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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 시집 : 처영 승군을 생각하며 1.
서시
금산사 1
아 우리의 영원한
호국불교의 명승
처영 승군이여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
그것이 호남벌을 지키고
조선의 백성을 구하는
원력이었네
금산사는 백제의 사찰인데
동진에서 불교를 전승하고
후에 양나라에서 불교를 전해왔다.
금산사는 진표 율사가
수행하던 사찰인기에
견훤을 가둔 금산사였다.
후백제가 멸하고 고려가 건국하니
금산사는 부처님을 모시고 살았다.
고려가 멸하고 조선이 건국하고
선조임금 시대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2) 처영승군이 출가한 금산사
처영이 금산사에 출가했다.
금산사는 백제 지역에 사찰인데
미륵을 찬양하고 있는 사찰이다.
처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해
조현이 금산사를 방문하여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박정로 문인과 대화를 했다는
예언을 하고 공주로 돌아왔는데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처영에 대하여 성도 부모의 이름도 태어난
일시도 모른 스님인데 승군 대장으로
조선 선조 25년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은
처영 승군의 존재를 인정했다‘
승과 시험은 명종 20년에 중단했으니
처영은 승과시험이 폐지된 시기에 출가했으면
선조 25년이면 승과시험에 합격한 스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기였다
승통 휴정 선사가 처영을 승군대장으로 임명했으니
처영이라는 이름이 드날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선조 25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
선조 25년(1682)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날에 부산을 함락한 일본군은
부산을 지키던 정발장군이 전사하고
동래부사인 송상현을 주살하고
파죽지세로 밀양을 지났다.
이런 소식을 들은 선조임금은
조선의 총대장 신림장군을 보내
일본군의 북진을 막아라. 명했다.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하고 전사 그것도 현장에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탄금대에 뛰어들어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하는 소식을 접한
선조임금은 몽진을 결정해 경성을 버리고 떠났다.
백성들이 화가 나서 임금이 거처하는 궁을 불태우고
경성은 불바다가 되고 일본군이 차지하고 말았다,
서울 경성을 버리고 의주까지가 자신만을
지키려고 몽진했던 선조임금이다.
선조임금이 묘향산에 거주하고 있다는
휴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여립이라는 사건에 억울하게
옥에 있을 때 석방한 일이 있는데
선조임금은 묘향산에 거주하고 있는
휴정 선사를 의주로 청하였다.
휴정선사는 선조임금 앞에서
합장을 하며 말했다.
나라를 구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대한을 말씀 드릴 까 생각합니다.
신라 시대 당나라에서 50만의 병력을 이끌고
신라를 침략하려는 군사를 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있던 의상 스님은
김인문이 감옥에 있었는데 면회를 가서
그러한 소식을 알고 귀국하여
문무대왕에게 보고하였더니
방법이 있는가라고 물어 의상 스님은
호국불교를 선양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한다고
그래서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대비를 하여
문무대왕은 의상 스님에게 명하여
혜통 스님을 청해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당나라 50만 병력을 막아낸 일이 있었는데
대왕께서 명령을 내리면 나라를 위하여
조선에 승려들을 거느린 승통이라는 책임이
있으니 그 명을 주시옵소서.
선조임금은 휴정에게 승통이라는
직책을 부여하여 과거 승관제도를 회복
조선에서 승군을 인정하고 승통을 명했다.
명을 받은 조선의 승통 휴정은 격문을
조선팔도에 있는 사찰에 보냈다.
4) 선조 25년 7월 1일 승통 휴정 임명
선조임금은 조선에 승통은 휴정 선승을
총대장이라는 명을 내렸다.
승통 휴정
조선의 총섭. 의염
관동군대장. 유정
호남승군대장. 처영
황해도에서 총섭승 의엄은 300명을
관동지역 건봉사에서는 유정대장이 900명을
호남 지역 금산사에서 처영대장은 1000여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선조임금에게 보고를 하고
승군 총집결지인 순안 법흥사에 집결하라는
명을 받았다. 조선팔도에 승군들은
순안에 있는 법흥사를 향해 집결했다.
조선에서 격문을 받았던 승려들은 순안
법흥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충청도 청주 지역에서는 승전의 보고를
전라도 앞 바다에는 수군인 원균과 이순신이
바다에서 승전을 하는 소식이 들러왔다.
바다에 승리하는 수군만을 믿으며
선조임금은 명나라 군을 청하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외교력을 다했다.
