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희만(1938년생, 74세)_가정1리 | |
조사일시 | 2011년 7월 21일 오전 |
가족관계 | 부인, 자녀-2남2녀. |
특징 | 전 춘천시 공무원, 춘천시의원 현 가정1․2리 노인회장 |
- 춘천시공무원 & 춘천시의원
2002년~2006년 춘천시 6대 의원을 했다.
“공무원퇴직하고서 그거 한 번 하겠다 하고 한 거에요. (한 번만 하신 거에요?) 그때도 70이 다됐으니까. (그 전에는 공직에 계셨나요?) 28년 동안 춘천시에 있으면서 1996년도에 퇴직했어요. 몇해 놀다가 시의원에 나갔어요. (춘천시에서 어떤 일을 하셨죠?) 저는 그냥 이 남면에서 주민등록 호적을 주로 한 20년을 했어요. 그리고 산업계장 하다가 퇴직했죠. (그러면 마을에 도움을 많이 주셨겠어요) 면 행정이 도움 줄 것은 별로 없겠지만, 주민등록 호적을 보다 보니까 웬만한 파악은 그냥 사전과 같이 누가 어서 왔다 하면 저 집은 몇 번지다. (문서를 자주 보시다 보니까) 옛날 말로 숟가락이 몇 개다 정도도 파악할 수 있었죠. (시의원은 남면에서 나오신거죠?) 예. (노인회장도 하신다는데) 노인회장은 지금. (총무도 좀 하셨담서요?) 그 양반이 노인회장을 8년을 했는데 8년 동안 총무를 했었어요. (시의원과 겹치는 시기인데요) 의원하면서 했었어요. (류연씨 말에 따르면 총무가 일을 많이 했다고 그러시더라구요) 노인정이 뭐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근래 농촌에서는 노인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잖아요) 그래도 남면 노인회관이 모두 10군데인데. 근데 여기는 유독 1리 2리가 통합이에요. 제가 의원 하면서 첫 스타트를 전천후 게이트볼장을 끊었어요. (그럼 시의원할실 때 마을에 도움을 주신 건가요?) 제가 한 건 아니구요. 시에서 지원을 받은 거지. (그래도 이쪽으로) 예. (그래서 가정리 게이트볼장이 아니라 남면이더라구요) 그렇죠. 그건 춘천시 건물이니까. (시의원하시면서 남면 또는 가정리에 신경 쓰셨던 사업이나 그런 건) 그런 건 이야기할 것도 없고. 하다 보면은 자기 동네 챙기긴 해야 하는데 그걸 갖다 그걸 나열할 수 없죠. (자기 마을을 챙기면 다른 마을에서 머라고 하기도 하고) 아유 그건 욕이나 먹죠. 그 뚜렷한 건 하여간 전천후 게이트볼을 춘천시에서 두 번째로 끌어왔어요. (1,2리 분들이 활발히 치시는 건 같아요) 아 근데 그게 여기 촌에서 집단 부락이 아니고 산재부락이라 보니까 게이트볼 남면건 데 가정리 사람만 치지, 다른 데 사람은 오지 않아요. 혹시 자가용이 있으면 몰라도 버스타고 왔다 갔다 한다는 건 힘들고. 시내 같으면 교통이 좋으니까 되는데, 그래서 남면 11개 리에서 2개 리가 와서 친다고. 그러니 선수가 좀 부족하죠. (공직생활 28년 동안 하시면서 다른 일은, 집에서 농사는 안 지으셨나요?) 농촌에 있으니까 안 지을 수가 없죠. 짓다가 인제 퇴직하면서 나이가 들고 하니까 안하던 사람은 하기 힘들고 해서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채소나 조금 하지 안 해요”
(택호가 노점댁인데 예전에 점방을 하셨나요?) 노점이 아니라 놋점인데, 왜냐하면 여기는 그 윗대 할머니가 오신 친정, 그 동네를 따서 택호를 지었어요. 우리 증조할머니가 놋점에서 왔는데, 거기가 춘천시 여우고개 있죠, 거기가 놋점이에요. 거기 이서방네인데 그래서 놋점댁. (무슨 이씨인데요?) 전주이씨. (공직생활 하시면서 댁은 가정리에 계속 있으셨어요?) 그렇죠. 남면에 있으니까 출퇴근도 하고 저 동산면에서 한 1년 있었는데 그때는 거기 가서 있었고. 또 서면 가서 1년 있었는데 애들도 있고 해서 저 혼자 가 있었고. (류씨들이 춘천시 공무원이나 경찰 쪽에 많은 거 같아요) 많다고 볼 수 있죠. 서면 같지 않아도 많아요. (박사마을)서면이 많죠. (학교는 어디까지 다니셨어요?) 아, 학교는 안 나왔어요. (가정초교는?)초등학교는 나왔죠. 댕기다 말다 댕기다 말다 가정이 하도 어려우니까. 그것 또 제가 심지어 야간으로 독학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생전 시에 그래도 네가 장손이니까 구학을 가서 좀 배우자 해서, 춘천 있는데 할아버지가 오셔서 가자 그래서 할 수 없이 끌려 나와서, 여기에 한문 서당이 있었어요. 거기서 3년 배우다, 신체검사하고 바로 군으로 갔어요. 끝이지 뭐. 군대 갔으니까. (그때 어떤 책 배우셨어요?) 그 이제 그런 이야기하기 챙피한 이야기인데, 여기는 겨울방학 여름방학 때 천자, 동문편, 서문편 배웠어요. 다니면서 그래가지고 춘천 있다가 나와서 그때는 17살 때니까, 명심보감 배우고 소학 6권까지 배우고, 대학 배우고 중용까지 읽고서 신체검사 하고서 그 해에 영장이 나오더라고. 