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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아들이 돌아왔다!”
나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는 곧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신호이다. 우리 집의 분위기는 다른 집과는 다르다. 뭐라 할까나……. 많이 자유분방하고 가볍다.
“어, 그래.”
아빠가 나를 가볍게 반겨주신다. 내 나이가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호칭은 아버지가 아닌 아빠. 그만큼 친하다는 증거다. 아빠는 능력 좋은 프로그래머였다. 지금은 회사에서 나와 프리랜서 신세지만 예전에는 나름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빠는 곧잘 집에만 있으시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생긴 구멍은 엄마가 메운다. 비록 병원 급식 조리사이지만 안 버는 것 보다는 낫다.
나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집에서는 완전자유다! 게임을 해도 좋고, 공부를 해도 좋다.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면 당연히 게임이다. 게임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헤드셋을 착용한다.
-띠 띠 띠띠- 띠로링-
“아이고 힘들어!”
게임을 시작하려는 찰나. 익숙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엄마가 돌아왔다. 상관없다. 나는 게임을 마저 켰다. 이 친숙한 BGM! 게임 속에서라면 나도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다.
“이상혁! 엄마가 왔는데 눈길 하나 안주냐?”
아차, 엄마는 아들의 관심이 한참 필요할 시기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우리 엄마는 엄청나게 아들을 좋아하신다. 그 아들이 나인 것이 문제. 사랑받는 본인은 꽤 곤란한 입장인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 엄마가 왔네.”
대충 대답했다. 지금 내 귀에는 엄마의 목소리보다 게임의 소리가 더 생생하게 들린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게임을 시작했다. 대략 30초 동안 기다려야만 한다. 그때 내 헤드셋이 벗겨졌다. 뒤를 돌아보니 엄마였다.
“아들! 엄마 뽀뽀!”
“아들은 고1이야. 뽀뽀를 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아들이 늙은 만큼 엄마도 늙었으니까 괜찮아~ 뽀뽀?”
엄마의 볼이 점점 다가온다. 이러다가 입술이 가기 전에 볼이 입술로 오겠다. 거꾸로 뽀뽀인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뒤쪽으로 피했다.
“흥, 이제 다 자라서 엄마랑 놀기는 싫다는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반사 신경이었어.”
“그럼 뽀뽀!”
다시금 볼이 다가온다. 세상에 피해야해. 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꾹 누르고 입을 볼에 가져다가 댔다. 진짜 닿기만 했다. 그제야 엄마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가지고 내 방을 나갔다. 그 사이 게임 준비가 끝났다. 이제 지구를 지키러 가보자.
내 귀에 도청장치?!
지구를 지켜내지 못했다. 세 번 정도 지구를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네 번째 지구를 지켜내면 되니까. 내가 지는 이유는 다 헤드셋 때문이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장인이 아니기 때문에 도구 탓을 할 권리가 있다. 아빠가 작년 생일선물로 헤드셋을 사줬는데 헤드셋이 주변 소리를 잘 차단하지 못한다. 거실에서 들리는 TV소리, 대화소리가 전부 게임할 때 같이 들려버린다. 내가 하는 이 게임은 소리가 중요한 게임이란 말이다. 적들이 오른쪽에서 오면 오른쪽에서 소리가나고, 왼쪽에 있으면 왼쪽에서 소리가 난다. 가까이 있으면 소리가 커지고 멀리 있으면 소리가 작아진다. 즉, 소리로 적들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중요한 헤드셋에 문제가 있으니 게임 패배는 당연하다. 아빠의 헤드셋을 고르는 능력이 부족한 탓에 내가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 핑계를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게임이 잡혔다. 아니, 핑계가 아니라 패배 원인이다 원인. 망할 헤드셋. 이번 맵은 내가 자신있어하는 맵이다. 게임을 신나게 하려던 찰나 헤드셋 밖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여보.”
“왜.”
“이제 돈 벌어야지. 직장은 알아 봤어?”
“어……. 응. 그 국방부 관련된 쪽으로 면접 다녀왔어.”
“그래서 잘된 거 같아?”
“글쎄……. 연락이 와야 알겠지.”
“그래. 힘내서 알아봐!”
