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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서애 류성룡이 출생한 의성 사촌마을 만취당 종가 종부와 대산 이상정이 기록한 만취당 행장 이야기를 찾아가다-2탄
해은
2018. 8. 14. 18:34
의성사촌마을 만취당 종가의 종부가 되다.
이전 1탄에서 잠시 이야기 하였지만 저자의 재종고모는 살아 있다면 구십은 아니지만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부석사 무량수전만큼 오래된 사가의 건물중 최고로 오래된 건물이 만취당이다.
저자의 직계 세 증조부중 백부의 후손은 서울로 중부후손은 대구 부산으로 숙부의 후손도 대구 부산으로 이주를 하였다.
625라는 한국전쟁이전과 이후 가문의 수난사가 계속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글을 올려볼까 한다.
만취당종가 종부이었던 저자의 재종고모는 시집을 만취당종가에 갔었고 지금의 만취당 종가 종손은 즉 저자의 형님은 저자의 큰형과 친하게 지냈었다.
시집간 재종고모는 아들하나를 낳고 재미있게 알송달송 살아볼 시간도 없이 일찍 부군(남편)이 졸하였다.
지금이야 돌싱이나 재혼이 많지만 옛날 우리나라 문화는 좀처럼 이런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구에서 교편을 잡아 하나뿐이 자식을 기르고 훈육하였으며 시간이 흐르고는 대대로 내러오는 시댁의 종부로써 소임을 다하고자 의성사촌마을 만취당옆 점곡초 지금은 폐교된 곳에 교편을 잡고 만취당종가를 다시 일으켰다.
의성사촌마을에 있는 만취당의 행장 중 퇴계학을 집대성한 한산이씨 소퇴계 대산 이상정의 기록은 나라사랑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것이라 생각되어 삼가 게시해 본다.
대산집(大山集) 행장(行狀)
만취당 김공 행장〔晩翠堂金公行狀〕
공은 휘가 사원(士元)이고 자는 경인(景仁)이며, - 처음의 자는 경방(景龐)이다. -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상락(上洛)이 본관이다.
증조 휘 광수(光粹)는 성균관 진사이고 호는 송은(松隱)이다.
증조비는 영양 남씨(英陽南氏)와 순천 장씨(順天張氏)이다.
조부 휘 당(溏)은 참봉을 지냈다.
조비(祖妣)는 죽산 안씨(竹山安氏)이다.
부 휘 세우(世佑)는 선무랑(宣務郞)으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지냈다.
비(妣)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상락 김씨(上洛金氏)는 고려에서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충렬공(忠烈公) 휘 방경(方慶)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분이 비조(鼻祖)이다. 5대를 지나 휘 자첨(子瞻)에 이르러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이 고려 명신의 후예라는 이유로 관북 감목관(關北監牧官)을 제수했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가솔을 거느리고 문소(聞韶 의성(義城)) 사촌(沙村)으로 들어왔다.
자손들이 이로 인해서 사촌에 거주하게 되었다.
증조인 송은공(松隱公)은 지취(志趣)가 고상하고 식견(識見)이 뛰어났다.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해서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목격하고 마침내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뜻을 추구하였다. 사림에서는 공을 서원에 제향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기해년(1539, 중종35) 10월 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자애로웠다. 한번은 아이들과 밖에서 놀다가 까막까치, 솔개가 시끄럽게 모여 있기에 가 보니 사람이 얼어 죽어 있었다. 측은한 생각이 들어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돌아와 집안 어른에게 고하니, 집종에게 시신을 묻어 주게 하였다. 가난한 이웃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청해서 그들을 구제하는 데 힘을 다했다.
공은 부모를 섬길 때에는 순순히 부모의 뜻을 따라 시봉하였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다. 친척을 만나면 곡진한 은정과 도의를 갖추었고 향리(鄕里)를 출입할 때에는 공경과 겸양의 태도를 갖추어 예법을 지키니,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을 아끼고 공경하였다.
공은 매일 송은공 곁에서 의리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조금 자라서는 마음을 다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15)에는 도산(陶山)으로 문순공(文純公) 이 선생을 찾아뵙고 그곳에 머물며 가르침 받기를 청하였다. 이 선생이 〈무이관선재(武夷觀善齋)〉 시를 적어 주면서 “그대는 나의 이 뜻을 알겠는가?”라고 하자, 공이 절을 하고 그 시를 받아 마음에 새겼다. 공은 이때부터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에만 마음을 쏟았다.
