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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경북영덕~울진답사 첫째 날 2009년 8월 22일~23일, 1박 2일로 경북 답사를 위해 아침 7시 40분에 익산시청 앞에 모였다. 7월 답사 때도 많은 회원이 참석해 보람되게 행했는데 이번 답사에도 회원이 37명 참석. 관광버스 VIP 37석 만 차로 기분 좋게 출발하였다. 오늘에 일정은 포항 보경사에서 점심을 하고, 보경사, 영덕(신돌석장군유적지), 영해난고종가정참, 영해경수당종택, 화수루, 갈천동까치구멍집, 장육사를 거쳐 울진숙소에 도착, 저녁을 하고 그곳에서 1박을 한다. 울진의 숙소와 식당은 임홍락선생님의 친구분 정철원장님(울진 왕 수학학원. 감사합니다.)께서 도와 주셨다. 이동 중 강좌는
1교시 : 최옥환(전북문화재연구원장)님께서『백성들에게 술의 절제(節制)를 훈유(訓諭)하는 세종의 교지』관해 강의 하시고, 2교시 : 임홍락(익산고등학교)선생님께서 『신돌석의병의 이야기』 의병에 관한 강의를 하시고, 3교시 : 이택희(남성고등학교)선생님께서 진도아리랑에 이어 『경상도지방 아리랑과 우리의 성문화』를 강의 하셨다. 강의 듣다보니 12시 20분, 보경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최옥환선생님 임홍락선생님 이택희선생님
보경사 [寶鏡寺]
경북 포항시 송라면(松羅面) 내연산(內延山)에 있는 절로써.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명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 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이 지명법사와 함께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고 보경사라고 했다. 보경사대웅전[寶鏡寺大雄殿]경북문화재자료 제231호 보경사는 동해안 지역에서는 규모가 매우 큰 절로 지명법사(智明法師)에 의하여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경사는 창건된 이후 신라 제35대 경덕왕 4년에 철민화상에 의하여 한 차례의 중창이 있었다. 그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제23대 왕인 고종 원년 때 보경사의 주지가 된 대선사 승형, 곧 원진국사(圓眞國師)에 의하여 다시 중창되었다. 원진국사는 당우가 퇴락한 것을 보고 승방 4동과 정문 1칸 등을 중창하고, 종·경·법고 등의 도구도 완비하였다. 경내에는 보경사원진국사비(보물 제252호)와 보경사부도(보물 제430호)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 및 5층 석탑 등이 있다.
보경사 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보물 제252호
보경사에 있는 고려시대 원진국사(1187∼1221)의 비이다. 높이 1.83m, 너비 1.04m, 두께 0.17m이다. 송라면 내연산(內延山)에 있는 보경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723년(성덕왕 22)에 일조대사(日照大師)가 세운 사찰이다. 원진국사는 고려시대의 승려로 속성은 신씨(申氏), 호는 승형(承逈), 자는 영회(永廻)이며, 원진은 시호이다. 13세 때인 1200년(신종 3)에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로 출가해 동순(洞純)에게서 배웠으며, 1201년 금산사(金山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 비석은 1224년(고종 11)에 세워졌는데, 귀부(龜趺)는 화강암, 비신(碑身)은 사암이다. 귀부와 대석(臺石)은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비좌(碑座)는 폭이 배면과 거의 같은 정도의 넓이로 주위에 단엽(單葉) 44연판(蓮瓣)을 새겼으며 그 위에 비신을 얹었다. 귀두(龜頭)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처럼 조각하였고 거북 등에는 육각형의 무늬 안에 ‘왕(王)’자가 질서 있게 새겨져 있다. 비석의 위쪽 양끝을 귀접이한 신석(身石) 둘레에는 당초문(唐草文)을 새겨 장식하였다. 비석 둘레의 조식은 고려시대 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며, 이수(螭首)가 없는 귀접이 형식도 비교적 하대(下代)에 속하는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보물 107)와 조선시대에 속하는 억정사 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보물 16) 등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비명은 이공로(李公老)가 지었고 글씨는 김효인(金孝印)이 썼다. 보경사 오층석탑[寶鏡寺五層石塔] 경북유형문화재 제203호 보경사 적광전[寶鏡寺寂光殿] 경북유형문화재 제254호
보경사부도[寶鏡寺浮屠] 보물 제430호
높이 4.5m이다. 8각 원당형(圓堂形)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하대석(下臺石)은 3단인데 아래쪽 2단은 무문(無文) 8각이고 상단(上段)은 세장(細長)한 단판복련(單瓣覆蓮) 32엽(葉)을 새긴 복련석(覆蓮石)이다. 중대석(中臺石)은 각 우각(隅角)에 우주형(隅柱形)만 있으며, 상대석(上臺石)은 윗면에 높직한 받침이 있는 32엽의 앙련석(仰蓮石)이다. 탑신(塔身)은 8각의 석주(石柱)와 같은데, 각 우각에 우주가 표시되고, 1면에 문약형(門鑰形)만 모각(模刻)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아랫면에 우각으로 뻗은 융기선(隆起線)이 있으며 전각(轉角)에는 귀꽃이 솟아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8엽 연꽃을 새긴 앙화(仰華) 위에 복발(覆鉢)이 놓이고 다시 앙화형 1석(石)을 놓아 보주(寶珠)를 받고 있다. 이 부도는 탑신이 지나치게 장대(長大)하여 더욱 고준(高峻)한 감을 주고 기본 조형에 있어 폭이 좁아서 안정감이 없다. 1224년(고종 11)에 건립되었다.
