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면 3.18 독립 운동 기념관’에 걸린 ‘매전면 장연리의 만세’ 안내판. 사건의 내용 및 사진도 사실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민원> 존경하는 군수님 귀하
청도 3.1운동의 효시 장연리 만세 사건 기념비 건립 건의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가 발표되고 거족적(擧族的)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외치는 평화적인 시위는 조직적으로 일시에 전개되었으나, 우리 고장 청도(淸道)는 교통과 통신의 격오지(隔奧地)인 지역적 여건으로 인해 즉시 전파되지 못하고 있다가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산동(山東)지역에서부터 먼저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중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이 매전면 장연동(梅田面 長淵洞) 만세시위 사건이고, 청도군 만세운동의 효시(嚆矢)입니다.
1919년 3월 10일 장연동에 있는 고성이씨 문중 이원당(李元塘) 조상의 제전(祭典)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농민 김집이(金集伊.28세)는 이씨문중 제례(祭禮)에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부터 전국 독립의거(獨立義擧)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같은 마을에 사는 노이만(盧二萬.34세), 이선이(李善伊.32세), 이작지(李作之.30세), 이용술(李龍述.31세), 최두천(崔斗千.27세), 이학천(李學千.29세), 배돌이(裵乭伊.30세) 등을 규합하여 이날 오후 9시와 다음 날 오후 9시 야간에 2차례에 걸쳐 연인원 100여명의 주민들이 동네를 누비면서 '한국독립만세(韓國獨立萬歲)'를 외치다가 이 마을 이동기(李東基) 씨 집 앞에 다시 모여 해산하였습니다.
당시 동창천(東倉川) 건너 온막동에 있던 경찰 주재소(駐在所)에서는 이 사실을 뒤늦게 인지(認知)하고 주동 인물을 탐문해서 주동자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등 6명을 검거하여 고문 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하였다가 불기소로 석방하였고, 김집이는 노이만과 함께 도주했다가 후일 노이만만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고, 김집이는 이후부터 생사불명입니다.
또 1941년 매전면 장연동 길명마을 사람 이종악(李鍾岳)은 대구사범학교 5학년에 재학 중 대구사범학교의 항일결사(抗日結社)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의 조직원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에 검거되어 퇴학 처분을 당하고, 2년여의 미결기간을 거쳐 1943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2년6월의 징역형을 받은 일도 있었고,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대구 사범학교 출신 매전공립국민학교 안진강(安津江) 교사는 학생들에게 항일정신을 교육하다 1941년 당시 문관징계령(文官懲戒令)에 의해 교사직에서 파면되고 구금되어 같은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두 장연리 만세운동으로 시작한 이 마을 항일정신의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연리보다 늦게 일어난 군내 다른 지역의 항일운동은 모두 기념관이나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반해 어찌된 영문인지 장연리에는 아직도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군수님께서 한번 검토하시어 지금 공사 중인 장연리 생태공원나, 아니면 장연리 길명마을에 기념비를 세워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2015.2.26.
청도군 매전면 호화리 김진태 드림
전화 010-8557-0000
* 참고자료
청도의 독립운동사,권대웅 외,청도군,185,197,198
독립운동사 제20권 국내 3·1운동 Ⅱ - 남부, 金珍晧 외2명
대구지방법원, 「노이만 판결문(1919년 6월 21일)」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권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49보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33.
독립운동사자료집 13 :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1977.12.2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운문면 3.18 독립 운동 기념관’에 걸린 안내판을 어린이들이 관람하고 있다.
<회신> 청도군 주민생활지원과(2015.3.4.)
평소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 관심을 가져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의 3.1 독립(만세)운동은 마을단위 만세운동으로 우리지역에는 유호리, 운문면, 장연리, 구촌리, 송금리, 화양읍 등지에서 만세 운동을 한 사실이 있으며, 매전면 장연리에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건립지원 건에 대하여 검토한 바, 군내 만세운동이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우리군 재정형편상 지원에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만약, 마을자체에서 건립 계획을 수립 추진시 대구지방보훈청에 신청하여 보훈청의 심사를 거쳐 승인되면 총사업비의 30%정도 국비가 지원됨을 알려드립니다. 끝.
<민원 처리 만족도>
청도군은 민원인에게 한 번도 민원 내용을 구체적으로 물어 온 적이 없었다.
이 회신 이후 민원인이 군내(郡內) 인근지역의 3.1운동 기념비 건립 실태를 확인한바, 1919년 3월 10일 장연동 만세사건에 이어 3월 18일 운문면 대천동 면사무소 앞과 19일 공암동 강정(江亭)에서 만세시위가 있었고, 4월 20일에는 청도읍 거연동 철로(鐵路) 변에서 만세 시위가 이었으며, 5월 7일 석가탄신일 매전면 구촌동에서 만세시위가 있었고, 같은 날 유천(柳川)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일본인 수야(水野) 외 2명의 집을 습격, 구타하는 다소 과격한 시위가 있었다.
우리 지역 장연동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운문면 사건은 교육청에 의해 신원리 방지초등학교 문명분교 내에 '운문면 3.18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청도읍 거연동 만세사건은 주민들에 의해 철로 변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유천 만세사건은 민.관(民.官) 합동으로 내호리 오누이공원에 기념탑이 이미 세워져 있었다.
구촌리 만세사건은 구촌동민이 아닌 밀양군 상동면 매화리 주민들이 건너와 시위한 사건임으로 제외하면, 현재 장연동 시위사건만 아무런 기념 흔적 없이 잊혀져가고 있는 실정으로 청도군청의 회시 내용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한차레 더 민원을 제기했으나 관련 법규를 잘못 인지한 민원인의 착오에 대한 해명만 들을 수 있었고, 민원 본안에 대해서는 관심표명 정도의 회신을 받았다.
<추기> 전국매전면향우회 박규혜(관하,매전중2회,포항거주) 님께서 독립기념관에서 3.1운동 당시 전국 시위현황 중 장연동 시위 부분을 찾아 사진을 보내왔다. 그러나 시위 일시가 사실과 달라 정정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4월 12일로 기록되어있어 1개월 이상 차이가 난다. 독립기념관 자료는 경북경찰부의 '고등경찰요사'를 근거로 한 것으로 이는 경찰에서 뒤늦게 사건을 인지하여 상부에 보고한 날이고, 실제 발생일은 대구지법의 노이만 판결문에 3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야간시위를 한 것으로 정확하게 나와 있다. 판결문의 내용은 ‘청도의 독립운동사’ ‘한국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자료집‘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등의 사료가 뒷받침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kjyoun24/221040020212
첫댓글 훌륭하십니다.
우리 고장 매전면 장연리에 이렇게 만세운동이 있었다니 놀랍고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매전초드학교 총동창회가 중심이 되어서 전국 매전면 향우회 연합회 밴드등을 통해서 많이 홍보해야 겠습니다.
정작 장연동 주민과 출신 조차도 이 사실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니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