신유년(1561)에 성재공(惺齋公) 금난수(琴蘭秀)와 간재공(艮齋公) 이덕홍(李德弘)이 도산에 학사를 마련하여 생도를 수용할 방도를 의논하여 편지를 띄워 공을 불렀다.
공이 곧바로 비용을 마련하여 회합에 나아갔으나, 선생께서 “지나치게 번잡한 일이니 하지 말라.”라고 하여 그만두었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퇴계 선생이 청량산(淸凉山)의 연대사(蓮臺寺)에 놀러갔다.
공도 문하의 제공들과 선생을 따라가 시를 짓고 이름을 적어 두었다. 제공이 공의 시에 화답한 것이 많으나, 공의 시는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다.
을축년(1565) 겨울에는 만월암(滿月庵)에 머물렀고, 정묘년(1567) 여름에는 연대사에 머물렀다.
무진년(1568, 선조1) 봄에 다시 월란암(月瀾庵)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간재(艮齋), 조공 기백(趙公起伯 조진(趙振)) 등과 교유한 일이 많았는데, 의심이 생기면 그때마다 첨지(籤紙)를 붙여 두었다가 질문하고, 깨달음이 있으면 내용을 기록하고 마음에 깊이 새겨 두었다. 또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사람이 타고난 기의 청탁(淸濁) 등에 대해서 질문을 보내면, 선생께서 답장을 보내 조목조목 해설을 해 주면서 마지막에는 또 깊은 사색과 연구가 가져올 병통을 경계시켜 주었다.
공은 평소 병을 자주 앓았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오랫동안 산사에 머무르면서 학문의 노고와 부실한 식사 때문에 설사를 심하게 앓게 되었다.
그러자 퇴계 선생께서 몸소 증상을 확인하고 처방을 내려 주면서 이르기를,
“공은 기가 몹시 부실하여 추위나 더위로 인한 환우를 벗어나기 어렵다. 고인들도 학문을 하는 것을 고생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어찌 병이 들어 부모를 근심시키는 데까지 이르겠는가.”
하였다.
경오년(1570) 겨울, 선생께서 후학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다. 공이 급히 달려가 곡을 하였는데, 문인들은 무슨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스승을 위해서 상복을 입지 않았으니 어길 수 없습니다.”
하여, 흑립(黑笠)에 백의(白衣), 백대(白帶)를 하고 상사를 치렀다. 공은 장례와 대상(大祥)에 동문의 제공들과 연명(聯名)으로 제사를 받들며 3년 동안 잔치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송은공(松隱公) 이래로 집안의 생계를 돌보지 않아 부모를 봉양하는 일도 종종 끊기게 되었다. 이에 공이 탄식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살면서 의롭지 않은 일로 봉록을 구해서는 안 되고 오직 본분에 힘쓰면서 허물이 없기를 바라야 한다. 하물며 언행을 신중히 하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농상(農桑)에 힘쓰는 것, 이 세 가지는 우리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 있으니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몸가짐을 바로 하고 독서에 힘을 쏟는 여가에, 농사일에 힘쓰도록 종들을 독려하였다.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고 쓰고 남은 것을 조금씩 보관하여 흉년을 만날 때마다 원근의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식구 수에 맞게 빌려 주었다. 가난하여 갚을 수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번번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문서를 불태웠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김씨 의창(金氏義倉)’이라고 하였다.
경진년(1580, 선조13) 8월에 인의공(引儀公)의 상을 당했다.
임오년(1582) 6월에 모부인(母夫人)이 돌아가셨다. 현의 북쪽에 있는 화곡산(禾谷山) 아래를 장지로 정했으나 백여 호쯤 되는 촌민들이 모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이 공에게 아버지의 표제(表弟)가 되는데, 당시에 진보 현감(眞寶縣監)으로 있으면서 조문을 왔다. 누군가가 본현(本縣)에서 먼저 허락을 받을 것을 권하자, 공이 이르기를,
“나는 평소에 사적인 일로 정사(政事)에 간여하고자 하지 않았다. 또 유공(柳公)이 어찌 궁핍한 자가 자기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억지로 나를 도와주려고 하겠는가.”
