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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 수선사 불일보조국사 비명1)
曹溪山 修禪社 佛日普照2)國師 碑銘
김군수3)
金君綏4)
1) 저본(底本)은『동문선(東文選)』제117권(1500년대 중반)에 수록된「조계산 수선
사 불일보조국사 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
로 갑본(甲本)은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新文館, 1918)
에 수록된「승평부 조계산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병서(昇平府曹溪山松廣寺佛
日普照國師碑銘幷序)」이며, 을본(乙本)은『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
부, 1919)에 수록된 「해동 조선국 호남로 순천부 조계산 송광사 증시 불일보조국
사 비명 병서(海東朝鮮國湖南路順天府曹溪山松廣寺贈諡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이
며, 병본(丙本)은 탄허스님이 현토(懸吐)하고 역해(譯解)한『보조법어(普照法語)』
(回想社, 1978)에 수록된 「승평부 조계산 수선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병서(昇平府曹
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이며, 정본(丁本)은 보조사상연구원(普照思想硏
究院)에서 펴낸『보조전서(普照全書)』(佛日出版社, 1989)에 수록된「승평부 조계산
수선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병서(昇平府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이다.
2) 저본에는「炤」로 되어 있으나 저본이 간행된 1500년대 중반을 고려하면 명나라
제10대 황제 무종(武宗, 1505~1521)의 이름인 주후조(朱厚照)를 피휘(避諱)한 것
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원래 글자인「照」로 바꾸었다.
3) 김군수(金君綏)는 고려의 문신(文臣)으로 생몰 연대를 알 수 없다. 호는 설당(雪
堂),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손자이자 김돈중(金敦
中, ?~1170)의 아들이다.
4) 갑본에는「知公州事副使兼勸農使管句學士將仕郞兼禮部尙書賜紫金魚袋臣金
君綏奉宣撰 文林郞神號衛長臣柳伸奉宣書(지공주사부사 겸 권농사 관구 학사 장
사랑 겸 예부상서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김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림랑이며 신호위장인 신 유신이 교지를 받들어 비문을 쓰다)」로 되어 있다. 을본
에는「知公州事副使兼勸農使管句學士將仕郞兼禮部尙書賜紫金魚袋臣金君綏奉
宣撰 中訓大夫前任藝文館奉敎兼春秋館記事官崔致翁書 興錄大夫郞善君兼五衛
都摠莩摠管俁篆(지공주사부사 겸 권농사 관구 학사 장사랑 겸 예부상서이며 자
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김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중훈대부 전임 예문관
봉교 겸 춘추기사관 최치옹이 쓰고, 흥록대부 낭선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우가 전
각하다)」으로 되어 있다. 병본과 정본에는 「知公州事副使兼勸農使管句學士將仕
郞兼禮部尙書賜紫金魚袋臣金君綏奉宣撰(지공주사부사 겸 권농사 관구 학사 장사
랑 겸 예부상서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김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다)」
으로 되어 있다. 벼슬 이름과 인물에 대해서는 오희복, 『봉건 관료기구 및 벼슬
이름 편람』(여강출판사, 1992) ; 이지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5(가산불교문
화연구원, 1997) ; 조명제・김탁・정용범・원경,『역주 조계산송광사사고 : 인물
부』(도서출판 혜안, 2007) 참조.
선[禪那]5)을 배우는 근원이 가섭[迦葉波]6)에서 나왔고, 달마가 그것을
얻어 중국[震旦]7)에 와서 교화하니, 그것을 전하는 이는 전하지 않음으로
전하였고 그것을 닦는 이는 닦지 않음으로 닦았다. 잎에서 잎으로 서로 이
어지고 등(燈)에서 등(燈)으로 함께 빛나니 어찌 이리 기이한가!
禪那之學源, 出於迦葉波, 達磨得之, 來化震旦, 傳之者, 以不
傳而傳, 修之者, 以無修而修. 葉葉相承, 燈燈竝耀, 一何奇也!
5) 선나(禪那)는 산스크리트어 dhyāna의 음사이다. 보통 선(禪)이라 약칭하며, 정
려(靜慮), 사유수(思惟修), 정(定) 등으로 번역한다.
6) 가섭파(迦葉波)는 산스크리트어 kāśyapa, 팔리어 kassapa의 음사이다. 일반적으
로 가섭(迦葉)이라 약칭한다. 선종의 33조사설에서는 부처님께 정법안장(正法
眼藏)을 전해 받은, 제1조로 추앙받고 있다. 음광(飮光)으로 번역한다.[『경덕전등
록(景德傳燈錄)』 권1, 大51, pp.205c22-206b7 참조.]
7) 진단(震旦)은 중국(中國)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중국에서 역경이 이루어지던
때에 인도에서 중국을 가리키던 호칭인 치나스타나(Cīnasthāna) 또는 치니스탄
(Cīnistan)을 진단으로 음사하였다. 진단(眞丹), 진단(震丹), 진단(振旦) 등으로도 부
른다. 중국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인 지나(支那)는 Cīna의 음사이다. 중국에서
는, 동쪽은 8괘 중 진(震)에 해당하고 해가 뜨는 곳이기 때문에 진단이라고 한다
는 의미도 부여하였다.[『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권22(大54, p.447c2) ;
『번범어(翻梵語)』권8(大54, p.1036b7)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 권3(大54,
p.1098b14-21) 참조.]
성인께서 가신 지 더욱 오래되어 법도 따라서 느슨해지니, 학자들은 진
부한 말만을 고수하여 은밀한 뜻을 몰라 근본은 버리고 지말만 좇는다. 그
리하여 관찰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길은 막히고, 문자로 희론하는 실마리는
벌떼처럼 일어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거의 땅에 떨어졌다.
曁乎去聖彌遠, 法隨而弛, 學者守陳言迷密旨, 棄本而逐末. 於
是乎, 觀察悟入之路茅塞, 文字戲論之端蜂8)起, 而正法眼藏,
幾墜乎地.