게임에 집중이 안 된다. 이렇게 소리가 합쳐지니 게임에 집중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 봐라. 벌써 게임 속의 내가 죽었다. 오늘 게임은 영 아닌 것 같다. 진행 중인 게임에서 탈주하고 게임을 종료했다. 팀원들이 백날 욕해도 어차피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 이럴 때 공부를 하는 것이다. 대충 던져둔 가방에서 대충 책을 꺼낸다. 공부는 계획을 잡고 하는 것이 아니다. 손이 잡히는 대로 하는 것이다. 손에 잡힌 책은 국어였다. 오늘은 국어다. 책상에 국어를 펴두고 본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필기해둔 부분을 참고하며 읽어야 공부가 제대로 되기 때문에 공책도 꺼냈다.
“우리아들 공부하니?”
엄마가 사과 한 접시를 들고 내 방에 찾아왔다.
“응, 할 게 없어서.”
“웬일이야? 공부도 다하고.”
“가끔은 해야지.”
“아이고! 기특해라!”
엄마가 내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 사과를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나는 사과 한 조각을 베어 물고 계속 공부를 이어나갔다. 거실에서는 TV소리가 들린다. 재미없는 뉴스였다. 시간도 늦었으니 조금만 더 하고 자야겠다.
월요일은 위험해.
평범한 고등학생은 월요일 아침에 등교를 한다. 아침밥은 대충 빵 하나로 때우고 학교로 출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도착한다. 내 교실은 3층.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오늘따라 가방이 더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월요일은 위험하다. 교실 문을 열었는데 엄청 조용하다. 전부 자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월요일이 아니었다면 미쳐 날뛰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다. 예를 들어 실내화로 축구를 한다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추격전을 한다던가. 돈 내기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렇게 조용한 것은 아마 나처럼 힘들기 때문이겠지. 나도 힘들기에 자리에 앉아서 휴대폰을 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웹툰을 보는 것이 내 학교생활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월요일 웹툰은 꽤나 볼만하다. 웹툰이나 보자. 불도 꺼져있어 어둡고 조용하니 좋다.
“폰 내라. 여기가 무슨 게임방이냐?”
꺼져있던 불이 켜지며 선생님의 호령이 들려온다. 별로 안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조례시간인가.
“자! 활기찬 월요일이다! 다들 그렇게 늘어져 있지 말고 할거해라.”
월요일은 전혀 활기차지 않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드는 거라고 생각하실 게 뻔하다. 사실 대든게 맞지만 아직 안했으니 상관은 없다. 내가 할 것은 바로 수면이다. 1교시 수업 전까지만 적당히 자두면 남은 시간동안 졸지 않고 수업을 할 수 있다. 제발 깨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깨보니 1교시 수업 중이었다. 좀 깨워주지 왜 깨우지 않았는가. 선생님이 원망스럽다. 이미 지난 일이니 잊고 지금부터라도 수업을 들어야겠다.
수업을 들은 기억은 없지만 어영부영 점심시간이다. 점심시간은 왜 점심시간인가? 점심을 먹으라고? 아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쪼개서 놀라는 뜻이다. 점심시간의 꽃은 역시 농구! 그러므로 점심을 최대한 빨리 먹어야 한다. 늦게 먹으면 농구대를 빼앗겨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종이 치자마자 나는 지금 급식소에 왔다. 나와 내 친구들이 1등이다.
“오늘 날씨도 더운데 아이스크림 걸고 농구 콜?”
친구가 내기를 제안한다. 거절할 이유는 없지.
“오프 콜스! 네 명이니까 반코트로 2대2 덤벼봐.”
“나랑 진채랑 팀할 테니까 너는 동찬이랑 팀해.”
“밸런스 좋네. 빨리 밥 먹고 경기하자.”
우리는 초인적인 속도로 밥을 먹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50분의 점심시간 중 40분이 남아있었다. 이 노력을 공부에 쏟았다면 전교등수가 50등은 올라갈 텐데. 당연히 농구대는 우리의 것이었다.
“좋아. 간단하게 11점내기로. 한 골당 무조건 1점이야.”
농구경기는 치열했다. 경기가 반쯤 진행되고 밥을 다 먹은 학생들이 난입하면서 더 복잡해졌다. 그런 애로사항 속에서도 결과는 11:9로 나와 동찬이의 승리! 아이스크림은 우리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남의 돈으로 사먹는 음식이다. 나는 이 아이스크림을 조롱하듯이 먹었다. 인생의 낙이다.
“역시. 공짜로 먹는 아이스크림이 제일 달콤한 법이지. 그렇지 동찬?”
“어휴~ 맛있다 맛있어! 너희는 너희 돈으로 하나 더 사먹으라구~”
“아냐, 내일 다시해! 팀 똑같이 짜서! 내일은 이길 거니까.”