하고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감이 이 얘기를 듣고 은밀히 촌민들을 회유하여 송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는 두 아우와 삼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섬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팔도가 와해되고 임금이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인근 여러 마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병사를 규합하여, 각 지역에서 신망이 높은 사람을 정제장(整齊將)으로 삼고 근시재공(近始齋公)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공은 의성 정제장(義城整齊將)으로서 안동(安東)의 일직현(一直縣)에서 회합하여 경주(慶州)에 이르렀으나, 대장이 진중에서 죽어 결국은 해산하고 돌아왔다.
병란의 여파에 기황까지 겹쳐 유랑민이 길에 가득하자 공은 집안 재물을 팔아 죽을 쑤어 먹이고 곡식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구휼하고, 부녀자가 찾아오면 집안사람에게 대접하도록 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 덕분에 생명을 부지한 자가 아주 많았다. 혹시 토지나 노비로 사례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여러분이 제힘으로 먹고살 수 없기에 내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도와주었다. 어찌 보답을 바랐겠는가.”
하였다.
공이 살던 사촌(沙村)은 여러 성씨가 함께 사는 마을이었다. 공이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을 동규(洞規)로 삼고 수십 년 동안 이를 시행하니, 온 마을이 돈후한 풍속을 갖추게 되었다.
집 서쪽에 만년송(萬年松)이 한 그루 있는데, 바로 송은공이 호를 취한 나무이다. 공이 이 소나무 아래에 조그만 당을 짓고 ‘만취(晩翠)’라고 편액을 걸어 세한(歲寒)의 생각을 실었다.
공은 만력(萬曆) 신축년(1601, 선조34) 6월 14일에 집에서 생을 마쳤으니, 향년 63세였다. 현의 북쪽에 있는 마산(馬山)의 감방(坎方)을 등진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공의 선취(先娶)인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전적(典籍)을 지낸 남숭(南崧)의 따님이며, 1남 4녀를 두었다. 아들 준(濬)은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을 지냈고, 딸은 전적 권극명(權克明), 사인(士人) 김지선(金之善), 권득선(權得善), 안창(安昌)에게 시집갔다. 재취(再娶)인 일직 임씨(一直任氏)는 딸 하나를 낳았고, 그 딸은 사인 이집가(李執可)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딸 하나를 두었으며, 조강(趙綱)에게 시집갔다. 직장 준은 5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상원(尙瑗)은 호군(護軍)을 지냈고, 상기(尙琦)는 장사랑(將仕郞)이었으며, 그 아래로 상각(尙珏), 상빈(尙玭), 상린(尙璘)이 있다.
딸은 문박(文博)과 이조명(李朝鳴)에게 시집갔는데, 두 사위는 모두 진사이다. 권극명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권연(權瑌), 권해(權瑎), 권적(權玓)이다. 김지선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김창세(金昌世)이다. 권득선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권욱(權稶)이다.
안창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안세환(安世瓛), 안세숙(安世璹), 안세호(安世瑚)이다. 이집가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이순미(李純美), 이수미(李粹美), 이문미(李文美), 이전미(李全美), 이시미(李時美)이다. 조강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조유정(趙惟精), 조유일(趙惟一), 조유성(趙惟誠), 조유함(趙惟諴), 조유청(趙惟淸)이다.
증손은 남자가 11명인데 이름은 요좌(堯佐), 성좌(成佐), 굉좌(宏佐), 몽좌(夢佐), 순좌(舜佐), 석좌(碩佐), 영좌(英佐), 홍좌(弘佐), 그리고 생원인 양좌(良佐),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낸 성좌(聖佐), 현좌(賢佐)이다. 오늘날 5대손까지 이르렀는데 백 명에 가까우며, 문학과 학문을 수학하여 온유한 고가(古家)의 유풍을 지니고 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매우 후덕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들과 사물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장한 후에는 학문의 힘을 빌려 이러한 자질을 완성하였기에, 존심(存心)과 덕행(德行)이 모두 천리(天理)와 민이(民彝)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억지로 노력하여 성과를 이루고자 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슴에 품은 덕량을 펼치지 못하고 초야에 묻히고 만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공은 심오한 뜻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굶주리고 궁핍한 자들을 구휼하여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고, 향약을 조직하고 규약을 마련하여 교화가 다른 이에게 미쳤다. 이러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공효가 얼마나 드러났는가는 단지 만난 때가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본분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이 선생께서 도산(陶山)에서 도를 강론하실 때, 제자의 예를 갖춘 이들은 모두가 한 시대의 영재(英材)들이었다. 공이 강석을 왕래하면서 의심나는 것을 묻고 가르침을 청했던 것이 십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었으니, 스승의 가르침과 자신의 연마를 통한 깨우침은 반드시 진보를 거듭하고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문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항으로 보자면, 문답한 다섯 조항의 주지(主旨)는 모두가 조화의 근원을 탐색하고 있다.
