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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집(龍巖集) 튼튼한 나무는 튼튼한 뿌리 http://blog.daum.net/cheesookdang/1888 ==선산 죽장 오층 석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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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세 始祖大王(朴赫居世. 朴氏의 시조. 서력기원전 69년 출생) 02세 南解大王(남해대왕.서력기원전 50년 출생) 03세 儒理大王(유리대왕) 04세 逸聖大王(일성대왕)-------------------------婆婆大王(파파대왕) 05세 阿達羅大王(아달라대왕) 06세 葛文王 碧芳(갈문왕 벽방. 석탈해왕시대) 07세 前山君 武英(전산군 무영. 탈해왕시대) 08세 朝現君 判得(조현군 판득) 09세 大誕君 光欽(대탄군 광흠) 10세 山西君 美一(산서군 미일) 11세 水道候 乃勿(수도후 내물) 12세 一是---晋山君 相建(진산군 상건)-------------- 義珏 13세 太泳--大川君 仁燁(대천군 인엽)--------- 曇(담) 14세 道兼--大司侯 啓輔(대사후 계보)---- 紐(뉴) 15세 水侯 明信(수후 명신)------- 龍文 16세 浪侯 貞環(낭후 정환)------- 京環 17세 隱逸君 露兼(은일군 노겸) 18세 擧山君 楠善(거산군 남선) 19세 禮始君 金山(예시군 금산)---- 秀奉- 20세 渤海君 應燦(발해군 응찬)---- 秀業 21세 安定大君 德興(안정대군 덕흥) 22세 萍侯 大寧(평후 대녕) 23세 浪侯 尼淳(낭후 니순)----尼秀----尼國 24세 壁山君 隆劒(벽산군 융검)------- 大守 25세 水浦大君 之坤(수포대군 지곤) 26세 東山大君 成順(성산대군 성순) 27세 秋信---宣聖王 乂謙(선성왕 예겸) 28세 神德大王(신덕대왕) 29세 景明大王(경명대왕)------ 景哀王 30세 ( 밀양박씨의 시조) 彦忱(언침. 밀성대군)
(30세)彦枕(언침.밀양박씨 시조)--彦成-彦信-彦立-彦昌-彦華-彦知-彦義(8본으로나뉨) 31세 郁(욱.대장군) 32세 瀾(란.독포사) 33세 永禎(영정.참지정사)---------永禧--永基--永垕--永址 34세 基世(기세.합문지후)---------樞世---瑚----璉---珣 35세 施做(시주.이부상서)---------施厚--之溫--之閏--之炳 36세 讚行(찬행.문하시중) 37세 彦孚(언부.태사공.문하시중공파의 시조)--彦祥--彦仁--良彦--天翊--乙材 38세 孝臣---義臣(의신.공부상서) 39세 元(원. 四門進士公派의 시조. 고려조 사문진사또는 국자진사)
★시조39세(중조1세)= 元(원. 사문진사 또는 국자진사.= 사문진사공파의 시조) 39세(01세) 元(원) 40세(02세) 晈然(교연.사문박사) 41세(03세) 奇輔(기보.첨지정사) 42세(04세) 洪昇(홍승.위위시승) 43세(05세) 諴(함.(言咸)검교군기감을 지내시다 조청대부 예빈윤 지합문사에 추봉됨) 44세(06세) 華(화) 45세(07세) 仁榦-仁祉-杞-仁翊(인익.고려조 간의대부,조선조 좌의정출사를 거부함) 46세(08세) 琰-琮(종.이조좌랑) 47세(09세) 尙溫(상온.중랑장)--尙文 48세(10세) 中實--云實(운실) 49세(11세) 孝文-孝武(효무) 50세(12세) 宗蕃--宗亢(종항.초년사마시합격.역학)
51세(13세) 雲(운) (용암공파(龍巖公派)의 파조)----(사마시,퇴계와동문수학, 저서;자양심학지론,격동편,삼후전) 52세(14세) 灝(호.성리학자)--演--潭--泌 53세(15세) 遂一(수일.퇴계문하.정유왜란본부 군대주관전사,선조때 참봉추서) 54세(16세) 弘慶--亨慶--履慶(이경)--晋慶 *[54세(16세)] 履慶(이경) 55세(17세) 愉(유)-------------------協----용----栒-----悌----기 56세(18세) 廷望--廷彬(정빈) 57세(19세) 重鉉(중현)-------重九-------重世 58세(20세) 震曾(진증) 59세(21세) 思溢(사일) 60세(22세) 來能(래능) 61세(23세) 世濤(세도) 62세(24세) 理煥(리환)-------鍾煥 63세(25세) 耆龍(기룡) 64세(26세) 應鎬(응호)
(여기부터가 현재 “熙”자 항렬 기준으로 본 네분 할아버지의 후손들입니다.)
65세(27세) (1)永極(영극)-------------------(2)永德(영덕)------------- 66세(28세) 棋根-------景根 栢根---壽根 67세(29세) 元熙 重熙---忠熙 日熙
*65세(27세) -----(3)永在(영재)--------------------------------------- *66세(28세) 東根-----------------達根------------澤根 *67세(29세) 準熙---宰熙 哲熙 昌熙
*65세(27세) -------(4)永學(영학, 울산) *66세(28세) 垈根------------富根---------------------南根 *67세(29세) 成熙--正熙 宰弘--炳俊--炳建 炳奎--炳國
(★ 용어 : “몇 대(세)”와 “몇 대(세)손” 인가?.. 를 예로 보기) 元熙, 重熙, 成熙 ...등의 “희“자 항렬 기준으로: * 시조(혁거세)기준으로 -- 시조 67대(세). (시조 66세(대)손) 이며 * 중조(원)기준으로 ------ 중조 29대(세). (중조 28세(대)손)
용암공파 (龍巖公派)
의 파조(派祖)는 운(雲)
휘(諱)에서 운(雲) [시조의 51세 (시조의 50대 손), 사문진사 공파의 파조(派祖) 원(元)의 13세 (12대 손)] 운(雲)은 1493년 (성종 24년)에 경북 현 구미에서 태어났다. 호가 용암(龍巖)으로 학문에 뛰어났다 1519년(중종14년)에 진사시,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선인의 명으로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진하신 학자로써 일생을 보내었다. 그 당신 친분인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기록이 있고 저서는 "자양심학지론, 격몽편,삼후전,위생방 등이 있다.
모부인을 40여년 모시되 뜻을 받들어 성효를 다하고 상사에는 시묘하여 효행으로 선조조에 정문을 지었다. 1562년(명종 17년)에 돌아 가시고, 묘갈명(墓碣銘)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지었다. 1642년(인조20년) 해평의 낙봉서원(洛峰書院)에 배향되었다. 후손들이 그의 호 용암을 따 "용암문중" 혹은 "용암공파"라 한다. **용암(龍巖) 박운(朴雲) 선조의 효자정려비(孝子旌閭碑)*** 이 비석은 1578년(선조 11년)에 용암박운 선생의 효행을 나라에서 표창하여 1580년(선조13년)에 세운 정려비(旌閭碑)이다 비석 앞면의 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효자성균박운지려)는 조선시대의 밀필인 석봉(石峰) 한호(韓濩) 선생이 썼으며, 뒷면의 비문 [陰記]은 문도 (門徒)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 최응룡지었고 선생의 손자인 참봉(參奉) 수일(遂一)이 ?다. 구미 용수암 [ 龜尾龍首巖 ]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 산48-3번지에 있는 바위이다.
용수암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경북기념물 제158호 지정일 2006년 09월 14일 소장 밀양박씨 용암공파 종중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 산 48-3 (구미 금호공대 북쪽 주변 방향에 접한 구역) 시대 조선 종류/분류 생활유적 2006년 9월 14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학자로서 효행으로도 이름났던 용암(龍巖) 박운(朴雲 1493~1562)이 학문을 닦고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있는 커다란 바위이다. 경상북도 산동면 성수리 낙동강변의 용수산 정상부 용샘 옆에 있으며, 바위에 ‘용암 박선생 장구지소(龍巖朴先生杖求之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관련이미지 (12)
[출처] 구미 용수암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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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고을 구미(龜尾)] 용암 박운 효자정려비
[주소]경북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213
[지정문화재]경북 유형문화재363호
[역사기행보기]http://blog.daum.net/jab0018
박운선생의 정려비를 2012.7.11일 비가내리는 오후 찾았다.이 비석은 선조11년 나라에서 선생의 효행을 표창하여 세운비석이다. 조선의 학자로서 효자로 이름났던 용암(龍巖) 박운(朴雲 1493~1562)선생은 선조11년 정려를 받았으며, 정려비는 1580년 세워졌다.
"비석 앞면에는‘효자 성균진사 박운지려(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라 새겨져 있으며, 명필 석봉 한호가 글씨를 썼다고 알려지고있습니다.
인조20년 해평 낙봉서원에 배향되어 모셔지고 있습니다. — 2012.7.11 龍巖朴雲孝子旌閭 앞에서
[아름다운역사문화의고장 구미] 낙봉서원[ 洛峯書院 ]
[주소]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474번지
[지정사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2호
[사진설명]정면 건물은 강당인 집의당.거경재와 명성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사우(祠宇)인 상덕사(위패모셔짐)이다.
... 냉산에 진달래가가 피는계절 3월이면 항상 찾아가는곳 낙봉서원이다.
1787년(정조 11)에‘낙봉(洛峰)’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구미,선산지역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1년 우리고장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숙자(金叔滋)·김취성(金就成)·박운(朴雲)·김취문(金就文)·고응척(高應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해 위패를모셨다
http://cafe.daum.net/jangdalsoo/g6gK/17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15C 後期에서 17C 前期 사이의 作品 中心으로
A research on Panegyrical Poems of Many
Generations about Yaeun Gil Jae(Ⅱ)
-Focused on Poems from the late 15th
to the early 17th century
1)南 在 澈(Nam, Jaecheol)*
Ⅰ. 緖言
Ⅱ. 15C 後期∼17C 前期 讚詠詩
Ⅲ. 冶隱 遺蹟地와 冶隱 追崇
Ⅳ. 遺蹟地 訪問客들의 讚詠詩
Ⅴ. 結言
논 문 접 수 일 2016년 4월 11일
심 사 완 료 일 2016년 4월 29일
게 재 확 정 일 2016년 5월 2일
❙영문제요❙
This essay is to study on some panegyrical poems about Yaeun Gil Jae created by
men of distinction of many generations living in Joseon Dynasty era, focusing on the
aspect of poets and the creative process of some panegyrical poems about Gil Jae made
by men living in the period from the late 15th to the early 17th century. This is made as the
next step of study on some panegyrical poems about Gil Jae made by men of distinction
both in and out of government in Taejong Era, the early 15th century.
At first, I arranged the general aspect of some panegyrical poems in the period from
the late 15th to the early 17th century. And then I examined the historical site in Seonsan
area, focusing that the names of historical site in the same area are in the titles of all
*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namway@mju.ac.kr)
1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panegyrical poems. And I scrutinized the aspect of fourteen poets who visited the
historical sites about Gil Jae in the area and created seventeen poems and the creative
process of the poems.
