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에 대하여 - ‘꽃’과‘늙다’, 그리고 ‘꼰대’의 어원
흔히 늙음은 시들은 꽃에 비유된다. 그래서 오늘날 늙음은 시들은 꽃처럼 추함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시들은 꽃은, 꽃의 의미를 모르면, 당연히 썩어 문드러지는 추한 몰골로 여겨진다. 즉, 추함만 보이는 것은 아직 젊다는 뜻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직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추함/악함에서 아름다움/선함으로 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된사람’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작이나 마치는 의식에 꽃을 선물하거나 받친다. 졸업식이나 입학식 그리고 승진이나 각종 개업식 나아가 장례식에 꽃을 선물하고 받치는 일이 그것이다. 왜 꽃인가? 그럼 꽃은 무엇인가? 꽃은 식물의 생식기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식물의 섹스 그 짝짓기이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식물들이 짝짓기를 한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래서 생식기라는 꽃의 의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뜻이다.
꽃의 옛말은 ‘곶’이다. 그리고 ‘꽂다’의 옛말은 ‘곶다’이다. 즉, ‘고이어(괴다;<옛>짝짓기하다) 지피다(불을 붙여 타게 하다)’의 준말이 ‘곶’이고, ‘고초어(곧추세워) 지르다(찌르다)’의 준말이 ‘곶다’이다. 그래서 ‘끼워 지르다’에 의미 동화되어 ‘꽂다’가 되고, ‘꾀어 추다/추기다/추스르다’에 의미 동화되어 ‘꽃’이 되었다.
참고적으로 꿸/관(串)은 우리나라에서만 곶/곶(串)으로도 쓰인다. 곶(串)은 바다나 호수로 가늘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부분을 뜻한다. 장산곶 등의 지명은 육지와 바다가 곶(짝짓기)하는 곳을 상징하는 한자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미주알’이 똥구멍의 밑살이듯, 생식기의 우리말이 ‘고주알’이다. 다시 말해 ‘미주알고주알’은 ‘69’처럼 은밀한 사적인 일까지 말하고 캐어묻는 뜻이다.
그럼 곶감은 왜 ‘곶’감인가? 누구나 알고 있듯, 껍질을 벗겨 꼬챙이에 꿰어 말린 감이 곶감이고, 한자어로 관시(串柿)라고도 한다. 꼬챙이에 꽂아 말린 감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단순히 꽂아 말린 감이 아니라 껍질을 벗겨 말린 감이다. 즉, 짝짓기의 감칠맛이 나는 감이 곶감이다. 감나무 자체가 ‘감친(접붙인, 짝지은) 나무’의 뜻이지 않은가? <‘조율이시’참조 >
꽃이 시드는 것은 짝짓기를 끝내고 열매를 맺혔다는 신호이고, 그 열매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약속이다. 약속을 저버리고 그 썩어가는 추함만을 비관하다보면 열매는 영글지 못하고 쭉정이만 될 뿐이다.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열매가 알차게 여물려야 한다. 열매를 영글리지 못하는 노년이야말로 꽃이 아스팔트 위를 이리저리 뒹굴며 더럽히듯 거름되지 못한 한갓 썩어 문드러진 꽃의 추함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들의 모든 관계는 짝짓기의 원리와 같이 작동된다. 짝짓기의 원리가 음양의 원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짝짓기 할 준비가 되었다는 상징이다. 식물의 짝짓기는 열매를 맺는 곧 결실을 맺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꽃을 선물하는 것은 꽃처럼 달콤하고 흥겨운 짝짓기를 해서 훌륭한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는 의미인 것이다.
졸업 같은 마침의 꽃 선물은 학문과 짝짓기를 마쳤으니 꽃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의미일 것이고, 입학 같은 시작의 선물은 새로운 단계의 학문과 새로 꽃처럼 화려하고 달콤한 짝짓기를 시작해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기원하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꽃나무를 선물하는 것은 꽃처럼 결실을 맺히고 나무처럼 왕성하게 가지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꽃잎이 결실을 맺히면 시들며 노글노글하듯, 열매 또한 익으면 노글노글하듯, ‘노글노글해 가다/익히다’의 준말이 ‘늙다’이다. 우리말은 노(老) 그 한자 자형의 의미가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늙는다는 것은 각자의 천명을 잡아들이고 일으켜 노글노글 여물러 가며 새로운 얼을 잉태시키고 거듭나는 것이다. 즉, 우리말은 노(老)의 글말(자음)만 나타낸 말이고, 한자 자형은 그 생략된 뜻까지도 담아낸 글자이다. 그래서 한자를 버리면 우리말의 뜻도 사라지는 것이다. 어찌 한글전용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적으로 ‘꼰대’는 ‘꼬나보다(‘눈을 모로 뜨고 못마땅한 듯이 사람을 노려보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또는 ‘꼬느다(잔뜩 가다듬고 벼르다)’와 ‘대다’의 합성어 곧 ‘꼬나 대는 이’의 준말이다. 예전엔 주로 아버지나 선생을 비꼬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보다 폭넓게 쓰이고 있다. 즉, ‘꼰대질’하는 모든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되었다. 단지 나이 차이만으로 갑질하는 사람이 그 본질이다. 비약하면 오늘날 보수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을 존경하는 우리의 전통은,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이듯, 당연히 열매를 맺히고 여물려 된사람 곧 ‘어르신(신명을 어른 이)’을 전제로 비롯된 미풍양속이다. 갑질(꼰대질)은 쭉정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꽃(얼잇기, 짝짓기)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 쭉정이가 된다는, 꼰대가 아닌 사람에게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경계의 말이 ‘꼰대’이다. 즉, 함부로 막 써도 되는 호락호락한 말이 아니다. 하긴 쭉정이들이 갑질하듯 아직 덜 여문 사람이 함부로 쓰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