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3
절을 폐하고 쓴 명당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구나.
가야산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연군의 묘입니다.
남연군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이며 고종의 할아버지로 남연군의 묘는 서쪽에는 가야산의 석문봉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둘러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예산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그 사이에 봉긋이 솟아 있습니다.
조선이 안동 김씨가 국권을 쥐고 흔들 때 왕족 중에 쓸 만한 인물이 보이면 그대로 두지 않고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던 살벌한 시기였기에 흥선군은 살아남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하며 전국을 유람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는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왕기가 서린 명당으로 이장하고자 유명한 풍수가와도 어울렸는데 그 때 당대의 유명한 풍수가 정만인(鄭萬仁)을 만났습니다.
남연군묘의 이장(移葬)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황현의 <매천야록>과 예산의 향토사학자 박흥식의 <예산의 얼>에 전하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흥선군이 정만인에게 당대에 발복할 제왕지지(帝王之地)를 물으니 가야산 동쪽자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烏棲山)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하자 바로 가야산을 택했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만대에 걸친 복락보다 안동 김씨에게 복수 할 수 있는 임금의 자리가 더욱 절실하였을 것입니다.
남연군 묘의 형국은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복호형(伏虎形)이면서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에 해당하는데 가야산 서편에 있는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왼쪽으로 옥양봉, 만경봉이 덕산(德山)을 거쳐 청룡세를 이루고 오른쪽으로 가사봉, 가엽봉, 원효봉으로 이어져 금청산 월봉에 뭉쳐 백호세를 이루며 감싼 자리에 남연군 묘가 위치합니다.
천하 명당에도 흠결이 있기 마련입니다.
상제형의 명당에 청룡과 백호가 매우 높고 웅장하여 위에서 묘를 위압하는 형국으로 청룡, 백호가 묘자리(穴藏)를 누르면 아들이 아버지를 손님이 주인을 신하가 임금을 압박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고종은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그의 아들 순종 대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복호형의 명당에는 호랑이 발에 해당하는 산봉우리가 발가락에 해당하는 바위를 드러낸 채 서 있는 형국으로 호랑이는 다른 짐승을 공격할 때 발가락을 치켜드는데 그래서인지 고종이 즉위한 이후 천주교도와 엄청나게 많은 동학교도가 청, 일 그리고 조선의 군대에 의해 무참히 죽어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락호 대원군의 욕망은 왕권을 잡는 것이었기에 결정적인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장을 강행하기로 하고 가야산을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그 명당자리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고 혈처(穴處)에는 금탑(金塔)이 우뚝 서 있어서 흥선군은 할 수 없이 이장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짜고 하나하나 차례로 일을 벌려나갔습니다.
먼저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가야산 가야사 금탑 뒤의 산기슭에 임시로 옮겨 놓았는데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여리 길의 이장(移葬)은 종실(宗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라 상여가 지나가는 지방의 백성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이때 사용한 상여는 맨 마지막으로 운구를 한 ‘남은들’ 사람들에게 기증되어 가야산에서 덕숭산으로 이어지는 고개자락에 상여도가를 짓고 그 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최근에 남연군 묘 옆에 복사본을 유리로 만든 보관실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명당 근처에 임시로 가묘(假墓)를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가야사 절을 폐하는 일로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첫째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가야사 주지에게 주고 승려들을 쫓아내게 하고 불을 질렀다는 설과, 둘째는 충청감사에게 중국의 명품 단계벼루를 주고 가야사 승려들을 쫓아내게 하고 불을 질렀다는 설인데 절에 불을 지르고 승려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충청감사와 가야사 주지 모두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가야사를 폐한 후 금탑을 깨부수고 그 자리에 남연군묘를 쓴 뒤 도굴을 우려하여 석수들을 동원하여 바위를 십 척 이상 파고 관을 안치한 후 석회를 삼백 포나 쏟아 부었으니 그야말로 요즘의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후일 통상 요구를 두 번이나 거절당한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가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의 도움으로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앞세워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행담도를 거쳐 아산만으로 들어와 삽교천을 따라 덕산 구만포(九萬浦)에 내려 천주교도 김여강(金汝江) 등 8명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묘에 이르러 도굴을 하려했으나 돌병풍처럼 둘러쳐진 강회를 뚫어내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