‣ Key words : Yaeun, Gil Jae, Panegyrical Poem, Seonsan, Historical site
Ⅰ. 緖言
필자는 冶隱 吉再(1353∼1419)에 대한 朝鮮朝 歷代 諸賢의 讚詠
詩 가운데 일부를, 15세기 전기 太宗朝 朝野 諸賢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본 바 있다. 1403년(태종 3) 경상도 관찰사 龜亭 南在(1351∼1419)
가 善山에 은거하는 冶隱을 칭송하는 찬영시 몇 수를 짓고, 陽村 權近
(1352∼1409)을 비롯한 조야 제현이 이에 화답하여 詩卷이 이루어졌음
을 확인하며, 이 시권에 수록된 찬영시의 창작 경위와 작가 양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았다.
이를 통해 태종조에 이르러 조야 제현이 집단적으로 冶隱 찬영시 창
작에 참여한 데에는 정치적 의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태종
李芳遠(1367∼1422)이 冶隱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陽村 등
에 의해 冶隱에 대한 국가 차원의 포상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면서도
명분 부족으로 인해 국가적 포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冶隱
에 대한 국가 차원의 포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 축적 및 여론 형성
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龜亭의 주도 하에 집단적으로 冶隱 찬영시 창작
이 이루어졌던 것이다.1)
태종조에 이루어진 조야 제현의 집단적인 冶隱 찬영시 창작은, 결과
1) 南在澈,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Ⅰ) - 太宗朝 諸賢의 讚詠詩를
中心으로 -」(大東漢文學 第42輯, 大東漢文學會, 2015.3), pp.31-64 참조.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17
적으로 1434년(세종 16) 내외에 반포되는 三綱行實圖 「忠臣圖」2)에
冶隱의 행적이 ‘吉再抗節’이라는 조목으로 수록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
향을 미쳤다고 본다. 태종조 조야 제현의 집단적인 冶隱 찬영시 창작은
冶隱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冶隱은 1419년(세종 1)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吉再抗節’조의 내용3) 중 찬영시
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崧山王氣已成灰 송악산 왕의 기운 재로 이미 변하였고
眞主龍興泰運開 참 임금 나라 세워 태평 운수 열렸건만,
尙戀舊君全一節 오히려 옛 임 그려 절개를 보전하려
飄然高卧子陵臺 훌쩍 떠나 자릉대서 한가로이 은거했네.
亭亭孤節凜秋霜 꼿꼿한 높은 절개 서리같이 늠름하여
直欲追蹤餓首陽 곧바로 수양산의 굶어죽음 따랐다네.
聖代褒崇彰節義 성세에서 높이 기려 절의를 표창하여
三韓億載樹綱常 우리나라 억만년에 강상을 세웠다네.
2) 현전하는 三綱行實圖 「忠臣圖」의 漢文本 문헌으로는 먼저 서울대도서관 소장
三綱行實忠臣圖(삼강행실도(충신편),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2, 부
록 영인)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세종 초간본과 거의 때를 같이하는 복각본이다. 諺
解本은 여러 본이 전하는데, 이 가운데 영국 국립도서관 소장 三綱行實圖(역
주 삼강행실도,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0, 부록 영인)가 가장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서울대도서관 소장 한문본에는 ‘吉再抗節’ 부분의 지면이 모
두 탈락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으나, 한문본 내용이 런던대 소장 언해본에 그
대로 옮겨져 있어서, 세종조에 초간한 한문본의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3) “洪武己巳冬, 注書吉再, 棄官歸家. 歲在庚辰, 恭定大王在東宮召之. 再至, 啓
于恭靖大王, 授奉常博士. 再啓東宮辭職, 恭定大王曰: ‘子之所言, 實關綱常.
但召之者吾, 而官之者殿下也. 宜辭於殿下.’ 再乃上書曰: ‘再擢第辛朝, 爲門
下注書. 臣無二主, 乞放歸田里, 終養老母, 以遂臣不事二姓之志.’ 明日, 恭靖
大王御經筵, 問知經筵事權近曰: ‘吉再抗節不仕, 未審古人何以處之乎.’ 近對
曰: ‘嚴光不屈, 光武從之. 再若求去, 則不如使之自盡其心之爲愈也.’ 恭靖大
王乃許歸, 仍復其家. 永樂戊戌, 殿下卽位, 承恭定大王命, 官其子, 宣德丙午,
贈左司諫大夫. 詩 (시 생략.)”
1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三綱行實圖의 이 찬영시는,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下의 ‘讚詠
諸詩’ 항목에서는 「三綱行實絶句」(2수)라는 제목의 ‘無名氏’ 소작 작
품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冶隱 사후 그를 추앙하기 위해 지어진 ‘國家’
소작의 공식적인 작품으로 규정할 수 있다. 三綱行實圖에 수록된 冶
隱의 행적과 찬영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후 冶隱은 우리 역사상
충신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4)
15세기 전기 태종조 조야 제현의 冶隱 찬영시 작품은 모두 冶隱 생
전에 산출된 것이며, 그 결실로서 冶隱 사후에 국가에 의해 지어진 三
綱行實圖의 찬영시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면, 1434년(세종 16) 三
綱行實圖 반포 이후 즉 15세기 후기 이후에 산출된 冶隱에 대한 역
대 찬영시의 양상은 어떠한지를 파악하는 데에 본고의 목적이 있다. 본
고는 15세기 전기 태종조 조야 제현의 冶隱 찬영시 작품에 대한 연구의
후속 작업으로 마련된 것이다.
다만 15세기 후기 이후에 산출된 冶隱 찬영시는 16세기 전후 사림
세력 재평가기의 찬영시와 18세기 전후 왕권 강화기의 찬영시로 대별될
수 있는데, 18세기 전후 왕권 강화기의 찬영시는 군왕 주도 하에 군신
의리의 이상적 모델을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산출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16세기 전후 사림 세력 재평가기의 찬영시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점5)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는 18세기 전후 왕권 강화기의 冶
隱 찬영시에 대한 검토는 別稿로 미루고,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
기까지 산출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여 冶隱 찬영시의 양상, 특히 찬영
4) 金勳埴, 「15세기 朝家의 吉再 追崇과 인식」(民族文化論叢 第50輯,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2), pp.3-31 참조.
5) 이에 대해서는 南在澈, 前揭論文에서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19
次제 목 首작 자 形
45 過金烏山詩 1 秋江 南孝溫7고
46 過先生閭 1 退溪 李滉 5고
[도표 1] 冶隱先生言行拾遺 ‘讚詠諸詩’
시의 작가 양상과 창작 경위를 검토하는 데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까지 산출된 冶隱 찬영
시 작품의 전반적 양상을 간략히 정리해볼 것이다. 이어 冶隱 관련 유
적지의 양상과 冶隱에 대한 사림 세력의 추숭 과정에 대해 살펴볼 것이
다. 이는 이 시기에 산출된 冶隱 찬영시의 작가 양상과 창작 경위를 효
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의 성격을 지닌다. 이를 바탕으로 하
여 冶隱 유적지 방문객들에 의해 지어진 찬영시 작품들의 작가 양상 및
창작 경위를 하나하나 검토해볼 것이다.
Ⅱ. 15C 後期∼17C 前期 讚詠詩
1434년(세종 16) 三綱行實圖 반포 이후에 산출된, 즉 15세기 후기
이후에 산출된 역대 제현의 冶隱 찬영시 가운데 15세기 후기부터 17세
기 전기까지 지어진 작품들은, 1615년(광해군 7)에 간행된 冶隱先生
言行拾遺 卷下의 ‘讚詠諸詩’ 항목과 1858년(철종 9)에 간행된 冶隱
先生續集 卷之下의 ‘讚詠諸作’ 항목 2곳에 수록되어 있다. 이제 15
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까지 산출된 冶隱에 대한 역대 제현의 찬영
시 작품의 전반적 양상을 도표를 통해 정리해보고자 한다.6)
6) 도표상의 ‘제목’과 ‘작자’는 원문대로 옮기고, 나머지는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다
만 ‘秋江 南孝溫’의 ‘溫’자가 원문에는 ‘昷’자로 되어 있으나 바로잡았다.
2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次제 목 首작 자 形
4 金烏山1 西厓 柳成龍5고
5 遺墟碑1 旅軒 張顯光 7절
6 吳山志感1 旅軒5고
7 又1 重峯 趙憲7율
8 又1 勿齋 孫舜孝7절
30 金烏遺墟竹賦1 旅軒 張顯光賦
[도표 2] 冶隱先生續集 ‘讚詠諸作’
47 過金烏山 1 容齋 李荇 5고
48 金烏山賦 1 孫昭 賦
50 先生故居 1 佔畢齋 金宗直 7절
51 金烏山 1 企村 宋純 〃
52 金烏山1 魚無迹 7율
53 金烏山1 鄭士龍 〃
54 金烏山1 一善 盧麟瑞 7절
55 粟谷遺祠1 府使 金涌〃
56 遊金烏山1 旅軒 張顯光 5절
[도표1]에 누락되어 있는 1∼44번 작품과 [도표2]에 누락되어 있는 1
∼3번 작품은 모두 고려말 제현의 冶隱과의 교유시 및 15세기 전기 태
종조 조야 제현의 冶隱 찬영시에 해당하는 것들로 필자가 선행 연구에
서 검토한 바 있다. 그리고 [도표1]에 누락되어 있는 49번 작품은 ‘無名
氏’ 소작 「三綱行實絶句」 2수인데, 이는 三綱行實圖 「忠臣圖」 ‘吉
再抗節’조에 수록된, 위 緖論에서 인용한 찬영시 작품과 같은 것이다.
세종이 1431년(세종 13) 11월 「忠臣圖」 안에 冶隱 찬영시를 지어서 넣
으라 하명하고, 1432년(세종 14) 6월에 三綱行實圖의 편찬이 완료되
었으니,7) 「三綱行實絶句」 2수가 산출된 때는 1431년 11월에서 이듬해
7) 世宗實錄 卷54, ‘세종 13년(1431) 11월 11일 임신 2번째 기사’. “上謂偰循曰: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21
6월 사이가 될 터이다.
그리고 [도표2]에 누락되어 있는 9∼11번 작품은 冶隱先生續集
卷之中의 ‘御製詩’와 더불어 君臣 간의 唱和를 통한 冶隱 찬영시에
해당하는 작품들로, 모두 18세기 전기 이후에 산출된 것들이다. 즉 군왕
주도 하에 군신 의리의 이상적 모델을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산출된, 18
세기 전후 왕권 강화기의 찬영시인 것이다. 그리고 [도표2]에 누락되어
있는 12∼29번 작품과 31․32번 작품은 모두 18세기 이후에 산출된 것
들로, 창작 경위를 두고 볼 때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에 산출된
위 「[도표1], [도표2]의 작품들을 계승하는 성격을 지닌다.8) 그러므로
冶隱先生言行拾遺 ‘讚詠諸詩’ 항목과 冶隱先生續集 ‘讚詠諸作’
항목에 수록된 冶隱 찬영시 가운데 이상 [도표1]과 [도표2]에 정리한 총
14분의 제현이 지은 총17수의 작품이 본고의 핵심적 검토 대상이 된다.