8) 저본에는「鋒」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정본에 따라「蜂」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때에 한 스님이 있어 홀로 들뜨고 거짓된 세속을 등지고 바르고
참된 근본을 흠모하여, 처음에는 설명을 찾아 이치로 나아가고 끝내는 선
정[定]을 닦아 지혜[慧]를 드러낼 수 있었다. 이미 얻고 나서는 아울러 모
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선풍이 잠들어있던 것을 다시 떨치게 하고 조사의
달이 어두워져 있던 것을 다시 밝게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가섭의 후손이
며 달마(達磨)의 종손으로서 잘 이어 잘 따른 사람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아! 우리 국사께서 바로 이런 분이시다.
於此有人焉, 獨能背浮僞之俗, 慕正眞之宗, 始於尋詮而詣理,
終於修9)定以發慧. 旣得乎已, 兼施諸人, 使禪風寢而復振,
祖月晦而更明. 若然者, 可不謂迦葉之裔孫, 達磨之宗子, 善繼
善述者乎. 繄我國師是已.
9) 저본에는「依」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修」로 바꾸었다.
스님의 법명은 지눌이고 경서(京西)의 동주10) 사람이다. 일찍이 자호를
목우자로 하였으며, 속성은 정씨이다. 아버지인 광우(光遇)는 국학11) 학정12)
이었고, 어머니 조씨는 개흥군(開興郡)13) 부인이었다. 날 때부터 병이 많아
의원의 치료가 효험이 없어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출가로써 서원
하니 병이 곧 나았다. 나이 8세14)에 조계의 운손(雲孫)15)인 종휘(宗暉) 선사
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오직 도를 좇았으며, 지조가 높고 뛰어나 빼어나며 당당하였다.16)
師諱知訥, 京饍州人也. 甞自號爲牧牛子, 俗姓鄭氏. 考光
遇, 國學學正, 妣趙氏, 開興郡夫人. 生而多病, 醫治不效, 考
乃禱佛, 誓以出家, 疾尋愈. 年甫八歲, 投曹溪雲孫宗暉禪師,
祝髮受具戒. 學無常師, 惟道之從, 志操超邁, 軒軒如也.
10) 경서(京西)는 개성의 서쪽이란 뜻이고, 동주(洞州)는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의
옛 이름이다. 정씨는 이 곳의 토속 성씨의 하나이다. 갑본에 협주로 첨가된「(今
瑞興郡)」에 따라 번역하였다.
11) 국학(國學)은 신라시대에서 비롯된 교육 기관으로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
監)이라 하였으며 고려후기에는 성균관(成均館)이라 하였다.
12) 학정(學正)은 고려 국자감(國子監)의 정9품 관직이다. 정원(定員)은 2명으로 문
종(1046~1083) 때 설치되었다. 학정의 직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
으나 교수직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고려의 관등체계에서 최하위에 속했다.
13) 개흥군(開興郡)은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온정면의 옛 이름이다.
14)『동사열전(東師列傳)』 제1권의 「보조국사전(普照國師傳)」에서는 보조스님이 16
세에 출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韓10, p.1003c8)
15) 운손(雲孫)은 8대손을 가리킨다. 1대는 자(子), 2대는 손(孫), 3대는 증손(曾孫),
4대는 현손(玄孫), 5대는 내손(來孫), 6대는 곤손(昆孫), 7대는 잉손(仍孫), 8대는
운손(雲孫)이다. 조계의 운손이란 구산선문 중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邱井面)
학산리(鶴山里) 사굴산의 굴산사(崛山寺) 개산조인 범일국사(梵日國師)의 8대
법손으로 이해한다.
16) 헌헌(軒軒)은 풍채가 당당하고 빼어나다는 뜻이다.
25세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1182)에 승과[僧選]17)에 응시하여 합격
하고, 얼마 후에 남쪽으로 유행하여 창평18) 청원사19)에 머물렀다. 어느 날
학료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은 항상 자재하
다”20)라고 한 데 이르러 놀라 기뻐하며 미증유를 얻고, 일어나 불전(佛殿)
을 돌면서 그것을 외우고 생각하며 의미를 스스로 터득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은 명리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숲 속에 숨어 간절하고 고요히 그 도를
구하고자 하여 잠깐이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였다.21)
二十五以大定二十二年壬寅, 擧僧選中之, 未幾南遊, 抵昌平
淸源寺, 住錫焉. 偶一日, 於學寮, 閱六祖壇經至曰,“ 眞如自
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境, 而眞性22)常自在.” 乃驚
喜, 得未曾有, 起繞佛殿, 頌而思之, 意自得也. 自是, 心厭名
利, 每欲棲23)遁林壑, 艱恬以求其道, 造次必於是.
17) 승선(僧選)은 고려시대에 실시한 승과를 말한다. 광종 9년(958)에 과거제를 처
음 실시할 때부터 승과를 설치하였는데 처음에는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다가 선
종(宣宗, 1083~1094 재위) 때에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시행하였다. 합격한
스님에게는 대선(大選)이라는 법계를 주고,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
師), 삼중대사(三重大師)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이상의 법계는, 선종은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 교종은 수좌(首座), 승통(僧統)이다.
18) 창평(昌平)은 보통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이라고 본다. 그러나 청원사(淸源寺)
가 경기도 양성(陽城, 현재의 안성군)에 있었던 절임을 근거로 안성 지방에 있
던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며,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동남쪽 90
리 지점에 있는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 청원사(淸源寺)가 정확히 어디에 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신증동국여
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10권 ‘양성현(陽城縣) 불우조(佛宇條)’에 따르면
청원사(靑原寺)라는 절이 천덕산(天德山)에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때 양성
현은 지금의 안성에 해당한다.
20)『육조단경(六祖壇經)』권1(大48, p.353b4-5).
