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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장편소설>
첫사랑 -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다. - (11 편)
강성수
K의 기척이 느껴졌다.
“ 삶은 무엇인가?”
“ 삶은 시도 때도 없이 나부끼는 폐선의 깃발처럼 잠시도 조용한 영일(寧日)이 없다. 생(生)이라는 글자가 소(牛)가 통나무(一) 위를 걸어가는 것을 형상화 했다는 것이고 보면 생(生)의 진행형인 삶은 쉼 없이 너울져 밀려오는 파도처럼 한 날 한 시가 여의치 않고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시대가 바뀌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예전의 삶에 비하여 물질은 많이 풍부해 졌지만 상대적 박탈감등으로 정신과 마음이 산란하고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이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용히 마음의 거울을 갈고 닦고 가다듬으며 매일 스스로를 내려놓으며 겸손하게 살아갈 일이다.
삶이 사람의 준말이라는 것은 무인고도(無人孤島)에서 혼자서 연명하고 있는 것은 생(生)이라 할 수는 있어도 삶이라 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삶은 사람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을 사회적,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수직적 관계는 스승, 부모, 선배와의 관계이며 수평적 관계는 친구, 동료, 부인 등과의 관계이다. 수직적, 수평적 좌표를 연결하면 큰 면적을 가질수록 많은 대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그것이 꼭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적은 사람과 깊게 사귀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많은 사람과 폭 넓게 사귀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삶은 생(生)의 매 순간 어느 때라도 진솔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는 진검승부(眞劍勝負)다. 유희(遊戱)적인 재미에 해학(諧謔)적인 웃음을 주는 허접한 각설이 타령이라도 그 속에 진정한 삶에 대한 애환이 진하게 배어 있을 때만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박수를 쳐 주는 것으로 볼 때 언제나 정직하고 반듯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매초 매분 웃고 떠들고 즐기며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각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만나며 사람과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형성해가며 살아가게 되지만 바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중심에 생(生)의 진검승부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삶을 말하자면 생(生)을 말해야 하고 생(生)을 말하자면 죽음(死)을 말해야 하니 생(生)과 죽음(死) 사이가 삶이라 ‘생명의 주인’이 부여한 생(生)이 태어나서 죽음(死)으로 거두어 갈 때까지의 기간을 삶이라 할 수 있다. 삶은 생(生)의 진행형이니 현실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삶은 생(生)이 이어지는 것이며 삶이 끝나는 것이 죽음(死)이다.
삶은 생(生)의 반대쪽에 있는 죽음(死)에 대하여 깊이 있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은 나에게도 언젠가는 임종(臨終)의 시간이 온다는 것을 알게 해주니 삶의 끝인 임종(臨終)의 시간을 평소에 느끼고 사는 사람이라면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어 그간에 알던 것과는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니 생(生)에 대하여 관조할 수 있는 힘과 안목이 생기게 된다. 삶은 죽음을 통찰하여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을 재생산하게 해주니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삶이 비로소 다이야 몬드 같은 광채를 발하게 되어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어 사형수가 형장에 끌려갈 때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경이로움으로 매분 매초 새로운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생(生, 살아있음)에 대한 환희만 가지고도 이곳이 ‘낙원과 천국’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져서 찬란하고 빛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삶이 끝나는 죽음(死)과 맞부딪쳤을 때는 혼자서 건너가야 하는 일일 뿐 아무리 돈독한 대인관계도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설사 부부라 하더라도 혹은 부모 자식 관계라 하더라도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이니 철저하게 죽음(死)은 혼자서 건너가야 한다.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부모는 본능적으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며 대신 죽어 줄 수도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저 하루하루 바쁘게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 아무런 생각 없이 주는 것 먹고 잠자고 그렇게 살다가 이곳을 떠나는 미물의 삶이나 같다. 사람은 미물이 아니기에 죽음을 당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려면 죽음(死)에 대한 충분한 공력(功力)을 쌓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것이 사람과 미물의 다른 점이다.
네가 네 ‘생명의 주인’의 존재를 믿듯이 사후세상의 존재도 그렇게 믿어라. 그러한 생각이 돈독하면 돈독할수록 너 자신을 구원(救援)하게 되어 죽음조차도 초월하는 삶을 살게 된다. 많은 것을 용서하고 양보할 줄 알게 되면 편안한 마음이 열려져서 새 털같이 가벼운 정신과 몸이 되어 이곳에서 극락지생(極樂之生)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라야 가벼운 여행을 떠나듯 눈부신 사후(死後)세상(‘생명의 주인’이 사는 세상. 天國, 極樂之生)에 갈 수 있게 된다. 제멋대로 사는 삶이 경건한 곳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는 것은 삶의 동안에 사후의 아름다운 세상을 평소 꿈꾸고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곡하게 구하는 마음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세상(極樂之生)에 대한 간절한 간구(干求)와 염원(念願)도 없이 그런 세상(極樂之生)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이곳에서 살던 극락지생(極樂之生) 그대로의 눈부신 극락지생(極樂之生)이 네 앞에 펼쳐지게 될 것을 꿈꾸고 간구하라. 그런 삶을 평생 간구(干求)하고 살아 온 삶이라면 평생을 착하게 살아 온 것이 틀림없다. 시간의 유무도 사라지고 시간의 초월을 알게 되니 이곳에서도 무한 자유의 시간(極樂之生)을 얻어 즐기게 되는 것이다. 저곳의 극락지생(極樂之生)이나 이곳의 극락지생(極樂之生)이나 같은 것이니 자연히 오고 가는 것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후 세상만 강조하며 이 땅위에서의 현실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는 기타 종교와 다른 점이며 극락지생(極樂之生)은 스스로의 공력(功力)으로 얻게 되는 것이니 노년의 삶도 전혀 두려워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극락지생(極樂之生)의 같은 삶이니 모든 것을 용서하고 양보하며 내려놓는 삶에서는,
- 생(生)과 죽음(死)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사라지는 것이다. -
* 극락지생(極樂之生)의 삶이란 즐거움의 끝(極)이나 무한한 최고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니 동물과 사람이 같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낙원(樂園) 같은 개념이나 생명의 주인이 있는 하느님의 나라(天國)라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 주었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의 이유 모르는 설렘이나 행복감 같은 것이며, 성애(性愛)에서 마지막 절정(the climax)의 순간 같은 절정(絶頂)의 삶을 말한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양보하고 마음을 내려놓아 고요한 평화를 갖게 되었을 때 이성과는 아무 접촉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생(生)에 대한 환희가 성애(性愛)에서 느끼는 마지막 절정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이 땅위에서의 극락지생(極樂之生)을 느끼는 삶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누구하고도 원(怨)지지 말고 살아라. 그럴 일이 있다면 못 이기는 척하며 양보하고 져주라. 마음 흡족히 용서하고 양보해라. 그러면 그도 유감(有感)을 사서 너를 해하려 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부터 극락지생(極樂之生)의 삶을 살아라.