Ⅲ. 冶隱 遺蹟과 冶隱 追崇
위 [도표1], [도표2]에 소개된 17수의 冶隱 찬영시 작품의 제목을 살
펴보면 예외 없이 ‘金烏山’, ‘吳山’, ‘先生閭’, ‘先生故居’, ‘粟谷遺
祠’, ‘遺墟碑’, ‘金烏遺墟’와 같이 冶隱 관련 유적지로 보이는 명칭들
이 나타나 있다.9)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에 산출된 冶隱 찬영시
‘侍中鄭夢周, 守死不變, 注書吉再, 執節不移, 上疏乞退, 於所撰「忠臣圖」內,
竝圖形作贊.’” ; 世宗實錄 卷56, ‘세종 14년(1432) 6월 9일 병신 2번째 기사’.
“集賢殿新撰三綱行實以進.”
8) 이상 [도표2]에 누락되어 있는 9∼11번 작품, [도표2]에 누락되어 있는 12∼29번
작품과 31․32번 작품의 목록에 대해서는 南在澈, 前揭論文을 참조하기 바란다.
9) 이러한 양상은 [도표1], [도표2]의 작품의 성격을 계승하여 18세기 이후에 산출된
冶隱 찬영시 작품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冶隱의 文集 혹은 子孫을 염두에 두
2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의 작가 양상과 창작 경위를 상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冶隱 관련 유
적지 및 冶隱에 대한 사림 세력의 추숭 과정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
가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제 冶隱 관련 善山 또는 善山 인근 지
역의 유적지에 대해 살펴보며 그곳에서 진행되어 왔던 冶隱에 대한 추
숭 사업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冶隱 관련 유적지로는 크게 보면 鳳溪 마을, 栗谷 마을, 金烏山의
大穴寺 및 大穴洞, 藍山 지역, 吳山 지역 이상 다섯 곳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유적지로는 冶隱이 생장한 고향 마을 ‘鳳溪’가 있다.10) 鳳溪는
현재의 龜尾市 高牙邑 鳳漢里에 있는 마을이다. 冶隱은 1390년(공양
왕 2)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을 ‘鳳溪’로 돌아와서,11) 1403년(태종 3)
‘栗谷’으로 이사할 때까지 14년가량 이곳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5
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에 산출된 冶隱 찬영시에서는 물론이요, 특
히 15세기 전기 태종조 조야 제현의 冶隱 찬영시 작품에서는 ‘鳳溪’,
‘鳳溪水’, ‘鳳溪畔’, ‘鳳水’ 등의 시어가 빈출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冶隱의 고향 鳳溪를 말한 것이다. 세종조에 이르러 이곳 鳳溪에 冶隱
의 충절을 기리고자 旌閭碑가 세워졌다.12) 碑身의 앞면에는 ‘高麗忠
臣吉再之閭’라는 碑銘이 새겨져 있는데, 이 旌閭碑가 冶隱 사후 冶
隱의 고향 鳳溪 마을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자리를 잡아 현재까지 전하
고 있다.13)
고 쓴 몇 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목에 冶隱 관련 유적지로 보이는 ‘金
烏山’, ‘金烏遺墟’, ‘採薇亭’ 등의 명칭이 나타나 있다.
10)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上, 「年譜」. “至正十三年癸巳, 先生生于善山鳳溪里.”
11)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續蒙求」(眉巖 柳希春). “洪武庚午, 知國之將亡,
辭以母老棄官, 退居鳳溪, 除官不赴.”
12) 李荇 等,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二十九, 善山都護府, 人物, 高麗, ‘吉再’.
“世宗朝, 官其子師舜, 特贈再左司諫大夫, 以㫌其閭.”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23
둘째 유적지로는 冶隱이 1403년(태종 3)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거하며 살던 마을인 ‘栗谷’이 있다. 栗谷은 ‘밤실’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하는데, 현재의 龜尾市 道良洞에 있는 마을이다. 1403년(태종 3) 知
善州事인 春塘 李揚(1367∼1447)14)이 鳳溪가 외져서 살기에 불편하
다고 여겨 冶隱에게 栗谷의 田園을 마련해주었고, 경상도 관찰사 龜亭
南在(1351∼1419)가 栗谷에 집과 家廟를 지어주어 계속 살 수 있게
해주었다.15) 冶隱은 바로 이곳 栗谷에서 후진들을 敎授하였다.16) 그리
고 龜亭이 지어준 栗谷의 家廟는 冶隱 사후 冶隱의 祠堂으로 불렸는
바, “吉再祠가 金烏山 아래 仇㫆里에 있다.”17) 또는 “祠堂이 善山
仇旀里 栗谷洞에 있다”18)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冶隱의 祠堂이 무너져서, 1601년(선조 34)에 이르러 府使 金涌(1557
∼1620)이 祠堂을 중수하였다.19)
13) 현재 冶隱 旌閭碑는 1795년(정조 19)에 善山府使 華泉 李采(1745∼1820)가 鳳
溪 마을 출신 忠臣 冶隱 吉再, 孝子 裵淑綺, 烈女 趙乙生의 처 藥哥의 旌閭
碑를 모아 세운 善山 三綱旌閭 碑閣 내에 보관되어 있다. 善山 三綱旌閭는
199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3호로 지정되었다.
14) 春塘은 栗谷 李珥(1536∼1584)의 6대조이다. ‘栗谷’이란 명칭이 相符하니 기이
한 인연이라 하겠다.
15)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上, 「行狀」(朴瑞生). “癸未 (…중략…) 是年, 郡事李公
揚, 訪之, 謂地偏田瘠不宜居, 移錫栗谷園田, 以饒生養. (…중략…) 監司南龜
菴, 命州官營家廟, 州官督搆之. 先生仍營室廬, 以爲永世之居, 其祠堂之制,
祭享之儀, 一遵家禮.”
16) 金宗直, 佔畢齋集 彝尊錄 上, 先公師友 第三. “吉再.[海平人, 高麗忠臣,
本朝贈諫議大夫. 號冶隱. 善山之金烏山北仇弥里有田宅, 盖先生敎授之地.]”
* [ ] 안의 내용은 細注임. 이하 모두 동일함.
17) 李荇 等,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二十九, 善山都護府, 祠廟, ‘吉再祠’. “在
金烏山下仇旀里, 距府治二十里. 觀察使南在所建.”
18)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祠堂重修還安文」([萬曆癸未] 府使 柳德
粹). “(…전략…) [祠堂在善山仇旀里栗谷洞, 永樂元年癸未, 監司南龜菴在所
搆也.]”
19) 金涌, 雲川先生文集 卷之六, 「雲川先生年譜」. “二十九年辛丑.[先生四十五
2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한편 栗谷은 조선 후기부터는 ‘栗里’로도 불렸다. 원래 ‘栗里’는 冶
隱 찬영시에서 冶隱이 은거하는 ‘栗谷’을 陶淵明이 살던 ‘栗里’에 빗
대어 표현하던 것인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冶隱의 祠堂이 있는 栗谷
을 栗里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던 것이다.20) 현재 이곳 道良洞 720번
지에는 忠孝堂이 자리를 잡고 있다. 원래 忠孝堂은 龜尾市 吳太洞에
있던 吳山書院의 강당인데, 吳山書院이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후
1948년에 이곳 道良洞으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忠孝堂
안에는 ‘栗里田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셋째 유적지로는 冶隱이 鳳溪나 栗谷의 집을 떠나 잠시 머무르며
은거하던 곳인, 金烏山 중턱의 大穴寺 및 大穴寺 아래 大穴洞이 있
다. 大穴寺는 현재의 龜尾市 南通洞 산94번지에 있던 고찰인데 임진
왜란 때 폐사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海雲寺라는 사찰이 자리
를 잡고 있다. 大穴寺는 冶隱이 ‘숨어 지내던 곳[幽棲之所]’으로,21)
大穴寺 아래 몇 리쯤에 있는 大穴洞도 冶隱이 ‘은거하던 곳[隱居之
地]’ 또는 ‘거닐던 곳[所盤桓地]’으로 전한다.22) 冶隱이 大穴洞에 은
歲] 重建栗里遺祠. 始朝廷爲吉冶隱立祠以旌之, 壬辰亂, 爲兵火所殘, 先生爲
捐俸重修, 功未訖, 有吉姓者構逆于濟島, 先生以本府降號遞, 事將不擧. 九月,
還升爲府, 先生復任. 冬, 廟成, 先生親祭妥靈焉.”(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下,
「祠堂重修記」(社谷 高應陟) ;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祠堂重修奉
安文」(府使 金涌) 등 함께 참조.)
20)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求仁齋記」(知府 李在沆). “余於莅府之初, 卽爲往
拜于先生影幀於栗里, 則揭明陵御製, 雲漢輝暎, 榮光動人.” ;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採薇亭上樑文」(判書 徐命膺). “寄香火於栗里田園, 寔取地勢之饒
沃.”
21)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下, 讚詠諸詩, 「遊金烏山」(旅軒 張顯光). “竹有當年
碧, 山依昔日高, 淸風猶竪髮, 誰謂古人遙.[歲丁未, 尋山憩大穴寺. 寺乃先生
幽棲之所, 今其種竹尙在, 仍次先生閒居之韻而及之.]”
22)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求仁齋記」(知府 李在沆). “直一善府之南, 金烏山
之下, 有所謂大穴洞者, 卽高麗注書吉先生隱居之地也.” ; 冶隱先生續集 卷
之下, 「金烏錄」(臥遊堂 朴晉慶). “平時爲先生建院于大穴寺下數里許, 亦先生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25
거하며 거닐던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노년을 마친 곳
으로 알려져 있다.23) 이러한 이유로 1572년(선조 5) 이곳 大穴洞에 書
院이 설립되어,24) 1575년(선조 8)에 金烏書院이라는 額號와 서적이
하사되고,25) 1577년(선조 10)에는 宣祖의 賜祭文이 내려오기도 하였
다.26)
그러나 임진왜란 때 金烏山 大穴洞의 金烏書院이 소실되어 사라져
버려, 이 자리에 1768년(영조 44년) 冶隱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採薇亭을 건립하였다.27) 採薇亭 오른편에는 강학 공간인 求仁齋가,
採薇亭 뒤편에는 冶隱의 충절을 기린 숙종 御筆 오언절구와 冶隱의
影幀을 모셔놓은 敬慕閣과 遺墟碑閣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28) 원래
大穴洞의 金烏書院이 있던 자리에 遺墟碑가 있었는데 이것은 사라져
버렸고, 현재의 遺墟碑閣 안에 있는 遺墟碑는 1694년(숙종 20)에 다시
세운 것이다.29) 採薇亭은 현재의 龜尾市 南通洞 249번지에 남아 현재
까지 전하고 있다.30)
所盤桓地也.”
23)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善山請建書院文」. “創立書院于冶隱先生終老之
地金烏山麓, 庶幾使先生有享, 諸生有學.” ;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吳山書
院重建上樑文(旅軒 張顯光). “生于長于鳳溪之上, 鳳溪距此未一息程, 老於
終於烏山之中, 烏山瞻彼纔十里際.”
24)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金烏書院奉安文」([降慶壬申春] 鄕人 崔應
龍) 참조.
25)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請建書院牒」 참조.
26)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賜祭文」([萬曆丁丑春, 司僕寺正 朴應福 奉
命致祭]) 참조.