21) ‘잠깐이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였다’는 표현은『논어(論語)』의「이인(里仁)」편에
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군자는 한 끼의 밥 먹는 사이에도 어김이 없으니, 잠깐
사이에도 반드시 이렇게 하며 엎어지고 넘어짐에도 반드시 이렇게 하니라.”(君
子, 無終食之間, 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22) 저본에는「眞性而」로 되어 있으나 갑본・정본과『육조단경』에 따라「而眞性」으
로 바꾸었다.
23) 저본에는「拪」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棲」로 바꾸었다.
[대정] 25년 을사(1185)를 지나면서 하가산에 노닐며 보문사24)에 머물렀
다. 대장경을 읽다가 이장자(李長者)의『화엄론(華嚴論)』을 얻어 거듭 신심
을 내었다. [이치를] 찾아내 드러내고 숨은 것을 찾아 [그 의미를] 씹고 씹
어 정수를 맛보아 이전의 앎이 점점 밝아졌다. 이에 마음을 원돈(圓頓)의
관문(觀門)에 가라앉혔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혹함을 인도하여 그들
을 위하여 못을 제거하고 쐐기를 뽑아주고자 하였다.
24) 보문사(普門寺)는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普門面) 수계동(首溪洞)에 있는 절이
다. 677년(문무왕 17)에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1184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
였으며, 조선조 태종 7년(1407)에 교종(敎宗)에 속하였고, 1926년에 중수하였다.
越二十五年乙巳, 遊下柯山, 寓普門寺. 因讀大藏, 得李長者華
嚴論, 重發信心. 搜抉而索隱, 嚌嚅而味精, 前解轉明. 乃潛心
圓頓觀門, 亦欲導末學之迷, 爲之去釘拔楔.
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선노(禪老) 득재(得才)25)가 팔공산[公山] 거
조사26)에 머무르며 멀리서 청함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드디어 가서 머물렀
다. 이름을 버린 여러 종파의 고사(高士)들을 널리 맞아들여 힘써 권하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음이 여러 해였다.
適有舊識禪老得才者, 住公山居祖寺, 邀請懇至, 遂往居焉. 廣
延諸宗抛名高士軰, 刻意勸發, 習定均慧, 夙夜毋斁者累稔矣.
25) 득재(得才)는 지눌보다 연장자인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전기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26) 거조사(居祖寺)는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
이다. 738년(효성왕 2) 원감조사가 창건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제22권의 「영천군(永川郡) 불우조(佛宇條)」에도 거조사, 원명사(圓明
寺), 안흥사(安興寺), 상원사(上元寺) 등은 모두 팔공산에 있다고 전한다.
승안 3년27) 무오(1198) 봄에 선승 몇 사람과 함께 발우 하나만 가지고 승
지(勝地)를 찾아 지리산에 올라 상무주암28)에 숨어 지냈다. 경치가 그윽하
고 고요하여 천하에 으뜸이며 참으로 선을 닦을 만한 좋은 곳이었다. 스님
은 여기에서 바깥 인연을 물리치고 오로지 안으로 관(觀)하는 것에만 전념
하였다. 갈고 닦아 예리한 지혜를 내며 궁극의 근원을 찾았다. 그 때에 법
을 얻은 몇 가지 상서로운 일은 말이 번거로워 싣지 않는다. 스님께서 일찍
이 말씀하셨다.
“내가 보문사에서 지낸 이후 10여년이 되었다. 비록 뜻을 얻어 부지런히
닦아 헛되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없어지지 않아,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이 원수의 처소에 있는 것과 같았다.
지리산에 머물 때에『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얻었는데,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
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
나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
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는 것이니, 홀연
히 눈이 열리면 비로소 모두가 집안 일[屋裏事]29)임을 알 것이다.’30)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뜻이 딱 들어맞아 자연히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
고 원수도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안하고 즐거웠다.”
이로 말미암아 지혜로 아는 것이 더욱 높아져 대중들이 스님을 우러르게
되었다.
至承安三31)年戊午春, 與禪侶數子, 一鉢尋勝, 登智異山, 隱
居上無住庵. 境致幽寂甲天下, 眞安禪之佳所也. 師於是, 屛黜
外緣, 專情內觀. 磨淬發銳, 㳂尋窮源. 時有得法瑞相數事, 語
繁不載. 師甞言.“ 予自普門已來, 十餘年矣. 雖得意勤修, 無
虛廢時, 情見未忘, 有物礙膺, 如讎所. 至居智異, 得大慧普覺
禪師語錄云,‘ 禪不32)在靜處, 不在閙處, 不在日用應緣處, 不
在思量分別處. 然第一不得, 捨却靜處閙處, 日用應緣處, 思量
分別處叅, 忽然眼開, 方知皆是屋裏事.’ 予於此契會, 自然物
不礙膺, 讎不同所, 當下安樂耳.” 由是, 慧解增高, 衆所宗師.
27) 승안(承安, 1196~1201)은 중국 금나라 제6대 장종(章宗) 때의 연호이다. 저본에
는「승안 2년 무오」라고 되어 있으나 무오년은 승안 2년이 아니고 3년이므로
「승안 3년 무오」로 번역하였다.
28) 상무주암(上無住庵)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에 있는 절이다.
영원사에 소속된 산내 암자로서 합천 해인사의 말사(末寺)이다.
29) 집안 일[屋裏事]은 자신의 내부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대혜어록
(大慧語錄)』을 비롯하여 많은 선어록에 등장한다.
30)『대혜어록(大慧語錄)』권19(大47, pp.893c28-894a2).
31) 저본에는「二」로 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三」으로 바꾸었다.