이 선생이 전후로 경계를 내린 것도 매번 깊은 사색이 가져올 병통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으니, 이것만으로도 공이 고명한 경지를 마음속으로 완미하고 뜻을 독실하게 하여 부지런히 노력한 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중년 이후 은일 자적하던 때에는 매우 전일하게 평이하고 진실됨을 추구하였다.
공은 저술로 자임하지 않은 데다가 집안의 우환이 연이어 발생하여 공의 훌륭한 언사와 아름다운 자취가 모두 사라져 전하지 않는다.
어찌 옛사람의 말과 행동을 논하고자 하는 후세의 선비들이 애석해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공이 본디 《대학질의(大學質疑)》, 《어록해(語錄解)》 등을 저술했으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다섯 조항의 문답은 이 선생의 필적이 모두 남아 있으나, 그중 두 조항은 조공(趙公)의 답문(答問)에 수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공이 조공과 함께 산사(山寺)에 머물면서 서로 질문했던 사항을 옮겨 적어 반성의 자료로 삼으려 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다 문집을 엮으면서 조공의 편지 속에 끼어 들어갔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때문에 공의 글이 《퇴계집》에서 퇴계 선생이 문하의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에 들어 있지 않게 되었고, 공이 학문을 전수받은 실제를 상고할 수 없으니 더더욱 애석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선생이 일찍이 주자 문하의 제자들을 논하기를,
“문하에 나아가 배우기를 청하고 책을 들고 가서 의문점을 물어 스승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은 비록 학업의 성취 정도나 식견에 따라 다르더라도, 스승의 답변은 억제시키거나 치켜세우며 나아가게 하거나 물러나게 하는 가운데 지극한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지극한 가르침은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니, 어찌 사도(斯道)에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의 도는 주자를 바로 이은 것이다. 그런데 공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의문점을 물었으니, 이는 곧 주자의 문하에 책을 들고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다섯 조항의 문답은 스승이 전하고자 하는 뜻과 억제시키거나 치켜세우며, 나아가게 하거나 물러나게 하는 가르침을 드러내 밝힌 것이니, 공이 어찌 사도(斯道)에 도움이 되지 않겠으며, 성인의 문하에 드는 인물이 아니겠는가.
곤손(昆孫)인 성균관 유생 김종덕(金宗德)이 부형(父兄)들의 명을 받아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기를,
“선조의 사적(事跡)이 거의 사라지고 한두 개의 가첩(家牒)만 남아 있습니다. 일이 자꾸 늦춰지고 사람이 영민하지 못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덕이 높은 선배에게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징험할 방도가 없으니, 선생께서 부디 한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나는 아득한 후대 사람이라서 공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어찌 감히 고루한 말을 꾸며 착오하는 죄를 저지르겠는가. 그래서 두 번씩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사양했지만, 부탁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어려서 공의 후손과 교유하면서 그 집안에 오래도록 전해진 기록을 보고 공이 사문(師門)에서 학업을 전수했던 실상을 살펴본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는 공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알고 있으니, 만약 분수와 역량만 헤아려 계속 사양한다면 머뭇거리는 사이에 혹시 알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행적을 기록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의 채택을 기다리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을 듯하였다. 마침내 참람함이나 두려움을 따지지 않고 망녕되지만 글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도산의 강석에서 문답을 주고받은 사적에 대해서는 특별히 감개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세상의 입언(立言)하는 군자들이 혹시라도 취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사문(師門)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으리라.
[주-D001] 상락 김씨(上洛金氏) :
상락은 안동의 옛 이름인데, 구 안동 김씨 중에 대대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진 명인(名人)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졌다. 구 안동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삼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삼는다.
[주-D002] 사림에서는 …… 제향하였다 :
김광수(金光粹)는 의성(義城)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주-D003] 무이관선재(武夷觀善齋) 시 :
주희가 지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8수 중 관선재를 읊은 시이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 짊어지고 어디에서 오셨는가? 오늘 아침 자리를 함께했네. 날마다 공부하느라 여력이 없으니, 서로 함께 노력하세나.〔負笈何方來 今朝此同席 日用無餘功 相看俱努力〕”
[주-D004] 겸암(謙菴) …… 되는데 :
김사원(金士元)의 할아버지 김당(金唐)과 유운룡(柳雲龍)의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남매간이다. 즉, 유운룡이 김사원의 아버지인 김세우(金世佑)의 고종사촌 동생이다.