그래서 군인 갔다 오니까 또 그만이지, 그러다 농사 좀 짓다가 면에 자리가 있어서 들어간 거죠. (면에는 자리가 있어서?) 그때 당시 70년도인가 69년도에 주민등록증이 생길 때, 그때 나는 학교에는 제대로 안 다녔어도, 다 한문이니까. 고등학교 졸업자들이 들어와도 못하고 가는 거야, 한문을 못하니까, 호적등본을 뗄레도 하루 진종일해도 안되니까. 그런데 나는 한문 3년 배우고 한문에 능통하니까 특채로 들어간 거야. (그럼 호적 담당하셨던?) 예. (좋으시겠어요. 지금세대는 영어가 더 친숙한지 한문은 정말 힘들거든요) 옛날 호적은 전부 깨알 같은 글씨 한문 쫙 나온 그런 걸 고등학교 나와서 교육받고 들어온 사람이 진 종일해도 그걸 못하고 못한다고 도망간 거야. 그 당시에는 복사기가 있나, 전기가 있나. 그냥 전부 써야 하는 거지 (그럼 글씨도 잘 쓰시겠어요) 잘 쓰는 게 아니라, 달필이죠. 빨리 써야 하니까. 묵지 대고 3,4통씩 서야 되고, 민원은 많지, 복사기 없지, 전기 없지 그러니까 보통 열두시까지 초롱불 피고 쓰는 거에요. (야근 많이 하셨어요?) 아 야근 안하면 할 수 없죠. 낮에 오는 사람들 쭉 순서대로 적어 놓았다가 저녁때 하는 거야. 그러면 그 사람 민원인도 거기서 자죠. 그때 버스도 하루 1대 있을 때니까. 그니까 자고서 그 이튿날 가고, 까닥하면 그 이튿날 못 가는 사람도 있고. 차 놓치면. 그때는 그런 시절이야. (면사소가 지금도 저 자리였나요?) 그때는 면사무소가 아니라 출장소에요. 저 남산면과 남면이 통합이라 출장소가 있었는데, 89년도에 처음 출장소를 승격하면서 여기가 남면이 되고, 동내면이 신동면 출장소인데 동내면이 되고 해서 2개면이 89년도에 늘었다고. (그럼 예전에 출장소까지 걸어 다니셨어요?) 그때는 걸어야지 머. (얼마나 걸리셨어요?) 한 4km 잡고 댕기는데, 8km 10km 출장을 가도 걸어야 되고, 먼 데는 출장 갔다가 당일에 못 오고 자고 오기도 하고. (할아버지 말을 듣기 잘 하셨죠?) 할아버지는 손주라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뒤를 댈 수가 없으니까, 돈이 없으니까 양식이고 뭐고 댈 수가 없으니까. 또 그렇게 하셨는지도 몰라요. 그때는 여기 토요일이면 나와서 쌀 5되 주면 깨소금하고 장작 요만하게 패서 한 바구니 해서 지고서 일요일에 걸어가야 해. 70리를 춘천으로 걸어가야 했어요. 그런데 일주일에 쌀 5되 주는 것도 우리집은 그걸 댈 능력이 없었어요. 그니까 할아버지가 겸사겸사 나를 끌어 온 거죠. 그니까 나는 중학교 졸업장도 없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어요. (처음 면사무소 근무하실 때 당시 월급은 어떻게 받으셨어요?) 그때 쌀 3가마, 그때 쌀 1가마에 3천 원 정도 했는데, 쌀 3가마야 처음 들어가니까. 그때는 봉급을 돈으로 안주고 양곡으로 줬잖아. 80년대 들어가면서 공무원들 처우 개선이 됐으니까 공무원들 살만하지, 지금 쌀 3가마면 40,50만 원 정도 되는 거죠. 그때는 쌀 3가마면 아주 엄청난 돈이야. 쌀이 없을 시절 힘들 때니까.”
- 형제관계, 택호
(장남이라하셨죠?) 증조할아버지가 계신데 거기서는 내가 장손이고, 또 우리 아버지가 지금은 4남매지만 그때는 저 하나 밖에 없었어요. 6.25사변에 다 실패보고. 이제 막내동생은 군대 가니까 그때 막내동생을 낳았던데.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3형제인데요. 둘째는 청원 한국화학에 있고, 막내는 강대 나와서 저 동대문 의료보험조합에 있어. (북간도댁 큰집이시죠, 왜 북간도댁이에요?)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아들을 4형제를 낳으셨어, 우리가 제일 큰집이 놋점댁이고, 북간도댁은 둘째분인데 살기 어려우니까 저 북간도로 이주해 갔다가 오셨기 때문에 북간도댁. 셋째분은 여기 새방댁. 이거는 장개를 들어가지고 집을 못 구하고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니까 셋방댁이라 짓고, 넷째분은 하도 어려우니까 먼 촌한테로 양자를 보냈어. 그렇게 됐습니다. 만주 북간도에 가서 화전해서 조,쌀 잡수는데 유리하니까 갔다가 나오면서 택호가 북간도댁이 된 거죠. (북간도에서 얼마 안 있다가 오셨나요?) 그게 해방되고서 나오셨죠. (북간도댁이라고 해서 의병운동에 참여해서 그런가 했었어요) 아냐, 그런 지원을 못하지. 어려워서 가신 거니까. (중국어도 하셨겠어요?) 몇해 못 사셨었어. 나와서 몇 해 안 있다가 돌아가셨어. 지금은 당숙이 돌아가시고, 당숙모가 혼자 계세요. 지금은 영세민으로 되어 있어요. 어렵죠. (그럼 친척들이 돌봐 주시거나) 우리가 이웃에 있어도 돌봐 줄 능력이 없고, 어려우니까 정부에서 지원을 받고 있어요. 그래도 앞, 뒷집에 있으니까 살림을 하다시피 하죠. (계속 돌보거나 그런 건) 그렇죠. 경제적으로 도움을 못 드려서 걱정이죠.