32) 저본에는 없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과『대혜어록(大慧語錄)』에 따라「在」
앞에「不」을 삽입하였다
[승안] 5년 경신(1200)에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살며 대중을 거느리고 법
을 펼치기를 11년 동안 하였다. 혹은 도를 이야기하고 혹은 선을 닦으며 안
거하고 두타하는 데에 한결같이 부처님의 율(律)에 의거하였다. 사방에서
스님과 재가자들이 소문을 듣고 폭주하여 수많은 대중이 모여들었다. 심지
어 명예와 벼슬을 관두고 처자를 버리고는 옷을 물들이고 머리를 깎고 친
구에게 권하여 함께 오기도 하고,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로서 이름을 버
리고 결사에 들어오는 사람 역시 수백 명이었다.
五年庚申, 移居松廣山吉祥寺, 領徒作法, 十有一年. 或談道,
或修禪, 安居頭陁, 一依佛律. 四方緇白, 聞風輻湊, 蔚爲盛集.
至有捨名爵, 捐妻子, 毁服壞形, 命侶而偕來33)者, 王公士庶,
投名入社, 亦數百人.
33) 저본에는「來偕」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偕來」로 바꾸
었다.
스님은 도에 스스로를 맡겨 남들의 칭찬이나 비방에는 전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성품은 자애롭고 참을성이 있어 후배를 잘 지도하였다.
혹 비록 어그러져 틀리고 뜻에 맞지 않더라도 오히려 딱하게 여기며 받아
들여 지켜주면서 그 정(情)이 줄거나 그치지 않아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귀여워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사람들에게 외워 지니게 권하기는
늘 『금강경(金剛經)』으로 하였고, 법을 세우고 교의(敎義)를 연설할 때에는
뜻을 반드시『육조단경』으로 하였으며, 펼치는 데에는 이통현의『화엄론
(華嚴論)』과『대혜어록(大慧語錄)』으로 서로 날개를 삼았다. 문을 여는 데
에 세 가지34)가 있었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부르고, 원돈신해
문(圓頓信解門)이라고 부르고, 경절문(徑截門)이라고 불렀으니, 의지하여
수행해 믿어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선학의 융성함이 옛날에나 근래에나
비교할 수 없었다. 스님은 또한 위의를 잘 거두어 소의 걸음에 범의 눈빛이
었다. 연거(燕居)할 때에도 삼가고 경계하여 게으른 몸가짐이 없었고, 힘드
는 일을 하거나 운력할 때에도 항상 대중에 앞장섰다. 억보산35)의 백운정
사 적취암, 서석산36)의 규봉난야37) 조월암 등은 모두 스님이 짓고 왕래하면
서 선을 닦은 곳이다.
師爾自任, 不以人之譽非動其心. 性慈且忍, 善接後流, 或雖
悖謬迕意, 猶能憫念攝護, 情不衰止, 若慈母之於嬌38)子然. 其
勸人誦39)持, 常以金剛經, 立法演義, 則意必六40)祖壇經, 申以
華嚴李論大慧語錄, 相羽翼. 開門有三種, 曰惺寂等持門, 曰圓
頓信解門, 曰徑截門, 依而41)修行信入者多焉. 禪學之盛, 近古
莫比. 師又善攝威儀, 牛行虎視. 燕居謹飭42), 無惰容, 至於執
勞任力, 恒在衆先. 億寶山之白雲精舍積翠庵, 瑞石山之圭43)
峯蘭若祖月庵, 皆師所作, 而徃來修禪者也.
34) 세 가지 문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
이다. 지눌스님의 사상 체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저술과 관련하
여 보통『수심결』은 성적등지문,『원돈성불론』과『화엄론절요』는 원돈신해문,
『간화결의론』은 경절문, 그리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는 세 가지 문 모두
를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지눌스님이 명확하게 체계적으로 밝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 가지 문의 위상과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
다. 세 가지 문을 각각 근기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교화방법이라고 보는 견해와
함께 단계적으로 밟아가는 수행방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도
성적등지문을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보고 원돈신해문과 경절문을 근기에 따라
행하는 수행방법으로 보는 견해와, 세 가지 문을 지눌스님의 사상이 발전해가
는 과정으로 이해하여 경절문을 완전한 수행법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성적등
지문과 원돈신해문은 지눌스님의 사상체계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 돈오점수
(頓悟漸修)와 관련된다. 또한 지눌스님은 이 둘이 이론의 영역이라면 이것을 벗
어나 궁극적인 깨달음은 화두 참구라는 경절문을 거쳐야 한다고 제시한다.
35) 억보산(億寶山)은 억불산(億佛山)이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장흥읍(長興邑) 동쪽
에 있는 산으로 현재의 백운산이다.
36) 서석산(瑞石山)은 전라남도 화순읍 북쪽에 있는 산으로 현재의 무등산이다.
37) 규봉난야(圭峯蘭若)는 규봉사(圭峯寺)라고도 한다. 도선 국사가 서석산 중턱에
있는 은신대(隱身臺)에 앉아 정진하다가 절을 짓고 규봉사라 이름하였다. 그 후
폐사가 되었던 것을 지눌스님이 중창하고 규봉난야라 이름하였다.
38) 저본에는「驕」로 되어 있으나 갑본・병본・정본에 따라「嬌」로 바꾸었다.
39) 저본에는「頌」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병본・정본에 따라「誦」으로 바꾸었다.
40) 저본에는 없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 「祖」 앞에「六」을 삽입하였다.
41) 저본에는 없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 「而」 다음에「修行」을 삽입하였다.
42) 저본에는「筯」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飭」으로 바꾸었다.
43) 저본에는「珪」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圭」로 바꾸었다.
임금44)이 잠저45)에 있을 때부터 평소 스님의 명성을 존중하다가 왕위에
오르자 왕명으로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고쳐 부르게 하고 길상사를 수선사
로 고쳐 친필로 현판을 썼다. 그리고 또 만수가사 한 벌을 내려 특별히 기
리니 돈독하게 공경하고 크게 보호하는 정성이 달리 견줄 데가 없었다.