- 생(生)과 죽음(死)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사라지는 것이다. -
“ 살다보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무료함이나 권태감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런 때는 마음을 어떻게 달래가며 살아가야 하나?”
“ 첫째 오래 살려고 애를 써도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그 살아야 할 아름다운 날들이 충분하게 많이 남아 있지 않음에 주목하게 되면 무료한 마음을 달랠 수가 있을 것이다. 둘째 사후세상의 극락지생(極樂之生)을 동경하고 꿈꾸며 살아가고 이곳에서도 극락지생(極樂之生)을 느끼고 살면 되는 것이다. 셋째는 이곳이 과거 추억의 시간이라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2080년이 되면 너는 만 130세가 된다. 그 때가 되면 다른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낮에는 지나가는 나비와 벌과 나무와 밤에는 별과 달하고만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치열하고 멋있게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한 추억만 되새기고 있는 파파 늙은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명(命)이 짧다고 하면 그 이전에 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최대한 수명의 스펙트럼을 넓게 잡아 보았다. 그 파파 늙은 노인이 된 날이 오면 양지 바른 곳에서 낡은 의자 위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지도 모른다. 졸음의 끝 무렵 부분에서는 2017년에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살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면서 즐거워했는가에 대해서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때 너는 이 소설을 쓰고 있었고, 박근혜대통령의 탄핵 문제로 새해 벽두부터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져서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었고, 그 여파로 삼성 그룹의 이재용 부회장도 구속 수감되고 박 근혜 대통령도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130살이 된 그 때 뒤돌아보는 추억의 시간에 너는 지금의 현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80년에 타임머신을 타고 63년 전의 2017년 흘러간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와 추억의 시간에 살고 있다. 2080년에 뒤돌아보는 2017년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매분 매초가 새롭고 아깝고 보람되게 살아야하고 극락지생(極樂之生)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개념으로 신라시대 이전의 시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니,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다.
- 생(生)과 죽음(死)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삶은 어떻게 살다 가야 하는 것인가?”
“ 삶은 미소며 웃음이며 행복이다.”
“ ?”
“ 예전에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울 때는 인사가 “진지 드셨어요?”하고 인사할 때가 있었다. 그 후에 먹고 사는 형편이 낳아졌을 때가 되어서는 “안녕하세요?” 혹은 “Good morning?’ 하고 지냈다. 시대에 따라 인사말이 변해간다. 이제는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지금 행복하세요?” “ Are you happy now?” “네,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 “ Yes, I am happy now” 라고 인사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말하자면 다른 말로 는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의 삶에 만족하세요?”이다. 이것은 오로지 내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는 무한 만족의 표현이며,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의 답이 될 수 있으니 매 순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지에 대한 상대나 나에 대한 사실 확인 작업이니 매 순간 행복한 것인지 아닌지를 인식시켜 주게 되니 우리에게 아니면 스스로에게 이보다 더 나은 인사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인사법은 많은 사람을 순화되게 하여 순수하게 살다가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오게 할 것이다. 이러한 인사는 멋있는 철학적인 인사도 될 것이다. 물론 이때의 행복감은 성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生存)에 대한 무한 행복감이다. 캐나다에 가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미소에 익숙한지를 알게 된다. 커피 한잔을 서빙하면서도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밝은 미소를 온 얼굴에 띠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한 곳에서 아마 우리나라 한국 사람들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어디가 아픈 사람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미소가 없는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거나 머리가 나쁜 사람이거나 어디가 아픈 사람이거나 한 세 가지 유형중의 한 사람이다. 삶은 미소고 웃음이며 동시에 행복이다. 그것이 삶의 이유이며 전부며 답이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웃음 없는 하루는 낭비한 하루다!(A day without laughter is a day waisted!)” 라고 말한 것이다.
뒤돌아보니 K는 사라지고 없었다.
꿈 16) 1960년대 우리나라는 문맹퇴치 율이 낮아 한 50%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의 고등학생쯤 되면 여름 방학 때 몇몇이 모여 시골로 문맹퇴치 계몽 및 노력 봉사 활동을 다니곤 했다. 1986년 치과의사가 되고 난 후 낙후지역으로 치과의사 몇몇이 모여서 봉사 활동을 다니기도 했으니 1960년대는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고등학생들이 시골로 봉사 활동하는 시기가 있었다. 나는 당시만 하여도 부친이 여유롭게 사시던 때라 집에 가정교사를 두고 있었는데 그 가정교사 이름이 ‘이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2∼ 3학년 정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서 함께 생활하고 나는 그 때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런 봉사 활동은 한번이 아니라 여름 방학과 겨울방학 때 여러 번 따라 다녔던 기억이 난다. 뜨거운 여름 날 등에 잔뜩 짐을 올려 메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걸어가기도 하고 낡은 트럭이라도 협조해주면 차를 타고 오지로 가기도 했던 것인데 보통은 버스를 제일 많이 이용하고 다녔다. 그 때 기억이 나는 것은 무더운 여름철에 비가 많이 와서 개울물이 넘치면 물에 젖지 않도록 바짓가랑이를 걷고 건너던 이원 선생님이 나를 업고 도랑을 건너가곤 하였다. 작은 툇마루 같은 곳에 어린이, 처녀, 총각, 아주머니, 아저씨를 가리지 않고 20∼30명 정도씩 모아 놓고 작은 흑판에 분필로 쓰면서 기역 니은 하며 배우는 나이든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따라 글쓰기와 읽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밤이 이슥해지면 옛날에 서당에서 글 읽기 하는 것처럼 제법 공부하는 운치도 느껴졌다. 또 머리에 이가 있는 경우에는 하얀 석회가루를 뿌려 주기도 하고, 그나마 붕대나 과산화수소나 아까징끼(머큐로크롬)라고 하는 빨간 약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간단한 상처가 났을 때나 모기에 물렸던가 아니면 긁어서 난 상처나 짓무른 곳에는 만병통치약으로 마구잡이로 발라 주었다. 말하자면, 야학(夜學)도 하고 어설픈 의료 봉사까지 하였는데 어찌 되었건 그런 공부가 끝나고 나면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감자나 고구마 땅콩 같은 것을 삶아 오면 거칠게 엮어진 멍석 위에서 쑥 향내 나는 모깃불을 맡아가며 이런 저런 얘기꽃을 피우며 서로 웃으며 같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시골 장독대 옆에 핀 옥잠화를 처음 물어보고 알았다. 그 하얀 꽃의 수수한 아름다움에 “참 예쁜 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별 도움도 못되고 공부하는데 이리 저리 따라다니며 방아깨비나 잡고 보리밥이나 쪄준 감자를 먹고 했었지만 이원 선생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으로 공연히 으쓱해져서 어깨에 힘을 주고 자랑스럽게 다녔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도시서 학교를 다니니 얘 네들 보다는 윗길이구나! 하는 자부심으로 우쭐해 했던가 보다. 부모님이 부산역에서 매점을 하는 관계로 혼자서 내 보낼 기회가 없었던 차에 가정교사를 따라 오지에 나서는 문맹 퇴치 활동은 나에게 신선한 체험으로 다가왔고 부모님도 믿고 맡길 수가 있다고 흔쾌히 보내 주셨던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따라 나섰는데 부모님을 떠나 여러 날 떨어져 있던 경험은 훗날 까지 신선한 체험으로 오래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방학에 한 일주일 정도 따라 다녀오면 나의 몸 군데군데 모기 물린 자국으로 여기저기 얼룩과 함께 진물이 흐르고 있었으니 그것이 딱하게 보인 어머니는 나를 보면서 “조심하지 그랬어!?” 하고 물으면 나는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신나하며 내 빼곤 했던 것이다. 그런 체험은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 때마다 계속 되다가 가정교사 선생님이 고려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서울로 가게 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훗날 치과 대학을 다닐 때 교수님을 따라 무료봉사 활동을 할 때도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며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중반 시절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꿈 17) 치과대학 예과를 다닐 때 어느 날 할아버지가 어깨에다 뭣을 메고 아파트로 들어오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어깨에 둘러메고 온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무겁겠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안쓰러워,
“ 할아버지 뭔데 그렇게 무겁게 메고 오세요?”
