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집
양병집 /타박네
타박타박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러 찾아간다
물이 깊어 못 간단다 물 깊으면 헤엄치지
산이 높아 못 간단다 산 높으면 기어 가지
명태 줄라 명태 싫다 가지 줄라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무덤가에 기어 기어 와서 보니
빛깔 좋고 탐스러운 개똥 참외 열렸길래
두 손으로 따서 쥐고 정신 없이 먹어보니
우리 엄마 살아생전 내게 주던 젖맛일세
엄마무덤 바라보며 울며울며 집에오니
따스하던 그방안은 싸늘하게 식었는데
우리엄마 나를안고 재워주던 이불속엔
엄마모습 보이지않고 눈물자욱 남아있네..
외국곡에 가사를 달아 번안곡을 만든 양병집(51.본명 양준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대수.김민기와 더불어 저항가수로 불리는 그는 대중보다는 음악평론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잃어버린 전설' '서울하늘', 독립군의 노래를 정리한 '부활가' 등 그가 부른 노래들과
이연실의 '소낙비', 서유석의 '타박네' 등 그가 만든 노래들이 나름대로의 색깔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는 85년 '양병집 넋두리Ⅱ'에 담긴 '오늘 같은 날' '우리의 김씨' 등을 예로 들며
"양병집은 사라져가는 모던 포크의 마지막 불꽃을 묵묵히 태웠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 양병집에게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한대수였다.
국산품 애용운동이 한창인데도 사회지도층 자녀들은 외제 쓰기에 바빴던 시절.
그도 외제 화장품만 쓰던 누나들과 한바탕 싸우고 '두바퀴로∼'의 노랫말을 완성했다.
시대적인 감상이 음악으로 파고들기 전까지 노래는 그저 취미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 종로의 우미관 옆 음악감상실 '디쉐네',
명동에 자리한 미도파백화점 5층의 '미도파 싸롱'을 드나들었다.
68.69년 당시에는 이인성 악단과 이길봉 악단이 활동했고 현미.위키리.유주영이 노래하던 곳이다.
: "70년대에는 외국곡의 악보가 흔하지 않았어요.
귀로 듣고 스스로 악보를 만들어 연주해야했죠".
양병집은 낯선 음악을 악보로 옮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번안곡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그는 정태춘과 전인권을 세상에 알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무명의 정태춘이 75년 그를 불쑥 찾아왔다.
당시 양병집은 자신의 노래들이 금지곡이 되는 바람에 가수활동을 접고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평택에서 곡을 준비해온 '단꼬바지' 차림의 정태춘. "김민기씨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짓고 있어 대신 저를 찾아왔더군요.
얼굴이 순박해 보였는데 당시 불러 보였던 '보리고개' '겨울나무'가 마음에 와닿았어요"
: 양병집은 81년 서울 신촌의 라이브업소 '뮤직모노'를 열었다.
전인권.정태춘을 비롯해 '동서남북' 등 노래꾼들이 이곳에서 기타를 치며 그와 어울렸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데모, 걸핏하면 휴교하는 대학의 악순환.
가게 앞에 경찰차가 진을 쳐 1년만에 문을 닫았다.
: 그는 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끈질기게 음악인생을 반대하신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주셨던 구전을 정리한 노래 '타박네'는 그의 대표곡이 되기도 했다.
99년 13년만에 다시 돌아온 양병집은 지난해 호주 영주권을 반납했다.
: 그는 최근 노래 '16년차이'로 유명한 김하용덕의 새앨범을 내놓는 등 음반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말로는 포크가 죽었다, 들을 음악이 없다고 하지만 애써 음악을 내놓으면 아무도 듣지 않아 결국 망하게 돼요.
그러나 미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음반기획자로 활동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 그는 '포크'가 단지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70년대 음악쯤으로 단순화한 것에 불만이 크다.
포크의 강한 저항정신은 사라지고 발라드에 통기타를 입힌 것이 마치 포크음악인양 인식돼왔기 때문이다.
: 세월이 흘렀어도 청바지 차림으로 특유의 포크가수 분위기를 풍기는 양병집. "변한 것 없다"는 요즘 세상에
그는 또 어떤 노래들을 선보일까.
: 글 김희연 기자
◎어두운시대 참인간 찾아나선 한국 모던포크의 마지막 불꽃
: 양병집은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과 함께 초창기 한국 모던 포크의 4인방으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이 음악 언어가 요구하는 세계관의 독자적인 형상화 역량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탓에 마땅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60년대말부터 시작된 그의 작업이 주로 밥 딜런이나 우디 거스리 같은 서구 모던포크 거장들의 음악을 번안하거나
우리의 전통적인 구전음악을 되살리는 데 치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물론 이 작업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디 거스리의 노래를 번안한 〈서울 하늘〉이나
최근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한 〈역(逆)〉은
우리의 현실이 스며든 최고의 번안으로 꼽힐 만하다.
그리고 그가 채보한 〈타복네〉나 광복군의 노래 〈엄마 엄마 아 엄마〉의 ’다시 부르기’는 민중들의 옛 유산에서
오늘의 의미를 읽어내는 모던 포크 고유의 강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는 단지 그것만으로 자신의 이력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대학가의 전투적인 저항가들도 웅장한 키보드 사운드를 채택하기 시작하면서
70년대의 통기타 소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있던 80년대 중반에 양병집은 사라져 가는 모던 포크의 마지막 불꽃을 묵묵히 태운다
. 별 반응 없이 끝났던 1980년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앨범의 흥행은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집의 속살은, 전작은 물론이고 어떤 한국 모던 포크의 걸작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한마디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의 제2차 혁명의 포문이 불당겨지던 1985년의 숨은 보석이다.
: 포크 록의 전형적인 담담함으로 앨범은 문을 연다.
〈오늘 같은 날〉은 ‘비나 왔으면’ 좋을 답답한 일상에서 ‘어리석은 위로’라도 받기 위해
‘십원짜리 동전을 깨끗이 닦아’ 전화하지만 ‘결국’ 집으로밖에 갈 수 없는,
도시의 중심에서 떠밀린 자신을 소개한다.
: 그러나 이 누추한 자아는 그저 누추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어지는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와 〈우리의 김씨〉를 보라. 본래 제목이 〈구인광고〉인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는
정태춘의 곡으로, 양병집 특유의 걸쭉하고 텁텁한 목청을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을 소리 없이 밝히는 진정한 인간을 찾아 나서며
이에 대한 응답이 바로 ‘도매상이 모여 있는 시장길에서 물건을 싣고 있는 우리의 김씨’인 것이다. ‘
옷차림은 남루하고 키는 작지만’, 그리고 ‘내년에는 큰 딸아이 시집 보내고 마누라의 속치마도 사다 줘야’하는
그의 김씨는 바로 어두운 시대를 끝까지 살아남는 자신의 초상인 것이다.
: 비록 자작곡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앨범은 양병집이 단순히 서구 자유주의 문화의 ‘전달자’로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그 문법을 기반으로 한국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소리를 창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자신의 소리를 찾은 것이다.<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첫댓글 추억을 들추어 봅니다,
덕분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