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지역에서의 현대문학의 태동과 그 개화
강원도 수부 춘천의 100년 역사로 볼 때 춘천 현대 문학의 뿌리는 그리 깊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상고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선조들의 문화적 정서와 삶의 지혜는 이 지방 특유의 지리적 영향 속에서 그 나름의 가치 창출의 문화유산으로 이어져 오늘의 춘천 문학의 모태가 되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강원도 정선에서 정선아리랑이 불려지듯 이 고장에도 춘천아리랑이나 장사타령, 이동풀이 등의 서민민요가 구성지게 불려져 당대의 세태와 그 서민들 삶의 애환이 우리 문학의 뿌리가 되고 있음이 바로 그러한 전통계승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개화기 신소설 귀의 성(이인직)이나 소양정(이해조)에는 춘천의 삼악산이나 송암리 신연강과 소양강의 소양정등이 작품의 배경 지명으로 나오고 있다. 비록 이 지방 출신 작가는 아니지만 그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이 춘천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작가가 그 작품을 통해 당대 이 지방의 자연과 사람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춘천문학의 한 맥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개화기 문학기를 지나 2,30년대 현대 문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 무렵에 작품 활동을 한 메밀꽃 필 무렵의 평창 출신 이효석(1907~1941), 돌다리의 철원 출신 이태준(1904~?),그리고 동백꽃의 춘천 출신 김우정, 30년대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받던 인제 출신의 박인환(1926~1956)시인과 기 <파초>로 유명한 강릉의 김동명(1901~1968)시인 등이 바로 강원도 현대문학의 뿌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에 뜻을 둔 이들이 동인활동을 편 춘천 최초의 동인지는 1948년에 발간된 좁은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좁은문의 동인으로는 이재학, 김세한, 이혀근, 신철균, 장운산, 유광열, 구혜영, 한옥수, 임혜자. 장동림, 장독, 장건 등이며, 구혜영(소설)과 유광열(시) 두 사람은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6.25전쟁과 더불어 춘천은 휴전선에 인접한 변방적 위치로 해서 문화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게 된다. 동족산잔의 전쟁으로 해서 기존의 문화적 가치와 질서가 깨어지고 민족의 대이동에 따른 작가. 시인들의 거취문제 등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로 40년대 춘천지방 문학과 문단형성에 관계가 있었던 사람으로 회월(懷月)박영희(朴英熙,1901-?)와 신영철(申瑛澈),그리고 이태극(李泰極,1913- )등을 들 수 있다. 박영희는 백조동인(1921), 시경향파(1925), 카프결성(1924)등으로 유면한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활약하다가 34년 전향선언을 한 뒤 45년부터 약4년간 춘천고보에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연작시 <산가>등을 남기는 동시에 강원음악미술연구회 활동을 통해 이 지방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영희와 같은 시기 춘천고보에서 교편을 잡으며 『고시조신역(古時調新繹)』등의 저서를 남긴 신영철은 춘천고보 7회 졸업생으로 상록회 사건에도 관계됐던 사람으로 40년대 춘천문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화천 간동면 출신의 시조시인 이택극 역시 춘천고보 출신으로 1934년부터 춘천고보 등 이 지방에서 교편을 잡았던 10여 년 간 시조문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동시에 춘천의 문학발전을 위해서도 큰 역할을 했다.
6ㆍ25전쟁을 겪은 뒤 폐허가 된 춘천지방에 문학의 싹이 다시 돋기 시작한 것은 지방신문인 강원일보를 중심으로 지역문화인들이 문화인식을 넓혀가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함북 청진 출신의 이덕성(李德成,1929- ) 이 52년 2인시집『조락의 모닥불』을 내놓아 등단한 뒤 춘천사범, 춘천농고, 춘천고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춘천문학의 개화기가 시작된다. 이보다 몇 년 뒤인 56년『문학예술』을 잡으면서 중앙문단과 연계되는 문학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들 두 시인 외에도 이형근(작고, 연극인), 이기원(현재 강원일보 상무이사), 이만선(현재 목사)등이 주로 5,60년대 춘천지역의 문단을 이뤄 활동했다.
