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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적 관점 읽기 복습입니다.
[로렌치치의 감옥. 벤야민의 자살] 이 두 이야기가 공유하는 것은 고급문화(미술과 이론)와 잔인한 저급정치(살인, 고문) 사이의 놀라운 연계뿐만이 아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실 그러한 연계가 표면적으로 인식되는 것만큼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추상예술을 관람하는 일이 (무조음악을 듣는 일과 같이) 고문이라는 것은 가장 비속한 상식적 견해가 아닌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쉽게 구금자들이 끊임없이 무조음악에 노출되는 감옥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 더욱 “깊이 있는” 상식에 따르면 쇤베르크는 그의 음악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대량폭격의 공포를 이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표현^했다. 근본적으로 두 이야기가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축하는 관계가 구조적인 이유들로 인해 결코 조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단락의 층위들이라는 것이다.(시차12-13)
예를 들어 “스탈린”이 대표하는 것을 “벤야민”과 같은 층위로 이동시키는 것, 즉 스탈린적인 관점에서 벤야민의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이 두 이야기가 기조로 삼고 있는 허상, 즉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 상호 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시차13)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시차13)
(레닌이 취리히의 캬바레 볼테르에서 다다이스트들을 만나는 환상이 예증하는 것과 같은) 레닌의 정치학과 현대미술의 조우는 구조상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 근본적으로, 혁명적 정치학과 혁명적 예술은 상이한 시간성 속에서 움직인다. 비록 그들이 연계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들이며, 명백한 양쪽으로서 그들은 결코 대면하지 못한다. 문화에 대해 말할 때, 레닌주의자들은 위대한 고전주의 예술을 찬탄했으며,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정치적 보수주의자이거나 심지어는 전형적 파시스트였다는 사실에는 역사적 우연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이것은 이미 프랑스혁명과 독일 관념론의 관계로부터 얻은 교훈이 아닌가? 비록 이들이 동일한 역사적 시간의 양면이긴 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여 독일 관념론은 오직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독일이라는 “후진적” 조건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시차13-14)
독일 관념론의 위대성과 후진성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으나 레닌주의와 모더니스트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하다고 여겨진다. 모더니스트가 레닌주와 결합될 수 없는 어떤 필연성이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줄여 말하자면, 두 일화 모두가 공유하는 바는 극복할 수 없는 시차적 간극의 발생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중립적 공동 기반도 가능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두 관점들에 대면하게 된다.(시차14)
처음 생각할 때에는 시차적 간극과 같은 개념은 헤겔에 대한 일종의 칸트적 복수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시차”(視差, parallax)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시차14)
칸트의 이율배반 개념을 헤겔은 상대화하며, 이율배반론의 기반인 감성, 오성, 이성의 확연한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차적 간극이란 개념은 결코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 역설에 대면한다. 많은 현대과학들이 자발적으로 유물론적 변증법을 실천하지만, 그들은 철학적으로 기계적 유물론과 관념적 반계몽주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다. 어떠한 “대화”도 없으며 어려운 시기에 동맹군을 찾는 일도 없다.(시차14)
변증법적 유물론이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시대인 오늘날 레닌의 전략적 통찰은 중요하다. “군대가 퇴각할 때는 군대가 진격할 때보다 백 배 많은 규칙들이 요구된다. …멘셰비키 당원이 ‘이제 퇴각하는 군요; 나는 항상 퇴각을 지지해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함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함께 퇴각합시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한 회답으로 ‘멘셰비즘의 공식 입장에 대하여 우리의 혁명 법정은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법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라고 답한다.”(시차14-15)
오늘날 맑스주의의 위기는 맑스주의 운동의 사회정치적 참패 때문만이 아니다;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위기는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이 맑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라는 역할로 퇴조했다는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소멸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설명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더욱 쉽게 수용할 수 있고 당혹스러움이 적은 “유물변증법”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규정적 반성에서 반성적 규정으로의 전환은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의 단어 또는 단어들의 위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시차15)
유물변증법과 변증법적 유물론: 뒤섞어서 쓰이기도 하는 점에서 같은 개념 같기도 하다. 포이어바흐의 비변증법적 유물론과 대조해 맑스의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뮬론이다. 헤겔의 관념변증법과 대조되는 측면에서 맑스의 변증법은 유물변증법이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초, 역사유물론을 적용이라고 구분하지만, 변증법 자체가 이미 인식의 시간적 역사적 핵심을 내포하는 점에서 그 구분은 불필요하며, 변증법을 초역사적 공식으로 오인케 하는 부작용을 지닌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그 사이에 스탈린주의 인식론이라는 뉴앙스를 지니게 되었고 그래서 서구에서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규정적 반성에서는 강세가 반성에, 반성적 규정에서는 강세가 규정에 놓인다.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는 전환은−(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핵심적인 변증법적 전환이다. 이것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을 극복할 수 없는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진정 파악하기 어려운 변증법적 전환이다.(시차15)
'부정 변증법'이 아도르노를 겨냥하는 것이라면 반쯤 맞다. 아도르노의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에 대한 도식적 이해에 반대하지만, 기본적으로 청산주의나 무정부주의만 아니라 현존자본주의질서의 유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념, 계몽, 이성, 과학기술이 저지르는 폐해를 극복하는 것도 개념, 계몽 , 이성, 과학기술이라고 보고 내재비판과 모순에 초점을 두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변증법 이론은 간단히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는 데에 머문다고 할 수 없다.
