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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 선생(晦齋 李彦迪)
朴志薰
1, 자기 학문 세계를 이루었다
2, 조선 유학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저작을 남겼다.
3, 제왕학帝王學
4, 태극이 바로 이(理)이며, 이가 먼저 있고 기는 나중에 있다
5, 주리론主理論
1, 자기 학문 세계를 이루었다
이언적 선생은 본관은 경기도 여주 이씨로, 자는 복고(復古)로 불렸다. 처음 이름은 ‘적迪’으로 불렀는데 뒤에 중종의 어명으로 학문과 재주가 모두 뛰어난 선비를 칭찬하는 말 ‘언彦’을 더해서 ‘언적彦迪’이라 하였다. 성종 22년(1491년)에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 월성 손씨 대종가 서백당(書白堂)에서 태어났고, 명종 8년(1553년)에 유배지 강계(江界)에서 63세로 쓸쓸히 일생을 마쳤다. 10세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는 외삼촌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敦, 1464년-1529년)의 벼슬길을 따라다니며,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다. 우재는 3조 판서 등 높은 벼슬을 두루 지냈던 정치가이며, 점필재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운 문인으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였다. 중종 8년(1513년) 23세에 생원시에 처음으로 합격하고, 25세에 문과 별시에 지원해서 급제하고 경주향교의 교관으로 벼슬길에 처음으로 올랐다.
27세에 약관의 나이로 그 지역 선배 학자 망기당 조한보(忘機堂 曺漢輔) 와 망재 손숙돈 (忘齋 孫叔暾) 사이에 벌어졌던 ‘태극론太極論’ 논쟁에 뛰어들어 2년 동안 모두 네 차례에 걸쳐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 철학사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외래문화와 사상이 도입되어 들어온다고 해서 저절로 쉽게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사상과 학문은 기존 사고방식과 마찰이 발생하면서 큰 충격을 일으킨다든지, 혹은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쳐서 이해되고 자기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과 같은 중요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리학이 비로소 학문적으로 충분히 이해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논쟁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계속해서 이황(1501년-1570년)과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년-1572년)사이에 7년간에 걸쳐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에 관한 성리학 논변을 벌였다. 이어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년-1584년)와 성혼(牛溪 成渾, 1535년-1598년) 사이에도 ’사단칠정논변‘이 벌어졌다. 이 논변을 통해서 조선 학자들은 ’리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비롯한 철학적 문제를 더욱 깊게 이해하였다.
회재는 중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이조정랑과 사헌부 장령을 거쳐 사간원 사간까지 지냈지만, 당시는 사림들이 큰 시련을 맞이하였던 시기에 해당한다. 41세에 당시 실력자 김안로가 정계 복귀하는 것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파직 당하는 정치적 좌절을 맞게 된다. 당시 공신과 외척 세력이 왕권을 제어하고 정권을 휘어잡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이 뜻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도리어 그 자신이 여러 차례에 걸쳐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향으로 낙향해서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독락獨樂’ 이란『맹자』「진심장구 상」에서 찾았다. “옛날 어진 임금은 선(善)을 좋아하고 권세를 잊었다. 옛날 어진 선비만이 어찌 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회재는 독락당에서 물 흐르는 소리에 마음을 씻고 홀로 도를 즐기며 세상의 권세를 잊고 지냈다. 독락당에 앉아 사시사철 끊임없이 맑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계곡의 정취를 바라보며,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달래던 회재의 모습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이 때 그는「관심觀心」이란 시를 짓고 당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觀心 내 마음을 살피며
空山中夜整衣襟 한 밤중 빈산에서 의관을 바로잡으니
一點靑燈一片心 한 점 푸른 등잔 불빛은 한 조각 내 마음이네
本體已從明處驗 본체는 이미 밝은 곳을 체험하여
眞源更向靜中尋 참된 근원은 더욱 고요한 속을 향해 찾아 간다
독락당의 이미지는 이미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이상을 넓혀나가는 선생의 학문을 잘 나타내는 기념물이 되었다. 독락당에서 은둔 생활은 현실로부터 도피와 좌절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자기반성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맹자』에서“막히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열리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아마 회재는 벼슬길에 나가 세상을 다스리기보다는, 차라리 자연에 묻혀 학문을 기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을 지도 모른다. 물 흐르는 시내 물소리에 마음을 씻고 홀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학문의 도를 이루고, 아울러 자기 나름대로 이상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이 시기에 엄격한 주자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주자가 이룬 학문 세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신 나름대로 학문 세계를 이루었다. 회재는 주자가 역점을 두고 재정비하였던『대학장구大學章句』 ‘경일장 전십장經一章伝十章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주자는『대학』을 재정비하면서 없어졌다고 판단되는 내용, 즉「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자신이 직접 써넣었다. 회재는 이「격물치지보망」을 제외하고 ’경일장 전구장經一章 伝九章‘ 으로 다시 고쳐 썼다. “비록 주자가 다시 일어난다 하더라도 자신의 해석을 따를 것이다” 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회재는 주자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자의 학문을 인용한 부분이 많지만,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한 바탕위에 자기 나름대로 학문세계를 이루어내었다. 이러한 학문 태도는 주자의 한 마디의 말과 글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아들이는 훗날 후학의 학문태도에 비해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서슴치 않고 실행한 매우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보여 준다.