전후 문학적 열정을 가진 춘천의 몇몇 성인들에 의해 그 열기가 서서히 싹트는 가운데 강원일보는 1958,59년 2년에 걸쳐 신춘문학생 문예작품을 공모한다. 여기에 입상한 춘천시내 고등학교 2학년 문예반 학생들이 1959년 '봉의 문학회'(이승훈,전상국,허남헌,유근,유연선,손명희,김주경,백혜자)를 만들어 서로의 문학적 열정과 재능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6ㆍ25이후 춘천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동인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봉의문학회'는 적십자 사무실을 빌려 작품발표 등을 해오다 이들 멤버에 그 해 춘고를 졸업한 허단(許檀)과 최승덕(춘고3)이 합세하면서 '예맥문학'으로 개칭, 재결성된 뒤 동인지 『예맥문학』1집(59년)을 발간한다.
61년 문총(文總)이 해체된 뒤 곧바로 62년 예총이 발족하면서 강원도에도 예총강원도지회(초대지회장 변희천)아래 62년 2월 한국문인협회 강원도지부(초대지부장 이덕성, 부지부장 유호, 총무간사 공병진, 간사 허단)가 결성된다. 강원문협이 결성되면서 비로소 춘천문단 내지 강원도 문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다.
강원문협은 60년대 초 중앙의 저명한 문인들을 초청해 문학강연을 함으로써 이 지방의 문학발전을 도모한다. 이때 초청된 문인들로는 이봉구(李鳳九), 박기원(朴琦遠), 박거영(朴巨影), 한하운(韓何雲), 이하윤, 안수길 등이었다.
강원문협 역대 지부장은 이덕성, 고동률, 심상하, 김영기, 황영찬, 박유석으로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지역문학의 구심적 위치에서 95년 현재 『강원문학』22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1967년 춘천에서 이 지방의 문학적 전통을 세우고 춘천문단의 도약을 다짐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이 고장의 작가 김유정(金裕貞)을 기리는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로, 춘천문학의 전통을 수립하고 그 새로운 장을 다짐하는 모임이었다. 그 모임을 통해 67년 10월 26일 에 '김유정문인비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된다. 변희천 예총지부장이 추진위회장을, 이형근이 사무국장을 맡은 이 위원회는 68년 2월에 '김유정 전집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5월에 드디어 춘천문학의 상징이며 그 미래의 초상인 김유정문인비가 의암댐 호수 절벽에 세워진다.
지방의 문화가 발전하는 데는 그 지방 대학의 인적 자원이 어떻게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되는가에 달려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지방문화와 대학문화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가지는 가운데 지방문화의 굳건한 토대가 세워지고 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춘천교욱대학에 최태호 학장과 서무과의 이인수 시인, 그리고 60년대 초 박동규, 특히 60년대 말 춘천교육대학에 부임한 이승훈 등에 의해 춘천의 시문학이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이들 기성 시인들이 재직하는 교육대학 출신 교사들에 의한 문학열기가 도내 천체로 확산되어 나감으로써 지방문학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88년 발족한 '석우문학회'를 통해서 확인된다.
문학은 창작된 그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발표지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발표지면이 극히 제한되어있던 6,70년대 문인들이 동인읠 만들어 작품활동을 많이 하게 된 것도 서로의 문학적 고뇌를 나눠갖는 동시에 작품발표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춘천에도 70년대 각 장르별 동인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강원아동문학』『표현』,
『삼악시』,『예맥문학』,『호반수필』등이 그런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들어
『청태』, 『풀잎』,『풀무』,『토담시』등의 동인 활동도 춘천문학의 현주소 확인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강원일보 문화면과 예총의 기관지인 『강원예총』등도 춘천 문인들의 중요한 발표 지면이 된다. 그러나 71년 『강원문학』창간호가 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이 지방의 문인들은 최소한 1년에 한 번 고정적인 발표 지면을 확보하게 된다. 강원문협 기관지인 『강원문학』1집은 향토성과 한국성이 일치되는 보편적 가치를 얻어내는 일로 한 시대를 증한하는 문학이 될 것을 표방한다는 권두사로 시작되어, 춘천의 문인들로는 최태호(崔台鎬), 전상국(全商國), 황영찬(黃英燦), 이도행, 최종남, 임교순, 고동율, 박일송, 정태문, 심상하, 이승훈, 이무상, 박유석, 이은무, 최돈선, 김학철, 김영기, 박민일, 이기원 등의 글이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