명나라만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는
아 신념이 있을 뿐이었다,
명나라에서 황제가 병력을 파견해
선조임금은 명나라 군을 한영했다.
명나라 군은 평양성에 있는 일본군을 향해
선조임금의 명을 받지 않고 1차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
사상자만 내고 퇴각하여 명나라에 거짓 보고를
조선인들을 일본군이라고 보고를 했던 사건이
그 사건을 통보받았던 명나라 황제는 다시
명나라 군을 파병했다.
명나라 군이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는
조선에 있는 반병들과 연합하여 공격했다
2차도 물론 실패를 하고 있었다.
5) 임진왜란 이후 청주 성 탈환
선조 25년 8월경에 충정도에 있는
승군 영규가 조헌 의병과 청주성을
탈환하였다는 승리의 소식이 전해저
선조는 묘향산에 있는 총섭 휴정 승군에게도
용기와 힘을 얻은 명을 내렸다.
청주성을 탈출한 일본군들은
호남지역으로 향해가는 문을
금산으로 택했다.
금산을 향해 승군 영규와
의병 조헌이 금산 지역으로
달려갔다.
금산에서는 조헌과 영규가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수만이고 의병 조현은 수백명과
영규 승병 700여병이 전투대비를 하고 있었다.
영규 700명과 조헌 수백명이 집결한 전투진은
방어를 할 수 없는 지역에서 공격을 하려는
조헌에게 지금 공격하면 실패하니
방향을 이동해서 공격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조헌 의병은 자신이 관군처럼
영규 에게 명했다.
장부가 한번 낸 마음인데
공격을 하지 않으면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
공격이다 공격하라 일본 지역을 향해 공격했다.
그날에 의병 조헌과 영규 700명 승군이 전사를
선조임금은 금산에서 의병 조헌과 영규 700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명나라 군이 다시 조선에 파병을 했다.
명나라군은 평양성을 3차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를 하였다.
명나라에서도 평양성 3차 공격을 했으나
실패했다고 하여 명나라에서는 이여송을 중심으로
조선에 파병을 해 왔다.
6) 명나라에서 이여송제독 파병
순안에 있는 법흥사에는
황해도 의엄 총섭군 300명
관동지역 유정 대장 900명
호남 지역 처영대장 1000명
승군이 집결해 평양성 탈환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명나라에서도
이여송 제독 중심으로 순안 법흥사 지역에 집결했다.
물론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해도 총섭승 의염은 선조 임금을 호위하는 명을 받고
관동지역 유정 승군과 호남지역 처영 승군 결합 2300여명이
이여송 제독과 연합하는데 있어 이여송제독을
조명연합군 총사령관에 명했다.
7) 평양성 4차 전투 승리
선조 26년 1월 8일이었다.
순안 법흥사에 집결한 승군과 조명연합군
이여송 제독이 평양성 4차 전투에
공격한 새벽이었다.
평양 성안에 있던 일본군은
명나라 군과의 협상을 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북군과 남군이 참여했기에 북군과 남군이
서로 다름을 보여준 이여송제독이었다.
이여송 제독은 북군에서 지지를 했다.
평양성언에서는 남군이 협상을 시도했는데
현소라는 승려가 협상에 나선 것인데
명군 가운데 남부군은 현소를 지지했다.
북군에서는 강력하게 평양성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결렸던 평양 4차 전투였다.
평양성안에 있던 남부군의 협력을 얻어
일본군은 평양성 안에서 탈출을 시행했다
평양성은 9일 새벽에 완전하게 점령했다.
일본군은 이미 평양성을 빠저나와 대동강을 건넜다.
경성을 향해 달리는 일본군 뒤에는 명나라 군
이여송 조명연합군 총사령관이 따랐다.
승통 휴정 유정 승군대장 처영 승군 대장이
경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8) 조명연합군 이여송 제독의 탄핵
일본군이 남하 하는데 뒤를 따랐던 이여송 제독이
개성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일본군은 경성에 집결해
뒤를 따르던 이여송 조명 연합군 총사령관은
일본군에 대하여 너무도 무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벽제전투에 참여했는데
일본군이 소수인 것을 알고 깊숙이
경성을 향해 진격하다가 그만 말에 넘어진
조명연합군 이여송 제독은 일어나 경성을
향해 진격하는 명을 내리었는데 벽제전투 중
1만 2천의 말이 죽고 이여송 제독은
목숨만 겨우 살아 나 개성으로 퇴각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명나라에서 알고는
이여송 제독에 대하여 탄핵 했다.