“ 소금이다. 비켜봐라!” 하시기에 옆으로 비켰더니
“ 아이쿠! 무거워라!” 하시며 마루로 휙! 집어 던지시는 것이었다.
“ 나는 간다. 잘 있어라!”
“ 아니 할아버지! 어디를 가신다고 하시는 거예요? 들어오셔요!”
그러다가 깼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치과 대학을 들어오고도 학생신분이라 편하게 한번 모시지도 못했는데 돌아가시고 저승에 가서도 그 무거운 소금을 지고 다니는 소금장수가 되셨나? 싶어서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 날 시무룩해하는 나를 바라본 집사람이
“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하고 묻기에 그 얘기를 해 주었다.
본래 잠이 들면 좀체 꿈꾸는 일이 없는지라 꿈자리 기분이 별로라고 했더니, 집 사람이 장모님에게 꿈 얘기를 하고 장모님이 꿈 해몽하는 사람한테 물어 봤다며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그 꿈이 길몽이라는 것이었다.
“ 길몽은 무슨? 할아버지가 소금장수 하는 꿈이 무슨 길몽이래? 누가 그래요?”
“ 엄마가 꿈 해몽 잘하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봤데요. 그러니까 그 사람 하는 말이 그 꿈을 누가 꿨냐고 묻기에 우리 사위가 꿨다고 하니 사위되는 사람이 앞으로 잘 살게 될 것이라 해서 왜 그러냐? 하고 물었더니 소금은 오래전 옛날부터 귀한 것이고 귀한 것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니 결국 할아버지가 주고 간 것은 재물을 주고 간 것이라고 얘기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좀 멍해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님을 좋아했다. 또 할아버님도 나를 많이 귀여워해주셨다. 여름 날 할아버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등목을 하시면 내가 그 뒤에 가서 “할부지! 내가 등 밀어 드릴께!” 하면서 조막만한 손으로 밀어 드리면 “어이구! 우리 손자 예쁘다. 어이구! 시원해라!” 하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할아버님의 일이라면 뭣이든지 다 잘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치과 대학에 입학하고 우리 집으로 모셔서 같이 있으려고 할아버님께 약속을 했는데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1980년도에 전국적으로 온갖 데모가 일어나는 와중에 우리 치과 대학에서도 데모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 학생들이 다칠까 봐 데모를 못하게 말리는 과정에서 학생들 끼리 사고가 나서 어쩔 수 없이 학교로부터 권고 휴학을 받아 졸지에 실업자 모양새가 되어 할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셔오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이다. 사촌 큰 형님이 시골 고향땅을 5촌 당숙에게 다 팔아치우고 할아버님을 모시지를 않아 거처가 불편하셨던 할아버님이 간혹 한번씩,
“ 찬이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하셨단 말씀을 돌아가시고 난 뒤에 듣고서는 할아버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에서 많은 죄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님은 나를 원망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걱정하여 무거운 소금 가마니를 주겠다고 어깨에 메고 오셨구나!”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과 머리가 멍해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 사는 것이 뭣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저곳에 계시는 할아버님이 잘 계셔 줄 것을 소원하고 할아버님은 이곳의 손자를 걱정해 주시니 할아버님의 따스한 마음이 손끝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시공을 초월하는 교감이었다.
“ 할아버님! 제 걱정 마시고 편안히 계셔요. 너무나 고맙습니다!”
속으로 되뇌는 나는 목과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 뒤에 할아버님과 할머님의 기일(忌日)에 더 깍듯한 정성을 드리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손자 손녀가 자라고 있으니 어린아이 때의 경험한 일이 다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성장 과정에서의 그런 좋은 추억과 따뜻했던 기억은 일생을 두고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자양분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한 번도 화내지 않고 인자했던 기억을 남기는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싶다. 먼먼 훗날에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적에도 예전의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좋은 기억과 추억을 가지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팔베개하고 안겨 있던 그녀가 먼저 말했다.
“ 이제 우리 힘든 얘기는 그만해요 ”
“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 뭐예요?”
“ 서울은 왜, 갔으며 도대체 무슨 일을 했어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또 굳어졌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내색이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고 더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느꼈다.
“ 아니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요... 부담스러우면 하지 말아요.”
그런 연고로 나는 그녀의 서울 얘기를 알지 못한다.
내가 말을 했다.
“ 소개했던 이 일병은 연락이 되요?”
“ 영찬 씨가 그렇게 가고난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거리에서 뺨을 한 대 올려붙였어요.”
“ 이 일병 그 친구 지금 목포에 있어요?”
“ 제대하고 회사에 다니나 봐요.”
“ 아까는 내가 한번 보고 싶다고 해 놓고 뺨을 때리는 것은 또 무슨 경우요?”
“ 자기하고 연락도 되지 않고 이 일병은 제대하고 나왔으니까 그랬지요. 중매 잘못서면 뺨이 세 대라는 말대로 됐지요?” 그녀가 쿡! 웃으며 말했다. 나도 쿡! 하고 따라 웃었다.
“그 친구는 잘 되라고 열심히 소개시켜 줬는데 잘못은 우리가 해 놓고 그 친구만 애매하게 혼이 났군! 그 친구한테 많이 미안하게 됐네. 다음에 혹 만나게 되면 사과라도 해야겠네. 기약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물었다.