“뭐라고? 농구도 못하는 사람 말이라서 잘 안 들리는데?”
남 놀리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다. 아이스크림이 더 달고 맛있어진다.
-딴따라 따라 따라란 딴따라 다라 따라따라다라 딴따라 다라 단!-
종이 울렸다. 이제 슬슬 교실로 돌아가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교시는……. 뭐였더라?
“야, 다음교시 뭐냐?”
“체육이잖아.”
아싸! 바로 나가면 되는구나. 기분이 괜히 좋아졌다.
“오늘 1600m달리기 기록 잰다고 했잖아.”
1600m? 그 거리를 달려야 한다고? 왜 사람이 그런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기분이 다시 떨어졌다.
다시 가족
“아들이 오늘도 돌아왔다!”
오늘도 힘찬 목소리로 아들의 복귀를 알렸다.
“어, 그래”
아빠는 오늘도 집이다. TV에는 게임방송이 나오고 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서 의자에 앉아야겠다. 오늘도 역시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나는 게임을 고르겠다. 오늘도 컴퓨터를 켜고 접속이다. 오늘도 즐거운 지구 지키기! 헤드셋을 쓰고 달려보자.
-띠 띠 띠띠- 띠로링-
“흐미, 힘들어.”
이 소리는 엄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게임이나 해야지.
“이상혁! 엄마 왔다!”
알고 있다. 반응을 안했을 뿐. 하지만 엄마가 반응을 바라는 것 같으니 대충 대답하기로 했다.
“우와. 엄마다.”
적당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게임의 로딩이 모두 끝났다. 좋아. 오늘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완벽하다. 우리 팀의 승리다. 아직 이기진 않았지만 확신한다. 아무리 상대팀이라도 저 점수를 따라올 순 없다. 지금의 나는 장인이다. 망할 헤드셋 따위는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
“여보 우리 문어발 어디 있어? 선풍기 좀 꽂자.”
“문어발? 어디 있더라……. 그냥 코드 아무거나 빼고 꽂아.”
“음... 그럼 대충 이거?”
[게임 클라이언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유-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
내 완벽한 게임이! 이렇게! 무너질 리가 없어!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인 나는 키보드를 세 번 후려쳤다. 소리도 지르면서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 그건 인터넷이라 뽑으면 안 돼. 다시 꽂고 다른 거 뽑아.”
“알았어.”
“쟤는 또 왜이래?”
“하……. 아무 일도 아니야.”
괘... 괜찮다! 다음 판은 분명 이길 테니까! 긍정적인 마인드……. 긍정적인 마인드……. 후……. 다시 게임을 시작하자.
목소리가 들려.
“그래서 여보. 면접은 잘 됐데?”
“잘... 안됐어……. 요즘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잖아.”
“여보.”
“응? 왜 그래.”
“우리 돈이 얼마 없다? 다음 달부터는 대출해서 먹고 살아야할 판이야.”
“아이, 내가 모아둔 돈이 얼만데 그게 바닥나? 다시 확인해봐.”
“다 썼잖아! 여기다 쓰고 저기다 쓰고!”
“알았어 알았어. 왜 화를 내?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맞아, 당신 차 바꿨지? 그게 몇 천인데? 돈은 벌면서 바꾸던가. 출근도 안할 거면 왜 차를 바꾸고 난리야?”
“아니……. 차를 5년 동안 탔으니까 슬슬 바꿀 때가…….”
“그 잘 굴러가는 차가 어디가 문제 있다고 그래?”
“아니, 원래 차는 수명 다 되면 바꿔야…….”
“다음 달까지 직장이나 알아봐. 내가 먹여 살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알겠어! 다음 달까지 구해볼게!”
“못 구하면 이혼이야! 이혼!”
참……. 이러니 집중이 안 되지……. 오늘도 게임은 별로다. 그렇다고 공부도 아니다. 기분이 영 아니다. 다른 일들도 있겠지만 엄마아빠의 말을 들으니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뭔가 불안하달까?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다.