그 이유는 명나라에서는 북군과 남군
그렇게 구성이 되었는데 이여송 제독은
북군만을 찬양하고 남부군에 대하여
그래서 명나라 남부군 측에서 탄핵을
당한 이후에 조선에서는 실망했는데
9) 행주산성에서의 승리
행주산성에서는 권율과 처영 승군 대장이
죽을 각오로 일본군에 대응할 준비를 한 이후
조명연합군이 실패하였던 그러한 전투가 아니라
일심 단결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결사적 전투에
참전해 승리를 하는 성과를 올렸다.
권율과 처영 승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승전을 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선조임금은
권율 장군에게만 상을 내렸다.
그런데 우리의 승군 처영대장을
인정하지도 않고 있었다,
당시 승통 휴정은 안성 지역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 말했다.
조선의 승통에 유정과 처영에게 넘기고
자신은 묘향산으로 돌아간다고
선조임금에게 보고하여 윤허를 받았다
10)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 가유약
명나라 황제는 가유약을 명황제의
칙사로서 조선에 왔다.
명나라 군의 평양전투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군과 명나라 황제에
사은사를 보내지 않았다.
이여송 제독이 벽제전투에서
패하여 의기를 상실하고 있을 무렵에
명국에서 황제의 명을 받고
온 가유약은
계사년 3월에
나와 강상(江上 의주(義州))에서
군공을 조사하고 안주(安州)에서
군대를 위로한 뒤 바로 돌아갔다.
기해년에 재차 왔다
11) 선교양종 판사에서 총섭 명칭
조선 승군들에게 선교양종 판사 총섭 명칭을
승군 총섭이라는 명칭을 부여 받도록 했다.
선조 26년 7월 20일에는 일본군이
남하하고 있는데 승군들도 조명 연합군과 같이
승군을 지휘하고 있는 휴정에게 통보해
승군을 선교양종에 명하였다.
12) 경성을 진주한 선조임금
명나라 황제는 이여송 제독에게 용기를 주고
경성을 재차 진주하도록 명을 내렸다.
행주산성에서 승리한 권율과 승군 처영은
전라도에 내려가 일본군에 대한 방어를
하려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일본군은 경상도를 점령한 이후
명나라 군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경상남도를 일본에 양도하고
명나라 군은 철수를 하자는 협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이여송 제독은
일본군 진영을 진격하지 않고 있었다.
선조 임금은 연일 이어송 제독에게
진격하라고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생각한 방법이 조선에 승군들을
병권을 주려는 의도적 압력이었다.
승장 유정에게 당상관을 제수하였다.
선조임금은 승통 휴정에게 병권을
그러나 병권을 주는데 잘못이라고
그 이유는 가들먹 거리는 모습을
지금은 휴전 기간이기에 그런 것이라
휴정의 제자 의엄에게 판사라는 직책을
승군 대장 유정을 총섭이라고 명했다.
승장 유정은 의령 주둔하여 명나라 군에
식량을 마련하는 일에 총력을 다 하고 있었다.
일본군 진영에서는 협상자를 택했는데
유정 총섭에게 일본진영 1차 회담을 하게 했다
승군에게 주어진 최고의 책임회담
조선에서 유생들도 하지 못했던 회담을
유정 총섭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조선에 불교가 최고의 직책을
수행했던 역사를 지억하게 한다
오직 나라를 구하려는 일심이었던
조선에 승군들이었다,
13) 승군 처영에게 남원산성 수축
한편 호남의 승군 처영 대장에게 있어서는
호남에 거주하고 있는 처영 승군대장에게
남원산성을 축소하라는 명을 내렸다.
남원산성을 축소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지리산에서 남원 성을 쌓고 있던
처영 승군에게 주어진 직책은 바로
남원산성을 축소하는 직책이었다.
처영은 승군으로서 산성을 축소하고
일본군에 대항할 준비를 수비했다,
전라도를 지키는 것은 조선 승군의 임무였다.
전라도를 점령당하면 조선에 백성들은
노예로 팔려가는 노예 신세를 막지 못한다.
처영 승군은 조선의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남원 성을 쌓아 방어를 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남에 처영승군 대장은
선조 30년 8월 12일에는 일본군 14만 여명이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고 있는 지역에 가서
명나라 수군 계금장군과 합류했던 처영 승군은
전라도를 수호하는데 전력을 다 할 것을 맹서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하고 남원산성을 지키던
남원 산성이 무너지고 명나라군 이 전사를 하고
충청도 지역에 함락 당하고 충청 지역 성주사가 불타고
한편 원균과 이순신은 당쟁에 의해서
원군을 지지하는 세력 이순신을 지지하는 세력
시대에 병이었음을 알고 있는 자들은 없다.