27)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採薇亭記」(左相 李溵) 참조.
28)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求仁齋記」(知府 李在沆) ;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敬慕閣記」(知府 徐秉淳) 등 참조.
29)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求仁齋記」(知府 李在沆). “遺墟碑中間毀泐, 亦無
文蹟, 而崇禎二甲戌, 府使金侯萬增改立新碑.”
30) 採薇亭은 2008년에 명승 제52호로 지정되었다.
2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넷째 유적지로는 大穴洞의 金烏書院을 옮겨서 새로 지은 곳인 藍山
지역이 있다. 府使 金涌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사라져버린 金烏山
大穴洞의 金烏書院을 1602년(선조 35) 藍山 아래로 옮겨서 새로 지
어,31)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32) 金烏書院은 고도
169m의 야트막한 야산인 藍山 아래의 甘川과 洛東江이 합류하는 지
점, 현재의 龜尾市 善山邑 院里 276번지에 남아서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33)
다섯째 유적지로는 冶隱墓가 있는 吳山 지역이 있다. 冶隱은 1419
년(세종 1) 4월 12일에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이듬해인 1420년(세
종 2) 정월 13일에 金烏山 동쪽이자 낙동강 서쪽인 烏浦 언덕에 장사
를 지내다.34) 冶隱墓는 곧 당시의 仁同縣 서쪽 14리에 있던 吳泰山
동쪽 기슭에 있었는데,35) 이곳은 현재의 龜尾市 吳太洞 산9번지에 해
당한다. 그런데 仁同縣監 謙庵 柳雲龍(1539∼1601)이 1585년(선조
18) 봄에 冶隱墓를 정비하고, 1587년(선조 20)에는 墓標를 ‘高麗門下
注書冶隱吉先生之墓’라고 고쳐 세웠다.36) 원래의 墓標는 1569년(선
31)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金烏書院重修奉安文」(旅軒) ; 金涌, 雲川先生文
集 卷之六, 「雲川先生年譜」. “三十年壬寅.[先生四十六歲] 移建金烏書院于
藍山. 院舊在烏山北麓, 地偏土瘠, 人不成村, 負笈者罕往, 人皆病之. 先生率
郡中名士盧公景任, 崔公晛, 院長金錫胤等, 相地于府東之藍山, 士皆樂赴, 院
旣成, 改號曰藍山, 崔公記其事, 先生有詩, 諸人和之.”
32) 宣祖實錄 卷206, ‘선조 39년(1606) 12월 26일 경신 2번째 기사’ 참조.
33) 藍山 아래의 金烏書院은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34)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上, 「行狀」(朴瑞生). “庚子正月十三日, 葬于金烏山東
洛江之西烏浦[烏浦之烏一作吳]之原.” ;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上, 「年譜」.
“永樂十八年庚子正月十三日, 葬于金烏山東洛江之西烏浦之原, 距仁同縣十
四里.”
35) 李荇 等,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二十七, 仁同縣, 塚墓, ‘吉再墓’. “[在縣西
十四里吳泰山].” ;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吳山書院事蹟畧」(縣監 柳雲
龍). “冶隱吉先生墓, 在縣西十四里洛江下流漆津之右.”
36) 이하 謙庵 柳雲龍의 冶隱 추숭 사업은 「謙菴先生年譜」에 정리가 되어 있다.(柳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27
조 2) 현감 趙天啓가 세운 것으로 ‘高麗忠臣吉再之墓’라고 되어 있었
다.37)
謙庵은 또한 1587년(선조 20) 冶隱墓 앞 낙동강 가에 冶隱의 충절
을 기리고자 砥柱中流碑를 세웠다.38) ‘砥柱’란 중국의 河南城 黃河
중류에 있는 砥柱山을 말하는 것으로, 黃河가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이 산에 부딪치나 쓰러지지 않는 데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굳게 지킨
冶隱을 이 산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비문이 닳아 알아
보기 어려워지자, 1780년(정조 4)에 砥柱中流碑를 다시 세웠다.39) 砥
柱中流碑의 현재 위치는 吳太洞 산1번지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40)
또한 현감 趙天啓가 1569년(선조 2) 冶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
원 건립을 시도하다가 중단되었는데, 謙庵이 1585년(선조 18) 冶隱墓
앞 吳泰山 기슭 蘿月峰 아래에 다시 서원 건립을 추진하여 1588년(선
雲龍, 謙菴先生文集, 「謙菴先生年譜」 卷之一. “十三年乙酉[先生四十七歲]
春, 修冶隱吉先生墓, 刱吳山書院.[吉先生墓, 在縣西漆津之右. 歲久蕪廢, 先
生慨然曰: ‘此庸非守宰責耶.’ 卽具牲醴, 展省而修治之. 又卜地於墓前吳奉山
麓蘿月峯下, 建院宇, 前後方伯, 皆致其力. 大丘府使權公文海, 善山府使柳公
德粹, 星州牧使柳公夢鼎, 都事李公憙, 亦皆資給相繼.] (…중략…) 十五年丁亥
[先生四十八歲]四月, 立砥柱中流碑, 改豎冶隱先生墓標.[蘿月峯之東, 有山斗
起入江心, 淸爽壯快, 先生欲立石其上, 以頌冶隱風節, 得中原夷齊廟砥柱中
流墨本於鄭寒岡仇, 伐石前刻四大字, 使文忠公記其陰. 又以冶隱墓前舊標,
直書冶隱姓諱, 事乖遵尙, 易豎小碣, 刻曰: ‘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之墓.’
爲文以祭之.] (…중략…) 十六年戊子[先生五十歲]三月, 吳山書院落成, 率境內
諸生講學.[取諸書院規及五禮儀, 以立學規, 爲院中永守之圖, 撰吳山志.]”)
37)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改竪墓標祭文」([萬曆丁亥] 縣監 柳雲龍) ;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吳山書院事蹟畧」(縣監 柳雲龍) 참조.
38)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下, 「砥柱碑陰記」(西厓 柳成龍) ;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吳山書院事蹟畧」(縣監 柳雲龍) 참조.
39)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改建砥柱中流碑記」(承旨 任希雨) 참조.
40) 砥柱中流碑는 1983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2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조 21)에 吳山書院을 완공하였다.41) 그런데 임진왜란 때 吳山書院이
무너져버려 1610년(광해군 2)에 다시 중수되었다.42) 그러나 1868년(고
종 5)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吳山書院의 강당인 忠孝堂은
1948년에 栗谷이 있는 道良洞으로 이건되고, 현재 吳山書院 자리에는
墓齋인 淸風齋만 남아 있다. 한편 吳山書院에서의 ‘吳山’은 곧 ‘吳泰
山’의 줄임말이다. 1577년(선조 10) 宣祖의 賜祭文에서 “저 吳山을 쳐
다보니, 그분께서 잠드신 곳(睠彼吳山, 曰維其藏.)”43)이라 하고, 1604
년(선조 37) 尹根壽의 祭墓文에서 “吳山의 한 모퉁이, 거친 수풀을 헤
쳐가니, 공의 산소가 여기로다.(吳山一方, 披厥榛荒, 繄公所藏.)”44)라
고 한 것에서 보듯, 冶隱墓가 있는 ‘吳泰山’을 ‘吳山’으로도 불렀다.
이상 鳳溪 마을, 栗谷 마을, 金烏山의 大穴寺와 大穴洞, 藍山 지
역, 吳山 지역 등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형태의 冶隱 유적지 정비 및 冶
隱 추숭 사업은 16세기 사림파 세력의 입지 획득 및 도통 체계의 수립
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三綱行實圖가 편찬되는
세종조 이후 조정에서는 冶隱의 아들 및 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리게 하
는 조치가 면면히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이러한 예우와는 별도로 冶隱
의 충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16세기 士林의 대두와 함께 생성되었다.
1517년(중종 12)을 전후해 靜庵 趙光祖(1482~1519)를 중심으로 사림
세력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연산군조의 戊午․甲子士禍 때 화를 입은
41)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吳山書院事蹟畧」(縣監 柳雲龍) ; 冶隱先生言行
拾遺 卷中, 祭文, 「吳山書院奉安文」([萬曆戊子夏] 西厓 柳成龍) 참조.
42)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吳山書院重修奉安文」(旅軒 張顯光) ; 冶
隱先生續集 卷之中, 「吳山書院重建上樑文」(旅軒 張顯光) : 張顯光, 旅軒
先生續集 卷之三, 上樑文, 「吳山書院忠孝堂上樑文」 참조.
43)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賜祭文」([萬曆丁丑春, 司僕寺正朴應福, 奉
命致祭.])
44)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尹根壽 祭墓文」([萬曆甲戌]).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29
寒暄堂 金宏弼(1454∼1504), 一蠹 鄭汝昌(1450∼1504) 등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한 명분의 근거로 圃隱 鄭夢周(1337~1392)와 冶隱의
절의가 거론되었다. 寒暄堂, 一蠹 등에 대한 일련의 추앙 운동은 사림
파 세력의 입지 획득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진행되었다.
즉 사림파 세력은 자신들의 입지 획득을 위해 앞 시기에 이미 공인된
권위를 끌어올 필요가 있어서, 三綱行實圖 「忠臣圖」에 오른 圃隱,
冶隱과 자신들의 학통상의 연계를 구체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己卯士禍를 거치며 계속 이어지다가, 乙巳士禍 후 약 20여년
이 지난 뒤 선조가 즉위하여 사림 세력의 진출이 재개되면서, 圃隱 →
冶隱 → 江湖 金叔滋(1389∼1456) → 佔畢齋 金宗直(1431~1492)
→ 寒暄堂 → 靜庵으로 이어진다고 평가되는 사림의 도통 체계가 거의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冶隱의 고향 善
山에서는 그를 추숭하는 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되었다.45) 16세기 전기
이후 사림 세력이 훈구척신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절의의 표상
으로 冶隱의 충절을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冶隱은 사림의 도통 체
계상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매김이 되었던 것이다.
Ⅳ. 遺蹟地 訪問客들의 讚詠詩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冶隱의 충절이, 사림 세력에 의해서는 16
세기 전기인 1517년(중종 12)을 전후하여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지만,
개별 작가들에 의해서는 훨씬 이전인 15세기 후기부터 이미 조명을 받
고 있었다. 이제 [도표1]과 [도표2]에 소개된 총14분이 지은 총17수의
45) 李泰鎭, 「吉再 忠節 追崇의 時代的 變遷」(韓國思想史學 4․5合輯, 韓國思
想史學會, 1993), PP.211-229 참조.
3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찬영시와 관련하여 이들 작품의 작가 양상 및 창작 경위에 대해, 각 작
품들을 창작 시기에 따라 새롭게 순서를 매겨가며 살펴보고자 한다. 우
리 역사에서 冶隱이 갖는 사상사적, 문학사적 위상을 고려할 때, 각 찬
영시의 작가 양상과 창작 경위를 면밀하게 파악하는 작업은 그 의의가
크다고 본다.
