다. 사람이 꽃과 비견될 수 있을까? 꽃과 비견될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쉬지 않고 자기를 연마하는 사람, 자기만큼 타인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꽃이다. 나비의 보람은 깨달은 것을 전하는 일, 바로 그것이 아닐까.
이제 나의 일지를 독자들에게 인계할 때가 온 것 같다. 모든 근무자들이 떠난 외로운 숙소에서 밤새 순찰을 하는 마음으로 일지를 쓴다. 세상을 순찰한 일지를 당신에게 전한다. 변변치 않지만 당신이 받아주기 바란다. 이제는 한껏 즐기며 세상을 구원하기를, 노래하며 춤추는 나비가 되기를, 꽃들의 사랑을 전하기를, 바라며 나는 일지를 마무리한다. 저자라는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는 길에 기꺼이 들어서길 원하는 독자라면 모두가 이 일지를 기꺼이 받아들고 당신만의 일지를 써나가라. 내 경험이 당신의 일상에 인계되어 당신들이 더 가벼워지기를, 부디 용기 내 주기를, 한번쯤은 당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기를, 당신이 빚진 세상에 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