[주-D005]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 :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네 형제가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 여씨향약인데, 여기에 주희가 가감하고 주석을 단 것이다.
[주-D006] 세한(歲寒)의 생각 :
《논어》 〈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구절에서 온 말로, 역경 속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007] 문답한 다섯 조항 :
《퇴계집(退溪集)》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데, 음양오행(陰陽五行)에 관한 문답임을 〈답조기백대학문목(答趙起伯大學問目)〉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출처 번역 : 고전번역원 | 정명수 (역) | 2012
대산집(大山集)
행장(行狀)
만취당 김공 행장〔晩翠堂金公行狀〕
원문
晩翠堂金公行狀
公諱士元。字景仁。初字景龐。 慶尙道安東府上洛人。
曾祖諱光粹。成均進士。號松隱。
妣英陽南氏。順天張氏。
祖諱溏。參奉。
妣竹山安氏。
父諱世佑。宣務郞通禮院引儀。
妣義城金氏。
上洛之金。肇自高麗僉議中贊忠烈公諱方慶。寔爲鼻祖。五世而至諱子瞻。我 恭定王。以前朝名臣。後授關北監牧官。不受。挈家入聞韶之沙村。子孫因居焉。松隱公有高志遠識。嘗遊太學。見燕山政亂。遂輟擧南歸。隱居以求志。士林享于院祠。公以嘉靖己亥十月二日生。幼而天性慈仁。嘗與羣兒出遊。見烏鳶噪集。往視有凍死人。惻然解衣以覆。歸告于長者。命家丁收瘞。見隣里有貧乏者。必請于父母。極力以賙救。公事父母。承顔順志。無故不離其側。遇親戚。曲有恩義。出入鄕里。恭敬退讓而有禮。無少長皆愛敬焉。日侍松隱公。聞義方之訓。稍長。尤篤志向學。庚申。謁文純李先生于陶山。請留受業。先生書贈武夷觀善齋詩曰。君能喩吾此意否。公拜受服膺。自是絶擧子業。專意爲己之學。辛酉。惺齋琴公蘭秀。艮齋李公德弘。議構齋于陶山。以容學徒。爲書以邀公。公卽具資力往會。先生以過爲煩張不可乃止。甲子。先生遊淸凉蓮臺寺。公與及門諸公。從先生有詩及題名。諸公多和之。公詩逸不傳。乙丑冬。棲于滿月庵。丁卯夏。棲于蓮臺。戊辰春。又棲于月瀾庵。蓋與艮齋及趙公起伯多同遊。有疑輒籤標質問。有得則籍記而銘佩。又以陰陽五行人生受氣淸濁等說發問。先生復書條解。末又戒以苦思深求之病。公素善病。至是久寓山寺。攻苦食淡。患泄痢彌甚。先生親自檢方示劑謂曰。公氣不甚實。未免寒暑之患。古人爲學。雖曰勤苦。何至生病以貽父母之憂乎。庚午冬。先生棄後學。公亟往哭。門人疑於所服。公曰。古者師不立服。不可越也。以黑笠白衣帶從事。葬及大祥。與同門諸公。聯名致祭。三年不與宴樂。自松隱以來。不事家業。親養往往不繼。公歎曰。士子處世。不可非義干祿。惟盡力於本分。爲庶幾寡過。况愼言行。勤讀書。務農桑三事。我師敎之所存。敢不勉乎。飭躳劬書之暇。課僮力田。量入爲出。稍存其贏餘。每値凶歲。使遠近艱食者。計口稱貸。有貧無以償者。輒對衆焚券。人號爲金氏義倉云。庚辰八月。丁引儀公憂。壬午六月。母夫人卒。卜葬于縣北之禾谷山下村。民僅百餘戶。皆齗齗相持。謙庵柳公雲龍。於公爲父表弟。時以眞寶縣監來弔。或勸公以一言先容於本縣。公曰。吾平生不欲以私干政。