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 이씨 문중의 반대와 방해로 섬촌마을의 예배당 건축이 큰 어려움 속에 빠져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약 한 달 보름이 지나갔다. 그런데 5월 중순에 문중회의는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서 예배당을 계속 짓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 기적 같은 결정에 따라 교인들은 기쁨으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웃 마을의 만촌교회와 북평교회 온혜교회 교인들도 기꺼이 건축에 동참하였다.
드디어 예배당건축이 완공되었고, 6월 4일에 교인들은 큰 감격 속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날은 마침 오순절이었다. 이원영은 이 기쁨과 감사의 날을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비유했고 또 섬촌교회를 '도산지방의 예루살렘'에 비유했다.
그러나 섬촌교회는 또 한번 큰 어려움 속에 빠진다. 진성 이씨 문중의 일부는 섬촌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점을 여전히 불평하면서 이 교회를 없애고자 했기 때문이다. 6월 14일에 대문회(大門會, 큰 문중모임)가 또 다시 시사단에서 모였는데, 같은 날 경안노회의 정기노회(제2회)가 만촌예배당에서 열렸다.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 약 60여 명이 만촌마을로 달려가서 노회가 열리고 있는 만촌예배당 안으로 들이 닥쳤다.
이들은 노회 참석자들 앞으로 썩 나서서 '섬촌마을의 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윽박지르고 또 평소에 잘 알고 있는 교인들에게는 교회를 철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침묵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이에 윽박지르던 문중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화로 말미암아 씩씩거렸다. 분을 삭이지 못한 이들은 다시 섬촌마을로 돌아가서 예배당 안에 있는 기물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 몇몇이 살그머니 마을을 빠져 나와 경찰서에 신고했다. 순사 세 사람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기물파손은 멎었다.
부서지고 파손된 물건을 돈으로 계산하니 70원이 조금 더 되었다. 그런데, 섬촌의 교인들은 이 사건이 법적으로 해결되기를 원치 않았고 다만 파손된 곳을 원래대로 복구해 주는 것으로 모든 것이 원만하게 타결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교회기물을 부순 사람들은 오히려 기고만장해져서 원상복구는 고사하고 되레 큰소리 치며 나머지 기물과 예배당 건물도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이 사건이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순사가 세 차례나 양 편 모두 동시에 경찰서로 오게 해서 서로 화해할 것을 권했는데도 사건이 풀릴 기미는 전혀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에서 해결되었다. 그해 9월에 선교사 권찬영이 이 지역의 시찰장으로서 안동재판소에다 교회건물원상회복청구서를 제출했다. 재판은 1년 이상 진행되었고 그 결과 안동군 재판소 검사가 건물의 파손된 곳을 원상회복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섬촌 마을 교회당은 말끔하게 수리되었다.
섬촌교회의 설립과정에서 빚어진 진성 이씨 문중의 갈등을 당시의 전국 교회가 주목하였다. 이 사건이 제12회 장로교회의 총회(1923년)에 보고되었고 총회는 회의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안동군 도산면 퇴계 리 선생 후예 몇 사람이 믿고 예배당을 건축하여 오던 중 믿지 아니한 일가들이 핍박할 뿐 아니라 누차 문회하고 예배당까지 훼파하므로 소송이 되어 1년간 재판으로 지내다가 필경은 자기들이 부족함을 깨달아 자복하고 예배당을 여전히 수리해 줌으로 지금은 무사히 될 뿐 아니라 교인의 믿음은 더욱 든든히 되고 핍박하던 그들의 자녀들이 야학에 다니며 성경을 공부하게 되였으니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오며…(하략).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회의록(1923), 133-134쪽)
이원영 또한 다음과 같이 '섬촌교회당설립일기'를 마무리 지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미리 정하신 것을 이루었으니 주께서 저희의 곤갈함을 감하여 보옵시고, 성신의 날카로운 검으로 굳은 마음들을 깨뜨리시고 성자의 사랑하는 음성으로 그 마음 문들을 두드려 열게 하시사 하나님의 생명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이 후에 섬촌교회는 날로 부흥하고 발전하였다.
임희국/ 장신대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