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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 사교춤 예찬
2) 원초적 가족
프로필 : 이 용 주 (만정)
전 대구전신전화국장
현 대경상록아카데미 수필창작교실 회원
사교춤 예찬
이 용 주 대경상록 아카데미는 공무원 연금공단 대구 지부가 창설한 상록봉사단이 운영하는 교육기구다. 대구 경북 소재 퇴직공무원을 대상으로 30여개 과정의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나는 지난달부터 이 아카데미 스포츠 힐링 반에서 스트레칭을 비롯하여 라인댄스와 사교춤을 배우고 있다. 스트레칭은 스포츠의 컨디셔닝과 상해 방지를 위한 준비운동이며 라인댄스는 특별한 파트너 없이 앞줄과 옆줄의 라인을 만들어 추는 선무(線舞)이다.
사교춤은 남녀가 짝을 지어 사교의 목적으로 추는 대중 춤이다.
우리 아카데미의 교육 목적은 자원봉사자 양성이다. 수강생은 배운 것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배운 것을 토대로 사회에 봉사하라는 뜻이다.
나는 스포츠 힐링 반에서 배운 것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봉사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먼저 스트레칭은 춤을 추기 전의 몸 풀기 운동으로 간주하여 제쳐두고 라인댄스를 생각한다. 체육 적 요소가 강해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다. 다음 사교춤을 생각해 보니 체육 적 요소 외에 사회적 기능이 많다. 여기에는 내 봉사의 손길이 닿을 곳이 있을 것 같다.
요즘 거리의 화두는 소통이고 정부에서도 소통과 화합을 강조하지 않은 부처가 없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가 관장하는 문화융성과 문화가 있는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한국사교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사교춤은 음악과 율동으로 우리에게 여가생활을 즐겁게 해 준다.
그리고 이성간의 스킨십에 따른 예절을 가르치며 파트너와의 하모니를 위해 상대를 배려하고 협동하는 습성을 기른다. 또한 사교춤은 소통과 화합의 통로가 되어 건전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근래에 와서 정부는 소통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여러 행사를 주관하면서도 사교춤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어쩌다 행사에 참여하게 될 때도 라이프댄스라는 이름으로 참가한다. 이와 같이 사교춤을 홀대하는 것은 당국이 사교춤의 사회적 효능을 몰라서가 아니라 일부 사교춤을 백안시하는 편견을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교춤은 서양처럼 궁중이나 고급 사교장에서 품격 있게 발전하지 못했다. 카바레. 회관 등 술집에서 주류 매상고를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군사정부 시절에는 사회정화 차원에서 단속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낡은 관념이 남아 사교춤을 백안시하는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민의 인지와 삶의 질이 높아짐에 따라 사교춤 인구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사교춤은 경기용이나 시범용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신명이 나면 춤을 추고 춤을 추면 더욱 즐거운 인간본연의 행동이다.
이제 정부는 관망만 하지 말고 사교춤이 국민적 레크리에이션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먼저 정부가 할 일은 일상생활 주변에서 쉽게 춤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파트단지나 자연부락 단위로 공회당을 짓는다. 거기서 마을 회의도하고 잔치도하며 부부끼리 또는 이웃끼리 춤도 춘다. 지역 주민의 여가 생활의 터전이 되며 소통과 화합의 산실이 되어 국가발전에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다음 사교춤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우리 아카데미에는 요행히 사계에 권위 있는 L교수가 사교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식인이나 학교에서는 사교춤 교습을 기피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대중은 사교춤을 무용이나 스포츠댄스보다 격이 낮은 비천한 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무용은 예술이고 스포츠댄스는 운동이다. 사교춤은 사교를 겸한 오락일 뿐이다. 같은 반열에 놓고 평가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필요성을 따진다면 사교춤은 필수과목이고 나머지 춤은 선택과목이다.
봉사는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일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스포츠 힐링 반을 수료하면 미력하지만 이 땅에 건전한 사교춤 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봉사할 것이다.
그러나 춤의 일선에 나가서 몸으로 봉사하지는 못한다. 후방에서 글로서 지원사격을 할 뿐이다.