“이 일병이 나를 자기에게 소개시켜준 이유가 뭐예요? 이 일병이 자기를 많이 좋아 했었나 봐요? 그러니 소개시켜 주지 않았겠어요?”
“ 뺨까지 때린 사람이 그건 또 왜 물어요? 알고 나면 한 대 더 때릴 거예요?”
“ 아니요? 어떤 이유로 소개를 하게 됐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 물론 그 친구가 나를 많이 좋아 했으니까! 소개를 해 준 것이겠지!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면 한참 길어지는데?”
“ 그래도 듣고 싶으니 얘기해줘요!”
그녀가 나에게 묻고 알고 싶다고 하는 것이 처음이고 또 얘기를 하면서 분위기도 가볍게 바꿀 겸 그 얘기를 해주기로 했다.
“ 그럼 간단하게 얘기해 줄 테니 들어봐요!”
“ 네”
“ 군부대에 내무반 생활을 같이 하는 병사 중에는 사병과 하사관이 있는데 보통 사병 9명에 하사관 1명을 단위로 해서 1개 분대가 되는데 4개 분대가 1개 소대가 되니 소대원은 보통 40여명 정도 되고 하사관은 4명으로 이 인원이 한 내무반에서 같이 생활을 하게 되는데 군부대에서 최소 단위가 되는 것이요. 말하자면 한 막사에서 같이 먹고 자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 그래서요?”
그녀가 적당한 자리에서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 이 일병이 우리부대에 자대 배치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대에 난리가 난 적이 있었어요. 군대 훈련 6개월 받고 자대 배치된 하사를 우리 일반 병사들은 훈련만 받고 하사 계급장을 달고 왔다고 ‘물 하사’라고 불렀는데 그러한 이유로 고참병들과 ‘물 하사’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내무반 헤게모니(주도권)를 잡으려고 알력관계가 형성되는데 계급은 하사가 높으니 대우받으려고 하고, 군 생활은 고참병이 많이 했으니 ‘물 하사’를 아니꼽게 보니 졸병들은 고참병과 ‘물 하사’ 사이에서 비위맞추기가 여간 쉽지 않은 것이지! 물론 졸병들은 고참병 말을 우선해서 잘 듣기는 하지만.
그런데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최 하사가 병사들을 모아 놓고,
“ 앞으로는 장교 앞에서처럼 맞담배 피지 말라!”고 하는 지시를 한 것이니 말하자면 담배로 군기를 잡아보겠다는 것인데 고참병들은 회식 때 같으면 간혹 장교들이 맞담배를 허용해서 같이 피우기도 하는데 물 하사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니 병사들이 큭! 큭! 거리며 콧방귀를 뀌는 형세가 되고 그 후로도 계속 피워대니까 최하사가 그날 저녁 식사 후에 위 막사에서 군기를 잡는다는 핑계로 줄 빳다를 치겠다고 전원 집합시킨 일이 있었어요. 줄 빳다를 치는 것은 고참병은 몇 대 맞지 않으니 별것 아닌데 들어 온지 얼마 안 되는 신병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빳다를 한 대씩 다 맞아야 하니까 거의 40대를 맞게 되니까 아주 엉덩이 살이 헤져서 피가 터지게 되어 고생을 많이 하게 되거든. 말하자면 피 떡이 져서 바지에 엉켜 붙는 경우도 다반사지. 물론 고참병들은 신병들이 많이 맞는 것을 생각해서 그냥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경우도 있으나 평소에 유감이 있던 후참 병들에게는 그 때를 기화로 그냥 그대로 때리는 경우도 있으니 후참 병들로서는 여간 긴장을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집합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 위의 고참병들보고 어떻게 할 것이냐? 고 물었더니 오늘 저녁을 기회로 해서 최 하사를 엎어 놓고 패 버리자는 것이야. 나는 막사 내에서 서열이 5번 째 쯤 되었는데 말년 고참병들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내 밑으로 병사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린 거지. 물론 내 기수 아래 졸병들에게는 오늘 일에 대해서 얘기가 다 되어있어 어떤 상황을 예상하고 벌어질 일들을 모두들 알고 있었지. 드디어 최 하사가 들어오고 말 같지도 않은 연설을 한참 하고 나더니 푸닥거리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지.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야. 최 하사가 고참병들 보고 엎어지라고 하니까 대들겠다고 하던 고참병들이 그냥 엎어지더니 빳다를 맞고 그 다음도 넘어지고 내 위 고참병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다 엎어져서 다 맞은 것이야. 최 하사가 한 대씩 40 여명의 병사를 다 때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병사들 중에 최 고참병이 일어나 또 그 빳다를 받아서 연속 때리기로 되어 있는데 막상 최 하사가 줄 빳다를 치니까 위의 고참병 들이 아무 말도 안하고 다 맞아버리니 나 하고는 최 하사를 패버리자고 말은 해놓고 실제로는 제대 말년이라 사고 쳐서 영창에 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 군대 말로 말년 고참병들이라 몸조심을 한 것이지. 그리고 이제 내가 맞을 차례가 된 것이야. 나까지 무너지면 이제 꼼짝없이 저 아래 신병까지 박살이 나게 생겼는데, 나는 최 하사가 엎어지라고 해서 나까지 맞고 난 후, 내 아래 기수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최 하사에게 아래 병사들은 때리지 못한다고 막아서서 버틴 것이지,
“나까지 맞았으니까 내 아래 기수들은 때리지 마시오!”
정색을 하고 말을 했더니 최 하사가 빳다를 들고,
“여기는 군대야! 너 같은 새끼가 왜 까불어!” 하고 빳다를 들고 내 머리를 향해 내려치려고 하는데 나는 그 찰나적 순간에 왼쪽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왼쪽 발을 한 발 앞으로 내 디디면서 오른쪽 주먹이 뒤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최 하사 턱 바로 앞에 가서 멈췄던 거지. 워낙 전광석화처럼 일어난 일이라 최 하사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깜짝 놀라 뒤로 흠칫 물러났고, 그 시간에 아마 최 하사가 빳다로 내 머리를 쳤다면 왼팔로 상단 막기를 하면서 나도 같이 때려서 최 하사 턱도 부서졌던지 빠개져서 깨어졌겠지!“
나는 의기양양해져 그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 어라!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영창가고 싶은 가보네!”
“ 그래 이 참에 영창 한번 가려고 한다! 빳다 놓고 나가지 않으면 오늘 밤에 이 막사에서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괴상한 일이 벌어질 것이야!”
그랬더니 최 하사가 내 밑의 조 상병보고 엎어지라고 했던 것이야. 그랬더니 조 상병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멀뚱히 막사 위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야. 내가 조 상병 위의 바로 선참인데 내가 나까지 맞고 엎어지라 하지 않았는데 조 상병이 최 하사에게 맞으려고 엎어지면 나중에 나한테 뒤지게 혼 날것이니까 엎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지. 또 사전에 얘기가 된 것도 있었고. 그렇게 되니 최하사도 어쩔 수가 없게 된 것이지. 병사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비로소 느낀 것이지.