처영 승군은 지리산 전라도를 수호하는데 있어
온힘을 다했는데 일본군이 퇴각하고 있을 무렵에
원균이 일본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전사를 하고 말았다.
선조 임금은 이순신을 다시 명하여 전라도를
수호하는데 처영 승군도 이순신을 보호하려고
전라도에 내려가 이순신 수군을 호위하였다
14) 이순신 처영 명나라 등자룡 전사
선조 31년 10월 1일 계축년 전쟁에
진주성을 함략시키던 일본군은 전라도를
향해 가고 일부는 충청도 지역으로 달려갔다.
충청도에 나타난 일본군은 부여무량사를 불지르고
성주사를 불지르고 충청도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죽산 지역에까지 진군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회군
조선에 승군 처영은 이순신을 도우려 명량 지역으로
게금장군도 함께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요도미 시데요시가 사망함에
일본에서는 조선에 참전한 군 철수를 명했던 같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이 가열되었는데
이순신장군이 앞장을 서고 계금 장군 승군 처영도
온 힘을 다해 일본에 대하여 한을 풀기 위해
임진왜란 정유재란 시기에 전사한 백성들과
조선의 백성들과 전사한 수군 승군들을 위하여
명량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아 전라도를 수호하려는 이순신, 처영 승군
명나라 등자룡이 전사를 하고
명나라 계금 장군이 부상 했다.
그날에 명랑 앞바다는 피바다 였고
죽은 인간의 몸은 일본군 조선군 명나라 군의
죽은 육신들이 명량 앞바다에 가득했다.
조선 앞바다는 아직도 그날에 피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5) 전라도 앞 바다에 피바다
조선 승군의 피여 처영 승군의 피여
언제나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는 피여
조선을 지키는 것은 전라도를 지키는 것
전라도를 지키지 않았으면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군에 의하여 배고파 죽었을 것이고
명나라 군은 7년동안 전쟁을 하지 못했던 일
사명 스님은 휴전 지간에는 경상도 의령 지역에서
식량을 마련하는 농사를 독려했던 것을
유생들아 알고 있는 것이나
모르고 있는 것이냐 말해보게나
우리의 승군 사명과 처영을 찬양하세
조선을 지킨 승군을 위하여
바다에서 전사한 승군의 역사를
선조 25년 7월 1일에 조선을 지킨
승통을 임명한 휴정 승통
그날을 승군의 날을 선포해야 한다
그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하는 날
조선에 승군의 날을 기명하는 것
조선의 역사를 바르게 선언하자
조선이여 그날을 기억하게 하자
조선에 승군을 우리가 지키자
16) 일본에 사명 승군 평화협상
전쟁이 종결된 시기에 사명 스님을
일본국에 평화협상자로 선정해 명했다.
그런데 묘향산에 거주하고 있는
휴정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묘향산을 가려고 출발하려했는데
그만 선조 임금의 명을 받고 선조37년 6월 22일에
조선국왕의 명을 받고 조선대표로 화친의 소임을 하려고
부산 금수사에서 대마도를 향해 배를 타고 떠났다
선조 37년 8월 20일 유정이 대마도에 도착했다.
유정은 대마도에서 일본국에 와서
통신사들이 걸었던 길을 택해
일본에서 국빈대접을 조선의
승려로서 지위를 얻었다.
조선에 승려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유생들이 수행해야할 책임성을
조선에 승려들을 무시하고 탄압하던
그날에는 수모를 당하고 있던 시대를
일본에 와서 정치력을 걸고 조선에 평화를
오로지 그 일념뿐인 유정이었다.
조선에 통신사들이 걸었던 길을
승군 유정 스님이 통신사가 되었다.
이러한 소임을 맡았다는 것이야 말로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승군 유정이었다.