2014. 10. 9
원초적 가족
이 용 주
“ 오늘부터 신부 ○○○양은 시집인 경주 ○씨 가문의 종부가 되는 것이며 신랑 ○○○군 또한 처가인 안동 ○씨 가문의 췌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 신랑 신부는 양가 가문의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흔히 듣던 가족주의적 주례사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결혼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며 한 가족의 원초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동서고금을 통하여 결혼은 인륜의 대사로서 신중히 하라는 경구 들이 많다. 러시아에서는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도 이웃 혼사를 하려면 삼대적선을 하라 했고, 남편을 잘못 만나면 당대 원수, 아내를 잘못 만나도 당대 원수라는 속담도 있다. 이는 모두 결혼을 잘못하면 일생 동안 불행하다는 말이다.
나는 나이 서른에 결혼을 했다. 그때 우리나라는 산아제한운동이 한창이었다. 아들 딸 구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시절인데 나는 10남매의 장남이었다. 위로는 양친과 조모님이 계셨고 아래로 남동생 5명과 여동생 4명을 합치면 모두 열세가족이 한집에서 살았다. 분답하기는 하였으나 형제간에 우애가 넘쳤고 화목한 집안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아내는 나와 여섯 살 연하인데 전형적인 공무원 가정의 사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랐다.
우리부부는 결혼 전 부산 서면에 있는 경남지방공무원 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되어 6개 월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3일 부산 대청장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때 우리 집이나 처가 모두 개혼이라 격식을 갖추어 제대로 결혼식을 치르기를 바랐으나 나는 양가 부모님에게 상견례의 기회조차 드리지 못했다. 우리 둘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솔선수범하여 허례허식을 배척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처가에 대하여 10남매의 맏이인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13명의 대가족속에서 시작되었다. 아내는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장남을 낳고 4년 뒤 차남을 출산할 때 까지 5년 동안 시가에서 공무원 생활을 계속했다.
나는 결혼 후 승승장구 승진하여 남들이 선망하는 자리에 보임되었다. 이제 나의 급선무는 아내를 시집살이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나는 도청소재지 감독기관 요직에 있으면서 군 단위 일선 기관으로 전보 희망을 하였다. 좌천을 자청했기 때문에 곧 경북 북부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나는 여기서 아내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난생 처음으로 결혼식 주례를 서게 되었다. 그때 우리 부처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소속직원이 결혼하면 기관장이 주례를 서도록 권장하고 있었다.
나는 주례사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내가 결혼 할 때는 부창부수가 대세였지만 그것은 남녀평등에 어긋난다. 부부일심동체도 시대정서에 맞지 않는다. 아름답고 젊은 한 쌍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니 앞날을 축복한다고 간단히 덕담만 하고 말 것인가? 그것은 너무 성의가 없다.
무엇인가 신랑 신부에게 생활지침이 될 수 있는 말은 없을까 궁리 끝에 가화만사성이 떠올랐다. 이것은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다 잘되어 나간다는 말이다. 나는 신랑 신부에게 처가와 시가 양가 가족이 화목하도록 특단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오니 아내가 나를 철면피라고 놀린다. 가화만사성은 당신이 평소 직장 단합을 위해 직원들에게 당부했던 말이 아니냐?
신랑신부를 축하해주는 자리에서 신랑 신부 당사자보다 가족이라는 집단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당신은 철면피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아내의 예리한 지적에 놀라면서도 가화만사성은 내 소신이니 언제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어느새 30년 세월이 흘러 내가 퇴직할 즈음 우리의 대가족은 뿔뿔이 헤어졌다. 조모님과 부모님은 하늘나라로 가시고 동생들도 모두 시집가고 장가가서 독자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슬하의 두 아들도 결혼과 동시 분가해서 장남은 미국으로 차남은 서울로 떠났다. 이제 아내와 나, 원초적 가족만이 대구에 남아 있다.
아내와 나는 출생 배경이 다르고 성장환경이 다르다. 그리고 성격은 더욱 다르다. 나는 동적인데 비해 아내는 정적인 성격이다. 내가 일을 대충하면 아내가 섬세히 마무리 한다. 반면 힘들고 큰일은 내가 추진한다.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살고 있다.
요즘 성격차이 때문에 황혼이혼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부부가 성격이 다른 것은 하늘이 정한 엄연한 현실이다.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함께 살 수 있다. 만약 배우자의 성격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면 그 자체가 잘못이고 불행이다. 그리고 배우자의 성격이 나와 같도록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요. 인권유린이다.
부부는 가족의 원초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면서 백년해로 하자.
2014. 10. 31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