① 冶隱先生言行拾遺 48번 孫昭의 「金烏山賦」는 총64구에 이
르는 장편 賦인데, 孫昭라는 분의 문집이 따로 확인되지 않고, 현재로
서 「金烏山賦」는 冶隱先生言行拾遺에서만 발견이 된다. 필자는 여
기에서의 孫昭가 慶州 良洞 마을의 月城孫氏 入鄕祖로 유명한 松齋
孫昭(1433∼1484)라고 본다.46) 冶隱先生言行拾遺에서 孫昭의 이름
앞에 ‘松齋’라는 號가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冶隱先生言行
拾遺가 간행되는 1615년(광해군 7) 당시까지는 이 號가 널리 사용되
지 않아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47) 松齋는 佔畢齋 金宗直과 30년 知
己 執友로서, 松齋의 墓碣銘을 佔畢齋가 써줬다.48) 또한 松齋는 晦
齋 李彦迪(1491∼1553)의 外祖父가 된다. 그래서 松齋의 차남인 愚齋
孫仲暾(1463~1529)이 부친의 執友인 佔畢齋에게 수학하고, 晦齋는
外叔인 愚齋에게 수학하였다.49) 佔畢齋의 학문이 松齋의 아들인 愚
齋를 통해서 晦齋에게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46) 松齋 孫昭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서는 成宗實錄의 ‘雞川君 孫昭’의 卒記(成
宗實錄 권165, ‘성종 15년(1484) 4월 11일 정묘 1번째 기사’)와 佔畢齋의 「雞川
君孫公墓碣銘」(金宗直, 佔畢齋文集 卷之二) 등을 참고할 수 있다.
47) 1986년에 건립한 「朝鮮國精忠出氣敵愾功臣雞川君贈嘉吏曹判書諡襄敏松齋
孫先生神道碑銘」에 ‘松齋’라는 號가 보이는데, ‘松齋’라는 이 號가 언제부터 보
편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다.
48) 金宗直, 佔畢齋文集 卷之二, 「雞川君孫公墓碣銘」. “旣卒事, 碣于墓, 伯暾
等, 以書請銘於同知中樞府事金宗直, 宗直再與公同科第, 又同選承文院, 遂
爲三十年之執友, 知公爲詳, 義不可辭.”
49) 李彦迪, 晦齋先生集 「文元公晦齋先生年譜」 참조.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31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松齋의 冶隱 찬영시가 冶隱先生言行拾遺
에 수록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松齋의 「金烏山賦」는 제5․6구
에서 “내 일찍이 善山에서 유적을 방문하여, 드디어 험한 산에 행차를
멈추었네.(余甞訪遺迹於一善, 遂弭節乎山之岨.)”라고 한 내용으로 보
아, 松齋가 37세 되던 1469년(예종 1)에 善山 지근에 위치한 星州의
牧使50)로 나갔을 때 善山에 있는 冶隱의 여러 유적을 방문하고자 金
烏山에 갔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어진 작품이라 여겨진다.
② 冶隱先生言行拾遺 50번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先
生故居」는 칠언절구 1수인데, 佔畢齋集에는 「允了作善山地理圖,
題十絶其上」51)이라는 제목의 작품 제6수52)로 실려 있고, 續東文選
에는 「十絕歌」라는 제목의 작품 제5수인 「冶隱故居」53)로 실려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 성리학의 道統 체계로 볼 때, 佔畢齋는 부친 江湖
金叔滋를 통해 冶隱의 학문을 전수받은 분이다. 佔畢齋는 1476년(성
종 7) 가을에 모친 봉양을 위하여 善山府使가 되고, 이듬해 가을 善山
地圖誌를 찬하였다.54) 아울러 작품의 “금오산과 봉계수에 마음대로
노닐거니(烏山鳳水恣徜徉.)”라고 한 구절로 보아, 이 시는 佔畢齋가
善山府使로서 善山地圖誌를 찬하던 47세 되던 1477년(성종 8) 즈
음에 金烏山 및 鳳溪 마을을 방문하여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③ 冶隱先生續集 8번 勿齋 孫舜孝(1427∼1497)의 「吳山志感」
50) 成宗實錄 권165, ‘성종 15년(1484) 4월 11일 정묘 1번째 기사’. “成化己丑以親
老, 乞外拜星州牧使. (…중략…) 癸巳又乞外拜安東府使, 丙申遞授雞川君, 出
爲晋州牧使.”
51) 金宗直, 佔畢齋集 卷之十三, 詩.
52) 제6수의 작품 아래에 “吉再隱居金烏山鳳溪洞. 世言再之家婢, 舂粟時亦以詩詞
相杵.”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53) 申用漑 等, 續東文選 卷之九, 七言絕句, 「十絕歌」(金宗直).
54) 金宗直, 佔畢齋文集 卷之二, 「善山地圖誌」 참조.
3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은 칠언절구 1수인데, 勿齋集에는 「題仁同縣」55)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勿齋가 경상도관찰사가 된 것이 1485년(성종 16)이므로, 이 작품
역시 1485년(성종 16) 즈음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작품은
1615년(광해군 7) 冶隱先生言行拾遺 간행 시에 미처 수습되지 못하
였던 것을 1858년(철종 9) 冶隱先生續集 간행 시에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冶隱에 대한 그의 祭文 2편은 冶隱先生言行拾遺에 실려
있는데,56) 「題仁同縣」은 冶隱先生言行拾遺에서 누락되었던 것이
다.
작품의 “금오산 아래의 외론 무덤 길 간의는, 수양산과 짝하여 높은
풍모 떨치누나.(下有孤墳吉諫議, 首陽山對振高風.)”라고 한 내용으로
보아, 이 시는 勿齋가 59세 되던 1485년(성종 16) 즈음 仁同縣 소재
吳泰山 즉 吳山에 있는 冶隱墓를 찾아가서 지은 것이다. 勿齋가 「題
仁同縣」으로 제목을 붙여놓은 시를 冶隱先生續集 간행 시에 「吳山
志感」으로 바꾼 것은, 冶隱先生續集 간행자들이 가능하면 冶隱 유
적지 중심으로 詩題를 조정한 까닭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④ 冶隱先生言行拾遺 45번 秋江 南孝溫(1454∼1492)의 「過金
烏山詩」는 총28구의 칠언고시인데, 秋江先生文集에는 「過金烏山
」57)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조선 성리학의 道統 체계로 볼 때, 秋江
은 佔畢齋의 門人으로서 寒暄堂 金宏弼과 동문수학한 분이다.
念我鼻祖龜亭公 생각건대 우리 선조 귀정공 할아버진
先生德美談亹亹 선생의 그 덕행을 힘써서 말하셨네.
監司此道作家廟 경상도 감사 되어 가묘를 세워주니
遺說亦在長老耳 그 전설 아직까지 父老들이 말한다네.
曾於家訓飽聞之 일찍이 집안에서 수도 없이 들었기에
匹馬短童過故里 필마에 종 하나로 옛 마을 방문했네.
55) 孫舜孝, 勿齋集 卷之一, 詩.
56)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孫舜 孝祭文」․「又」 ; 孫舜孝, 勿齋集
卷之一, 雜著, 「祭高麗門下注書吉先生文」․「又祭文」.
57) 南孝溫, 秋江先生文集 卷之二, 詩.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33
또한 작품 내용 중에 위와 같이 언급한 부분에서 보듯, 秋江은 태종
조 조야 제현의 집단적인 冶隱 찬영시 창작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冶隱이 1403년(태종 3) 이후 은거하였던 栗谷 마을에 집과 家廟를 지
어주었던 龜亭 南在의 5대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秋
江은 평소 집안에서 冶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침 영남
지역을 유람하던 중 冶隱의 祠堂이 있는 栗谷 마을을 방문하여 이 시
를 지은 것이다. 창작 시기는 秋江의 생애 및 秋江先生文集에 수록
된 전후 작품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秋江이 영남 지역을 유람하던 때
인 34세 되던 1487년(성종 18) 가을로 볼 수 있다.58) 한편 秋江의 이
시는 태종조 조야 제현의 冶隱 찬영시 53수에 이어 제일 먼저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龜亭의 冶隱 찬영이 秋江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도 개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⑤ 冶隱先生言行拾遺 52번 魚無迹은 주지하다시피 연산군조에
주로 활동한 분이다. 칠언율시 1수로 되어 있는 魚無迹의 「金烏山」은
예로부터 인구에 널리 회자되어 온 작품이지만, 그의 문집이 전하지 않
아 상세한 창작 경위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淸江 李
濟臣(1536∼1583)은 魚無迹이 冶隱이 은거하던 ‘金烏山’을 지나가다
가 이 시를 지었다고 하였는데, 淸江 자신이 일찍이 金烏山을 지나다
보니 魚無迹이 지은 시의 함련 구절59)이 旌門 바깥 도리에 새겨져 있
58) 秋江先生文集(卷之二, 詩)에 보면, 지리산 雙溪寺에서 지은 「讀雙溪寺碑」시
가 「過金烏山」시 뒤에 곧바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智異山日課」(秋江先生
文集 卷之六), 「遊天王峯記[丁未]」(秋江先生文集 卷之四)에 보면, 秋江은
1487년(성종 18) 9월 하순에 지리산으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3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었다60)고 전하고 있다. 또한 松溪 權應仁(1517∼?)과 芝峯 李睟光
(1563∼1628)은 魚無迹이 冶隱의 ‘옛마을[故里]’에서 지었다고 하였는
데, 특히 松溪는 “수양산 고사리는 은나라 그 풀이요, 율리의 전원은 진
나라 옛터일세(首陽薇蕨殷遺草, 栗里田園晉故墟.)”라고 한 함련 구
절을 驚句로 꼽았다.61) 여기에서의 ‘옛마을[故里]’ 곧 ‘율리의 전원’은
冶隱이 1403년(태종 3) 이후 은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冶隱 祠堂이 있
는 栗谷 마을을 말한다.
⑥ 冶隱先生言行拾遺 47번 容齋 李荇(1478∼1534)의 「過金烏
山」은 총16구의 오언고시인데, 容齋先生集의 南遊錄62)에도 같은
제목으로 실려 있다. 南遊錄은 容齋가 33세이던 1510년(중종 5) 서
울을 떠나 남쪽의 金烏山, 伽倻山, 海印寺, 紅流洞 등지를 유람할 때
지은 시를 모은 것이므로, 「過金烏山」 역시 1510년(중종 5) 무렵에 容
齋가 金烏山을 유람하며 지은 것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容齋는 특히
1515년(중종 10) 이후 靜庵 趙光祖 등의 사림 세력과 적대한 바가 있
59) 이 시의 함련 구절에 대해서는 五洲 李圭景(1788∼1856)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治道類, 糶糴賑恤, 「糴唐米辨證說」.
“魏糜元「弔夷齊」曰: ‘首陽誰山, 而子匿之, 彼薇誰菜, 而子食之.’ 此不如我東
詩人魚無跡「題吉冶隱故里」: ‘首陽蕨殷遺草, 栗里田園晉故墟’之爲渾厚也.”)
60) 李濟臣, 淸江先生詩話. “有過吉注書金烏山詩曰: ‘落落高標吉注書, 金烏山
下閉門居, 首陽薇蕨殷遺草, 栗里田園晉故墟, 千載名垂扶大義, 至今人過式
前廬, 生爲男子雖無膽, 立立峰巒摠起余.’ 予嘗觀過金烏, 此詩第二聯, 刻在
閭表之楣矣.”