조선에서는 승군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일본에 불교는 승려의 역할을 존중하고 있다
아 언제나 조선에서 승군의 지위를 얻을 수 있을지
이것은 꿈이다 조선에 불교를 회복한다는 것은
하지만 승군 유정은 일본에 불교를 탐구하고
조선에 정탐자로 왔던 현소승군의 안내를 받았다
17) 조선통신사 유정 승군
승군 통신사 유정이 교도에 도착하여 일본 일련종
본법사에 머물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평화회담을 수행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본보사에 3개월 동안 머물러도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는데 3월이 되어서야
일본의 최고의 지도자와 회담이
조선국의 승군 유정과 일본의 지도자와
평화회담이 성사되었는데 그날에 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
石上難生草(석상난생초) 돌 위엔 풀이 나기 어렵고
房中難起雲(방중난기운) 방에서는 구름이 일기 어려운데
汝爾何山鳥(여미하산조) 너는 도대체 어느 산의 새이기에
來參鳳凰群(내참봉황군) 여기 봉황의 무리 속에 끼어들었느뇨
-사명 대사-
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인데
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노닐다가
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하루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잘못하여 들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1605년 3월6일에 조선에 승군 통신사 유정이
일본교토에서 도쿠가와를 친견 했던 날에 시로서 대답한
우리의 영웅 조선에 통신사 유정 승군은 귀국길에
조선국과 일본국이 통상을 성사하고 귀국했는데
일본군이 부산 초량에 왔다
명나라 선유격이 일본에게
어이하여 조선에 왔나
송운 대사를 호송하기 위함이요
포로들을 쇄환하기 의함이요
만일에 일본이 다시 침략한다면
조선에 명군 40만이 일시에 막을
18) 조선에 포로 3000여명을
선조 38년 4월 1일에 유정대사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3000여명을 모시고 왔다
우리의 승군 유정대사는 일본에서 평화를 성사한
조선의 평화 협상 승군이었다는 사실을 그 누가 기록을
아 아 조선의 승군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조선에 유생들은 불교를 업신여기고
조선에 승군에 대한 예우는커녕
선조 신록에는 기록을 격하했는데
선조 수정 신록에 조선의 포로를
기록하고 있음에 대하여 생각하자
선조39년에는 일본에 사절단을 파겸하자고
이 모든 것을 승군 유정대사가 협상을 했던 것인데
유생들 자신들이 행하려고 한다.
선조 41년 2월 1일 선조의 죽음이다.
19)광해왕과 유정
광해왕은 유정대사가 공로가 있으니
승장의 칭호를 주어 승군 관군이 병합하여
서로의 요해처를 주둔하게 하였다.
광해 2년 9월 28일에 유정 대사 열반
조선을 지킨 승군에 대하여
선조 25년 7월 1일에 승군의 날
그날을 선포하는 것만이
오늘의 승군의 역사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에서 온 힘을 다했던 승군
승통 휴정 총섭승 의엄
관동군 대장 유정
호남 승군 대장 처영
충청도 승군 영규
조선이여 그날을 기억하게
조선이여 승군을 기어하게
20) 처영승군 그리워
처영승군 그리워 두 손을 모두 우니
임진란 일어나던 그날에 통곡소리
금산사 주지 소임을 다하려 했던 그날
승통에 임명받은 휴정 스님 전국에
승첩 승에 의염 관동지역에 유정대장
호남에 처영 승에게 대장이란 명을 주었네.
휴정 승통 격문을 발송 승려들 참여하
한양을 가로질러 평양으로 달려가서
법흥사 승군 승통인 스님을 친견했네.
조선승군 연합부대 편승한 그날에는
평양전투 참여하여 승려의 깃발들이고
의주의 선조임금을 기쁘게 하였다네.
평양산성 다시 찾아 남하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 협력하여 경성을 향해가다
벽제에 이여송 제독 준비 없이 달려갔네.
그날에 잘못판단 경성진입 실패하고
명나라군 1만 2천말이 죽게 했으니
이여송 개성에 철수 신뢰를 상실했네.
조선에 승군위력 보이려는 행주산성
일본군을 물리친 전략을 실행하니
명나라 조정에서는 가유약을 파견했네.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이여
경성에 진주하여 조선을 회복하니
일본군 폐주하던 길 파도처럼 달려가네.
권율장군 조선승군 연합군에 편성하여
경성에 집결한 군 내몰아 내던 처영
일본군 집결지에서 철수한 빈자리네
명나라군 일본군이 휴전에 들어갔고
권율장군 조선승군 처영대장 전라도 사수
금산사 주지소임은 호국처영 찾은 일이네
처영 승군 남원산성 쌓는 일에 책임자로
임명을 받아 온 몸을 다 하여 쌓았네.
지리산 지킴을 위해 임금의 명을 받았네.
