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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립운동가 박열의사 추도회 원문보기 글쓴이: 朴東信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35] 박열(朴烈 1902~1974)
( 1990.8.3. 한겨레신문 연재, 조선희 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옛 화신 백화점 앞 태을다방에는 백발이 희끗희끗한 노신사들이 열명 남짓 모여든다. 식민시대에 의열단활동을 했던 최갑룡(86)씨, 해방공간에 자유사회건설자연맹 대표를 지낸 전 서강대 교수 양희석(83)씨 등이 고정멤버들이다. 자신들을‘아나키스트(무정부즈의자)’ 혹은 줄여서‘아나’라고 부르는 이들의 모임은 6·25전쟁 중 명동 백장미다방에서 시작돼 벌써 40년째 계속돼 오고 있다. 20년대 식민지 지식인 사회를 풍미했던 ‘권력기관 없는 자주 공동체사회’운동은 이제 전 세대 운동가들의 친목모임으로 실날 같은 명맥을 이어오고 잇는 셈이다.
태을다방의 노인들
이들은 지난 87년 약 3백명쯤의 회원들이 모였던‘자주인연맹’총회를 한국아나키스트들의 4차대회로 규정하고 있다. 29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총회를 1차대회, 45년 서울의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총회를 2차대회, 71년 자주인연맹 총회를 3차대회로 친다.
“범민족대회에 우리 자주인연맹도 참가합시다. 전민련의 신창균씨에게 가서 신청서를 타 오시게.” “우리들이 있음을 보여줘야지요. 그런데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원래 아나키스트들을 싫어해 놔서...“ 마침 범민족대회 예비회담이 하루 뒤로 다가온 25일 태을 다방 회합에선 범민족대회가 화제로 올랐다. 이들‘아’들이 사상의 선배로 꼽는 인물은 신채호, 박열, 유림, 정화암 선생 등인데 이중에서도 박열은 식민 시대 무정부주의 운동을 상징하는 신화적 존재로 각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본격적인 무정부주의 운동 조직가로서 박열(본명 준식)의 삶은 불과 2년에 그쳤다.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띤 한국인 최초의 사상단체인‘흑도회’를 도쿄에서 결성한 1921년부터‘대역사건’의 사형수로 감옥생활을 시작하는 23년까지다.
그러나 한때 식민지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박열일파 천황암살음모사건’‘박열과 일본인 애인 가테코 후미코(금자문자)의 옥중결혼설’등으로 인해 박열은 당대의 다른 어떤 무정부주의 운동가들보다 낯익고 인상적인 이름이 돼 있다.
관동대지진의 후유증의 채 가시지 않은 1923년 10월 16일 석간신문들에는‘상해폭탄사건, 진원은 무정부주의자의 대음모’라는 제목의 조직사건이 대서특필됐다.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도쿄 경시청이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 17명을 검거, 한달 남짓 심문한 결과 만주 의열단으로부터 폭탄 50개를 들여와 테러활동에 사용할 음모를 꾸민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당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량학살의 핑계를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돌리려고 일본 당국이 조작한 것으로 풀이했다. (하기락 <한국아나키즘운동사>)
나중에 ‘대역사건’‘황실에 대한 불경죄 사건’ 등으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의 주범이었던 박열과 가네코는 이때부터 사형판결을 받던 26년까지 사흘 걸러씩 국내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도쿄진재 당시 대음모를 도모하던 무정부의자의 수령 박열은 <흑로> <불령선인> 등 주의선전 잡지를 발행하던 청년인데, 목하 그와 함께 철창에서 신음하는 꽃같은 여성이 있으니 그가 다름아닌 <불령선인> 등에 박문자란 이름으로 종종 기염을 토한 일본 여자 가네코 후미토다.”(<동아일보>1923년 10월 18일)
25년 11월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토의 옥중결혼이 저널리즘의 호재가 되기도 했다. 또한 박열이 재판장에게 공판정에서 죄인대우하지 말 것, 조선옷 입도록 허락할 것,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등 네 가지 요구에 불응하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놔 재판부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기사는 식민지 조선인인들이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육신은 죽여도 정신만은...”