- 혼인
(혼인은 언제 하셨어요?) 61년도. 5.16 혁명 나고 3달 만에 제대했는데 그 이듬해. 그러니까 62년도에 했구나. 62년도 12월. 섣달. 양력으로 1월 쯤 됐을 거야. (중매 결혼하셨어요?) 네. 저 서면이요. 서면 월송리. 용인이씨. 이영숙. (나이 차이는?) 2살 아래. (누가 중신을 서주었나요?) 사돈집에서. 우리 고모의 시아버지가. (서면에서 시집오신 분들이 꽤 있었나요?) 서면에서 온 사람은 별로 없고요. 여기서 서면으로 간 사람은 많죠. 류변호사댁은 서면에서 왔어요. (광판리 서씨네와도 결혼 많이 했더라구요) 서씨네도 저기 노인회장네집 몇 사람이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모곡에서도 많이 오고) 정씨, 김씨 다양하죠. (서면까지 결혼하러 어떻게 가셨어요?) 그때는 저 광판으로 돌아오는 신작로가 있었어요. 단일로가, 마이크로 버스인가 조금만 거 그걸 이용을 했어요. 구식으로. (신부는 바로 우귀하셨나요?) 그때는 신혼여행이 없었으니까 대례 지내고 그날로 바로 왔어요. (신랑은 와서 잡혀가서 신랑국수 먹어야죠) 옛날이니까 장난이 심했던 때지. (잿봉도 맞으셨어요?) 잿봉은 안 맞고 콩봉지는 맞았죠. 그때는 12월 눈이 오는데 재로 하면 옷을 다 버리니까 어른들이 뭐라고 그러셨는지 몰라도 잿봉질은 없었어요. (신방 초야 때 제대로 못 자잖아요) 그때 손님들 와서 집에 손님들 버글버글하는데 잠을 어떻게 제대로 자요. 지금은 여행 간다고 하지만, 외지에서 온 손님들이 집에서 다 자야하니까 잠이 옵니까. 잘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장난들도 하는 거고.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2남 2녀요. 아들 2, 딸 2. 첫째가 아들, 둘째 셋째가 딸, 막내가 아들. (처음에 아들을 놓으셨어요. 자녀분들은 다 출가하셨나요?) 아들 2은 가고, 큰딸도 가고, 그니까 3째 딸 개가 안 갔어요. 43인데, 저 서울 의료보험조합에 다니다가, 나와서 자기가 뭐 하겠다고 하는데 안 되고, 지금 안 가고 있어요. 안 간다는 걸 어떻게 해. (걱정되시겠어요) 걱정되지만, 이제는 지쳤어요. 이제는 나이가 들고 하니까, 도 자신이 없는지, 지 사업은 제대로 안되고 하니까 그냥 있어요. (자녀분들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큰 아들은 교육 계통에 있고, 딸 하나는 서울로 시집갔고, 막내는 여기 한화제약에 용인에 있을 적에 들어갔어요. (그럼 아직도 용인에?) 여기로 오면서 같이 왔죠. 걔는 인제 월요일에 출근해서 금욜날 저녁에는 지집 용인으로 간다구요. (평일에는 있다가 주말에는 자기 집으로 가는) 갔다가 월욜 아침에 출근하고. 그동안에는 우리집에서 자죠. (평일에라도 가까이 지내니까 좋으시죠?) 없는 거만 못하죠. 갔다가 저녁에 와서 자고, 금욜에는 지 집에 가는데 뭐 돈 받을 것도 없지 뭐. (약간 귀찮으신가 봐요)
- 한화제약 이주 관련
내가 걔가(막내아들) 용인 있을 때, 그 사장이랑 잘 알기 때문에 또 그 사장이 여기로 놀러 자주 오다 보니까 회사를 여기로 옮기게 됐어요. (한화제약이 그래서 여기로 온 거네요) 제가 근 한 20년 전부터 사장을 알고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여기로 회사를 옮기고 싶다 그래서 여기로 옮긴 거에요. 그 사장이 한 달에 한 번씩 놀다 오다 보니까 좋다고 해서 결정을 내린 거죠. (부지 매입을 도와 주셨겠네요) 그건 제가 다 했죠. 처음에는 후동, 발산에다가 부지를 확보해놓고 옮길라고 했는데, 막상 그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거기를 포기하고 여기다 확보를 한 거야. 그걸 그냥 놔두고 확보한 거야. (초복에는 한화제약에서 복놀이를 시켜주더라구요) 처음에 이사와가지고서는 추석이나 구정 때 조그마한 선물을 돌렸어요. 사과 등의 과일을. 그게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냥 하루 잡아 1,2리 주민들 모아 놓고 음식을 대접하는 게 좋지 않겠나 해서 그렇게 시작했어요. 먼저는 선물을 돌렸었는데. (한화제약에서 마을을 후원하거나 찬조금을 내거나 하진 않나요?) 특별한 찬조금은 글쎄요. 2리의 경우 연 천만 원을 개발금으로 줘요. 일 년에 천만 원씩. 마을발전기금으로 술 먹으라고 주는 건 아니니까.
-마을사업
(새농어촌건설운동으로 5억 타셨다면서요?) 현찰 주는 건 없구요. 그거는 전부 농기계니 등 등 이런 걸로 지원하는 거지. 있다 하더라도 다 썼고. (한우 소 키우는 데도 있던데요) 네, 그런 거 뿐이야. 소 키우는 건 그 조건이 아닐텐데. 그건 작목반지원으로. 공동사업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지었는데 잘 안되니까. 지금은 잘 운영이 안 되고 있어요. 지원받은 건물이기 때문에 맘대로 뜯어내지도 못하고. (마을 개발위원으로 활동하셨나요?) 남면 번영회원으로 활동은 했지만, 개발위원회는 제대로 조직이 안 돼 있어요. 한화제약의 경영고문을 맡고 있어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제가 전문적인 경영을 아는 사람은 아니고, 여기로 와야 하는데 부지확보를 해야 되서 경영고문을 시킨 건지. 그리고 마을과 관련하여 민원 같은 게 있으면 도와주고.