화요일은 위험한가
열심히 등교를 했다. 월요일이 아니지만 몸은 천근만근이다. 망할 1600m달리기 때문이겠지. 아직도 어제 엄마아빠의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빠가 틀어놓은 뉴스 중에 한 부분이 생각난다. 이혼율이 30퍼센트가 넘는다고 했나?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괜히 더 불안해 진다. 이혼 사유 중에서 경제적 요인이 꽤 됐었던 거 같은데……. 그럼 우리 엄마아빠가 이혼하면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이혼인가? 나는 엄마를 따라갈까? 아빠를 따라갈까? 그래. 이혼은 무슨. 엄마가 괜히 한 마디 던진 거겠지. 맞다. 엄마가 그냥 해본 소리이다. 그렇다고 생각하자. 머리만 아파질 뿐이다. 친구들은 매점에서 사서 마신 음료수의 캔으로 열심히 축구를 하고 계신다. 되게 재밌게 한다. 평소였다면 같이 했겠지만 머리가 아프다. 잠시 엎드려 자고 싶다. 그러나 자는 것도 잘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하다. 설마 진짜 이혼하시겠어…….
“불 좀 켜두고 살아라! 무슨 너희가 어둠의 자식들이냐?”
헉! 잠들었었나. 이왕 잠든 김에 마저 자는 게 좋겠다. 깨있으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과대망상증인가……
거의 모든 시간을 잤는데 점심시간이다. 눈떠보니 점심시간이라는 말이 적절할 듯하다.
“상혁! 농구해야지! 일어나!”
무슨 내 책상까지 왔네.
“오늘도 너희를 빈털터리로 만들어주지.”
“어제 말했듯이 오늘은 설욕전이야. 똑같은 팀으로 한번 더해.”
“아니... 오늘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다음에 하자.”
“뭐야, 무슨 일이야.”
“네가 힘들다고? 뭐 잘못 먹었냐?”
“안 돼! 일어나! 오늘 너를 밟아버릴 거라고!”
“내일 하자…….”
“에잉. 어쩔 수 없지. 오늘은 그냥 가자.”
“푹 쉬고 내일 밟힐 준비하고 와.”
친구들이 나갔다. 밥은 먹어야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다. 급식은 포기할까. 조금 더 자야겠다.
위기의 가족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집으로 들어갔다. 뭔가 너덜너덜한 기분이다.
“왔다…….”
“왔냐.”
“아들 왔어?”
엄마도 계시다. 아마 내 걸음속도가 평소보다 느려서 그런 것 같다. 오늘은 학교에서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했었다. 종례시간에 반장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반장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반장역할을 열심히 해주니 뭔가 미안했다. 준비물은 USB 혹은 CD이다. 그런데 요즘 세대에 CD는 빼야하는 거 아닌가?
“나 다음 주까지 준비물 있어.”
“뭔데?”
“USB 아니면 CD.”
“맞아. 우리 아들 고등학생이면 USB하나 필요하겠지. 아빠가 다음 주까지 좋은 걸로 하나 사 줄게.”
“뭐? 당신 쓰던 USB있잖아. 그거 주면 되지.”
“취직하면 개인용으로 나도 필요할 거야. 상혁이도 계속 필요할 텐데 내꺼를 계속 줄 순 없잖아.”
“그럼 당신 직장 구하기 전까지만 당신꺼 빌려줘. 어차피 그때까진 필요 없잖아.”
“에이, 어차피 사줄 거 지금 그냥 사줘.”
“안 돼. 나중에 돈 생길 거잖아. 그때 사줘도 늦지 않아. 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최대한 아껴야 돼.”
“하... 그래 알았어. 상혁아. 내 USB가져가라.”
“응.”
딱히 나에게는 쓰던 USB건 새 USB건 나에겐 상관없다. 그런데 새 USB에 미련이 남는 건 왜일까. 하지만 굳이 새 USB를 사달라고 해서 싸움을 부추기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준비물 준비는 끝났으니 게임이나 해볼까.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켜지기를 기다린다.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다.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분위기지만 아빠가 양보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다. 하긴, 늘 부부싸움을 하면 승자는 엄마였지. 아빠는 엄마를 이길 수 없다. 다른 집은 몰라도 우리 집은 그렇다. 이번에는 이혼이라는 단어까지 나왔지만 분명 아닐 것이다. 평소처럼 지나가겠지. 그래, 분위기는 무겁지만 싸우시지는 않는다. 이게 바로 금방 화해할 것이라는 증거인 것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다. 게임이나 하자.
칼로 물 베기
일요일이다. 그리고 나는 게임 중이다. 이번 주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덕분에 학교에서 환자취급을 받았지만 상관없다. 아, 농구를 못한 것은 상관있다. 심란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아빠는 여전히 대치중이다. 지금까지 ‘이혼’이라는 단어가 더 튀어나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 이 감정을 게임에다 맡기자. 게임은 사람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좋은 쪽으로 바뀌길 바라면서 시작이다.