“26년 3월 25일 검거후 2년7개월만의 대역사건 판결에서 박열과 가네코 부부에게 사형이 언도됐다. 이들 부부의 법정진술은 일본 개벽 이래 처음 듣는 대담한 언사가 많아 재판장의입을 벌리게 했는데 사형이 선고되자 박열은 미소지으며‘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라. 그러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가네코는‘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라, 박열과 함께 죽는 것을 가장 만족히 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더라...”
그러나 바로 1주일 뒤 이들 부부를 각각 무기징역으로 감형다는 발표가 나왔다. 4개월 뒤인 7월 느닷없이 가네코가 작업중 삼줄로 목매 자살했다는 보도는 또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일본내 극우파가 가네코 옥중 임신설을 빌미로 내각을 곤경에 빠뜨리던 무렵 가네코의 죽음은 당국에 의한 타살 의혹을 짙게 풍기면서 희대의 의문사 사건으로 남게 됐다.
박열은 45년 10월 23일 해방 직후 아키다 형무소에서 석방되기까지 식민시대의 나머지 날들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한때 장기 흉악범들만 수용하나다는 홋카이도 아미하시 형무소에 이감됐었다.
박열이 옥중에서 썼다는 한시 몇수가 전한다.
“식월달 달밝은 날 / 새벽에 가시니라 /OOOO 계신데로 / 나의 님은 가시니라.....중략...가을날 바람차고 / 구름은 덮였는데 / 아침부터 공중에서 / 비행기가 오고간다. 오고가는 비행기에 / 타고앉은 비행사야 / 네중에는 한사람의 / ‘테러’도 없는고야.”
박열은 1902년 경북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서 가난한 농민 박영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창공립보통학교를 나와서 15살에 상경했고 경성고보 사범과 2학년 때 3·1만세운동과 관련돼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세이소쿠영어학원에 다녔다. 21년 재일조선인 고학생동지회 결성은 그의 첫 사회운동의 기록인데, 본격적인 조직운동은 그해 11월 김약수 조봉암 김사국 원종린 정태성 등과 함께 결성한 사상단체 ‘흑도회에서 시작된다. ’흑도회‘는 이듬해인 22년 12월 김약수 등 공산주의자들의 ’북성회‘와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의 ’흑로회‘로 갈라졌고, ’흑로회‘는 기관지 <불령선인>을 발간했다.
그 무렵 그가 일시 귀국해 서울에서 이강하 등과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단체인 ‘북로회’를 조직해놓고 도쿄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도쿄‘흑로회’와‘불령선인사’는 23년 ‘박열 대역음모’사건으로 핵심인물들이 모조리 구속되면서 쑥밭이 됐다.
청년기의 대부분을 형무소에 묻고서 45년 40대 중반에 접어든 중년의‘재일동포’자격으로 해방과 출옥을 맞은 박열의 이후 기록은, 청년기의 혁명성은 가시고 정치적 야심이 고개를 드는 가운데 이제 무정부주의 관계문헌들로부터 <민단 40년사>(재일거류민단 ·87년 펴냄)로 옯겨진다.
<민단 40년사>에 따르면 박열이 도쿄시내에 다시 나타난 것은 45년 11월 26일,‘재일조선인영맹’등 국내와 마찬가지로 사상과 입장을 달리하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던 무렵이었다. 박열이 도쿄에 돌아오자 그를 자파의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여러군데서 가시화됐고, 두 달 뒤인 46년 1월 20일 열린‘신조선건설동맹’창립대회에서 박열이 위원장에 선출됐다.‘민주주의적 건국의식’‘사해동포·세계협동’‘민족자주’‘근로대중의 동지’등 문구가 들어 있는 강령에서 아나키즘의 색채가 약간 가미된 중도우파의 취향을 읽을 수 있다.
신조선건설동맹은 그해 10월 3일 재일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등 범우파 단체들을 흡수 통합하면서‘재일조선거류민단’이라는 거대 기구를 띄웠다. 역시 단장에 박열, 부단장에 이강훈(현 광복회장)씨가 서출됐다.
‘재일조선 거류민단’은 태평양연합군사령부 및 남한쪽 단독정부 수립세력과 연계하며 재일동포 문제의 해결에 나섰고, 박열은 민단활동을 기점으로 명백히 우파대열에 앞장서게 된 셈이다. 이승만은 46년 12월과 47년 4월 국제연맹 회의 참가를 위한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도쿄에 들러 박열과 두 차례 만났고 이 회담 이후 민단은 정치적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게 된다.