2, 조선 유학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저작을 남겼다.
드디어 47세에 김안로 일파가 중앙 정계에서 몰려나면서, 7년간 가까이 은둔 생활을 마치고 조정의 부름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 나갔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예조와 형조 판서를 거쳐 승승장구해서, 마침내 인종 원년에 정1품에 해당하는 의정부 좌찬성까지 이르렀다. 1545년 인종을 이어서 명종이 즉위하면서 대윤파와 소윤파의 대립으로 일어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윤원형이 주도하는 소윤파 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정계에서 밀려나 낙향하고 말았다. 을사사화(1545년)의 여파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2년 뒤 1547년에 소윤파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켰다. 그들은 경기도 양재역 벽에 권력을 휘두르던 문정왕후와 외척 세력들에 대해서 헐뜯는 글을 써서 붙이는 음모를 조작하였다. 회재는 이 벽서사건에 휘말려들어 평안도 강계 땅으로 유배당하였다. 명종 8년(1553년)에 유배지에서 63세 일생을 쓸쓸하게 최후를 마쳤다.
비록 유배 생활은 정치가로서 차마 참아내기 어려웠지만, 학자로서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대부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구인록求仁錄」을 포함한「회재집」7책 14권 등 우리 유학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저작을 남겼다.「회재집」은 그의 손자 이릉이 편찬 간행하였는데, 인조 9년(1631년)에 옥산서원에서 다시 간행하였다. 사림들이 상소를 올리어 복권을 주장해서 다시 명예를 되찾았다. 돌아간 뒤 13년 만에 다시 명예를 되찾아 영의정으로 뒤이어 증직되었고, 문원공(文元公)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명종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마침내 광해군 2년 1610년에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오현(朝鮮五賢)으로 공자 위패를 모시는 문묘(文廟) 종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회재가 돌아가신 후 20년이 지나서, 1572년에 당시 경주부윤(시장) 이제민이 적극적으로 경상 감사와 예조판서를 설득해서 옥산서원(玉山書院) 창건을 허락받았다. 선조 7년(1574년)에 옥산서원으로 이름지은 편액을 하사 받았고, 조정으로부터 공인되고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안동의 도산서원과 진주의 덕천서원(德山)과 더불어 영남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른바 삼산(三山)서원 가운데 하나의 서원이다.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성균관 문묘에서 종사받는 일인 일원(一人一院)의 기준에 맞추어 문을 닫지 않은 전국 47 개소 서원의 하나로서, 그대로 이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태어나고 선생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1839년 강당이 불타고 나서, 이듬해 다시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화재로 옛 건물이 거의 불타버렸으나, 곧바로 복구되었다. 한 때는 사립 옥산 학교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3, 제왕학帝王學
조선 중기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 사림들은 성리학의 경전을 모범으로 해서 조선 사회에 군자가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기묘사화(1519년)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해서 기준, 김정, 김식 등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사림들이 유배당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에 휩쓸려 희생당한 선비들을 역사에서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르고 존경하였다. “기묘 사림의 학문은 한 사회를 개혁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확고한 실천적 신념은 당시 공신과 외척 세력에게까지 성리학을 새롭게 이해시켰고, 자기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조광조를 비롯해 기묘명현들이 결국 현실 정치에서 실패하게 된 이유를 학문적 역량의 미흡에서 찾고 있다. 즉지치至治라고 하는 이상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이 불충분하였다는 자기반성이 있었다. 사림들은 기묘명현이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학문적 수준이 깊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학문 연구에 더욱 심화시키고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기묘사화 이후로 사림들은 기본적으로 기묘 사림의 실천 의지를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면서, 동시에 이론적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율곡 이이는 그의 저서「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기묘사림이 실패하였던 원인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을 이루고 실천하는 요점이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로,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였고, 아래로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 성리학이 발전하게 된 동기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 이외에,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그들은 기묘 사림이 실패한 원인으로 군주가 먼저 왕도 정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학문적 수양이 부족하였다는 문제점을 깨닫고, 군왕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이 사회를 개혁하는 길이 첫걸음이다라고 인식하고,제왕학帝王學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회재가 목적으로 하였던 현실적 이상은 ‘인정仁政‘ 의 실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주역』「계사하전」1장에서성인의 위대한 보물은 천자의 자리이다. 어떻게 해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인으로 지킨다라고 하였다. 이 인정을 시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는 조광조의 경우와 같이 다름 아닌 군주였다. 