“좋아! 앞으로는 원리원칙대로 하겠다!”
최하사가 소리를 쳤다.
내가 맞받아 말했다.
“원리원칙대로 하려면 니들부터 모범을 보여야 할게 아니야! 개판은 니들이 다 치잖아!”
최하사가 노려보더니 빳다를 땅 바닥에 팽겨 치고 나가버린 것이다. 졸병들 입에서 푸 하고 한숨 소리가 나왔다 줄 빳다의 공포에서 풀려나는 순간이었다. 또 말년 고참병들이 수고했다며 악수를 청하면서
“말년이 되어서...” 하는 말들을 해서,
“다 이해합니다!” 하고 말했다.
“제대 말년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가 3개월 이내 남은 병사를 말하는데 제대 15일을 남겨둔 병사도 있었지. 그런 경우 얼마 있지 않으면 제대를 해야 하는데 그런 일에 휘말려 영창에 가서 제대 날짜를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이해한다고 말을 한 것이고, 그런데 이때 이 일병이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이러한 일말의 일이 인상에 깊게 남았던 모양이라.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유난히 이 일병이 나를 잘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대형 사건으로 번져 나가게 되요. 그 일이 있고 난 이틀 후 쯤 되어서 대대장님도 어디서 그 얘기를 들으셨는지 나를 대대장님 실로 불러들이더니 가죽 장갑을 끼고 영창에 보내는 대신 침대 각목으로 빳다 30대를 안겼다. 내가 맞고 유야무야되었으나, 나는 내무반 생활을 접으면서 행정반에 근무도 하지 못하게 되고 통신병으로 근무하게 되어 산속 OP에서 두 사람이 근무하는 곳으로 보내지게 되었어요.
처음에 난리가 났다고 하는 것은 그 뒤에 하사들의 반발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마지막에는 최고참 하사인 유 하사가 대검으로 할복을 한 사건으로 연결이 되었는데, 하사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구겨지자 여러 가지 일로 병사들에게 얘기를 해도 병사들에게 먹혀들지도 않고 그간에 자질구레한 일들이 벌어지고 했어도 서로가 모른척하고 넘어 가기도 한 모양인데 - 나는 부대서 한참 떨어진 OP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니 그냥 잘 지내는 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일요일 아침 한 10시 쯤 되었을 때 부대 위생병으로부터 부대에 급한 일이 생겼단 얘기를 듣고 막사로 달려갔더니 최고참 하사인 유 하사가 탁자에 기대서서 대검을 들고 배에 자상을 내고 있었고 양 바지에는 피가 흘러서 다 젖어 있었던 거야. 병사들은 막사 양쪽으로 도열을 해서 앉아 있었고 맨 끝 쪽 막사 한가운데 유 하사가 있었지. 그 동안에 하사들의 입지가 좁혀져 왔었고 나는 또 부대를 떠나 있어서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으나 하사들의 입지가 많이 곤란 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지. 더구나 유 하사는 군산의 전출 부대에서도 일반 사병 3명과 상대해서 사병 3명을 묵사발을 만들고 사고를 쳐서 우리 부대로 온 사고치기여서 대검을 언제 내 쪽으로 집어 던질 지도 모르는 순간이지만 그간에 친하게 지낸 게 있었으니까 그러지는 않을 것으로 알고 있었지.
만일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날 최 하사에게 그랬다면 그 다음날 유 하사한테 붙잡혀가서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때 나도 대대장님에게 30대나 빳다를 맞았으니 유 하사도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경상도라 그런 유대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유 하사가 부대로 올 때부터 우리 둘은 죽이 척척 맞아 같이 어울리며 잘 돌아 다녔던 것이다. 돌아다닌다고 해봐야 산 넘어 막걸리집이나 좀 멀리가면 군산이나 이리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우리는 어울리며 다녔던 것이다. 막상 막사에 들어서니 기간 병들이 양쪽 내무반에 도열을 해서 앉아 있었고 저쪽 막사 끝 편에 유 하사가 대검을 들고 배에 자상을 내어 이미 바지는 피로 물들어 바지에 피가 엉켜 붙어 칙칙하게 피가 굳은 상태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 하사의 얼굴은 피를 다량 흘려 다소 창백했으나 우리 둘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나는 유 하사 앞까지 그대로 천천히 걸어가게 되었고 내가 유 하사 3m 앞거리에서 사과를 했다.”
“앞으로 기간병사들이 하사님들에게 잘 하라고 하겠소.”
내 불찰이 크다고 말하고 출혈이 너무 심해서 빨리 응급처치를 해야 하니 - 두 눈끼리 서로 빤하게 쳐다보며 - 대검을 나에게 달라고 하자 유 하사는 들고 있던 대검 두 자루를 나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일 호차 운전병을 급하게 불러 군산에 가서 봉합 수술을 받고 일단락되었던 사건이었다. 그 뒤에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서 2차 수술비를 하라고 건네주었지. 유 하사는 경상남도 창녕 출신인데 후리후리한 중키에 얼굴은 약간 역 삼각형이고 어깨가 여자처럼 좁은 친구였는데 위로 쭉~ 찢어진 눈에 매부리 코 인상이라 우선 보기에 싸움꾼처럼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의리 있는 친구였다. 지금은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내 아래 사병인 조상병, 임상병과 함께 가장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지. 그런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이 일병이 나를 좋게 생각해서 자기를 소개 해 준 것이 아닌가! 해요”
긴 얘기가 끝이 났다.
“ 자기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요?”
“ 싸움 잘한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는데?”
“ 유 하사가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면 자기도 맞수가 되니까. 그리고 의기투합이 되니까 어울리고 다니게 된 것 아니에요? 동급이 되지 않으면 같이 어울릴 수가 없지 않아요?”
“ 어~허! 오늘 싸움 보따리 다 끌러놓게 생겼네! 주먹질을 잘 하는지는 모르겠고 눈이 좋으니까 상대방에게 맞지 않을 자신은 있어요! 싸움의 기본 정석은 맞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지! 맞거나 붙잡히면 마음대로 날뛸 수가 없으니 상대가 여러 명일 경우는 잡히면 몰매를 맞게 되지. 붙잡히지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상대를 가격하면 상대가 여러 명일 경우도 이길 수가 있는 것이요!”
“ 와? 그럴듯한 얘기에요?”
“ 아니? 그럼 여태까지 내 얘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 아니? 진짜 같아요!”
“ 아니! 진짜 같다니!”