- 의병 활동, 산악대 활동
(의병활동을 한 조상이 있나요?) 우린 없어요. 의병이라는 것이 넉넉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도, 진짜 어렵게 지냈지만 참여할 수가 없어요. (실제적인 활동뿐 아니라 주민들이 식량이나 도와주는 그런 지원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런 거야 있었겠지만, 큰 테두리 안에서 그런 걸로 의병활동을 했다고 할 수 없어요. (마을 분들이 도와주고 눈감아주고 그런 것이) 그런 건 다 합심해야 되지. 여기 살면서 그런 거 안 하면 말이 되나. 뚜렷하게 지원이나 참여는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는 여기 사는 사람은 다 같이 참여했는데 다들 뚜렷하게 하지는, 만주 가서 같이 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조금씩 쌀이나 모금은 다 같이 했긴 했죠. (의병으로 유명한 마을에 대해 그리고 일가로서 자긍심이 있을 거 같아요) 그렇죠. (의병마을로 특색화 되는데 이런 점에서 앞으로 마을이 어떻게 개발, 발전되었으면 좋으시겠어요?) 여기가 아무래도 충절의 고장, 류인석 장군의 묘역이 여기에 있고, 그리고 이 사상을 본받아서 6.25때 산악대가 조직됐었어요. 여기 인민군 패잔병들이 몇 천 명씩 가는 건 다 분산시키고 여기서 수 백 명이 죽었어요. 그리고 9월 달에 수복 되서 춘천경찰서에서 인민군총, 국방군총 총기류를 한 차로 이빠이 실어 나갔어요. 그만큼 인민군이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니까 여기 사람들이 그 의병정신을 살려가지고 6.25사변 정치권에도 저 은행나무 밑에서 대낮에 태극기를 달고 있었다고, 몇 사람씩 몇 사람씩 가는 거를 점심 먹인다고 방에다 끌어다 놓고 총 뺏고 한 것이 계기가 돼서 산악대를 조직해서. 그 만큼 일 개 사단이 지나가도 여기를 못 건드리고 그냥 갔어. (산악대는 언제 조직됐나요?) 6,25 사변이 나 가지고 한 7,8월 쯤 양력 8월 쯤 그때 인민군이 저 부산쯤 내려갔을 적인데. (활동인원은) 그렇게 되니까 이 근방 가평 등에서 그런 청년들이 따라와 가지고서 한 50명이 됐다고. 여기가 그렇게 조직이 됐다고 그러니까 젊은 혈기 있는 사람들이 따라온 거지. 그 지금 혜상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총기류를 실어간 다음에, 가평 남이섬 옆 방하리 가면 거기다 화적한 사람들 비를 세운다 그런 걸 뺀다고 했거든. 왜냐면 이다음에도 6.25 사변 같은 게 또 있다고 하면 우리집안 다 죽은 건 아니냐 해서 그 양반 뺏다고. 그만큼 여기서 대단했기 때문에 여기 사람은 못 건드리고, 저 넘어 사람은 죄 죽이고 그랬다고. 패잔병, 지방 빨갱이. 이게 다 류인석장군의 기를 받았다고 판단해도 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럼 의병활동의 정신을 이어 받아 한국전쟁 때 산악대 활동을 한 것도 재조명을 받았으면 하신다는 의견이시죠?) 그렇죠. 그건 뭐 지금 다 아는 데도 그건 평화가 안됐으니까 여기 사람 다 전멸당한다고 기록에 남기지 말라는 사람도 있으니까. 내가 생각할 적에는 류인석 장군의 그런 정신을 이어받지 않았냐하는 것이지.
(공직생활 당시 가정리 모습을 잘 아실 거 같은데, 그 당시 모습을 말씀해 주세요) 그때는 행정구역이 춘천시이지만, 생활권이 가평이에요. 춘천에 가려면 70,80리를 걸어가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전부 고개 넘어 배타고 가평으로 다녔어요. 곡식을 팔거나 사오더라도 전부 가평이에요. (중고등학교도 가평으로 많이 다녔다고 하시더라구요) 중학교도 가평인데, 여기 발산 중학교가 생기면서 여기 있었지. 배타고 가지 않아도 걸어가도 가평이 가까워요. 춘천을 갈래도 강촌까지 가서도 기차를 타고 가야하고. 그때는 촌사람이 시내 가서 잘라면은 친척집이나 찾아갔지. 여관에 잘 형편도 안 되고. 여기가 정지정리가 83년도에 됐는데 그 전에는 참 빈약했어요. 물이 부족해가지고 농사를 3년에 한 번씩은 물으다 시피했어요. 83년도에 저수지를 막으면서 농사짓는데 편리하게 됐고. (그 이후로 논농사 많이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전에는 다 밭이고 무슨 밤나무 밭이고 다 그랬어요. (밤나무가 많았다고 하시더라구요) 이 앞이 전부 밤나무 밭이었어. (왜 여기는 밤나무가 많았나요?) 물이 없어 논은 안되고 그러니까 밤나무를 심은 거지. 특이하게 밤나무가 무슨 유래가 있어 그런 건 아냐. 물이 없으니까. (밤을 갖다 팔고 그러신 거에요?) 아유 그럼. 밤을 가을에 되면 여기 배로 몇 배씩 나갔는데. (밤나무 말고 다른 부업거리는?) 여기는 밤 아니면 잣. 지금도 잣나무 많잖아. 근데 지금은 따도 맞지 않아. 인건비 비싸고 외국에서 들어온 싼 잣이 있어 안 맞아. 예전에는 전부 잣 땄지. (겨울의 일거리는?) 겨울에 여기는 거리가 있으니까 무얼 해도 안 되고, 천상 산판 밖에 없었어요. 숯가마 하고. (쟁골 약수물에 갔다 왔는데 거기 올라가는 데도 숯가마터가) 거기 많았죠. 나무를 갔다가 해도 산에서 져 내려 마차로 강가까지 끌어다. 강에서 물이 오염이 안 되서 그런지 얼음이 이렇게 얼었어요. 그럼 청평까지 바이구로 싣고 가는 거야. 거기선 서울까지 차로 실고 가고. (얼음위로 싣고 갔어요?) 그럼요. 그렇게 해도 상관없었죠. -류연훈) 요즘도 박암리 그쪽은 어는데, 청평 쪽은 안 얼어요. -류희만) 물이 오염이 되면 안 얼어. (마을에서 산판하는 이들이 많았나요?) 목상이 몇 사람 있죠. (목상이 돈을 많이 벌었다든데) 많이 버는 건 뭐. 크게 하는 사람은 많이 벌고, 적게 하는 사람은 적게 벌고. 그 만큼 조건이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야. 나무고 숯이고 저 산꼭대기서 하는데 그걸 평지까지 져 내려야 하는 거야. 우마차로 강가까지 운반을 해, 그리고 강가서 다시 숯 같은 것은 얼음에 발로 밀고 나가, 청평까지 밀고 나가고. 큰 나무 원목들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여름에 강에 뗏목 보셨죠, 그렇게 엮어서 청평까지 타고 나간다고.