그래서 군주는 이 참다운 정치가 시행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수양하는 수기(修己)가 절실히 요구되며, 이 수양을 통해 인정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바로 안으로 군주가 성인(聖人)과 같은 인격을 갖추고 인정을 실현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하는 ’제왕학帝王學‘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이 인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군주의 수양과 국가 경영을 핵심으로 하는『대학』과『중용』에 활발한 연구를 하였고,「대학장구보유」,「속대학혹문」,「중용구경연의」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언적의 학문을 ’제왕학帝王學‘ 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재는「구인록求仁錄」4권 저서를 남겼고, 이「구인록」에서 유교사상에서 핵심이 되는 인仁에 대한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인仁의 뜻과 실현 방법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 시켰고, 유학의 근본정신을 밝히고 있다.『맹자』「진심장」상편에서노력해서 남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행하다면, 인을 추구함이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인仁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한없이 만물을 생명을 탄생시키는 마음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말한다(惻隱之心). 사람의 마음에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네 가지 본성을 갖추어져 있지만, 오로지 인(仁)만이 다른 덕을 모두 포함하고 하나로 관통한다.
일반 백성도 모두 사람으로서 마음과 마음속에 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만물과 더불어 생을 완성해 가고 있다. 이 생의 완성을 잘 보장해 주는 것이 좋은 정치 곧 인정이다. 이 인의 정치를 통하여 평화의 극치인 중화의 세계가 구현된다.천지의 마음은 만물을 생성하려고 하는 의지이다. 사람의 마음도 천지자연과 같이 만물을 생성하는 도를 그 바탕으로 지니고 있다. 이 측은지심이 모든 만물에 들어가게 되면, 천지 사이에 있는 생명체는 무엇이든지 그 생성하는 의미를 얻게 된다. 인仁이 지극히 발휘되면 천지의 마음과 자연히 감응해서 일체가 되고, 천지와 나란히 서서 만물을 낳고 기르게 된다.
4, 태극이 바로 이(理)이며, 이가 먼저 있고 기는 나중에 있다
회재의 태극론과 이기론(理氣論)은 주자의 학문과 비교해 큰 차이점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스스로 지은 호 ‘회재晦齋‘는 중국 성리학 이론 체계를 완성한 주자의 호 회암(晦庵 朱熹, 1130년-1200년)을 쫓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다. 회재의 학문은 퇴계로부터 “불교나 노장(老莊)사상 같은 이단의 올바르지 못한 학문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정통을 바로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회재는 불교와 도가적 해석을 바탕으로 해서 성리학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척하고, 주자 이론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성리학적 기초를 튼튼히 세웠다.
회재는 망기당 조한보가 외삼촌이 되는 망재 손숙돈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자기의 의견을 써서 조한보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한보가 다시 그 비평에 대한 답장을 보내오면서 논쟁 상대가 손숙돈에서 이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주자가 해석한 태극 개념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밝힌 논문「서망재당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堂機堂無極太極說後」를 저술하였다.
논쟁의 주제는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 1017년-1073년)의「태극도설太極圖說」의 첫머리에 나오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태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무극이란 원래 도가(道家)에서 나오는 말로서 도가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태극설 해설 가운데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의 하나이다.
주자가 태극을 리(理)로 해석하고 나서, 태극론은 성리학에서 가장 핵심적 기본 개념을 등장하였다. 태극이란 사람마다 사물마다 모두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며 근거가 되는 것이다, 태극은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를 의미하는데, 형체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무극이란 이러한 태극이 실체를 가지지 않는 그것을 형용한 것이다. 무극이 곧 태극이니, 태극 위에 또 다시 무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생성(生成)과 변화에는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이 있다. 생성하고 변화하는 중심이 다름 아닌 태극이다.『주역』에서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는다라고 하였다. 역에 태극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만물의 생성이 어떤 근거도 없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태극이 작용하는 원리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 만물은 각각 하나의 원리를 갖추고 있으니, 하나의 근원에서 같이 나온 것이다. 회재는「답망기당제일서」에서 이렇게 해석하였다.태극이란 곧 이 도의 본체가 되며, 만 가지 변화를 주관하는 것이다. 본말과 상하가 하나의 원리로 관통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태극은 본말과 상하, 만물에 관통되어 있는 하나의 원리(一理)이다. 현상계의 모든 구체 사물, 즉 하늘 ․ 땅 ․ 해와 달 ․ 바람과 우레에는 하나의 원리가 관통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구체 사물에는 그렇게 작용하게 하는 리(理)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기(氣)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태극은 음양을 낳고 변화하는 원리이므로, 사물에 있어서는 바로 리(理)이며, 음양 2기는 바로 기(氣)이다. “이것은 리가 기에 우선해서 기 위에 존재하고, 기를 떠나 독립해서 존재한다理在氣先”라는 입장에 있다.