“ 아니 진짜요! 호호호”
“ 그러나 여러 명하고 싸울 때는 힘이 다 빠지기 전에 36계 놓을 자리부터 찾아야 되는 거요. 그리고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눈이에요. 눈이 나쁘면 쳐다보는 것이 늦게 되고 늦으면 얻어맞게 되니까 결국 다치게 되는 것이지. 싸움은 한방 제대로 얻어맞으면 끝나는 수가 많고 잘못하면 몰매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그 한방을 제대로 맞으면 안 되는 것이요. 운동선수 중에 안경 쓴 사람을 본적 있어요? 눈이 좋으면 뒤를 보지 않아도 뒤가 뭐가 날아오는지 다 보이는 법이라 서부에서 건 멘이 뒤에서 총을 쏘는 것을 알고 육감으로 뒤로 총을 쏘는 것이나 같아요. 눈이 좋으면 그런 감각이 남 다른 것이라 싸움에서도 상대방의 동작이 스로우 비디오로 천천히 다 보이게 되니 눈이 좋으면 상대방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 다 보이니까 자연히 쉽게 피할 수가 있는 것이고 눈이 나쁘면 맞고 난 뒤에 보이게 되는 것이지. 그런데 한, 두 명하고 싸울 때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돼요! 이리저리 피하다가 턱이나 명치 또 옆구리 안쪽 같은 곳을 질러 넣으면 급소에 맞으면 그냥 주저앉으며 숨을 못 쉬게 되거든. 안 그러면 턱에 카운터펀치가 들어가 제대로 맞으면 기절을 하던지. 그렇게 되면 양 쪽 허벅지 같은 곳을 구둣발로 좀 세게 한두 번 콱! 짓밟아 놓으면 일어서지를 못하지. 그러면 싸움은 통상적으로 끝나요. 왜냐하면 엎어져서 싸울 수는 없으니까 또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가서 구둣발로 한두 번 더 허벅지를 질러 줘 버리면 엎드려서 빌게 마련이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이에요. 눈이 빨라야 안 맞으니까 안 맞고 때리면 이기는 것이에요. 싸움의 기술은 간단해요. 그런데 때리는 것도 눈이 좋으면 때리는 순간에도 때리는 부위가 줌으로 당기듯이 정확한 포인트가 눈으로 끌려 들어와요. 그때 순간적으로 여기다! 하고 가격하면 정확한 부위를 때릴 수가 있고 딱! 하고 끊어 치면, 때리고 나서 오늘 싸움은 끝났다! 라는 것을 손에서 직접 느낄 수가 있는 것이에요. 카운트 펀치를 맞으면 뒤로 넘어 질 것 같지만 보통 앞으로 꼬꾸라져 버려요. 때린 사람이 주먹으로 밀지 않고 딱! 끊어서 치면 대개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던가 아니면 앞으로 넘어져 와요. 싸움을 여러 번 해봐서 알게 된 사실이지. 그렇다고 도나 개나 싸움질만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요. 아무리 싸움질을 잘 한다고 하여도 싸움이 잦다보면 결국 임자를 만나기 마련이고 고수를 만나면, 그럴 때는 크게 다칠 수가 있으니 언제든 싸움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싸움질을 안 하지. 어릴 때 아버님이 남자가 주먹이 약하면 센 놈 앞에서 할 말을 못할 수 있으니까 운동을 배워두라고 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 유도 합기도 등을 여기저기 배우러 다니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싸움은 순전히 자신의 순발력이 가장 큰 무기가 되고,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눈이 좋아야 하는데 눈이 좋으면 아까도 얘기 한 것처럼 상대방 주먹이 날라 오는 것이 보이니까 쉽게 피할 수 있게 되니 결국 싸움은 눈이 좋은 것이 기본에다가 순간적인 기술이나 감각 같은 것이 중요해요. 말하자면 가까이 붙어서 싸울 때는 짧은 관절인 팔꿈치나 무릎으로 상대의 급소를 어떻게 가격해야 하는 지도 중요하고, 그러니 뭐가 몇 단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싸움이 몇 단이다. 라는 것이 훨씬 더 센 것이지. 경험이 많으면 그만큼 임기응변에 강할 수 있으니까”
“ 근데 시력이 얼마에요?”
“양쪽 눈이 모두 다 2.0 이에요”
“ 와! 눈이 너무 좋아요! 그런데 말하는 것을 보니까 싸움질만 하고 다닌 사람 같아요!”
“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기본만 알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야 언제 어느 때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대처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니까! 보통 운동을 한 사람은 뒤꿈치로 걷지 않아요. 건강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런 걸음걸이는 노인 걸음걸이에요. 운동을 한 사람은 공수부대원들이낙하산을 타고 땅에 착지 할 때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발의 앞부분부터 착지하듯이 언제나 발의 앞부분으로 걸어요. 그렇게 계속 걸으려고 하면 허벅지 하체 힘이 받쳐 줘야 해요. 또 그렇게 걸어야 갑자기 날아 들어오는 상대방의 공격에 재빠르게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나는 상대가 덩치가 있다 해도 별로 겁을 내 본적은 없어요. 덩치가 큰 만큼 허점이 있을 수 있으니까. 상대가 힘이 세다고 해도 잡히지 않을 만큼 내가 빠르니까 덩치 큰 친구는 나하고 싸워봐야 별 무소득이지. 그러다가 한 차례 맞으면 눈에 번갯불이 번쩍하게 튀고! 때리고 빠지고 때리고 빠지고 몇 차례 그렇게 맞고 나면 기가 죽어서 주저앉게 되어있지. 덩치 큰 아이치고 몸이 빠르고 맷집 좋은 아이들이 별로 없거든. 큰 만큼 대신에 느리고 살이 무르다는 단점이 많으니까 겁을 낼 필요가 없지. 근육질의 몸이 아니면 대충 몇 차례에 그냥 무너지지!”
“그런데 데이트 할 때 질 나쁜 아이들을 만나면 그 때는 아주 곤란해져요. 이것은 혼자서 여자 친구까지 커버해야 되니까 행동이 자유롭지
못 하니까 애들한테 당할 수도 있지. 우선 남자가 막아서면 여자는 피신 할 곳이 있으면 빨리 다른 곳으로 피신해서 남자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센스인데, 즉 현지 사정에 따라 여친이 지형지물을 잘 보고 눈치껏 행동을 해 주는 것이 좋은데 여자애들은 본래 겁이 많아 놀라고 당황하기만 해요. 인근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 많은 쪽으로 피신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는데 상대가 여럿일 경우는 여자가 피신을 해도 다른 녀석이 따라 붙기 때문에 그러면 처신하기가 아주 힘이 들 때도 있지. 여친이 상대방에게 붙잡혀서 인질이 되면 아주 곤란해지지. 이때 남자는 상대가 대화가 될 만한 놈들인지 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 왜냐하면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놈들은 의리를 중요시하는 놈들도 있어서 너희들 중에 3명하고 나하고 1 : 3으로 싸워서 내가 이기면 그냥 보내 줄래? 하고 물으면 자존심이 있는 놈들 같으면 1 : 1 로 하자는 놈들도 간혹 있고 때로는 1 : 3으로 한바탕 하는 수도 있지만, 좀 의리가 있는 녀석은 의외라는 듯이 “그냥 가시지요?”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거든. 문제는 흉기를 들고 협박하는 놈들인데 그런 경우는 비교적 야비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해서 싸움하는 놈들 중에 제일 저질인 놈들이지! 그런 때는 옆에 있는 돌 같은 것을 가지고 상대 녀석들의 대가리를 보고 정 조준해 날려서 돌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 활로를 찾아야 되고, 상대가 많으면 이쪽저쪽 신경을 쓸 수가 없으니까! 던지면서 상대가 피하려고 할 때 다시 옆에 돌을 또 하나 주워드는데 요즈음은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돌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서 조심을 해야지 단 둘이 데이트 할 때는.”