이때 혁명적 정치학으로부터 차용된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살롱에서 토론하며 자신들의 모순된 언행을 즐기던 자유론자들로부터 권력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권력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역겨운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후반 혁명 전 프랑스에서 꽃피웠던 여러 자유사상가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혁명적 공포의 엄격한 새로운 질서로 전도시키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유사하게 절대주의자, 미래파, 구성주의자 등이 혁명적 열정의 우위를 두고 경쟁하던 시기^인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 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혁명 이후의 현재가 짊어진 십자가에서, 그들 자신들이 자유에 대해 가진 만개하는 꿈의 진실을 인식하기 거부하는 혁명적인 아름다운 영혼들보다 윤리적으로 더욱 역겨운 것은 없다.(시차15-16)
들뢰즈의 차이형이상학은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비판에 맞서 차이를 위해 피나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모순과 재현의 부정적인 것을 거부하는 면에서 아름다운 영혼에 빠져 있는 것 아닐까?
철학적으로 말하여, 스탈린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우둔함의 화신이라는 말은 요점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으며 사실 그 자체가 요점이다. 그 이유는 내가 주장하는 바가 정확히 나의 헤겔-라캉적 입장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헤겔적 무한판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즉 이를 골상학의 공식인 “정신은 뼈다”와 같이 가장 높은 것들과 가장 낮은 것들의 사변적 동일성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시차16)
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최고”와 “최하”의 독해 사이의 차이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완고한 네 번째 교사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보편 형이상학과 특수 형이상학의 차이, 즉 보편적 존재론과 사회의 특정 영역에 대한 그것의 적용으로 인식하여 그들 사이의 차이를 존재론의 용어로 표현하는 심각한 철학적 실수를 범했다. 이때 “최하”에서 “최고”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보편과 특수 사이의 차이를 특수 자체로 대체하기만 하면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적 유물론과는 다른, 인류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그렇다, 여기서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계는 시차적이다; 그것들은 사실상 같은 것이며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전환은 전적으로 관점의 전환에 따른 것이다.(시차16)
이는 인류의 집단적 실천의 지평 너머에 도달하는 인간의 “비인간”적 중핵인 죽음충동 같은 주제를 도입한다; 그러므로 간극은 인간다^움과 그 자체의 비인간적 과잉 사이의 간극으로서 인류사회에 내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시차16-17)
변증법적 유물론이 정신분석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인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과 비중, 이론적 위상, 기능 등을 살펴야 할 것이다. 지젝 읽기의 묘미이자 비판의 눈을 부릅떠야 하는 대목일 것이다.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러한 관계와, 정신분석을 사회-이데올로기적 과정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비판에 대응하는 정신분석의 적절한 응답 사이에는 구조적 유사점이 있다: 원래는 개인들을 처우하기 위해 활용된 개념들을 집단적 전체로 확장시켜 사용하여, 이를테면 종교를 “집단적 강박 정신증”으로 언급하는 것은 “적절한” 것일까? 정신분석은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인 것들,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신념들의 영역은 단순히 개인적 경험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신이 관계되어야 하는 것, 개인 자신이 가장 미세하게 “물화되고”, 외화된 질서로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시차17)
개인과 사회의 매개가 개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맑스의 기본적인 변증법적 인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철초고]의 한 가지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개인으로부터 사회적 차원으로 비약하느냐”가 아니다; 그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주체가 자신의 “건강”과 “정상적” 기능을 유지하려면 제도화된 실천과 믿음들의 외부적이며 객관적인 사회-상징적 질서는 어떻게 구조화되어야 하는가?(냉소적으로 도덕적 규범이라는 공공의 체계를 무산시키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자를 생각해보자: 원칙적으로 그러한 주체는 이와 같은 체계가 “밖에 존재”하여 공적으로 인식될 때에만 기능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으로 냉소적인 사람이 되려면 그는 “진정으로 믿는” 순진한 사람(들)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한다). 다른 말로 바꾸어, 개인과 “개인에 무관한” 사회적 차원 사이의 간극은 다시 개인 자신 안에 각인되어야 한다: 이 사회적 실체의 “객관적인” 질서는 개인들이 그것을 그렇게 간주하고 그것에 그러한 방식으로 관계할 때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탁월한 사례는 (다시)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가?: 그 안에서 신과 인간의 차이는 인간 자신에게 전가되지 않^는가?(시차17-18)