신돌석장군유적지[申乭石將軍遺蹟地]
경북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도곡2리 528-1에 자리한 한말의 의병장 신돌석(申乭石:1878∼1908)의 유적지. 1999년 11월 18일 개관하였다. 이 고장 출신인 의병장 신돌석의 우국충정을 기념하고 항일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설립하였으며, 신돌석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종합적으로 수집·보존하여 전시하고 있다.
태백산 호랑이로 일컬어지던 신돌석은 한말의 대표적 평민 의병장으로, 경남·경북·강원도· 충청도 등지에서 탁월한 유격전으로 용맹을 떨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기념관 안에는 일제의 침략 만행과 의병활동, 영덕군 지역의 항일운동, 일본군의 무기와 형장구 및 신돌석의 약력과 설화, 신돌석의 태백산전투, 그림으로 보는 신돌석의 일생, 신돌석의 전략과 전술, 신돌석 진의 조직도 등 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고, 장도·화승총·창검류·처결문서 등 유물 18점이 전시되어 있다. 신돌석이 태어난 생가는 이곳에서 약 2.3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나 우린 시간관계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화수루[花樹樓] 경북유형문화재 제82호
경북 영덕군 창수면(蒼水面) 갈천리(葛川里) 6-1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조선시대에 세워진 누각으로 권찬암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단종(端宗)의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에게 발각되어 화를 당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린 아들 권책(權策)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이다.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자 대봉서원(大峰書院)을 세우고 사육신과 함께 배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화수루(花樹樓)와 청간정(廳澗亭)만 남아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2층 누마루집이다. 중앙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대청이고 양쪽에 온돌방 하나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소박한 짜임새로 고건축물의 중후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화수루에 지금은 고양이가 새끼고양이 세마리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
갈천동까치구멍집 화수루 옆에 자리하고 있는 까치구멍집, 안방·사랑방·부엌·마루·봉당 등이 한 채에 딸려 있고, 앞뒤 양쪽으로 통하는 양통집의 속칭하는 말이다. 지붕 용마루의 양쪽에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구멍을 낸 모양이 까치둥지와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주택을 평면구성으로 볼 때 외통집·양통집·곱은자집·겹집으로 나눌 수 있다. 양통집은 처음에는 대개 6칸 집인 것이 8칸·10칸 또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였다.
장육사[莊陸寺]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120. 장육사는 1355년(공민왕 4년) 영덕에서 태어난 나옹혜근(懶翁惠筋), (1320~1376)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후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 때 산불로 인하여 사찰 전체가 불탄뒤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고 얼마 후 다시 중건하였다. 그런데 사전에는 1900년(광무 4년)에 이현규(李鉉圭)가 중수하였다고 되어있으나, 이건 문헌을 잘못 해석하여 생긴 오류로 보인다. 이현규가 중수하였다는 절에 전하는 「홍원루중수기」현판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본 듯한데, 실제로 현판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현규가 중수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계원들의 합심, 그 중에도 특히 황정오, 이유정, 김석출등 세 사람의 노력에 주로 힘입었으며, 중수한해도 1900년이 아니라 1937년임을 알 수 있다. 1937년에 홍원루를 중수한데이어 1940년에 신령각을 중수했다. 최근에는 1988년에 요사체를 지었고, 1998년 계단을 정비하였으며, 2001년 범종각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장육사건칠보살좌상(莊陸寺乾漆菩薩坐像) 보물 제993호 높이 86㎝의 조선 초기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버린 것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원문(願文)과 개금묵서명(改金墨書銘)을 통해 홍무 28년(태조 4년, 1395)에 영해부의 관리들과 마을 사람들의 시주로 만들었고, 영락 5년(태종 7년, 1407)에 다시 금칠하였음이 밝혀졌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이후에 만들어진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상(1447년), 영천 은해사 운부암청동보살좌상(1516년)에 영향을 주었으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어서 고려말 조선초 보살상들의 연대 추정에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영해경수당종택[寧海慶壽堂宗宅] 박응대가 소유하고 있다. 무안박씨 영해파(寧海派)의 대표적인 종택으로, 경수당 박세순(朴世淳)이 1570년(선조 3) 99칸 규모로 건립하였다. 박세순은 1599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하여졌으며,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영해경수당 향나무[寧海慶壽堂香] 경북기념물 제124호 경수당종택(慶壽堂宗宅:경북유형문화재 297) 후원 연못가에 심어져 있는 이 향나무는 수령(樹令) 약 700년으로, 경상북도 내륙지방에서는 제일 오래된 나무로 추정된다.
갈암종택(葛菴宗宅) 도지정기념물 제84호
조선 후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갈암 이현일(1627∼1704) 선생의 종가이다. 선생은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영남학파의 거두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아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였다. 서인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저서로 『갈암집』과 『홍범연의』가 있다. 가옥은 경북 북부지역의 전통적인 ㅁ자
영해난고종가정침 도지정민속자료 제29호 1624년 남길이 영해면 원구리에 지은 ㅁ자형 와가로 정면 5칸, 측면 6칸의 정침과 대청, 사당, 별묘, 정자 등으로 평지공간을 잘 활용하여 건물을 배치한 조선중기의 사대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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