- 주막거리, 가정리 5일장
(예전에도 이쯤에 사셨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13대 할아버지서 계속 여기서 산 거야. (이사 안하시고?) 조금. 한 동네서. (여기에 주막거리도 있었대요) 옛날에는 교통이 불편해서 주막집도 몇 집 있었고, 5일장도 섰었어요. (여기서요?) 5일장이 섰죠. 5일장 그게 6.25사변 난 후로 없어졌어. (장이면 여기 인근 사람들 다 모일 거 아니에요?) 대부분 소. 우시장이 있으면서 잡상인이 들어오지. 주로가 우시장인데, 잡상인들이 옷이니 등등 이런 데는 부식을 사도 가평으로 가야 되잖아. 지금으로 말하면 옛날 고등어, 새우젓, 짜서 썩지 않는 거나 오지 상하는 거는 못 들어오고. 여기서는 촌에서 팔게 있나, 계란이나 닭이나 그런 거나 팔고. 가을에는 밤, 잣, 대추. (대추도 많았어요?) 네. 주로 장이 소야. 소 팔고, 사가고 5일장이니까 하루는 여기, 다음은 여기 장사꾼이 삥삥 도는 거야. 거기서 생활용품 오는 사람도 있고. (광판리도 그랬죠?) 여기하고 광판하고 모곡 고기 돌면서 시장이 열린 거야. 여기서 생산 안 되는 건 오죠. (여기가 굉장히 번화가였겠어요) 우시장이 지금 게이트볼장 고 밑에 고기에 섰었어. 거기가 소나무밭이었어. (왜 6.25이후에 없어졌어요?) 교통이 편리해지면 자연히 안 되죠. (춘천하고 생긴 도로가 언제 생겼나요?) 제가 장개 갈 때 62년도인데, 한 58년도. 그때는 저 광판으로 군자리로 돌아가는 데 쓰리고다 댕긴 거야. 거기다 사람을 태워 다닌 거야. 그리고 여기 강변에서 여기 마을 들어올 때 차가 겨우 들어왔어요. 위험했어요. 그래서 가정3리 류증상이라는 사람이 사변 전에 군인을 갔어요. 공병대 상사로 있으면서 그 양반이 공병장교를 갔다가 (도로를) 넓히기 시작 한 거야. 그래서 여기서 공적비를 세워줘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 특무상사, 특무상사 그랬어. 그 양반하고 발산리 연승이라고 겸해서 비를 세울라고 하는 거야. (그분은 왜?) 그 사람이 추진을 해서 다리를(충효대교) 놓은 거야. 그래서 류증상씨 공로비는 가정리, 박암, 관천 다 해서 할려고 해요. 그 사람이 뚫기 시작해서 완전치 않아 정부에서 한 건데, 처음으로 그걸 한 거니까.
(특기가 있으신가요?) 소리를 잘 하면 여기 있겠어요? 전 그런 특기는 없어요. (대필을 해 주신다거나) 그럴만한 것이 요새는 없어요. 그냥 여기 있으니까 게이트볼이나 치고. (잘 치세요?) 한 10년 됐고. 제가 춘천시 공무원으로 있을 때는 춘천시 대표로 국궁을 저 태백 원주 동해 삼척 강원도 대회 할 적에 그렇게 다녔죠. (어디서 배우신 거에요?) 춘천시에서 (여기서도 국궁 가르치잖아요) 그건 적어요. 애들용이라서, 원래 규격은 145m야. 춘천시에서 운영하니까 시에서 불러서 우리를 가르킨 거지. 한 5,6번 댕기다가 그래도 퇴직하고 나니까 그만이지. 뭐 댕기나. (성적은?) 한 중치는 갔을 거야. (도체전에도 참가하나요?) 도 체전에도 하긴 하는데, 국궁이라는 게 별로 없잖아요. 각 시군에 국궁장이 하나 밖에 없어요. (따로 대회를 마련하는 거에요?) 그렇죠. 강원도. 전국대회는 못 나가 보고. (상장 받으신 게 있으세요?) 받은 게 없어요. 그리고 시 대표로 참여한 거라 받아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아니지. (당시 찍은 사진 남아있는 거 있으세요?) 없을 거에요. 벌써 96년도에 퇴직했으니까 15년이나 됐잖아.