“오늘 면접 다녀왔지? 어땠어.”
“어떻긴……. 그냥 잘 봤지.”
“결과는 언제 나온대?”
“그 자리에서 바로 알려줬는데…….”
“잘 됐어?”
“어……. 그게……. 그러니까……. 아니…….”
“으이그! 내가 못살아! 온 가족이 길거기로 나앉게 생겼네! 돈 없으면 당신 차부터 팔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어! 다음 주에도 면접 있으니까 걱정 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나는 게임에 재능이 없나보다. 아니지. 헤드셋 잘못이다. 그나저나 아빠는 오늘도 고전인 것 같다. 의기양양하게 “아빠 사표 냈다!” 라고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년이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아빠수입 없이 버텨온 게 대단하다. 그래도 엄마아빠가 저렇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조금 안심되는 것 같다.
“여보……. 근데 진짜 직장 못 구하면 이혼할거야?”
“응? 이혼? 무슨 말이야?”
“아니, 지난번에 당신이…….”
“푸핫! 설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가슴 조렸는데!”
“당신도 참! 내가 당신 두고 어디를 가겠어. 걱정 말고 직장이나 구해.”
순간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은 다 쓸모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아빠도 불안하셨구나. 나만 그런 건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빠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도 쓸데없이 고민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하고……. 아, 게임해야지 게임. 이길 때까지만 하고 자야겠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월요일 아침이다. 전혀 활기차지 않은 아침이다. 특히 어제 게임을 밤늦게까지 했더니 더더욱 피곤하다. 나는 준비를 서둘렀다. 세수를 하고, 교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아빠가 나를 몰래 불렀다.
“아들! 와봐!”
“왜? 피곤해……. 빨리 말해…….”
“너 오늘 USB 필요하다 그랬지? 아빠가 좋은 걸로 하나 샀어.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아 맞다 USB. 새거 샀어?!”
“쉿!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신발장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사실 속으로는 새 USB를 바래왔던 나였다. 아빠껄 같이 쓰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많겠고 하니 새 USB가 맘에 들었다.
“아들! 준비물 챙겨야지!”
엄마가 급하게 나를 멈춰 세운다.
“오늘 준비물 있잖아. USB.”
“아 그게…….”
뒤에서 아빠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그것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다. 자기가 줬다는 걸 말하지 말라는 격렬한 신호였다.
“엄마가 생각해 봤는데. 역시 필요할 것 같더라.”
“어?”
“아빠도 곧 취업할거고……. 역시 우리 아들께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하나 샀어.”
이건 예상했던 시나리오에 없었다. 순간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켜 답을 얻었다. 자연스럽게 엄마의 USB를 받고 학교로 간다! 이게 엄마와 아빠 두 분을 모두 생각하는 방법이다. 아마 이 두뇌면 수학 올림피아드 1등이리라.
“미안해…….”
아빠가 말했다. 아이고, 아부지! 왜 그러세요! 아무리 제발이 저려도 그렇지!
“응? 왜 그래?”
“그게……. 내가 몰래……. 하나 샀어…….”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아빠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는지 떨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텐데…….
“여보……? 잘못했어! 여보? 여보?”
“그래서 나 몰래 사셨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빠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한 표정이었다.
“당장 가서 환불할게! 두 개는 필요 없으니까! 응?”
아빠의 말 이후 약 2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엄마가 웃기 시작했다.
“푸핫! 당신 정말 못 말린다니까. 괜찮아. 나도 당신한테 말 안하고 산 잘못 있으니까.”
“여보…….”
“당신이 고른 게 더 좋은 거겠지? 당신 프로그래머잖아. 정말. 내껀 환불해야겠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오그라든다는 기분일까. 그래도 이런 게 가족인가 보다싶다. 어떤 갈등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는 힘. 그게 가족인 것이다. 그게 돈이든, 의견차이든 간에 말이다. 아차,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학교가야지.
“그럼, 다녀올게.”
“아들. 가기 전에 뽀뽀!”
“다녀오겠습니다.”
서둘러 문을 닫았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학교로 가야겠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다. 그렇지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내 생활기록부가 얼룩질 뻔했다. 교실 문을 연 순간 동찬이가 교실에 누워서 맞고 있었다. 뭐지 이 어이없는 광경은 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구경했다.
“상혁! 빨리 와서 때려! 얘 생일이야!”
“야! 선물은 주고 때려! 으악!”