61) 權應仁, 松溪漫錄 上. “魚公無迹, 題吉注書故里一律, 其頷聯云: ‘首陽薇蕨
殷遺草, 栗里田園晉故墟.’ 用事切當, 橫絶古今. 或曰: ‘此聯本吉先生所做,
而魚演成之, 以其上下句法觀之, 似非出於一手. 斯言恐或然也, 第未知先生
集中果有此聯否.” ; 李睟光, 芝峯類說 卷十三, 文章部 六, 東詩. “魚無迹,
字潛夫, 賤庶而有文才. 題吉注書故里詩曰: ‘落落高標吉注書, 金烏山下閉門
居, 首陽薇蕨殷遺草, 栗里田園晉故墟, 萬古名垂扶大義, 至今人過式前閭, 男
兒生世誰無膽, 立立峯巒總起予.”
62) 李荇, 容齋先生集 卷之七, 南遊錄[庚午年].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35
다. 그러나 容齋 시의 구절에 “우뚝할사 길 선생 문하에서는, 깨끗하게
기상 아직 남아 있도다.(卓哉吉門下, 皎皎尙餘輝.)”라고 한 부분이 있
고, 1403년(태종 3) 冶隱이 은거하던 鳳溪 마을이 외지고 살기에 불편
하다고 여겨 冶隱에게 栗谷의 田園을 마련해주었던 知善州事 春塘
李揚이 곧 容齋의 고조부라는 점 때문에 容齋의 이 시가 冶隱先生
言行拾遺에 선록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⑦ 冶隱先生言行拾遺 53번 鄭士龍(1491∼1570)의 「金烏山」은
칠언율시 1수인데, 湖陰雜稿63)에도 같은 제목으로 실려 있다. 鄭士
龍의 이름 앞에 ‘湖陰’이라는 號가 따로 쓰여 있지 않은 것은, 명종조
의 權臣으로서 士禍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하여 귀양을 갔다가 죽은 李
樑(1519∼1582)이 湖陰의 門人이었던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
으로 추측은 되나 자세한 사정은 파악하기 어렵다. 이 시는 湖陰의 문
집 北上錄조에 수록되어 있는데, 北上錄은 그가 1523년(중종 18)
부제학에서 파직되어 宜春(宜寧)에 내려갔다가, 1528년(중종 23) 5월
다시 서울로 올라오며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北上錄에는 1528년
(중종 23) 5월 16일부터 6월 26일까지 지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金
烏山」에서 “자손들 잔미하여 뒤를 잇지 못하여도, 마을에선 그래도 고
사의 집이라네.(雲仍不嗣靑氊業, 鄕里猶稱白屋高.)”라고 한 구절로
보아, 湖陰의 이 시는 그가 38세 되던 1528년(중종 23) 5월 내지 6월
즈음 冶隱이 은거하던 金烏山 아래 鳳溪 또는 栗谷 마을을 방문하여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⑧ 冶隱先生言行拾遺 46번 退溪 李滉(1501∼1570)의 「過先生
閭」는 총20구의 오언고시인데, 退溪先生文集에는 「過吉先生閭」64)
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문집의 「過吉先生閭」란 제목 아래에
63) 鄭士龍, 湖陰雜稿 卷之一, 北上錄.
64) 李滉, 退溪先生文集 卷之一, 詩.
3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癸巳’라고 창작 연대가 표기되어 있어서, 이 시가 1533년(중종 28)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有村名鳳溪 봉계라는 마을이 하나 있어서
乃在山水間 산수 간에 자리를 잡고 있다오.
先生晦其中 선생이 그 가운데 숨어 사시니
表閭朝命頒 정려를 세우라고 조명 내렸네.
그리고 시 제목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언급한 부분이 있어, 退溪가
성균관에서 유학하다가 33세이던 1533년(중종 28) 가을 고향 禮安에
내려와 있을 때, 鳳溪 마을에 있는 冶隱의 旌閭를 방문하여 지은 것임
을 알 수 있다.
⑨ 冶隱先生言行拾遺 51번 企村 宋純(1493∼1583)의 「金烏山」
은 칠언절구 1수인데, 企村의 俛仰集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주목
을 요한다. 그런데 ‘企村’이란 宋純의 號는 退溪가 지어준 것으로,65)
企村은 退溪와 더불어 교유가 많았던 분이다. 企村이 선산도호부사로
재직 중이던 1555년(명종 10)에는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던 退溪와
더불어 편지와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66) 企村은 1530년(중종 25)에
65) 宋純, 俛仰集 卷之五, 附錄, 「有明朝鮮國故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
秋館事 企村先生宋公家狀」(黃胤錫). “號企村, 退溪李文純先生滉, 因其所居
而稱也. 亦號俛仰亭․新平, 則士林因其亭名貫鄕而稱也.” ; 宋純, 俛仰集
卷之五, 附錄, 「議政府右參贊宋公行狀」(宋煥箕). “號企村, 卽退溪先生, 因其
里名而謂之也. 又號俛仰, 乃士林後學, 以其亭名而稱者也.”
66) 宋純, 俛仰集卷之五, 附錄, 「議政府右參贊俛仰亭先生年譜」. “乙卯嘉靖三
十四年[明宗十年], 先生六十三歲. 退溪爲先生次俛仰亭七律三首.[小序云: ‘公
舊居在潭陽, 亭之勝槩, 獨擅湖南, 公時屈跡善山, 將辭歸, 寄書索詩, 用趙景
陽韻.]” ; 李滉, 退溪先生文集 卷之二, 詩, 「宋企村[純]俛仰亭二首」[公居在
潭陽, 時爲善山, 將辭歸, 寄書索題.] ; 李滉, 退溪先生文集別集 卷之一, 詩,
「宋企村[純]俛仰亭」[公舊居在潭陽, 亭之勝槩, 獨擅湖南, 公時屈跡善山, 將辭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37
경상도어사가 되고, 10년 후인 1540년(중종 35)에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십수 년 후인 1553년(명종 8)에 선산도호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金烏
山」의 轉句에 “십 년만에 산 밖 길을 다시 지나니, 맑은 바람 예전처럼
나를 스치네.(十載再經山外路, 淸風如昨灑行人.)”라고 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이 시는 企村이 48세 되던 1540년(중종 35) 경상도관찰사로
서 善山을 방문하여,67) 혹은 61세 되던 1553년(명종 8)에 선산도호부사
로 나갔을 때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⑩ 冶隱先生續集 4번 西厓 柳成龍(1542∼1607)의 「金烏山」은
오언절구 1수인데, 西厓先生文集에는 「仁同西軒十絶」 중 제2수의
「金烏山」68)이란 동일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지하다시피, 西厓는 退溪
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西厓는 45세 되던 1586년(선조 19) 3월 휴가를
얻어 고향 安東으로 돌아와 벼슬에서 물러나겠다고 상소를 올린다. 이
때 軍威의 南溪書堂이 완성되자 仁同과 가까운 이곳 南溪書堂에 거
주하며 형 謙庵이 현감으로 있는 仁同으로 자주 찾아가서 어머니를 뵙
곤 하였는데, 謙庵이 1587년(선조 20) 吳山에 있는 冶隱墓 앞 낙동강
가에 砥柱中流碑를 세웠을 때에 西厓는 「砥柱中流碑陰記」69)를 지었
고, 謙庵이 1588년(선조 21) 吳山書院을 완공하였을 때 西厓는 「吳山
書院奉安文」70)을 짓기도 하였다.71)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金烏山」
歸, 寄書索詩, 用趙景陽韻.]
67) 宋純, 俛仰集(卷之一, 詩)에 「次善山東軒韻[庚子, 慶尙監司時作]」이란 작품
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의 ‘庚子’는 1540년(중종 35)이다.
68)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卷之一, 詩.
69)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下, 「砥柱碑陰記」(西厓 柳成龍) ; 柳成龍, 西厓先生
文集 卷之十九, 碑碣, 「砥柱中流碑」.
70)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吳山書院奉安文」([萬曆戊子夏] 西厓 柳成
龍) ;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卷之十九, 祭文, 「吳山書院冶隱先生奉安祭文」.
71)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西厓先生年譜」 卷之一. “十四年丙戌.[先生四十五
歲] (…중략…) 三月, 乞假還鄕, 上疏請解職名. ○ 南溪書堂成. (…중략…) 自
3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은 西厓가 1586년(선조 19)에서 1588년(선조 21) 사이에 仁同 인근 善
山의 金烏山과 鳳溪 혹은 栗谷 마을을 방문하여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西厓先生文集의 「仁同西軒十絶」 중 제5수인 「冶隱
墓」72)는 謙庵이 1585년(선조 18) 冶隱墓를 정비한 사실과 관련하여
읊은 것이다.
⑪ 冶隱先生續集 7번 重峯 趙憲(1544∼1592)의 「吳山志感」은
칠언율시 1수인데, 重峯先生文集에는 「海平縣, 東望金烏山有感,
次古人韻[十五日]」73)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지하다시피, 重峯은
牛溪 成渾(1535∼1598)과 栗谷 李珥(1536∼1584)의 門人으로서 문묘
에 배향된 東國十八賢 중 한분이다. 1858년(철종 9)에 간행된 冶隱先
生續集에 보면, 圃隱 → 冶隱 → 江湖 → 佔畢齋 → 寒暄堂 → 靜
庵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嶺南學派에서는 晦齋와 退溪가 이어받고, 畿
湖學派에서는 牛溪 成渾(1535∼1598)과 栗谷 李珥(1536∼1584)가 이
어받는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74) 重峯先生文集의
체제로 보아 이 시는 重峯이 영남을 유람하던 중인 1590년(선조 23) 12
월 15일에75) 善山都護府의 屬縣인 海平縣에서 金烏山을 바라보며
南溪往覲仁同.[時謙菴公奉大夫人在仁同任所. 先生以河隈距仁同稍遠, 遂近
就南溪, 日使僮僕問安, 每旬親往定省, 而不由官路, 人不知爲宰相行也. (…중
략…) 撰吉冶隱「砥柱中流碑陰記」.[又有「吳山書院奉安文」.]”
72) “路傍一抔土, 云是注書原, 誰知封植者, 不是子與孫.”
73) 趙憲, 重峯先生文集 卷之二, 詩.
74)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求仁齋記」(知府 李在沆). “而圃隱鄭文忠公, 始闡
性理之學, 先生受業於圃隱, 由金江湖․佔畢父子, 以傳于寒暄․靜菴, 而晦․
退․牛․栗繼之, 世稱吾東道學正脈, 肇自先生者, 非過語也.” ; 冶隱先生續
集 卷之下, 「與安邦俊問答質疑書」(洗馬 金萬英). “烏川之學, 傳之冶隱, 冶
隱再傳而傳之一蠧․寒暄, 傳之靜菴, 其後有晦齋․退溪之作興, 而牛溪․栗
谷之出, 蓋得以接其傳也.”