정유재란 일어나던 그해에는 전라도에
이순신을 대신하여 바다를 지켰는데
명나라 계금장군도 그날에 만났다네.
선조임금 총애 받은 원군이 사망함에
이순신 백의종군 명을 받아 수군이라
남해에 등장한 그날 처영 승군 만났네.
일본군 15만 명 진주성을 점령하고
지리산 남원 성을 순간에 점령하고
충청도 부여 무량사 순산에 불 질렀네
백제의 사찰인 성주사를 불태우고
전라도 금산사 김제에 흥복사를
일본군 그 기세 황금벌판 점령했네.
처영승군 결집하여 전라도를 지키려고
명나라 수군합류 이순신 참전하니
일본군 죽산 들판에 점령을 포기하네.
일본군 부산지역 집결하는 이유를
남해 바다 이순신도 몰랐던 일이라고
일본군 철수하는 날 전투가 벌어졌네.
명랑전투 침전한 처영 승군참여
일본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일
이순신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말 못해
명랑전투 처영 승군 명나라 등자룡
계금장군 부상당한 전투였다고 말하니
바다에 떠있는 육신 누가 거두었나.
명랑전투 승군참전 그 날을 기억하면
정유재란 피해 처영승군 전사하고
금산사 불타버린 날 눈물 바다였네
처영승군 전라도 땅 지키려던 그 마음
죽어간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어서
타버린 부처님도량 언제나 복원하리.
임진왜란 정유재란 조선을 불바다로
조선에 승군들이 나라를 구하는 일
불교를 억압한 나라 그래도 호국이여
나라를 구하는 일 참여하는 그 날에
백성들 모두 나와 승군과 합류하니
임금도 그 날 기억해 승군에 벼슬 내려
일본에 평화 통신사를 선발하는데
승군인 유정대사 보내자는 의견 있어
선조는 유정대사를 일본에 보내려하네
묘향산 승통 휴정이 열반한 소식 듣고
묘향산을 가려는데 선조임금 일본에
통신사 명을 받고서 부산으로 내려갔네.
부산에 머문 사찰 금수 사에 머물러
일본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본에 가는 그 길이 험난하다 말 못해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에 도착하니
현소스님 거처하던 사찰이 있는지라
그곳에 머물렀다가 기다리고 있었네.
일본국 출입허가 받는 일 기다렸네.
대마도에 멈춘 그날 조선에 운명 걸어
평화를 이룩하려나. 알 수 없는 일이네
일본에 간 유정대사 기다리는 선조임금
6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니 기다린
조선은 유정대사를 인정하고 있었네.
유정대사 교토 본문사에 부처님 전에
조선을 위해 기도하던 공덕으로 일본
지도자 친견한 인연 조선과 일본평화
조선국과 일본국은 평화를 약속했네.
조선포로 삼천을 인수해 왔던 그날
부산에 모여든 영광 영원한 노래였네
조선에 선조임금도 유정대사를 찬양해
유생들은 불교를 폄하하는 버릇 있어
지울 수 없는 약행을 자행하고 있었네.
조선에 국왕 선조 임금 눈감았네.
세상일 모두 잊어버릴 것이 없느냐
광해왕 조선국왕이 되어 내일을 노래
유정대사 열반한 그날을 기억하면
처영승군 전사한 그날을 기억 하면
조선에 승군들마저 그 공덕 있지 못해
처영승군 주지로 수행했던 금산사
임진왜란 승군참여 역사를 회복하여
죽음을 예언한 승군 명량 전에 죽음을
처영승군 생각해 조선을 생각하니
다시 찾은 나라를 지키는 것 우선이니
그 모습 눈에 삼삼해 눈물이 쏟아지네.
광해왕 몰아내고 인조가 임금 되어
조선승군 영혼이 상실되고 알았네.
조선에 승군들마저 그 지위 빼앗겼네.
정조임금 곰곰이 임진정유 생각하니
조선을 구한 승군 그 공덕 인정하여
임금의 명으로 승군 찬양해 기록했네.
세월이 지난 후에 처영승군 찬양하니
부처님 눈물 흘려 금산사에 내리는 비
조선의 승군들 눈물 처영승군 흘린 눈물
금산사 산문밖에 세월이 흘러가고
다시금 지나는 길 그간에 내가 서있네
언제나 부처님 뜻을 이 국토에 정토세상
비바람 몰아치는 언덕위에 처영승군
금산사 법당 앞에 눈물로 씻은 세월
이제야 그 영혼 찾아 바람으로 한을 씻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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