(옛날 가정리 마을 사진 찍은 거 가지고 계신 거 있으세요?) 그건 찾아봐야 알지 알 수가 있나. 내가 저녁때 찾아봐서 있으면 저 사람(류연훈)한테 줄게. 내가 찾아보면, 내가 사진 하나 간직하고 있는 거는, 지금 충의대교 밑에 보를 폭파하는 걸, 그때 면에 있을 때인데, 폭파 시간을 알아서 강 건너에서 그걸 찍어 놓았어. 그냥 터지는 걸. (주일당 있는데요?) 충의대교 있는 데서 돌아오는 바로 고기. (사진기를 갖고 계셨어요?) 옛날 거. 그때 올림푸스인가 일제 그걸 누가 사우디 간 사람이 하나 사다주더라고. 그걸로 좀 찍었지.
(마을의 발전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마을 발전이라면 범위가 크니까,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거고.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한계가 있는 거지. 우리 가정리만 받아서도 안 되는 건데. 여기 충절 충효의 고장 명맥을 이어받을 라면 거기에 따라가는 그런 게 있어야 되는데, 저는 남기우(남기호?)가 있을 당시 의병 마을을 활성화시켜 발전시킨다고 했는데 남기우가 나간 뒤로 어찌 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의병마을 이사로 되어 있었어요. 특별히 하는 건 없었어요. 근데 좀 아쉽다고 이왕에 의병마을의 집도 한옥 같은 거 그렇게 수억 수 십 억씨 들여서 그거 지금 뭐, 뜻 깊게 하는 게 없어요. 그게 자금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 만큼 시설을 해 놓고 한옥을 몇 채씩 지어놓았으면 무언가 활용을 해야 하는데, 물론 예산이 뒷받침이 안 되서 그러는 지 몰라도 좀 아쉬운 그런 게 있어요. 물론 제대로 된다고 하면은 각 시군에 학생들이고 사회단체들이고 와서 교육하면서 2박3일 1박2일 정도 하면서 여기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아쉬운 게 많아요. (마을과의 연계관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쎄 특별히 생각이 안 나는데. 그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유적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을의 소득과 연계가 되면 좋은 데요) 마을의 소득이. 소득이라 하는 게 참 어려운 것이죠. 소득이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서 각 초중고, 사회단체 연수 같은 걸 체험활동을 여기서 2박3일 정도 했으면 하는, 그렇커먼 지방에 사람이 많이 들어오면 숙박시설도 생겨야 하고 음식점도 생겨야 돼서 소득이 늘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의병마을을 저렇게 지어놓고는 있지만 실효성에서는 아쉽다는 생각이 있다.
-사냥
(겨울에 사냥 같은 건 안하셨어요?) 사냥은 한 7-8년. 그니까 1994년도 가 엽총을 하나 사서 좀 따라 다녔어요. 2002년도부터 의원생활을 하면서도 한 2년 댕겼는데, 그때 한 번 말썽이 생겨서 그리고 몸도 좋지 않고 해서 그냥 없애버렸어요. 그때 의회에 등원기간인데 산돼지가 나왔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없어서 갔는데 그게 어떻게 발각이 되더라고. (마을 분들도 사냥을 하셨어요?) 여기 오늘도 해요. 마을에 돼지가 내려와서 옥수수니 고구마밭을 망가뜨려서 어제 오후에 왔다가 안 돼서 오늘 또 왔어요. 이건 정식으로 허가 난 것이 아니고 엽사 자격증 있고 허가증 난 사람에 한 해서 농촌에 농작물 피해 예방 차원에서 허가를 임시로 내주는 거야. 오늘 아마 잡을 거에요. (피해가 많은 가 봐요?) 저기 해용이, 해룡네가 신고해서 왔는데. (농작물 피해는 시에서 보조해 주나요?) 근데 보조해 주는 만큼 피해를 보는 게 아니고, 옥수수니 고구마 밭 좀 망가뜨렸다고 보상을 해줄 수 없어요. 아주 피해가 어느 정도 얼만큼 되느냐 그 한계가 있어요. 일단 그걸 줄이기 위해서 면에서 엽사들한테 너는 어디 어디 몇일까지 하라는 허가를 내 줘요. (잡으면 엽사들이 갖고 가요?) 갖고 가죠. (마을에 주지 않고요?) 많이 잡으면 모를까 그냥 가져가요. 그게 비용이 남아 납니까? 개도 몇 마리 끌고 와야 하고, 개 없으면 못 잡아요. 옛날에는 사람이 하는 건 개가 하지. 지금은 뜨거워서 사람이 못 해. (전통적인 사냥은 있었나요?) 옛날에 있었는데, 그 뒤로다가 6,25 사변 나고서도 있었어요. 매 사냥을 많이 했는데 근래 와서는 안 되고. 다 노인네들 있을 때인데. 내가 알기에는 사변 나기 전에는 많았죠. 매를 붙들어다가 매를 키우고. 희철네, 보문댁, 상가댁 세집에서 계속 했는데. 그때 시절이지 지금은 못해요. 매도 못 붙들고 서넛이서 쫓아다니다가 꿩이나 몇 마리 잡으면 뭐합니까. 그리고 지금은 매사냥을 할 수가 없는 게 초목이 우거지면 안돼요. 옛날에는 화전해먹고 그래서 풀밭이고 그랬는데 꿩이 저 속으로 쑥 들어가면 매가 못 쫓아가지. 그건 재미야. (당시 멧돼지 사냥은?) 그때는 할 수 없었어요. 당시 딱 한 집이 총이 있었는데. 지금이니까 총이 있으니까 그때는 멧돼지 사냥한다면 올무나 놓았지. 주로 매 사냥. 삼뜯기 하는 거 아냐. 매는 꿩 뜯고, 가시덤불은 바지 뜯기고, 집에서 마누라는 울타리 뜯고, 맨날 매사냥 쫒아 다니다가 나무도 안 해오니까 울타리를 죄 뜯었다는 거야. (잡아서는 어떻게 해요?) 