75) 그의 문집을 보면 「海平縣, 東望金烏山有感, 次古人韻[十五日]」 앞에 「尙州道
中有感[臘月十四日]」이 수록되어 있고, 「尙州道中有感[臘月十四日]」 아래에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39
지은 작품으로 되어 있다.76)
⑫ 冶隱先生言行拾遺 54번 一善 盧麟瑞의 「金烏山」은 칠언절
구 1수인데, 一善 盧麟瑞에 대해서는 생몰 연대 및 행적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星湖 李瀷(1681∼1763)은 星湖僿說에서 「金烏山」의 작
자를 ‘一善 盧麟瑞’가 아닌 ‘趙麟瑞’로 밝히고 있는데,77) ‘趙麟瑞’ 역
시 생몰 연대 및 행적이 파악되지 않는다. 星湖가 언급한 ‘趙麟瑞’는
‘盧麟瑞’의 와전이 아닌가 한다. 다만 ‘一善’은 ‘善山’의 古名이니 ‘盧
麟瑞’는 善山 출신 인물로 여겨지며, 苔泉 閔仁伯(1552∼1626)이
1620∼1621년(광해군 12∼13) 즈음 전해들은 이야기 중에 善山 인근
大邱 지역에서 문학 활동을 하였던 ‘詩人 盧麟瑞’가 확인이 된다.78)
본고는 조심스럽게 여기에서의 ‘詩人 盧麟瑞’가 곧 ‘一善 盧麟瑞’가
“(按)以下九十一首, 遊嶺南時作.”이라고 하였다.
76) 그런데 당시 海平縣은 善山都護府의 屬縣으로 善山都護府의 동쪽 33리에 있고,
金烏山은 善山都護府의 남쪽 43리에 있었기 때문에,(李荇 等, 新增東國輿地
勝覽 卷之二十九, ‘善山都護府’ 참조) “海平縣에서 동쪽으로 金烏山을 바라
보며 느낀 바가 있어서 옛사람의 시에 차운하다.”라고 한 重峯 시의 제목은 후대
의 문집 편찬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킨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
다. 필자로서는 앞서 언급한 3번 勿齋의 「題仁同縣」이란 제목을 冶隱先生續集
간행 시 「吳山志感」으로 바꾼 것에서는 나름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海
平縣, 東望金烏山有感, 次古人韻[十五日]」이란 제목을 「吳山志感」으로 바꾼
것에서는 특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77) 李瀷, 星湖先生僿說 卷之, 詩文門, 「金烏山詩」. “趙麟瑞金烏山詩云: ‘漢波
不到商山上, 晉甲猶存栗里中, 嚴子能成光武大, 亦非虛老富春翁.’ 金烏卽前
朝吉冶隱之所居也. 以子陵取比, 語意不露, 詛嚼有味.”
78) 閔仁伯, 苔泉集 卷五, 「記聞」[多光海時事]. “往在庚申․辛酉, 聞大邱府鄕
校, 庭前有石上桐, 年久自枯, 府使取而作琴. 未久傳播, 隣邑儒生輩, 求得一
桐, 作杠而擔之, 植於前桐所在之處, 作文致祭以慰之, 其詞有那知今日再逢
伐樹之語. 且呈文於方伯, 方伯轉啓, 府使校官, 幷被拿科罪. 有詩人盧麟瑞作
詩弔之曰: ‘大饑儒道廢, 聖廟沒荊榛, 門閉山蜂吊, 庭空野鳥馴, 老蝸書破壁,
飢鼠噬殘茵, 誰伐堂前樹, 桓魋有後身.’ 時以旱饑, 盡放校生之入番者, 故詩
意云然.”
4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一善 盧麟瑞는 1615년(광
해군 7) 冶隱先生言行拾遺가 간행되던 당대의 인물로 여겨지는데,
冶隱先生言行拾遺에 당대의 인물인 ‘一善 盧麟瑞’의 「金烏山」, 府
使 金涌의 「粟谷遺祠」, 旅軒 張顯光의 「遊金烏山」이 나란히 순서대
로 실려 있어서, 一善 盧麟瑞의 「金烏山」이 府使 金涌의 「粟谷遺祠
」보다는 먼저 산출된 작품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수 있다.
⑬ 冶隱先生言行拾遺 55번 府使 金涌(1557∼1620)의 「粟谷遺
祠」는 칠언절구 1수인데, 府使 金涌은 곧 雲川 金涌을 말한다. 雲川
은 1599년(선조 32) 가을 선산부사로 부임하였다.79) 雲川은 앞서 언급
한 바와 같이 임란 이후, 선산부사로서 임진왜란때 소실된 현재의 道良
洞 栗谷 마을 冶隱의 祠堂을 중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소
실된 金烏山 大穴洞 金烏書院을 현재의 선산읍 院里의 藍山 아래로
옮겨 중건하기도 하는 등 冶隱 추숭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한 분이다. 「
粟谷遺祠」가 雲川先生文集에는 「栗里遺祠[冶隱遺址]」80)라는 제
목으로 실려 있다.
雲川은 退溪의 수제자인 鶴峰 金誠一(1538∼1593)의 조카로서, 退
溪의 손녀 眞寶李氏와 혼인을 하였다. 이 시는 그가 선산부사로 있던
1599년(선조 32) 9월 이후에 冶隱이 은거하던 栗谷 마을의 冶隱 祠堂
을 방문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府使 金涌
(1557∼1620)이 임진왜란을 겪으며 무너진 冶隱 祠堂을 중수한 것이
1601년(선조 34)이므로, 「粟谷遺祠」는 1599년(선조 32) 9월부터 冶隱
祠堂이 완성되는 1601년(선조 34)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⑭ 冶隱先生言行拾遺 56번 旅軒 張顯光(1554∼1637)의 「遊金
79) 金涌, 雲川先生文集 卷之六, 「雲川先生年譜」. “二十七年己亥.[先生四十三
歲] (…중략…) 秋, 拜善山府使.”
80) 金涌, 雲川先生文集 卷之一, 詩.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41
烏山」은 오언절구 1수인데, 旅軒先生文集에는 「訪金烏」라는 제목
으로 실려 있다.81) 冶隱先生言行拾遺의 「遊金烏山」 본문 아래 주
석에서 旅軒 스스로 이 시의 창작 경위를 밝혀놓고 있다. 즉 기․승구
에서 “대나무는 당시처럼 푸르게 있고, 금오산도 옛날처럼 드높이 섰네.
(竹有當年碧, 山依昔日高.)”라고 한 내용과 관련하여, “정미년 즉
1607년(선조 40)에 이 산을 찾아와 大穴寺(현재의 南通洞 海雲寺 자
리)에서 쉬었다. 이 절은 곧 冶隱 선생이 조용히 거처하던 곳인데, 지금
도 그때 심은 대나무가 남아 있다. 이에 冶隱 선생의 「閑居」82)시에 차
운하여 이 시를 지었다.”83)고 하였다.
⑮․⑯ 冶隱先生續集 5번 「遺墟碑」는 칠언절구 1수인데, 旅軒
先生文集에서는 찾아지지 않고, 冶隱先生續集 30번 「金烏遺墟竹
賦」는 총64구에 이르는 장편 賦인데, 旅軒先生文集에는 「冶隱竹賦
」84)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遺墟碑」에서의 ‘遺墟’와 「金烏遺墟竹賦」
에서의 ‘遺墟’는 모두 「遊金烏山」의 주석에서 밝힌바 있는, 旅軒이 방
문한 金烏山의 大穴寺 경내를 말하는 것이다.
「遺墟碑」 전․결구에서 “비석에는 前朝 글자 없어지지 아니했고, 송
죽에는 故國 풍경 여전히 그대로네.(石碑不沒前朝字, 松竹依然故國
煙.)”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곳 大穴寺 경내에 고려 말 冶隱 당시에
세워진 ‘遺墟碑’85)와 冶隱이 손수 심은 ‘冶隱竹’이 남아 있었던 것으
81) 張顯光, 旅軒先生文集 卷之一, 詩○五言絶句.
82)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上, 先生遺詩, 「閑居」. “盥手淸泉冷, 臨身茂樹高, 冠
童來問字, 聊可與逍遙.”
83) “歲丁未, 尋山憩大穴寺. 寺乃先生幽棲之所, 今其種竹尙在. 仍次先生「閒居」
之韻而及之.”
84) 張顯光, 旅軒先生文集 卷之一, 賦.
85) 大穴寺 아래 大穴洞의 1572년(선조 5)에 세워진 金烏書院이 있던 자리, 즉 1768
년(영조 44년)에 세워진 採薇亭 뒤편에 현재 남아있는 ‘遺墟碑’는 1694년(숙종
20)에 다시 세운 비석이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冶隱 遺墟碑는 冶隱이 大穴
4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로 여겨진다. 이는 「金烏遺墟竹賦」의 다음 내용에서도 확인이 된다.
遂杖藜而鞋芒 마침내 청려장에 미투리 신고
訪金烏於風雪 눈보라에 금오산 찾아 왔다네.
爰有竹兮山之阿 산기슭에 대나무 있는데
綠千秋兮一色 천추에 푸름이 한 가지로 변함없네.
云是冶隱之手栽 이것은 冶隱 손수 심은 거라 전해지니
凜寒風之如昨 늠름한 찬바람이 당시와 같네.
「遊金烏山」와 같이 「遺墟碑」와 「金烏遺墟竹賦」도 旅軒이 54세가
되던 1607년(선조 40)에 金烏山을 찾아가 大穴寺에서 쉴 때 지어졌을
터이다.
⑰ 冶隱先生續集 6번 「吳山志感」은 총16구의 오언고시인데, 旅
軒先生文集에는 吳山感興86)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지하다시
피 旅軒은 西厓 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 관직에 제수되었
으나, 49세 되던 1602년(선조 35) 工曹佐郎이 되어 周易의 교정에
참여하고 이듬해에 義城縣令이 되어 부임한 것 외에는 모두 나아가지
않고, 생애의 대부분을 자신의 貫鄕이자 故鄕 마을인 仁同87)의 仁義
坊88) 또는 善山의 月波村 등에서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寺에 은거하던 때인 고려 말에 大穴寺 경내에 세워진 것, 1572년(선조 5)에 세워
진 大穴洞의 金烏書院에 세워진 것이 있었는데 모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冶
隱先生續集 卷之中, 附錄, 「求仁齋記」(知府 李在沆). “舊甞立祠以祀先生,
中毀於兵燹. 後乃移建於藍山之陽, 而大穴舊里, 蕪沒榛莽, 無所表識. 世代久
遠, 文獻無徵, 未知何年何人刱立. 遺墟碑中間毀泐, 亦無文蹟.” 참조.)
86) 張顯光, 旅軒先生文集 卷之一, 詩○五言長篇.
87) 旅軒은 자신의 貫鄕 겸 故鄕을 ‘仁同府’의 ‘仁義坊’으로 밝혀놓고 있다.(旅軒
先生續集 卷之四, 雜著, 「仁義坊說」 참조.) 大東地志에 따르면, ‘仁同’은
원래 縣인데, 임진왜란 후 1604년(선조 37)에 都護府로 올렸다.
88) 현재의 龜尾市 仁義洞. 仁義洞은 法定洞으로 行政洞인 仁同洞의 관할 하에 있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43
전념하며, 冶隱 추숭 사업에도 많은 기여를 한 분이다.
