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구유가 아니라 나귀의 구유입니다
최광희 목사
교회마다 성대한 추수감사절 잔치가 끝나면 일제히 성탄절 준비에 돌입합니다. 성탄절 준비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나게 하는 무대를 꾸미거나 성탄 트리를 세우고 예쁘게 꾸밉니다. 그리고 각급 주일학교에서는 노래와 율동과 성탄과 관련된 연극을 합니다.
그런데 성탄절만 되면 여러 성도들은 별 생각 없이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고쳐야 할 잘못된 표현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은 ‘말구유’가 아니라 ‘나귀의 구유’였기 때문입니다.
말이나 나귀나 비슷한데 뭘 굳이 따지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과 나귀는 크기만 좀 다를 뿐 비슷한 동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었든지 나귀의 우릿간에서 태어나 나귀의 구유에 뉘었든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말과 나귀는 그 상징성에서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지므로 아무렇게나 말해도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단지 예수님이 누추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귀가 갖는 더 중요한 상징성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당시에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말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집집마다 다양한 형태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어도 개인적으로 장갑차나 전차를 가진 가정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이란 반드시 전쟁에 사용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아무 동네에서나 기르지 않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르엘 평원에 위치한 므깃도 언덕을 위시한 여러 변방에 병거성을 두고 말을 관리했습니다(왕상 9:19). 솔로몬은 물론 예루살렘에 마병을 두기도 했는데 그것은 전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전시효과를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 같은 산지에서는 말을 타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대에는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던 가이사랴 같은 도시에 말과 병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베들레헴에는 말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말과 나귀가 주는 상이한 이미지입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교만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고 겸손과 순종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동물의 상징성으로 말하자면 여우와 늑대는 비슷한 동물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 그 이미지는 매우 다른 것과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를 늑대에, 여자를 여우에 비교하곤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예수님이 나귀의 우릿간에서 태어나 나귀의 구유에 뉘셨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은 나귀처럼 겸손하며 순종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일제히 스가랴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슥 9:9)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마 21:5)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이처럼, 교만과 호전성을 나타내는 말 대신에, 겸손과 순종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신 것은 탄생하셨을 때 나귀의 구유에 누이신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말과 나귀는 이와 같은 대조적인 상징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귀의 구유’를 슬그머니 ‘말구유’로 바꿔치기 할 뿐 아니라 바른 지적조차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지를 넘어 예수님을 향한 모욕에 해당됩니다.
이제 곧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이번 성탄절에서는 꼭 이 사실을 명심하여 구유 앞에서 ‘말’을 떼는 노력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미 습관이 되어 잘 고쳐지지 않더라도 반드시 ‘나귀의 구유’라고 고쳐 부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겸손과 순종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욕하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다가오는 성탄절, 겸손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도 겸손하고 순종적인 마음의 구유 하나씩 준비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러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