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1] 전남대학교 60년 의미와 과제 (1) 인재양성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다
호남 최대 인재양성 요람 역할 다했다

(전남대학교는 개교 당시 도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으로 성장했다.
위 사진은 1952년 개교 기념식에 참석한 이을식 전남도지사가 최상채 총장과 악수하는 장면.)
20만 인재 용봉캠퍼스에서 수학 후 사회진출
도민의 성금으로 개교… 인재 양성으로 보답하다
대학설립 적극 지원한 지역사회에 봉사한 60년
중국의 관중(管仲)은 ‘곡식을 심는 것은 일년 계획이고, 나무를 심는 일은 십년 계획이며, 사람을 키우는 것은 백년 계획이다’(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고 했다.
전남대학교의 개교 60년은 바로 인재를 키우는 역사의 흔적을 우리 호남지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남겨 둔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전남대학교의 다양한 교육기관과 인연을 맺고 배출된 인원만도 20만 명. 이들은 이제 호남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국가와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명문대학교로 자리 잡기까지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 학교 문을 열어 모든 교육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경제적 어려움도 학교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정치적 암흑기를 거치며 숱한 외풍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남대학교는 지난 60여 년간 무려 20여명의 인재를 배출해 지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넘어 국가 경제성장 및 사회 진보의 커다란 축을 담당했다. 특히 전남대학교는 국립대학교라는 강점을 활용, 지역 우수인재들을 양질의 동량으로 키워 오늘 날 광주전남지역사회 리더들을 길러낸 것이다.
또한 기초학문 육성에 힘을 기울여 수많은 학문적 업적과 성과를 내 최고 교육기구로써의 역할도 톡톡히 하며 오늘을 맞았다.
호남최대의 인재요람 전남대학교 발전과정과 전남대학교 60년 갖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되짚어본다.
전남대학교는 1952년 6월 9일 개교하였지만 태동의 움직임은 1951년부터 일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터지면서 대학생들은 국군과 북한군에 강제로 소집되었고, 심지어 중학교 고학년까지(당시에는 고등학교가 없었음) 피난을 다니느라 재학생 수가 전쟁 전과 비교해 반수로 감소했다. 1951년 9월에 있은 대학신입생 모집에서는 입학시험 응시 중에 강제로 입영되는 경우까지 있어 광주에 있던 광주의대를 제외한 광주농대․목포상대는 물론 조선대․대성대도 입학 정원의 불과 30%만 채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미래 한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여론에 힘입어 국무회의는 1951년 5월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을 공포하고 대학 재학생에 대해서는 병역을 연기하는 특혜를 부여하기로 하는 한편,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여 지방에서도 서울 등에 학적을 두고 있는 재학생들이 학업을 지속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광주에도 당시 광주의대 최상채 학장이 전시연합대학 학장을 겸임하는 한편 광주의대 부속 중등교원양성소(동명동 소재)를 전시연합대학 임시교사로 활용하였다. 정부는 또 지방 국립대학교 설립의 필요성에 따라 사정이 하락되면 이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최상채 학장과 광주 유지들을 중심으로 광주의과대학․광주농과대학(초급)․목포상과대학(초급) 등 도립대학과 광주향교가 설립한 대성대학을 합쳐서 국립대학교 설립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1952년 9월에는 이 4개 대학이 국립 전남대학교 설립을 기정사실화 하여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광주향교 인사들 가운데는 대성대학을 도민의 성금으로 설립되었던 조선대학교에 통합하는 것이 취지에 맞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성균관(成均館)이 국가기관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국립대학교에 통합해야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에 국립 전남대학교에 통합하기로 했다.
1952년 9월 14일 국무회의가 국립 전남대학교와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전북대학교 설립안을 가결하자 이틀 뒤인 16일 박철수 전남지사를 회장으로 하는 전남대학교 설립기성회를 전남도청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3개 도립대학을 전남대학교에 통합하고, 향교재단에 의해 설립된 대성대학의 재산과 교수․학생을 흡수하여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으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또 전남대학교가 설립․인가되면 동시에 공과대학과 법과대학을 신설하기로 하는 한편, 전남대학교의 부지를 구입, 강의실을 건설하는 등 국립 전남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설립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전라남도 도민에게 전남대학교 설립기금 6억 3,000만원을 할당하는 한편, 1951년 11월 4일 귀속재산인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의 2만 6,637주와 공장일체를 9억 3,000만원에 매수했다. 이후 향교재단평의원회는 1952년 5월 3일 당초의 약속대로 이 법인의 기금인 농지증권 총액의 50%에 해당하는 9억 원을 전남대학교후원재단기금으로 기증하였다.
용봉동으로 캠퍼스가 결정되고 부지를 매입할 때 문교부발행 지가증권 14,921석에 대한 수입금 1,239만원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나 전남도민들이 모금한 금액에 비한다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결국 전남대학교는 국립으로 출발하기는 했지만 전쟁 때문에 국가의 지원은 일부에 그쳤고 각 시군에 할당된 설립기금, 귀속재산, 향교재산 등이 개교의 기초재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남대학교가 ‘국립’이기는 하지만 광주․전남 발전을 견인해야 하는 것은 물론 시도민들에게 감사와 애정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개교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출발의 역사가 있어 전남대학교는 지역사회를 이끌 우수 인재들을 길러 배출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개교 당시 720명이던 입학생의 규모가 여수대와 통합과정까지 거치며 무려 7천여 명으로 늘었다. 지금까지 배출한 졸업생만도 20여만 명, 이들은 지역의 정치, 행정,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에서 맹활약하며 오늘날 주축 리더그룹으로 성장해있다. 졸업 1세대들은 사회발전의 초석을 놓았고 2세대들은 그 틀을 공고히 닦았으며 이제 3세대 후배들이 사회 각 분야 현장을 누비며 전남대인의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어느 분야 몇 명이라는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20만 동문들이 고루 열심히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과는 바로 도민의 힘으로 제자리를 잡은 국립전남대학교가 지역 사회에 대학발전의 혜택을 고스란히 되돌려준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전남대학교가 개교 60년을 맞은 것은 바로 이처럼 지역발전의 핵심 동량을 길러낸 지역 최고 교육기관이 이제 어엿한 역사를 이루고 새로운 자기역할을 모색할 제2의 도약단계를 맞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한 차원 더 높은 교육과 학문탐구로 사회발전의 질을 더 높일 수 있는 인재배출과 대학기능을 요구받고 이를 실천해야할 때임을 각성할 시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