上, 自潛邸, 素重其名, 及卽位, 命改號松廣山爲曹溪山, 吉祥
寺爲修禪社, 親書題榜. 旣又就賜滿繡袈裟一領, 以褒異之, 篤
敬光護之誠, 他無等夷.
44) 임금은 고려 제21대 희종(熙宗, 1181~1237)이며, 재위 기간은 1204년부터 1211
년까지이다. 휘는 영(韺), 자는 불피(不陂), 시호는 희종인목성효대왕(熙宗仁穆
成孝大王)이며 신종과 정화태후(靖和太后) 김씨(金氏)의 맏아들이다. 최충헌과
의 갈등으로 두 번이나 강화로 쫓겨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능은 강화도
에 있는 석릉(碩陵)이다.
45) 잠저(潛邸)는 나라를 처음으로 이룩한 임금이거나 종친 중에서 왕이 된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역(周易)』의 ‘잠룡물용(潛龍
勿用)’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에 잠겨 승천을 준비하는 용은 쓰지 않는다는 뜻이
다. 여기에서 큰 뜻을 감추고 도약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잠룡(潛龍)이
라고 한다. 잠저라는 말 속에는 연못 속의 용이 승천하여 임금이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국왕에게 잠저가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지
못했음을 뜻하기 때문에 정식 왕자가 살던 동궁(東宮)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처음에, 스님이 아직 남쪽으로 노닐지 않았을 때 함께 공부했던 여러 사
람과 약속하기를, “나는 이름을 감추고 향사(香社)46)를 맺어 정혜(定慧) 닦
음을 일삼고자 하는데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하였다. [그들
이] 말하기를, “말법(末法)이므로 그 때가 아닌가 합니다.”라고 하였다. 스
님은 이에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기를, “시대[時劫]는 변천할 수 있지
만 심성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법(敎法)이 흥한다거나 쇠한다는 것은
삼승(三乘)인 방편으로 배우는 이들의 견해일 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승복하면서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뒷날 함께 결사를 맺으면 반드시 정혜(定慧)라 부릅시다.”라
고 하였다. 거조사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定慧社)를 세우고 곧『권수정혜
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으니, 이는 처음 뜻을 이룬 것이다. 결사
를 송광산으로 옮기고도 역시 그 이름을 따랐는데 후에 가까이 있는 절이
같은 이름이었으므로 조정의 뜻을 받아 이름을 고쳐 수선사라 하였다. 이
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같으니, 스님의 의지가 정혜(定慧)에 있었음이 이
와 같았다.
初師之未南遊也, 與同學諸子, 約曰,“ 吾欲逃名, 結香社, 以
習定慧爲事, 於子等, 何如?” 曰,“ 末法, 恐非其時.” 師乃慨
然長歎曰, “時劫可遷, 心性不變, 敎法興衰, 乃三乘權學見耳.
智者應如是乎.” 衆皆服曰,“ 然. 他日結同社, 必號定慧.” 及
在居祖寺, 果立定慧社, 仍述勸修定慧結社文, 償初志也. 至移
社松廣, 亦循其名, 後以隣有寺同稱者, 因受朝旨易焉, 所謂修
禪社也. 名雖異而義則同也, 師之志在定慧, 如此.
46) 향사(香社)는 결사(結社)의 다른 표현이며, 연사(蓮社)라는 표현도 사용하였
다.[남공철(南公轍),「차연사제소년운(次蓮社諸少年韻)」,『금릉집(金陵集)』권3. ;
김안국(金安國),「여제반숙장흥사(與諸伴宿長興寺)」,『모재집(慕齋集)』권8 참조]
대안(大安)47) 2년(1210) 봄 2월에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법연을 베
푼 지 수십 일이 되었다. 이 때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내가 세상에 머물
면서 법을 말하기도 오래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각자 노력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3월 20일에 병을 보이고 8일 만에 임종하니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이다. [입적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욕실에 나아가 목욕하실 때, 시자가 [임
종]게(偈)를 청하고 이내 질문을 했더니 스님이 조용히 대답하였다. 밤이
깊자 방장실로 들어가 묻고 답함이 처음과 같았다. 새벽이 되자 [스님이]
묻기를, “오늘이 며칠인가?”라고 하였고, [시자가] “3월 27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법복을 갖추고 세수와 양치질을 한 다음 말하기를, “이 눈
은 시조[鼻祖]의 눈이 아니요, 이 코도 시조의 코가 아니며, 이 입은 어머니
가 낳은 입이 아니요, 이 혀도 어머니가 낳은 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법
고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고 육환장을 짚고 선법당으로 걸어가 향을 피
우고 자리에 오르니 평소의 위의와 같았다.
大安二年春二月, 因薦母, 設法筵數旬. 時謂社衆曰, “吾住世
語法不久, 宜各努力.” 俄三月二十日, 示疾, 凡八日而終, 預
知也. 前一夕, 就湢室沐浴, 侍者請48)偈, 因設問, 師從容答49)
話. 夜艾, 乃入方丈, 問答50)如初. 將曉問51), “今是何日?”
曰,“ 三月二十七也.” 師具法服盥漱云,“ 這介眼, 不是鼻祖
眼, 這介鼻, 不是鼻祖鼻, 這介口, 不是孃生口, 這介舌, 不是
孃生舌.” 令擊法鼔集衆, 策六環錫杖, 步至善法堂, 祝香升
座, 如常儀.
47) 대안(大安, 1209~1211)은 중국 금나라 제7대 무평황제(武平皇帝) 때의 연호이다.
48) 저본에는「唱」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병본・정본에 따라「請」으로 바꾸었다.
49) 저본에는「荅」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答」으로 바꾸었다.
50) 저본에는「荅」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答」으로 바꾸었다.
51) 저본에는「間」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問」으로 바꾸었다.