“상대가 나보다. 손이 빠르다고 느껴지면 나는 자세를 낮추고, 내가 상대보다 빠르다고 느껴지면 서서 싸워도 되요.”
“ 와! 자기 싸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네요! 나는 전부 처음 듣는 말이에요!”
“ 아무 생각 없이 싸움하는 것하고 알고 싸우는 것하고는 프로와 아마추어와의 차이지! 그러나 아무하고나 싸우진 않아요. 나보다도 더 눈이 좋은 적수를 만날 수 있으니까. 피치 못할 때는 머리끝이 쭈뼛하고 살기가 감돌게 되고 그때는 한판 굿판을 벌려야 하는 것이고... 수컷들이란 본래 사냥과 야성본능이 있는 거니까! 허허”
그렇게 한 바탕 싸움질에 대하여 말을 하고 나니 그녀가 여자이긴 하지만 공연이 어깨가 으쓱해 졌다.
“ 이 일병이 그런 일로 나를 보고 자기를 소개시켜 준 것 같은데 결국 뺨만 한차례 얻어맞고 말았군!”
“ 그런데 왜? 나하고 있을 때는 그런 티를 한 번도 내지 않았어요?”
“ 어떤 티를! 아! 싸움하는 티 말이에요? 그건 남자들끼리 있을 때나 하는 얘기지 아름답고 예쁜 여자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지! 허허허”
다시 우리들 얘기로 돌아 왔다.
“ 그래 내가 보고 싶기는 했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얼만 큼?”
“ 정말, 정말 많이요... ”
“ 이리에서 만났을 때는 좋았어요?”
“ 응!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 많이 받고 참! 좋았어요. 누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느낌! 내 몸으로 누구를 사랑한다는 느낌! 사랑을 주고 또 받고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정말 행복했어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이리 얘기가 나오자 금 새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내가 묻는 말에 “네!” 라고 하지 않고 “응!”이라고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대답했다 그녀가 나를 좋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서울 얘기에 질색한 것과는 판이하게 대조적이었다. 우리들의 대화가 차츰 풀리고 있었다. 그녀가 베고 있는 내 오른 팔에 차츰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나도 이리에서의 그 밤을 잊지 못할 것이요. 많은 세월이 흘러가도 살아있는 동안은 잊지 못할 것이요. 난 그 때 가슴에 안겨 있는 그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세월이가면- 그 노래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물론 지나간 일이기는 하지만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과거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큰 애기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까? 했을 때요? 그 때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 그래요! 그 말을 했을 때이지. 그 때 우리 젊어서 참으로 좋은 시간이 가고 있구나! 하고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내 청춘도 가고 자기 젊은 날의 청춘도 가고 있구나!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이라 노래도 부르고 했잖아요? 왜? 그런 생각은 안 한 것 같아요? 벌써 4년이나 되었네.”
“아니에요. 좋아서 그런 생각도 했을 거예요! 나도 그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니까요. 호호호” 실로 오랜 만에 들어보는 그녀의 환하고 밝은 웃음 소리였다.
“그래서 내가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다.- 고 엽서에 썼잖아요. 나는 그 날 밤의 아름다운 일을 잊을 수도 없고 잊고 싶지도 않아요. 언제까지 그럴 것이에요”
-언제까지 그럴 것이에요- 한다. 그것은 헤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헤어지지 않고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란 얘기인가? 그런데 나는 왜 자꾸만 헤어진다는 소리로 들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접어 두고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더라도 우선 생각난 것이 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나를 떠난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차인 사랑의 패배자는 아니었다.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녀가 나를 떠나야 되겠다는 이유가 뭣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싫어서였거나 첫 날 뜨거운 밤에 뭣인가 내가 실수를 해서 그녀에게 퇴자를 맞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의 자존심이 다시 살아났다. 그녀가 다시 사랑스러워졌다. 그녀의 얼굴에 눈물의 흔적은 있었으나 밝은 얼굴로 생글 생글 웃고 있었다. 예전처럼 밝아진 얼굴이었다. 다른 미흡한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무엇이 그녀를 상처받게 했을까? 싶었다.
또 본래적인 궁금증이 발동했다.
“내 얘기는 서울은 왜? 갔으며 이별의 통고는 왜! 했느냐는 거요? 그리고 일주일 후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잊기로 해요. 사랑은 후회 않는 거래요- 하는 이별의 엽서는 너무 심했다!”
그녀의 오른쪽 검지가 가만히 내 입술을 막았다. 말하자면 그 얘기는 그만 진행하자며 입을 막는 손가락 신호였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은 물을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 내가 궁금한 것을 또 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세월이 가면- 그런 노래를 불렀어요? 헤어지려고 작정을 한 거예요?”
“아니요... 그냥 불렀다고 그랬었잖아요. 부르고나서는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슨 먹은 마음이 있어 부른 것 아니었는데... 실수한 것이에요.”
“나오다가 신발 가운데가 딱! 하고 부러져서 기분이 안 좋았지만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 가서... 좋지 않은 일이라 나도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말을 할 겨를도 없었는데 엽서가 그렇게 와서 나는 정말 새 신발 신고 먼 곳으로 도망을 가는 줄 알았지... 내가 얼마나 낙담을 했는지 몰라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입을 다시 막았다.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 하자는 그녀 식의 표현이었다.
팔베개를 하고 가까이 누워서 얘기하다보니 그녀의 눈물자국이 있는 차가운 얼굴이 내 뺨에 닿았다. 한 꺼풀 진 호수 같은 큰 두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풋사과 같이 윤이 나는 아름다운 복숭아 같은 화사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누가 이 여인에게 슬픔을 가져다주어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다시는 나로 하여금 울게 하지 않도록 하마!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러니 나만 믿고 따라오너라! 하는 소리가 가슴 속에서 끓고 있었다. 이리에서 두 눈을 마주 쳐다보고 서로의 눈동자 속에 찍힌 얼굴을 바라볼 때처럼 오늘 밤에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깊은 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랑의 자리를 내어 주는 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또 아득히 먼 곳에서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때 이리에서의 밤과 같이... 밤은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나보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아 가슴에 깊이 싸안았다. 그러고 있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숙인채로 울먹였다.