'객관적인 질서'에서 개인들이 그것을 그렇게 간주하고 그것에 그러한 방식으로 관계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연적 물질적 차원, 이미 형성된 물적 조건들을 빼놓을 경우, 자칫 주의주의나 결단론으로 달려갈 수 있지 않을까?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대하여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모두, 물론(“독립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존재의 반영/거울상으로서의 사유라는 철학 이전의 유치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개념을 떠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그들의 방식들은 상이하다. 사적 유물론은 (사회적) 존재의 과정과 집단적 실천 자체의 내재적 순간, 그 능동적 순간으로 사회현실에 (비록 오늘날, 이라크 침공 이후 우리가 이 동사를 사용하는 것이 수치스럽다할지라도) 묻혀(embedded) 있는 과정으로서의 사유(“의식”)라는 개념을 통해 “객관적 현실”의 수동적 거울상으로서의 사유라는 사유와 존재의 외적 평행관계를 극복한다.(시차18)
사회현실에 묻혀 있는 과정으로서의 사유 혹은 주체적 측면을 강조하는 점에 지젝의 주요 매력이 있다. 그러나 레닌이 말하는 주관과 '독립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공식은 주체의 역할을 배제하는 수동적 방관의 산물이 아니라, 레닌이라는 인식주체의 적극적 역할을 극대화하는 정치적 수사, 이론적 실천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레닌이 자신의 의식을 사회에 묻는 극단적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 말은 진짜니까 믿고 한판 벌이자. 틀리면 책임지마. 틀릴 수도 있니 어쩌니 하면서 꽁무니빼지 않겠다. 등등
[역사와 계급의식]에 나타난 죄르지 루카치의 이러한 극복에 대한 논의는 진정 탁월하다: “의식”(한 사람의 구체적 사회위치와 그 혁명적 잠재력의 의식화)은 존재 자체를 변화시킨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수동적 “노동계급”, 사회 조직의 한 계층을 혁명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 전환시킨다.(시차18)
루카치가 계급의식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한 대목에 대해 레닌은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야유를 보냈다. 계급투쟁은 계급의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주의자의 논박이었다. 아무튼 루카치는 그후 레닌주의 인식론의 공식을 받아들여 노년기까지 끌고다닌다. 아도르노는 [역사와 계급의식] 이후의 루카치가 자신의 뛰어난 지적 능력을 스스로 마멸시키고 당기관원으로 전락했다고 비난했고, 루카치는 아도르노를 '그랜드 호텔 지옥'에 앉아 노닥거리며 세상은 지옥이라고 툴툴거리는 인간들, '좌파적 인식론+우파적 정서'의 어정쩡한 절충형 속에 끼워넣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말하자면 반대쪽에서 동일한 매듭에 접근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어떻게 그들의 실천적-변증법적 매개를 차용하여 사유와 존재의 외적 대립을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긍정적 존재의 기복 없는 질서로부터 사유와 존재의 간극 자체, 사유의 부정성이 나타나는가이다.(시차18)
다른 말로 바꾸면, 루카치 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유가 사회적 존재의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순간일 수 있는가를 보이기 위하여 노력한 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적인 범주는(“죽음충동”의 부정성과도 같이) 바로 사유의 수동성 자체의 “실천적” 측면을 목표로 삼는다: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이 비-행위, 즉 존재로부터 반성적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것을 가장 급진적인 개입으로^서 설정하기 위하여 삶의 재생산이라는 순환을 파손/중지하겠는가? 키르케고르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중요한 것은 존재로부터 사유를 분리시키는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 속에서 그것을 착상하는 것이다.(시차18-19)
비-행위의 급진적 개입이라는 구상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개입보다 이론가의 아프리오리한 위치 문제, 즉 모순구조 속의 피억압자 위치에서 전략을 만드는 존재로서의 이론가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해 보인다. 맑스의 위치가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맑스를 놓고는 외부 이야기가 공허하다.
물론 루카치의 실천철학은 어떻게 사유와 존재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그 자체의 설명을 제시한다: 객관적인 과정에서 제외되어 외부적 조종자로서 개입하는, 관찰하는 주체의 형상은 그 자체가 사회적 소외/물화의 효과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극복할 수 없는 지평으로서의 사회적 실천의 장 속에서 움직이며−실천의 출현과 그것의 억압된 “초월론적 발생”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사적 유물론에 대해 이 점을 보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회를 의사-헤겔주의적 절대주체로 격상시키거나 또는 어떤 더욱 포괄적인 일반존재론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어야만 한다.(시차19)
초월론적(선험적) 발생의 문제는 지젝의 자유-필연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사적 유물론을 보충하자는 것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꼭 존재의 결함, 구멍 따위와 초월론적 주체 양자를 결합해야 주체의 위상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자유와 필연의 문제야말로 시차적 관점으로 설명해야 되지 않을까? 이는 지젝 이론의 한 가지 핵심을 거부하는 논쟁점이 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양극단들의 투쟁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법칙”이 대극(음-양 등)의 양극성이라는 뉴에이지식의 개념에 의해 식민화되었다는/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 비판적 시도는 이러한 대극의 양극성이라는 주제를 하나 자체에 내재적인 ‘긴장’, 간극, 불일치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책은 하나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이러한 간극을 시차라는 개념으로 나타내겠다는 전략적인 정치⋅철학적 결정에 근거하고 있다.(시차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