몇이서 잡아서 벗겨서 술안주하고 그러는데 소득이 되는 건 없고 그냥 노는 거지. 지금처럼 총으로 하루 10마리씩 잡는 다면 팔아먹겠지만 하루 잘 해야 2,3마리 잡는데.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우리는 입담이 좋지 않고. 류연오씨 한테 가서 하세요. 그 양반은 우리 아는 요 만한 거 같다가 이렇게도 만들고 워낙 아는 것도 많아요. 그 양반이 지금 일흔일곱인가 여섯인가 하는데 그 나이에 이 촌에서 4년제 대학교 나온 사람은 이 양반밖에 없어요. 이 변호사 같은 양반은 나가서 출세를 했으니까 그렇지만, 4년제 대학 나와서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은 그 양반 하나라고. 지금은 강대지만 그때는 농대지. 그 집안에서 모아서 다 소 팔고 그래서 대학을 시켰는데. (학비를 마련할 때는 소밖에 없었네요) 그렇죠. 소밖에는 없어요. 집안에서 다 모아서. 그 양반이 잘 풀려야 되는데 옛날도 지금도 똑 같지만 선거 때 학생들이 참여는 했는데, 너무 부정선거를 했으니까. 쫓겨 댕기다 보니까. 이력서 넣으면 무조건 빠꾸야. 이거 집주인 사촌도 같은 나이에 농대를 다니면서 선거 때 하도 부정선거를 하니까 이걸 참여하다 보면은 학교에 형사들이 잡으러 댕기고, 취직을 하려고 이력서 내면 무조건 서류에서 빠꾸야. 할 수 없이 군대에 갔지. 근데 연오양반은 초야에 묻혀있는 거지. 그러다 보니까 나이가 찼는데 여느 놈은 과장급 됐는데 말단으로 갈수 없으니 영영 못 간 거지.
- 한국전쟁 이야기
(어렸을 때 재미난 사건이나 이야기 좀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는 그런 건. 육이오 사변 나서 난 쫓겨 댕기다가 볼일 못 봤죠. 전 그때 장손이라고 그때 13살이에요.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너는 살아야 된다고, 노인네들 어머니 남겨놓고 우리 아버지가 나만 데리고 피난을 나갔어요. 그래서 13살에 이불보따리 들고 다녔어요. 저 밑으로 가서 포위당하고 그 산으로 밤길을 가고 그러면서 저 경상북도 김천까지 갔어요. 거기 가니까 쌀 떨어지고 돈 떨어지니까 어떻게 해 우리 아버지는 수단이 없는지 몰라도 밥을 얻어 와야 하는 게 못 얻어 오시더라고. 내가 낫겠지하고서 13살 먹은 놈이 옷도 뭐 바지저고리 다 떨어진 거에 모자 하나 쓰고 냄비 하나 들고서 그냥 마을을 도는 거야. 일치감치. 강원도에서 피난 나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구걸을 나왔다고. 답하기 전 일찍이니까 이따 올테니까 밥 좀 달라고 하면 아유 조그마한 게 멀리 나와서 고생한다고 이따 와서 받아 가라고. 근데 그게 한 두 사람이 아니란 말야. 내가 그러고 있다 나가면 또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그렇게 한 바쿠 빙 돌아서 20집을 돌면, 20집을 돌아야 요런 냄비로 하나 돼. 피난민이 하도 많으니까 그 사람들 탓할 수도 없어. 한 바쿠 돌아서 그 집으로 가면 아이고 고생이 많네 하며, 자기 먹던 밥그릇에서 숟갈로 조금 떠 주는 거야. 거기다 김치 하나 놔주고. 그래서 집에 와서, 그때만 해도 집을 어디 가서 얻어. 피난민이 하도 많으니까. 부엌 옆에 소 기르는 집이에요. 그냥 거기서 짚 깔고 지내는 거야. 거기 앉아서 아침 먹구선 이게 돈이 있으면 거기서 또 묶어서 쉬고 가는데, 얻어먹어야 하니까 거길 또 갈 수 없으니까 매일 이동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그 이듬해 5월달까지 하여간 매일 안 댕기 데가 없지. 경상남도, 전라도, 충청도로. 비가와도 가야 하는 게, 또 가서 달랠 수 없으니까, 갔던 집에는. 그렇게 해서 그 이듬해 여기에 4월 달 인가 보리가 누랬어. 아군이 국방군이 들어오자 그 이튿날에 바짝 따라 들어왔어. 와보니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어머니하고 할아버지하고 계시더라고. 그때는 애들이 없고 나 혼자야, 다 실패보고. 그렇게 고생하고 들어 왔는데도 나가서 괜찮더니, 들어와서 맥을 놓더니만 그 마이라, 전염병에 다 걸리더라구요. 들어오면서 중공군이 말 타고 와서 댕기는 걸 비행기가 기름을 뿌리고 폭격해서, 그 죽어서 썩는 거 그걸 그렇게 많이 봤는데, 거기서도 전염이 안됐는데, 집에서 막상 드러누우니까 병이 걸려서, 와 먹을 게 있나. 먹을 게 없으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 전해에 보리 갈아 놓은 게 있으니까, 보리 누렇누렇한 것을 가서 지게에다 한 짐 지고 와서 부지깽으로 떨어가지고. 보리가 바짝 말랐으면 상관없는데 푹푹 퍼진다고, 그걸 가마솥에다 넣어 불을 떼서 볶더라고. 그리고 절구에 찧어서, 맷돌에 이렇게 타. 그걸로 죽을 쑤우시더라고. 지금 내가 그걸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근데 그걸 먹고 낫긴 나았어. 나는 그렇지만도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하고 나하고 들어 누었는데 그걸 베다가, 볶아서, 찧어서 타서 죽을 쑤어주니, 참 지금 사람들 이야기하면 곧이 안 들어요. (당시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 해에 많이 죽었죠. 