“정말, 정말, 많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자기가... 보고 싶어 혼자서 이불 속에서 우는 날도 여러 번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눈을 아래로 내려 깐 채로 조그만 목소리로 ‘정말’이나 ‘많이’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며 말했다. 이리에서 -세월이 가면- 노래를 갑자기 불러 나를 당혹하게 했던 것처럼 내가 당혹하게 그렇게 갑자기 울먹였다. 떠나고 나서 아무 연락도 없던 내가 야속하고 서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돌아누워 한참을 눈물을 훔치며 울고 있었다. 편안한 자리가 되니까 그녀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본심이 나타나나보다 했다. 만일 오늘 낮에 그녀가 바라는 대로 보내주고 갔더라면 이런 진실을 듣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솔직하게 그녀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아! 남녀 간의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도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것인가! 새삼 생(生)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모두들 태어나서 사랑하며 살다가 또 때가 되면 헤어지고 만나고 또 정든 이곳을 하나씩 떠나가야 한다는 것인가?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 서러웠던 그 마음이 가슴에 포근하게 안기자 서러움의 봇물이 터져 버린 것 같았다. 예전의 처음 밤의 살가운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예전의 그 꽃밭에 다시 돌아온 그녀를 보고, 얼굴을 돌려 마주보고 다시 안아 주었다. 이리에서의 예전처럼 그녀가 내 품에 쏙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간 지금 우리들의 옛 일들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옅어져 간다. 첫 사랑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서로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닌가? 또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전조 현상으로 여인숙에서 걸어 나올 때 유리 구두처럼 그녀의 신발이 딱! 하고 깨어져 버린 것일까?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더니 그러고도 지금 또 기다리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인가? 첫 번째 편지대로 일평생을 사랑하겠다던 약속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노래 말 그대로 우리들의 운명적 사랑은 그날 밤에도 뜨거운 화염에 휩싸여 어디론가 흘러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 사는 일일 것이다. 기다리지 못하고 가는 것은 사랑도 사람도 시간도 마찬가지다. 기다리지 못하는 여자를 억지로 끌고 가서 장가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나 혼자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닌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그때 그녀가 이별의 엽서를 보냈을 때도 군대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그리고 나의 여건상 결혼을 하여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직 청춘이고 온 몸에는 힘이 넘쳐 나고 있었으니 아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사랑도 내 마음대로 되는 그런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날까지 사랑한다고 했으니 3년 이상이 지나더라도 나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런 자신 있던 마음이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나 혼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남녀 간에는 부모자식 간에 주는 사랑처럼 끝없이 주기만 하는 그런 사랑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녀는 몸이 뜨거운 여자였다. 이리에서나 목포에서나 밤이 다 지나 날이 새도록 사람을 가만히 내 버려 둘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기다린다는 확답을 주지 않았기에 막연하게 그녀가 나를 떠날 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날 밤 나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요즈음 아이들이라면 젊음의 날들을 남겨 두기 위해서 동영상이라도 찍어 둔다고 하지만 비디오가 없던 그 시절은 그녀와 나의 사랑에 있어 기억이 날만한 것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랑에 몰입해 있는 그녀와 다르게 나는 먼 날이 지나더라도 잊지 못할 사랑의 밤을 보낸 것이었다. 그런 발정 난 암고양이 같이 뜨거운 그녀가 좋았다. 우리들의 푸른 젊은 날들이었다.
새벽을 거쳐 날이 밝았다. 아침이 되자 확답을 받고 싶었다.
“지금은 내가 공부를 해야 해요. 그러나 내년 초에는 데리러 올 수 있소. 학교에 떨어지더라도 데리러 올 것이요. 이제 와서 몇 개월을 기다리지 못한다고 해서야 되겠어요?”
“집에서 너무 보채요...” 말꼬리가 힘이 없었다
“집에서 보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괜찮을 것 아니요.
너는 꼭 영찬총각한테 가서 살아라! 고 말했다 하지 않았소?“
“엄마 말고도 오빠도 있고 친척들도 노처녀 된다고 난리법석이에요 “
“그러면 고집부리면 되겠네, 나한테만 부리지 말고, 그런데 좀 부려보아요.”
그녀는 몽탄 집에서 고집 부리던 일이 생각이 났는지 “쿡!” 하고 웃었다.
“미안해요. 우리 성씨가 고집이 세어요...”
몽탄 일에 대해서 그녀가 사과를 했다.
“내가 올 줄은 알고 있었소?” 다시 확인을 하는 물음을 던져 봤다
“너무 명확하게 끊고 가서 반신반의 했어요... 그래도 올 것 같았어요. 확신은 없었지만...성격상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끝까지 기다리지 그랬어요?”
“ ...”
“변명 같지만 제대한 후에 너무 경황이 없었어요. 그런 일이 없었어도 한참 연락을 못했을 만큼... 그 점에 대해서 미안해요”
나도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리에서 자고 난 후 내가 싫어서 그런 엽서를 보낸 것은 아니었어요?”
“언제 자기가 나한테 미운 짓을 했었어요? 나는 자기를 좋아했어요. 우리의 여건이 나빠서 화가 났던 것이고, 몽탄에서 따라나서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 ”
“한 가지는 다짐을 받아야겠어요?”
“뭐에요?”
“나는 기다리는 줄 알고 가겠으나 만일에, 만일에... 말이요. 결혼을 하게 되면 12년이 지나 1990년도 10윌 3일 개천절 날, 낮 4시에 여로다방에 나와 줄 수 있겠소? 자기가 나한테 말했듯이 나도 자기가 사는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약속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요?”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될 수 있으면 나가도록 할게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세 번째 만남의 헤어짐은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아마 목포역 앞 어디쯤에서 손을 흔들어 잘 가라고 하며 헤어진 것 같다. 영화 닥터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에 무심하게 길거리를 걸어가는 사랑하는 라라를 바라보고 전차 안에서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헤어졌을 것이다.
그 후에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가을 호에 계속)
강성수: 시인, 소설가 *사진은 봄호 311쪽 참조
경북 선산 출생, 아호는 태로. 원광대 치대 졸업(치과 교정학 박사) 목원대학교 이사.
재전부산고동문회 회장. 구미선산향우회 회장.<국제문예>시 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국제문단』소설 부문 -첫 사랑, 사랑은 후회하지 않는다-신인상 수상 후 10회째 영재중.
[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현)대전 바르게 치과 원장. .kss28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