석장을 치고 전날 저녁에 방장실에서 문답한 이야기의 인연을 들어 말
하기를, “선법(禪法)의 영험은 불가사의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대중에게
설파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어둡지 않은 일착자(一著子)52)를 물어라. 이 늙
은이도 어둡지 않은 일착자로 대답하리라”라고 하였다. 좌우를 돌아보고
손으로 [육환장을] 만지면서 이르기를, “산승의 목숨[命根]이 모두 그대들
의 손 안에 있다. 한 번 그대들에게 맡길 터이니 가로 끌든지 거꾸로 끌든
지 힘이 있는 사람은 나와보라.”고 하면서 곧 발을 뻗어 법상(法床)에 걸터
앉아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말은 법답고 뜻도 자세하였으며 언변에 걸림
이 없었다. 자세한 것은『임종기』53)와 같다. 마지막으로 어느 스님이 묻기
를, “옛날 비야리에서 유마[淨名] 거사가 병을 보인 것과 오늘 조계에서 목
우자께서 병 드신 것이 같은지 다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스
님이 말하기를, “그대는 같고 다름만 배워왔느냐?”라고 하였다. 이어서 주
장자를 들어올려 몇 번 내리치고 말하기를,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 속
에 있느니라.”라고 하고는 그대로 주장자를 잡고 법상에 걸터앉아 움직이
지 않았으니 그대로 가신 것이다.
乃振錫, 擧前夕方丈中問答54)語句因緣云,“ 禪法靈驗, 不可
思議. 今日, 來到這裏, 欲爲大衆說破去也. 伱等不昧一著子問
來. 老漢亦不昧一著子答55)去.” 顧視左右, 以手摩之曰,“ 山
僧命根, 盡在諸人手裏. 一任諸人, 橫拖倒曳, 有筋骨底出來.”
便伸足踞于床, 隨問而答56), 言諦義詳, 辯才無礙. 具如臨終
記. 最後, 有僧問,“ 昔日毗耶淨名示疾, 今日曹溪牧牛作病,
未審是同是別.” 師云,“ 爾學同別來?” 乃拯柱杖數下云,“ 千
種萬般, 揔在這裏.” 因執杖, 踞床不動, 泊然而逝.57)
52) 일착자(一著子)는 바둑돌을 한 수 둔다는 뜻이나, 의미가 변하여 선사가 제자에
게 한 마디 들어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53) 임종기(臨終記)는 지눌스님의 임종 전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보이나 전하지 않아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54) 저본에는「荅」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答」으로 바꾸었다.
55) 저본에는「荅」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答」으로 바꾸었다.
56) 저본에는「荅」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答」으로 바꾸었다.
57) 갑본에는「師生於高麗毅宗十二年戊寅 卽宋高宗紹興二十八年 金海陵王正隆二
年(스님은 고려 의종 12년 무인에 태어났으니 송 고종 소흥28년이며 금 해능왕
정융 2년이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문도들이 향을 피우고 등을 달아 공양하기를 7일이 되었으나 안색은 살
아있을 때와 같고 수염과 머리털도 계속 자랐다. 다비 후 유골을 수습하니
유골이 모두 오색이었다. 사리를 얻으니 큰 것이 30과(顆)이고 작은 것은
헤아릴 수 없었다.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부도를 세웠다. 임금이 소식을 듣
고 크게 슬퍼하며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 하고 탑을 ‘감로
(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랍은 36세였다. 평생 지으신 것은 『정
혜결사문』,『상당록(上堂錄)』58),『법어(法語)』,『가송(歌頌)』각 1권이
며, 종지를 드러내 펼친 것이어서 모두 볼 만한 점이 있다.
門徒設香燈, 供養七日, 顔色如生, 鬚髮漸長. 茶毗拾遺骨, 骨
皆五色. 得舍利, 大者三十粒, 其小者無數. 浮圖于社之北麓.
上聞之慟, 贈謚曰佛日普照59)國師, 塔曰甘露. 閱世五十三齡,
受臘三60)十有六. 生平所著, 如結社文, 上堂錄, 法語歌頌, 各
一卷, 發揚宗旨, 咸有可觀.
58) 현재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59) 저본에는「炤」로 되어 있으나 명나라 황제 무종(武宗, 1505~1521)의 이름인 주후조
(朱厚照)를 피휘한 것으로 보아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照」로 바꾸었다.
60) 저본에는「二」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三」으로 바꾸었다.
어떤 이가 말한다. “죽음과 삶은 큰일이다. 그런데 스님은 천명을 따라
열반에 들 때에 걸림없고 자재하니, 그 속에는 반드시 보통 사람보다 뛰어
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한 도를 말한다면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노자(老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61) 장자
[莊周]는 행위에 남다른 일을 하지 않고자 하였다.62) 옛날의 도를 닦는 사
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같았을 뿐이다. 어찌 괴상하고 기이한 자취를 보여
남에게 알리려 하겠는가. 세존은 법 중의 왕이라 불리며 신통한 작용으로
자재로이 노닐었지만 쌍림(雙林)에서 입적할 무렵에는 ‘내가 이제 등이 아
프니 곧 열반에 들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개고
입적하였다. 또 당나라 은봉선사는 거꾸로 서서 입적하였는데,63) 비구니가
된 누이가 꾸짖어 말하기를, ‘노형(오빠)은 평생 법과 율을 따르지 않더니
죽어서도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라고 하였다. 이제 스님은 개당(開堂)하여
대중에게 보인 것이 이미 많은데 죽는 날까지 다시 법고를 쳐서 대중을 모
으고 자리에 올라 설법하고 법상에 걸터앉아 입적을 알리니 이것이 도에서
본다면 군더더기가 아니겠는가?”