且柳公豈肯爲竆乏之得我而強勉以副哉。竟不言。縣宰聞之。密諭村民。遂無訟。旣葬。廬于墓側。與二弟相守。以終三年。壬辰。島夷發亂。八路瓦解。 鑾輿播越。列邑倡義糾兵。各以境內重望爲整齊。將推近始齋金公垓爲大將。公以義城整齊。將會于安東之一直縣。行到東京。大將卒于陣。遂罷歸。兵燹之餘。重以饑荒流丐載路。公傾家貲設糜散穀以賑之。婦女至則令家人接待。遠邇聞風投集。所全活甚衆。或有籍土田臧獲以謝者。公笑曰。諸君不能自食。吾意哀而賙之。豈望其相報乎。所居沙村。累姓同閈。增損呂約。立爲洞規。行之數十年。一村頗有敦厚之風。宅西有萬年松。卽松隱公所取號者。公構小堂其下。扁以晩翠。以寓歲寒之思焉。萬曆辛丑六月十四日。考終于家。享六十有三年。葬于縣北馬山負坎之原。公先娶英陽南氏典籍諱崧之女。生一男四女。男濬。禮賓寺直長。女適典籍權克明,士人金之善,權得善,安昌。再娶一直任氏。生一女。適士人李執可。後娶安東權氏。生一女。適趙綱。直長五男二女。男尙瑗護軍,尙琦將仕郞,尙珏,尙玭,尙璘。女適文博,李朝鳴。並進士。權三男。瑌,瑎,玓。金一男昌世。權一男稶。安三男。世瓛,世璹,世瑚。李五男。純美,粹美,文美,全美,時美。趙五男。惟精,惟一,惟誠,惟諴,惟淸。曾孫男十一人。堯佐,成佐,宏佐,夢佐,舜佐,碩佐,英佐,弘佐,良佐生員,聖佐文科府使,賢佐。至今來晜且數十百人。業文藝修問學。恂恂有古家之遺風焉。公天資粹美。德量深厚。自其幼少已有愛人及物之志。旣長而濟以問學之力。則其存心制行。皆本諸天理民彝而非出於強勉有爲之私也。惜其抱德不售。埋沒於草澤之中。不得展布其所蘊。然賙飢恤乏。仁愛有以施於物。設約立規。敎化得以推於人。旣有是心以爲之本。則其功效之近遠廣狹。特在夫遇不遇如何耳。有何加損於本分哉。李先生講道陶山。攝齊升堂之士。極一世之英材。公周旋講席。質疑請益。蓋十年之久。其得於薰陶刮摩者。必有進進而不已者。今以其見於答問之間。則五條之旨。皆探賾造化之原。先生前後告戒。每以苦思生病爲慮。其玩心高明篤志勤勵之意。猶可以想見矣。逮夫中晩婆娑涵淹之餘。必益趨於深純平實之域。而公旣不以著述自居。重以家禍洊仍。嘉言懿蹟。率沈逸而不傳。豈不爲後世尙論之士所共慨惜哉。公蓋有大學質疑,語錄解諸書而今皆無有存者。五條問答。卽先生手筆俱在。而其二條。載於趙公答問中。意公與趙公同棲山寺。互有質問。轉相傳寫。以資觀省。而文集收成之日。雜於趙公書中。亦無足怪者。以故公之文字。不見於門弟答問之列。而無以考其授受淵源之實。是爲重可慨已。然李先生嘗論朱門諸子曰。登門請業。捧書質疑。以發其師傳之旨。雖其人所疑所問。隨所詣所見而不同。若先生所答。抑揚進退。無非爲至敎。是則至敎之發。由斯人而得。寧不有裨於斯道乎。夫以先生之道。卽朱子之嫡傳。而公之請業質疑。乃其登門捧書之倫。此五條者。亦足以發師傳之旨而明抑揚進退之敎。則豈非有裨於斯道而得列於聖人之徒者歟。昆孫上舍宗德甫以其諸父兄之命。屬象靖曰。先祖事行。散逸殆盡。只有一二家牒。稽緩不敏。不能藉手以自託於先輩長德。失今不圖。懼夫愈遠而益無徵。吾子幸惠以一言也。竊自惟象靖藐然無所識知。何敢飾其固陋之辭以犯不韙之罪。起而辭者再焉而其見責愈勤。則又竊自惟象靖少與公之後孫游。得其家傳故藏而考其師門傳受之實。比他人稍詳。若揣分量力。輒以退讓爲事。則因仍遷就之間。事或有不可知者。姑以屬辭比事。備秉筆者之采擇。亦無甚難焉者。遂不揆僭猥。妄加第錄。至於陶山講授答問之蹟。特致其感慨之意。世之立言君子或有取焉。未必不爲闡揚師門之一端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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