旅軒은 46세 되던 1599년(선조 32)에 善山 月波村으로 이거하였다
가 53세인 1606년(선조 39)에 仁同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아울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사라져버린 金烏山 大穴洞의
金烏書院을 善山府使 金涌이 1602년(선조 35) 藍山 아래, 현재의 善
山邑 院里로 옮겨서 지을 때, 月波村에 우거하던 旅軒이 「金烏書院
重修奉安文」을 짓기도 하였다.89)
謙庵 柳雲龍이 1584년(선조 17) 9월부터 1590년(선조 23) 겨울까지
7년 동안이나 仁同縣監으로 재직하며,90) 앞서 언급하였듯이 1585년(선
조 18) 冶隱墓를 정비하고, 1587년(선조 20) 冶隱의 墓標 고쳐 세우고,
1587년(선조 20) 冶隱墓 앞 낙동강 가에 砥柱中流碑를 세우고, 1588
년(선조 21)에 冶隱墓 앞 吳泰山 기슭에 吳山書院을 완공하는 등 仁
同의 吳泰山 즉 吳山 지역에서 冶隱 추숭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였
는데, 仁同에 은거하고 있던 旅軒이 謙庵의 지우를 받으며91) 墓祭
文92)을 짓는 등 謙庵의 추숭 사업에 동참하였고, 특히 吳山書院을 건
축할 때에는 모든 일을 상의하여 정하였다고 한다.93) 또한 謙庵에 의해
다.
89)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金烏書院重修奉安文」(旅軒) ; 張顯光, 旅軒先生
文集 卷之十一, 祝文, 「金烏書院重建奉安文」.
90) 柳雲龍, 謙菴先生文集, 「謙菴先生年譜」 卷之一. “十二年甲申[先生四十六
歲] (…중략…) 九月 (…중략…) 除仁同縣監. (…중략…) 奉大夫人, 往任所.” (…
중략…) 十八年庚寅[先生五十二歲] 特命仍任.[觀察使及御史交上先生治行,
賜表裏, 命加一年.] 冬, 入爲廣興倉主簿. [先生在仁同七年乃去, 民思不已, 立
石頌德, 張文康公顯光撰碑銘.]
91) 張顯光, 旅軒先生續集 卷之一, 詩, 「贈柳謙庵」(五言長篇) 참조.
92)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淸明日墓祭文」(旅軒 張顯光).
93) 張顯光, 旅軒先生續集 卷之十, 附錄, 「趨庭錄」(子 應一). “柳公雲龍宰本縣,
獨禮遇之, 時爲冶隱建吳山書院, 凡事與之謀而定焉. 柳公卽西厓伯氏也, 其
後西厓屢薦先生於筵席.”
4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1588년(선조 21)에 완성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吳山書院이
1610년(광해군 2)에 이르러 중건될 때에는 旅軒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
았는바, 그는 「吳山書院重建上樑文」,94) 「吳山書院重修奉安文」,95) 「
吳山書院忠孝堂上樑文」96) 등을 짓기도 하였다. 이렇듯 旅軒은 1588
년(선조 21) 吳山書院을 처음 세웠을 때에도, 1610년(광해군 2) 吳山
書院을 중건할 때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駄癃來僻院 늙은 말로 외진 서원 찾아온 후로
半旬有餘日 닷새하고 며칠이 지나갔구나.
(…중략…)
呼孫奉筆硯 손자 불러 붓과 벼루 받들게 하고
聊寫胸中活 흉중에 넘치는 뜻 글로 쓰노라.
위에 언급한 「吳山志感」의 내용으로 보아, 「吳山志感」은 吳山書院
이 중건된 시점인 1610년(광해군 2) 그의 나이 57세 되던 무렵에 지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旅軒은 1615년(광해군 7)에 冶隱先生言行拾遺
가 간행될 때 跋文97)을 쓰기도 하였다.
94) 冶隱先生續集 卷之中, 「吳山書院重建上樑文」(旅軒 張顯光) ; 張顯光, 旅
軒先生文集 卷之十, 上樑文, 「吳山書院重建祠宇上樑文」.
95) 冶隱先生言行拾遺 卷中, 祭文, 「吳山書院重修奉安文」(旅軒 張顯光) ; 張
顯光, 旅軒先生文集 卷之十一, 祝文, 「吳山書院重建奉安文」.
96) 張顯光, 旅軒先生續集 卷之三, 上樑文, 「吳山書院忠孝堂上樑文」.
97) 張顯光, 旅軒先生文集(卷之十, 跋)에는 冶隱先生言行拾遺의 跋文이 「冶
隱先生文集跋」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45
Ⅴ. 結言
이상에서 본고는 15세기 전기 태종조 조야 제현의 冶隱 찬영시 작품
에 대한 후속 연구의 일환으로, 사림 세력 재평가기에 해당하는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 사이에 산출된 冶隱 찬영시 작품들의 작가 양상
과 창작 경위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논의를 진
행하였다. 2장에서는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까지 산출된 冶隱에
대한 역대 제현의 찬영시 작품의 전반적 양상을 정리해봄으로써, 冶隱
문집에 수록된 冶隱 찬영시 가운데 총14분의 작가가 지은 총17수의 작
품이 본고의 핵심적인 검토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3장에서는 冶隱 찬영시 총17수의 작품 제목에 예외 없이 선
산 및 선산 인근 지역의 유적지 명칭이 나타나 있음에 주목하여, 冶隱
관련 유적지의 양상 및 冶隱에 대한 추숭 사업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
다. 즉 冶隱의 고향 마을로서 冶隱이 1390년(공양왕 2)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1403년(태종 3)까지 14년가량 은거하였던 ‘鳳溪’ 마을, 冶隱
이 1403년(태종 3)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거하며 門人을 양성하였
던 ‘栗谷’ 마을, 冶隱이 鳳溪나 栗谷의 집을 떠나 잠시 머무르며 쉬던
곳인 金烏山 중턱의 ‘大穴寺’ 및 大穴寺 아래 ‘大穴洞’ 지역, 임진왜
란 이후 소실된 大穴洞의 金烏書院을 옮겨서 새로 지은 장소인 낙동
강 가 ‘藍山’ 지역, 冶隱墓가 있는 吳泰山 즉 ‘吳山’ 지역, 이상 다섯
곳의 冶隱 관련 유적지의 구체적인 양상 및 이곳 유적지에서 진행되어
왔던 冶隱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추숭 사업의 양상에 대해서도 살펴보
았다. 아울러 이곳 유적지에서 이루어진 冶隱 추숭 사업이 16세기 사림
파 세력의 입지 획득 및 도통 체계의 수립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루
어진 것임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어 4장에서는 3장에서의 논의한 다섯 곳의 冶隱 유적지를 방문한
4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次제목 작자 창작 시기
1(拾48) 金烏山賦 松齋 孫昭1469(예종 1) 이후, 星州牧使 시
2(拾50) 先生故居 佔畢齋 金宗直1477(성종 8) 무렵, 善山府使 시
3(續8) 吳山志感勿齋 孫舜孝1485(성종 16) 무렵, 慶尙監司 시
4(拾45) 過金烏山詩 秋江 南孝溫1487(성종 18), 영남 유람 시
5(拾52) 金烏山魚無迹 연산군조 즈음, 선산을 지나다가?
6(拾47) 過金烏山 容齋 李荇1510(중종 5) 무렵, 영남 유람 시
7(拾53) 金烏山湖陰 鄭士龍1528(중종 23), 선산을 지나다가
8(拾46) 過先生閭 退溪 李滉1533(중종 28), 禮安 거주 시
9(拾51) 金烏山 企齋 宋純
1540(중종 35) 또는 1553(명종 8), 慶
尙監司 또는 善山府使 시
10(續4) 金烏山西厓 柳成龍1587(선조 20) 무렵, 軍威 우거 시
11(續7) 吳山志感重峯 趙憲1590(선조 23), 영남 유람 시
12(拾54) 金烏山盧麟瑞 1599(선조 32) 이전, 인근 거주 시
13(拾55) 粟谷遺祠雲川 金涌1599(선조 32) 무렵, 善山府使 시
14(拾56) 遊金烏山旅軒 張顯光1607(선조 40), 仁同 거주 시
15(續5) 遺墟碑〃〃
16(續30) 金烏遺墟竹賦〃〃
17(續6) 吳山志感〃1610(광해군 2) 무렵, 仁同 거주 시
총14분의 작가가 지은 총17수의 冶隱 찬영시 작품들의 작가 양상 및
창작 경위를 하나하나 면밀하게 파악해보았다. 여기에서 창작 시기 순
서에 따라 분석한 작품들을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앞서서 살펴본 바와 같이, 1434년(세종 16) 三綱行實圖 반포를 통
해 冶隱의 충절이 국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추숭된 이후 사림 세력에
의해 冶隱의 충절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때는 16세기 전기인 1517
년(중종 12) 전후이지만, 위 도표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冶隱
의 충절이 개별 작가들에 의해서는 그 이전인 15세기 후기부터 이미 조
명을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47
그리고 이상 14분의 작가에 의해 지어진 17수의 찬영시 작품들의 작가
와 창작 경위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서, 어떤 작품은 작가가 경상도 관찰
사, 또는 선산 부사, 또는 인근 지역 목사로 재임할 때에, 어떤 작품은 작
가가 유람객으로서 영남 지역을 유람하던 중, 또는 나그네로서 선산 지역
을 지나가던 중에, 어떤 작품은 작가가 선산 또는 선산 인근에 거주 또는
우거하던 시절에 짓는 등, 제한된 작가 및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작가 양
상 및 창작 경위가 다양하게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와 같은 다양한 성격의 작가들에 의한 冶隱 유적지 방문은 일종의 종교
적 순례와 같은 어떠한 목적 하에 진행된 것임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이제 본고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부분으로, 후속 연구를 요하는 부
분에 대한 언급을 덧붙이며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5세기 전기 태
종조 조야 제현의 冶隱 찬영시,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 사이에
산출된 冶隱 유적지 방문객의 찬영시에 이어, 이제는 군왕 주도 하에
군신 의리의 이상적 모델을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산출된 18세기 전후
왕권 강화기의 冶隱 찬영시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15세
기 전기 태종조 조야 제현의 찬영시 작품에 대해 검토한 선행 연구에서
와 마찬가지로, 15세기 후기부터 17세기 전기까지의 찬영시 작품을 대
상으로 한 본 연구에서도 작품의 창작 경위와 작가 양상에 대해 분석하
는 데에만 연구 역량이 집중되고 말았거니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삼아서 해당 시기 찬영시 작품들에 대한 작품론적 연구 또한 필수적이
다. 본고는 미시적 사실에 대한 검토가 주를 이루는바, 여기에는 오류의
존재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제현의 질정을 바라는바, 후속
연구에서 바로잡을 것임을 약속해둔다.
‣주제어: 冶隱, 吉再, 讚詠詩, 善山, 遺蹟地
4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7권 2호
참고문헌
權應仁, 松溪漫錄(한국고전번역원 DB)
吉再, 冶隱集(한국고전번역원 DB)
金涌, 雲川集(한국고전번역원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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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綱行實圖(영국 국립도서관 소장 諺解本), 역주 삼강행실도, 사단법인
冶隱 吉再에 對한 歷代 讚詠詩 檢討(Ⅱ)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