或曰.“ 死生大故也. 師能委命乘化, 優遊自肆, 是其中以有過
人者. 然語之至道則未也, 何以言之. 盖老子貴知我者希, 莊周
欲行不崖異, 古之爲道者, 與人同耳. 其肯自爲詭異奇偉之迹,
以取人知耶. 至如世尊, 號法中王, 神通作用, 游戲自在, 及其
雙林宴寂, 則曰, ‘吾今背痛, 將入涅槃.’ 遂右脥累足而化. 又
唐隱峯禪師, 倒立而化, 妹有爲尼者咄曰,‘ 老兄平生不循法
律, 死更熒惑於人.’ 今師之開堂示衆己多矣, 死之日而乃復鳴
鼓集衆, 升座說法, 踞床告滅, 其於道不爲疣贅乎?”
61)『노자(老子)』제70장. “내 말은 쉽고 따라 행하기도 쉬운데 사람들 중에 아는 자
도 행하는 자도 없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사물에는 주재자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아는 자는 드물고 나를 따르려
는 자도 귀하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남루한 베옷을 입은 속에 구슬을 감추고 있
는 것이다.”(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 被褐懷玉.)
62)『장자(莊子)』제12장「천지편(天地篇)」.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저 도란
만물을 덮어주고[天] 실어주니[地] 한없이 크도다. 군자는 마땅히 마음을 닦지
않으면 안되나니, … 행함에 다르지도 않고 또한 자취도 보이지 않음을 관용(寬
容)이라 한다.’고 하셨다.”(夫子曰, 夫道, 覆載萬物者也, 洋洋乎 大哉. 君子, 不可以
不刳心焉, … 行不崖異之謂寬.)
63) 은봉스님은 중국 복건현(福建縣) 소무(邵武) 출신으로 속성이 등씨(鄧氏)이므
로 세인들이 등은봉이라 일컬었다. 처음 마조도일 밑에 있었으나 깨닫지 못하
고, 다시 석두스님을 찾아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다시 마조를 찾아가 깨달
았다.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금강굴(金剛窟) 앞에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입적하였으나 옷자락이 아래로 내려오지 아니하였다. 다비장으로 법구를 옮기
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비구니스님인 누이동생의 말에 쓰러졌다고
한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8의 「오대산은봉선사(五臺山隱峯禪師)」
(大51 p.259b5-c11)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1(大50 p.847a2~20) 참조.]
답한다. “그렇지 않다. 도의 작용은 한계[方]가 없고 사람의 행함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천하에 하나의 이치뿐이지만 백 가지의 생각이 [있으]며,
다른 길이지만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64)고 하였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또 역대 선문(禪門)의 모든 조사들이 임
종에 법을 부촉할 때 반드시 신이(神異)함을 나타내었으니 승사(僧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후대의 모든 조사들에 이르기까지 법당에 올라 설법하
고 입적하였으니, 흥선사의 유관(惟寬)65)은 상당(上堂)하여 임종게를 설하
고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고, 수산의 성념(省念)66)은 임종게를 남긴 다음 온
종일 상당하여 설법하고 편안히 앉아 갔으며, 서봉의 지단(志端)67)은 삭발
목욕하고 법당에 올라 대중들에게 하직하고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고, 대녕
의 은미(隱微)68)는 상당하여 임종게를 설한 다음 입적하였으니, 모두 잘못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상법[像]과 말법[季]의 사람들은 의
심이 많고 신심은 적어서, 먼저 깨달은 스승이 교묘한 방편으로 설명하여
보이고 권하고 인도하여 흠모하는 마음을 생기게 하지 않으면, 비록 거룩
한 도에 나아가려 해도 이 또한 어려울 것이다. 스님의 마음을 보면 근기에
맞추어 이롭게 하려는 한 부분인 것이다.”
答69).“ 不然. 夫道之用無方, 而人之行不同. 故曰,‘ 天下一致
而百慮, 殊途而同歸.’ 若所云者, 知其一, 未知其二也. 且歷
代禪門諸祖, 臨終囑法, 必顯神異, 僧史載之詳矣. 至於後之諸
師, 升堂說法而就化, 若興善寺之惟寬, 上堂說偈, 安坐而化,
若首山之省念, 遺偈剋日, 上堂說法, 安坐長徃. 若瑞峯之志
端70), 剃髮澡身, 升堂辭衆, 安坐而化, 若大寧之隱微, 上堂說
偈而化71), 皆可譏耶. 嗟乎! 像季之人, 多疑而少72)信, 非有
先73)覺之士, 以善巧方便, 開示勸導74), 生歆慕心, 雖欲發趣
聖道, 斯亦難矣. 觀師之心, 亦接機利物之一端也.”
64)『주역(周易)』「계사하전(繫辭下傳)」 제5장.
65) 유관(惟寬, 755~817)은 절강성 신안(信安) 출신으로 속성은 축씨(祝氏)이다. 13
살 때 출가하여 율장과 천태지관을 배운 다음 마조대적(馬祖大寂)을 참방하여
선법(禪法)을 받았다. 817년 2월 그믐날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을 마치고 입적
하였다. 세수는 63세, 법랍은 39세였다. 당 헌종(憲宗)이 대철선사(大徹禪師)라
는 시호를, 탑호(塔號)를 원화정진지탑(元和正眞之塔)이라고 하사하였다.[『송
고승전(宋高僧傳)』 권10의 「당경조흥선사유관전(唐京兆興善寺惟寬傳)」(大50
p.768a13-b11)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7(大51 p.255a12-b14) 참조.]
66) 성념(省念, 926~993)은 임제종 풍혈연소(風穴延沼)의 제자로 산동성 출신이며
속성은 적씨(狄氏)이다. 993년 12월 4일 상당하여 설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
중에 하직하고 임종게를 설하고는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다.[『경덕전등록(景德傳
燈錄)』권13, 大51, pp.304a11-305a6 참조.]
67) 지단(志端, 892~969)은 복주(福州) 출신으로 속성은 유씨(兪氏)이다. 복주 남간
사(南澗寺)에서 출가하였으며 24살 때 안국사(安國寺) 홍도(弘瑫) 명진대사(明
眞大師)에게 법을 이어받고 제자가 되었다. 서봉원(瑞峰院)에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969년 1월 25일 자시(子時)에 삭발 목욕하고 대중을 모아 하직하
고 입적(入寂)하였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22, 大51, p.381b22-c28 참조.]