6월 <민단신문>에 실린 박열 단장의‘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의미심장한 테제를 신호로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는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정수립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굳혔다.
이승만과 제휴 시도
재일 조선인거류민단은 48년 남한정부 수립 직후에‘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른다. 박열은‘대한민국 거류민단’으로 바뀌기 전인 48년 2월 재정문제와 민단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남긴 사임의 변 가운데‘조국 조선의 정국은 극도의 긴박 하에 있습니다... 나는 금일까지 재일동포의 민생안정에 몰두하여 정치적 의견을 온존하여 왔는데 이제야 일어나서 정치적 활동의 복판에 투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위의 대목들에서 이미 그의 마음이 남한의 정치무대를 향하고 있다는 냄새를 짙게 풍겼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참석했고, 이듬해 5월 다시 귀국해 서울에 머물렀다. 당시 무정부주의 단체인‘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대표를 맡아 박열과 가깝게 지냈던 양희석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49년 5월 귀국했을 때는 환영회가 대단했지요. 박열은 50년 4월 초 아마도 영주 귀국할 모양으로 다시 왔는데, 이 대통령이 경무대로 불러 등을 두드리며‘내 아들 노릇 하라’고 얘길했다고 그러더군요. 한규설의 아들 한학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가 대원호텔로 거처를 옮겨 경무대에서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렸지만 무소식이어서 퍽 낙담해 있었어요. 그 뒤 6·25가 나고 사흘 뒤 부인 장의숙이 남편이 없어졌다고 우리 집에 찾으러 왔을 때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들더군요. 이미 인민군에 납치된 뒤였지요”
70년대에 열린‘박열 의사 추도식’에서 양씨가 낭독한 추도사는 이 대목에 대해“정치가의 권모술수에 넘어가고 속물이 작난에 놀아나다니 이미 혁명가의 기백은 상실된 것 아니냐”고 개탄하고 있다.
남쪽에 남았던 부인 장의숙씨는 그 뒤 타계했고, 슬하에 아들 박영일, 딸 박경희 씨가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인 장씨는 거류민단 단장시절 박열을 인터뷰하러 왔던 일본 <국제신문>의 한국인 기자였다.
납북뒤 74년 북에서 사망
1973년 오랜 세월 대중의 기억에서 밀려나 있던 박열과 가네코의 이름이 국내 신문·잡지들을 요란하게 장식했다. 박열의 형 박정식이 수습해 박열의 고향에 안치한 가네코의 유해가 50년 만에 고국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갖가지 흥미진진한 내력과 일화를 거느린 채, 유신시절을 살아 넘기는 대중들에게 한차례 신선한 화제를 선사했던 것이다. 이 해 7월에는 유해가 모셔졌던 문경읍 팔령동에서‘금자문자 여사 묘비제막식’이 엄수됐다.
그 바로 다음 해인 74년 1월 18일 국내 신문들 귀퉁이에는 짤막한 1단짜리 기사로 박열이 북에서 73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평양쪽 발표는 그를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회장으로 소개하고 있었으나 최갑룡씨 등은 그의 전적으로 미루어 그가 다른 납북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영변에 격리 수용됐을 소지도 없지 않다고 보고 있다.
2) 박열열사 이야기
1923년 가을, 지금의 일본 임금의 아버지요 당시 왕세자였던 소화일왕의 결혼식이 약정돼 있었다. 한데 이 시기에 때 맞추어 폭탄을 해외로부터 입수하려고 물색하는 한국 청년이 있다는 제보가 일본 경찰 당국에 들어왔다. 제보자는 니이야마라는 일본 아가씨다. 그녀의 한국인 연인인 김중한이 독립사상을 품은 한 한국 젊은이의 부탁으로 폭탄 입수의 일을 진행중이라고 밀고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왕과 왕세자를 폭살하려 음모했다는 소위 박열사건의 발단이다.
주모자인 박열은 경북 문경 점촌 태생으로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3·1운동을 겪고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작심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당시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던 오스기의 무정부 운동에 동조하여 그 산하에 한국인 동지 16명을 규합, 불령사라는 결사를 했다. 바로 고자질을 한 김중한과 니이야마도 그 결사의 같은 동지였다. 불령이라는 말은 일본 당국이 독립사상을 품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지칭하는 불온이란 뜻으로 결사 이름부터 반항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직업을 물으면 법정에서까지도 「불령업」이라고 대꾸했을 정도로 민족의지가 투철했다.
