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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고, 151장(만왕의 왕 내 주께서) 20170704 갈라디아서 2:11-21
복음 변호를 위해 경험적 변증(1장 11절~2장 14절)과 함께 신학적 논증을 이어갑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11~14절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지만(9절),
복음에 따라 처신하지 않은 베드로를 향해서는 공개적인 면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그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이고,
복음이 훼손되어도 관용해야 할 상황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두려워 이방인과의 교제를 회피한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의 진리보다 평판을 더 중요하게 여긴 위선입니다.
그의 외식은 복음의 본질을 희석했고 또 다른 외식을 낳았습니다.
나는 믿는 대로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적은 없습니까?
15,16절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도 없고 ‘의의 소망’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멸망의 길에 놓인 인류가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또 율법의 행위는 차별을 두지만(12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마서 3장 22절)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허문 차별의 장벽을 우리 손으로 다시 쌓지 말아야 합니다.
17,18절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죄를 짓도록 조장한다는 비난에 대해 반박합니다.
그런 비난은 그리스도를 죄의 구속자에서 조성자로 폄훼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조는
할례나 절기, 음식법과 같은 율법(의 행위)의 무가치함을 드러내는 것이지
방종을 허용하거나 순종의 요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이유로 죄 짓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19~21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단지 신분의 변화만 가져오는 일이 아닙니다.
내 소속을 바꾸고 주인을 바꾸는 일입니다.
과거의 죄뿐 아니라 죄를 지은 나도
주와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전의 내가 죽은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옛 자아가 살아나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길만이 내가 살고 남도 살리는 길입니다.
기도 저의 식탁에 어려운 이웃을 초대하여 복음을 나누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