68) 은미(隱微, 886~961)는 강서성 출신으로 속성은 양씨(楊氏)이다. 7살 때 홍주(洪
州) 석두원(石頭院) 도견선사(道堅禪師)를 은사로 스님이 되었다. 20살에 개원
사(開元寺) 지칭율사(智稱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나산(羅山)의 법보대사
(法寶大師) 도한(道閑)의 법을 이어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십선도량(十善道場),
용광선원(龍光禪院) 등을 거쳐 961년 홍주 강서성의 대령정사(大寧精舍)로 옮겨
머물다가 그 해 10월 27일 삭발 목욕하고 법상에 올라 대중에게 마지막 하직을
하고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다. 송 태조가 시호를 현적선사(玄寂禪師), 탑호(塔
號)를 상적(常寂)이라 하였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23, 大51, p.392a5-b1
참조.]
69) 저본에는「荅」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答」으로 바꾸었다.
70) 저본에는 없으나 갑본・병본・정본에 따라「志」 다음에「端」을 삽입하였다.
71) 저본에는 없으나 갑본・병본・정본에 따라 「上堂說偈而化」를 삽입하였다.
72) 저본에는「小」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少」로 바꾸었다.
73) 저본에는「老」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先」으로 바꾸었다.
74) 저본에는「道」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導」로 바꾸었다.
스님이 입적한 이듬해(1211년)에 그 법을 이은 사문 혜심(慧諶)75) 등이
스님의 행장을 갖추어 아뢰기를, “원하옵건대 후세에 보일 것을 내려 주소
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고 소신(小臣)에게 명하여 비문
을 짓게 하였다. 신(臣)은 유학을 업으로 하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인
데 하물며 부처의 마음과 조사의 법인 같은 분수 밖의 이야기이겠는가. 다
만 임금의 명령[明命]이 다다랐는데도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조금 얻어들
은 것을 다하여 감히 스님의 성대한 덕을 그려내는 것이다.
師沒之明年, 嗣法沙門慧諶等, 具師之行狀, 以聞曰,“ 願賜所
以示後者.” 上曰,“ 兪.” 乃命小臣, 文其碑. 臣業儒而未至者
也, 而况於佛心祖印方外之談乎. 但迫明命, 無由以辭, 玆扣竭
於謏聞, 敢形容於盛美.76)
75) 혜심(惠諶, 1178~1234)은 혜심(慧諶)이라고도 한다. 호는 무의자(無衣子)이고 자
는 영을(永乙)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전남 화순(和順) 출신으로 지눌스님
의 제자이며 송광사 16국사 중 제2세이다.
76) 저본에는「羙」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美」로 바꾸었다.
명(銘) :
손가락으로 달 가리킴이여,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고,
말로 법 설함이여, 법은 말에 있지 않도다.
삼승의 모든 경론이여, 근기의 차별이요,
경절의 바로 들어감이여, 한 문이 있을 뿐이로다.
석가모니께서 꽃 보이심이여, 가섭이 활짝 웃었고
달마가 벽 향함이여, 혜가가 팔을 끊었도다.
마음이 마음 전함이 둘이 아니요, 법으로 법 줌이 이치가 가지런하도다.
참 바람은 다하지 않으니,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으리오.
스님 몸은 학이 둥지에서 나옴이며, 스님 마음은 거울에 티끌 없음이로다.
하가산이여 길을 열었고, 송광사여 멍에를 벗었도다.
선정 물 맑고 맑아 물결이 없고, 지혜 등불 밝고 밝아 밤이 아니로다.
뜰의 잣나무 조사 뜻에 답하고, 못의 연꽃 참된 종지 펴도다.
사중의 둘러쌈 뒤섞이고, 한 소리 펼침 은은하도다.
생사 봄이 허깨비 같으니, 어찌 진실과 허망이 따로 있겠는가.
아, 스님이 석장 침이여, 만상 모두 융합이로다.
바람이 버들가지 날림이여, 비가 배꽃을 때리도다.
其銘曰,
指以標月兮, 月不在指,
言以說法兮, 法不在言.
三乘諸部兮, 隨機差別,
徑截直入兮, 唯有一門.
牟尼示花兮, 迦葉破顔,
達磨面壁兮, 慧可斷臂.
心傳心兮不二, 法與法兮齊致.
眞風兮未殄, 何代兮乏人.
師之身兮鶴出籠, 師之心兮鏡無塵.
柯山兮啓途, 松社兮蛻77)駕.
定水湛兮湛無波, 慧炬光兮光不夜.
庭栢兮答78)祖意, 池蓮兮演眞宗.
四衆繞兮雜遝, 一音暢兮舂容.
觀死生兮如幻, 豈眞妄兮殊科.
噫, 師之振錫兮, 萬像79)都融,
風吹柳絮兮, 雨打梨花.80)
77) 저본에는「稅」로 되어 있으나 갑본・병본에 따라「蛻」로 바꾸었다.
78) 저본에는「荅」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정본에 따라「答」으로 바꾸었다.
79) 저본에는「象」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像」으로 바꾸었다.
80) 「雨打梨花」 다음에 저본에는 없으나 갑본에는「大金大安三年辛未十二月日殿前
寶昌刊 大金崇慶二年癸酉四月日內侍昌樂宮錄事臣金振奉宣立石(대금 대안 3년
신미[1211] 12월 모일에 전전 보창이 새기고, 대금 숭경 2년 계유[1213] 4월 모일에
내시 창락궁 녹사 신 김진이 왕명을 받들어 세우다)」이 붙어 있고, 을본에는「崇禎
紀元戊辰後五十一年戊午十月日 重建沙門雪明(숭정 기원 무진[1628] 후 51년 무
오[1678] 10월 모일 사문 설명이 중건하다)」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