박열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의회란 국가라는 이름의 대강도단의 소두목 회의요 천황(일왕)이란 국가란 강도단의 소두목을 거느린 대두목이다”
박열은 1922년에 두 번 서울에 가 의열단의 한 사람인 김한에게 폭탄을 의뢰했고 이 두 사람과의 연락을 서울의 기생인 이소홍이 맡아 했는데 암호편지로 내왕했다 한다. 그런데 때마침 서울에 김상옥 의사의 폭탄사건이 일어나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또한 그가 우편배달부로 임시 고용되어 일본 임금이 사는 궁성 내부를 드나들며 내부구조를 익히기도 했다. 곧 범죄 예비는 했을망정 폭탄을 입수하거나 실행한 구체적 행동은 없었다.
이 박열 사건을 이해하고 진행하는데 일본 여인 가네코후미코를 빼고는 불가능하다. 일본 발음으로 부르지 말고 금자문자로 불러달라던 박열 의사의 연인이다. 박열이 금자문자를 만난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이는 오뎅집이었다. 그 집에서 막심부름하던 그녀의 생각이나 지성이 너무 진보적이고 날카로우며 풍부한데 반한 것이다. 박열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그녀의 인생역정은 어떤 통속소설보다 기구했다. 아버지는 첩을 들여놓고 어머니를 밤낮으로 패길 일삼았다. 어머니의 출타 중에 한 집에 살던 이모를 겁탈하는 아버지를 숨어본 것은 금자문자의 여섯살 때 일이다. 끝내 문자를 업고 가출한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호구를 했는데 나카무라라는 사나이와 동서 생활하면서 문자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방이 하나라 추잡한 일을 할 때면 엄동설한에 밖에 내쫓기길 일쑤였다 한다. 이 귀찮은 존재인 문자를 조선 경상도 김천에 동양척식회사의 개척이민으로 가 사는 외삼촌 집에 맡겼다. 후에 쓴 옥중기에 보면 조선에서 살았던 6년간은 매일처럼 철로변에 나아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뛰어들까 말까하는 추억밖에 없다 했다. 그는 도쿄에 돌아와 허리에 방울을 달고 달랑대며 신문팔이를 하면서 정칙영어학교에 들어가 중등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 문예반에서 알게 된 것이 박열을 대역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고자질한 니이야마다.
그녀의 일생을 살았다고 가정하면 이 세상 어느 누구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으며 허무주의자가 되지않고 배겨났겠는가. 박열을 만난 금자문자는 이 부조리에의 억하심정을 무정부 운동의 열정으로 쏟았다. 그들은 결사의 기관지를 편집하며 과격 논설을 싣는 등 의기투합하여 심신을 같이하는 동서생활을 일본 빈민가 게다집 셋방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 셋방에서 박열은 왕족폭탄살해 음모죄로 금자문자는 그 공범으로 잡혀든다.
박열이 과격한 반일 항일주의자인 것만은 틀림없고 일본국의 수장인 일왕을 폭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일본 법정이 밝힌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는 근거가 박약하며 따라서 조작설이 유력하게 나돈 채 의혹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박열로 하여금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할 정치적 배경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지방의 대지진이 온상이다. 이 때 있었던 한국인 대학살은 그 처참함이나 무도함으로 온 세상을 경악시켰고 일본이 궁지에 빠지게 한 사건이었다. 일본 자경대라는 민간단체에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돼있지만 일본 정부나 군부 경찰이 배후 조작했다는 사실은 저희네 조사로도 엄연한 사실이 되고 있었으며 외국에서도 그 사실을 알아 날이 갈수록 외교적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었다.
이 학살의 정치적 조작을 한 배후로 당시 일본 내무대신이요 3․1운동 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한국통 미즈노가 지목되기도 했다. 그는 관동 대지진 이전에 일어났던 일본 각지의 쌀 파동의 무서움을 체험해 알고 있는지라 대지진 후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식량 파동에 겁을 먹고 있었다. 시어머니한테 호통 맞은 며느리가 부엌에 들어와 무고한 강아지 배때기를 차 깨갱거리게 하여 스트레스를 전위시키듯이 팽배한 일본민중의 욕구불만을 한국인으로 향하게 하여 분출시키는 불만 전위정책을 쓴 것이다. 한국인이 난리 틈에 일본인을 습격하고 샘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는 루머를 퍼뜨려 대량 살상을 야기시킨 것이다.