아,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나도 껴야겠다. 생일빵은 친구들끼리의 우정을 확인하는 의식 중에 하나이다. 동찬이와 나의 우정은 지구 맨틀층보다 두꺼우니까 생일빵은 어쩔 수 없는 절차인 것이다. 내 생일은 바로 다음 주지만 친구들에겐 말하지 않겠다. 친구들이 내 생일선물을 고르느라 시간과 돈을 버릴 수 있으니 나름 배려하는 차원에서다. 맞기 싫어서가 아니다. 그때 종이 울렸고 학생들은 전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한사람 빼고 말이다.
“뭐야, 동찬이는 왜 땅바닥에 누워있냐.”
“아 선생님……. 너무 더워서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었어요…….”
“지랄 떨지 말고 가서 앉아라. 자. 다시 활기찬 월요일이다! 가만히 있지 말고 할거해라.”
월요일이 활기차다……. 그래 어쩌면 맞는 말이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말이다. 그러니까 잠깐 엎드려서 자야겠다. 더더욱 활기찬 월요일을 위해서 말이다.
수업을 들은 기억이 없지만 학교는 끝나있었다. 물론 점심시간에 농구는 했지만 내가 졌기 때문에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USB는 내일 준비물이란다. 그래, 하루 일찍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 집에나 가자.
가족의 정의
“아들 왔다!”
나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는 곧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신호이다.
“왔냐.”
아빠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어디를 나갔다 오신 게 분명하다. 이쯤 나가는 일은 없으니까. 나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띠 띠 띠띠- 띠로링-
“아이고! 삭신이야!”
게임을 시작하려는 찰나. 익숙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엄마가 돌아왔다. 뭔가 귀찮은 일이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자자, 여보! 상혁아! 거실로 모여 봐라.”
귀찮은 일이 시작되었다. 원래 예상한건 엄마의 난입이었지만 어쨌든 귀찮은 건 매한가지이다. 게임 중이였다면 게임을 마치고 갔겠지만 아쉽게 게임 중이 아니므로 곧장 나갔다.
“아들, USB 잘 썼어?”
“내일 준비물이더라고.”
“조용! 조용! 지금부터 중대발표를 할거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아빠가 할 만한 중대발표는 하나밖에 없다. 취업이다! 나는 아빠의 취업언급을 속으로 기대했다.
“자. 4년 동안의 방황 끝에 드디어! 취직을 했습니다!”
예상이 들어맞자 나는 속으로 ‘아싸!’를 외쳤다.
“나가자. 외식하러.”
아빠의 취직소식을 들은 엄마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 외식이란다.”
아빠도 뒤이어 나갔다. 조금 황당한가? 이게 우리 집이다. 우리 집의 분위기는 다른 집과는 다르다. 많이 자유분방하고 가볍다. 이게 우리 집이다. 평소의 우리 집이다. 나도 현관 밖으로 나왔다. 아직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상관없다. 외식이 중요하다.
“내가 비록 20개월 계약직이지만 월급은 빵빵하게 잡았다. 이제 너희 사고 싶었던 거 다 사줄게.”
“아이구! 잘했어 여보!”
엄마는 아빠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아들이 보고 있는데 그런 건 상관 없나보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 된다?”
“당연하지. 가족이 있는데 말이야.”
나는 이 장면에 필요가 없는 게 확실했다. 화기애애한 장면이지만 오그라든다. 그제까지 있었던 대치상황은 상상할 수 없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아니,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말이다. 세상 모든 가족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부모님의 사소한 말 하나로 가슴 졸이는 나 같은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말하자면 언제나 화목한 가정은 없다. 갈등이 있기에 화목이 있다고 생각한다. 갈등을 겪고 오히려 성장한다. 이게 중요한 것 같다.
“이상혁! 안 오냐! 먼저 간다?”
참. 외식 가는 중이였지. 생각에 너무 잠겼나 보다.
“갈게!”
바깥에는 아빠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새로 산 자동차라 그런지 매우 빛났다. 엄마, 아빠가 자동차에 탔다. 실제로 타는 건 처음이다. 뒷자리에 내가 앉고 운전석에 아빠가 앉았다. 엄마는 조수석이다.
“그럼 어디로 운전해?.”
“상혁아, 어디로 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 선택권이 나쁘지는 않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 가족이니까. 엄마도 아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가족 외식하면 당연히 거기 아니겠어?”
“그래, 늘 가던 대로 가야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오늘도 거기로 가자!”
거기는 음식점 이름이다. 우리 가족이 좋은 일이 있으면 가는 음식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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