5, 주리론主理論
회재는“태극이 바로 이(理)이며, 이가 먼저 있고 기는 나중에 있다” 라는「이선후기론理先氣後論」을 주장해서 주리론(主理論)에 입장에 있다. 이 주리론은 퇴계에게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으로 이어져 영남 남인계 성리학 이론 체계로 뿌리내렸다. 따라서 주자학이 조선에 전래된 이래로, 약 170년 만에 주자의 리(理) 철학이 비로소 이언적에 의해 철학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회재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개성에 살면서 경기도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 화담 서경덕(華潭 徐敬德, 1489년-1546년)은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해서, 신라 ․ 고려 옛 수도에서 그 시대 성리학의 양극적인 두 줄기를 이루었다.
주리론에서 이의 속성이 본래 그대로 순선(純善)해서 무악(無惡)하기 때문에, 그 순수함과 진실함을 지키고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개인의 엄격한 수양을 강조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갖추어져 있다. 어떨 때는 자기 몸을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사로운 욕심에 이끌리어 행동함으로서 악에 치우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사람은 꾸준한 수양과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며, 또한 수양을 통해서 욕심을 없애고 선한 본성을 되찾을 수 있다. 이가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될 경우에 가치론적으로 볼 때, 그것은 기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 곧 이는 오로지 순선하기만 한 것인데 반해서, 기는 선하기도 하고 또한 악에 치우칠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善)의 군자가 지배하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악(惡)의 소인을 철저하게 제거되어야 하며, 자신은 곧고 단호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주기론에서 기의 근원은 다름아닌 바로 태극이라고 설명한다. 서경덕은 우주의 근원과 자연세계를 모두 하나의 기로 해석하고, 기(氣)철학의 일관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이(理)철학적 입장에서 리는 기를 다스리지만, 기(氣)철학에서 기를 넘어서는 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기가 스스로 전개되는 현상 속에서 이를 보고 있다. 즉 이는 기의 한 속성으로, 이는 기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란 모든 현상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원리를 사회 구조의 변화에서 찾으려고 한다.
회재는 그 당시에 4대 사화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사림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하는 현장을 보고 겪었다. 이기론(理氣論)은 조선 중기 사림이 당면한 시대적 환경에서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할 것인가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이와 기는 각각 순선(純善), 겸선악(兼善惡)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것을 자신이 처한 현실과 접목해서 우주적 원리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주리론과 주기론은 이기론의 원리적 관계를 토대로 해서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를 본격적으로 철학화 하였을 뿐만 아니라, 뒤이어 등장하는 영남 남인계 퇴계학파와 경기, 호남 서인계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조선 성리학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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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伯崑, 『주역산책』 (서울: 예문서원, 2000).
이기백, 『한국사신론』 (서울: 일조각, 1989).
이형권, 『그리운 곳에 옛집이 있다』 (서울: 해들누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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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섭, 「태극기의 정체」(서울: 동아시아, 2001)
첫댓글 저의 5대조께서(이조참판 장인원) 철종 말 강계부사로 재임 하시면서 회재 선생이 귀양살이를 하시던 자리에 사달재(舍達齋)라는 건물을 새로 지어서 선비들의 강학처로 하였습니다.
사달(舍達): 송(宋)나라 정이(程頤 이천)가 부주(涪州)로 귀양 가면서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염여(灩澦)를 건너는데 풍랑이 심하여 배가 거의 전복되려 하였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으며 울었으나, 정이만은 유독 옷깃을 단정히 하고 편안히 앉아 평상시와 같았다. 배가 언덕에 정박하자 초부(樵夫)가 묻기를, “배가 위태로울 때 그대만이 유독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사(舍)해서 이와 같은 것인가, 달(達)해서 이와 같은 것인가?” 하였다. 정이가 대답하기를, “마음에 성경(誠敬)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자, 늙은이가 “마음에 성경을 지닌 것도 진실로 좋은 일이나 무심(無心)함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달(達)은 아침에 도를 들음이고, 사(舍)는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는 뜻이다. 《伊洛淵源錄 卷4》
사달재에 관한 자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