음력으로 6월 9일날인가 제사가 많아요. 그때 많이 돌아갔어. 먹을 건 없지, 염병은 들어 왔지, 약이 있수 뭐가 있수. 재수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고. (그날에는 곳곳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겠어요) 그리고 여간 지저분한가. 여기도 이 버덩에 집이 없었어요. 다 탔는데, 비행기가 폭격해서 소, 돼지 죽은 것들 그냥 갔다, 썩고 여기도 이런데 다니다가 보면 신발이 요 이렇게 뵈어. 그럼 나무를 깎아다 써놓았는데 보면 전부 중공군이야. 근데 개들은 죽으면 산 밑에 갔다가 묻는데 꼭 발을 내 놓고 묻어요. (그러면 다 썩어지고 말았겠네요) 썩었죠. 근데 중공군은 안 찾아가 다 썩었죠 뭐. 육이오사변 때 산악대가 인민군들이 열 댓명이 가면 거기서 산악대에서 활약한 인민군이 있었어요. 그 패잔병이 있는데 소위야. 여기로 하자면 간부 ROTC 같은 사람이야. 그 사람을 붙들었는데 나이가 19살이야. 하도 어린데다가 불쌍해 보여 살려줬더니, 인민군 복장을 입고서 우리 산악대랑 같이 있는 거야. 패잔병 한 열 댓 명 지나가는 것을 여기 점심해 놓았다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간다고, 인민군 장교의 복장이니까, 방에 들어가면 안에서 산악대 사람들이 총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렇게 잡아서 총을 그렇게 많이 모았다고. 그 인민군을 저수지 있는 골짜구니, 짐승 잡는 녹장 함정에 그 10명을 끌고 가서 파라고 하고, 저들 들어갈 구멍 파라는 거지. 거기 한 곳에 열이고, 스물이고 그냥 묻었다고. 한국군이나 미군들은 유해발굴을 하지만, 여기 사람인데 자기 부인이 암에 걸렸어, 근데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뼈를 갈아 타서 먹으면 낫는데 해서 마누라 살릴라고 이 양반이 80넘었는데, 대낮에 파서 비료 포대에 잔득해서 개울에 내려온 거야. 집이 저 공동묘지 조기 있어요. 거기다 파묻어 놓는 거야. 밤이면 가서 몇 개씩 파는 거야. 그렇게 해서 죽을 쒀 줬는데, 그렇게 정성껏 했지만 죽긴 죽었어. 밤에 그 공동묘지 가서 뼈를 한 웅큼갔다가 빻아 먹였는데. 내가 지금 닥치면 할런지, 참.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니까 그렇게 하면 낫는다 그랬는지 몰라도. (많은 뼈들이 묻혀 있네요) 많아요. 인민군의 총을 트럭으로 하나를 실어갔는 데요. 인민군 다 갖다 산에다 한 군데다가 다섯이고 열이고 그냥 묻었는데. (산악대에게 정부에서 증서를 준다던가 하는 건?) 그런 건 없었구요. 책으로 기록되어 나오고 비를 세운다는 거를 류혜상씨는 자기는 빠진다고 했다고. 이런 사변 같은 일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비는 어디에 있어요?) 방하리 언덕 길가에. (그때 여기서 활약했던 분들) 거의 다 있죠. (활약상에 대해 기록한 책자도 있나요?) 그전에는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몰라요. (춘성군수가 세워준) 네. 거기 사람이 하루 저녁에 제사가 20,30명 될 거 에요. 홧김에 빨갱이들이 와서 죄 끌어다 남이섬에서 총살시키고. (어렸을 때 기억이지만 잘 안 잊어지죠?) 그렇죠. 하도 지겨우니까 그런지 그건 안 잊어버리고. 우리는 13살이니까 산악대 쫒아 다니면서 인민군 패 죽이고 그런 것을 밤나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구경하고 그랬으니까. 내가 13살 먹고 포위당해서 경상도로 피난 다닌 거 이야기하면 우리 손자들은 씨익 웃고 말아. (웃음)
(갔다 오니까 초등학교 졸업장은 나와요?) 여기는 한 해 묵었어요. 다시 6학년을 다녀서 졸업장을 탔지, 그해에는 없어요. (몇 살 때 졸업하셨어요?) 14살 때. -류연훈) 14살은 빠른 거야, 저 형님 동창은 몇 살이나 더 많은 사람도 있고 그런데. -류희만) 4살이나 더 먹은 사람도 있고. 그때 박암리나 저런 데는 요기 초등학교 오려면 어린애는 못 오잖아. 그럼 10살쯤 먹어 학교를 들어온다고. (어떤 분은 나이가 너무 많아 중학교를 진학 못하셨다고) 그때는 관계가 없을 텐데, 지금은 안 되지만. -류연훈)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연식댁 아저씨. 그 아저씨가 나이 많아 못 댕겼어. -류희만) 군인 갔다 온 사람도 댕기고. 현역군인이 군복을 입고 댕겼는데. (인공치하 됐던 적인 얼마 안 되네요) 육이고 사변 나고서 한 댓달.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가정집에서 자고 가고 그러지 않았어요?) 여기서 잘 수가 없는 게, 점심 먹으러 들어왔다가 다 죽었는데, 그 소문이 나니까 그래서 여기를 지나갈 때는 한 둘이 안 지나가고 몇 백명 씩 지나간 거야. 점심도 안 먹고. 그래도 산악대원들이 논둑에 숨어서 들이 총을 쏴서 풍비박산을 만들고 그랬다고. 농사짓던 사람들이 총 쏘는 것도 전술이라는 것도 모르는데. 그렇게 소문이 나니까 시시한 수십 명씩은 안 오는 거야. 돌아가지. 그리고 점심도 먹을 수 없고. -류연훈) 그래서 여기 마을이 쑥대밭이 될 수 있었다는 게 그 이야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