이 무자비하고 잔인무도한 학살 사례가 구미 각국에 외교채넬과 신문 보도로 알려지자 열강에서 항의 규탄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일본 주재 외국대사들이 연서명하여 한국인 학살을 항의하는 것을 필두로 세계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에 대한 정치적 음모 하나를 진행시킬 필요가 생기고 이것이 바로 박열 사건인 것이다. 곧 일본인이 재일 한국인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 수밖에 없는 골치 아픈 한국인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한국인이 일본 왕을 죽일 뻔했다는 연극을 조작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박열과 금자문자의 옥중괴사진도 이 조작 선상의 한 작품이다. 괴사진이란 판사의 예심조사실에서 박열이 앉아있는 무릎에 금자문자가 태평스레 책을 들고있는 사진이다. 뿐만 아니라 취조하던 다치마쓰 예심판사는 피의자인 박열과 금자문자를 취조실에 놓아두고 변소가는 척 오랜 시간을 비워두곤 했다 한다. 당시 일본 우익은 괴사진을 두고 춘화라 표현하고 사법권의 문란이라 하여 당시 와카키 내각의 사퇴를 들고 나오기까지 했다. 끝내는 박열과 금자문자가 옥중결혼을 했다는 설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당시 조선일보에 보면 옥에 갇히기 전 1년 남짓을 동거한 사이로 굳이 옥중결혼까지 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고 당사자들이 부인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사법사상 전례없는 옥중결혼을 시킨 것이라 하여 떠들석했다. 이 괴사진과 옥중결혼은 그들의 공작대로 피의 사실을 자백케하기 위한 유화정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공판이 열리기 전에 박열은 면회갔던 조선 학우회의 조헌영에게 자신과 금자문자가 한복을 입고 재판받게 해달라 부탁해서 한복을 차입했다. 공판정에 입정한 박열은 쌍학교비하는 혼례복에 사모를 쓰고 관대를 둘렀으며 태극선을 든 채였고 금자문자는 흰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공릉치마 차림이었다. 일본 왕을 대표하는 재판관이라면 나는 한국민족을 대표하기에 한복을 요구함이며 재판관석과 피고석의 높이를 동등하게 하라고 요구함이며 나는 한국말을 사용할 테니 통역을 딸려라고 말함이며 심문에 재판관이 꿀릴만큼 기개가 당당했다. 그는 지구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 가운데 첫걸음이 일본 제국을 쓸어버리는 일이다라는 등 보도하지 못하게 한 ‘아의 선언’ 등 극단 발언이 많았다. 형법73조인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에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규를 적용, 사형을 언도하자 박열은 태연히 웃음을 띠었고 금자문자는 “박열과 나를 한 교수대에서 같이 목매어 죽여달라. 그리고 죽은 백골도 더불어 묻어달라”고 진술했다. 1926년 3월25일의 일이었다.
한데 10일이 지난 4월5일에 무기징역으로 특사를 받는다. 특사를 받은 지 넉달이 되는 7월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금자문자가 수인작업인 마니라 삼끈을 꼬다가 그 끈을 창살에 매어 목매어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소설보다 더 기구한 한많은 25세의 삶을 그렇게 맺은 것이다. 꼭 그 시기에 죽을 이유도 없고 또 작은 심경 변화에도 글로 써 나타냈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자살이라면 유서를 남겼을 텐데 흔적 없이 사라진 게 또 하나의 의혹이 응어리진 것이다.
그 무렵 박열의 형인 박정식씨가 금자문자를 면회코자 신청을 했으나 이유없이 거절당한 사실이 복합되어 더욱 그러했다. 옥중에서 일어난 일이라 추측이 만발했는데 그 중 유력한 추측이 임신한 것이 외형으로 드러났고 옥중임신이 알려지면 사법부가 또 한번 곤욕을 치러야 하기에 낙태수술을 하다가 치사한 것을 자살로 변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년의 옥살이를 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출감한 박열은 한국거류민단장을 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된 것이다. 그후 금자문자는 경북 문경읍 마성면 격리 박열씨 집안의 선형에 이장되어 한국 땅에 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