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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구원 |
영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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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란 |
유정란 |
구약 |
공관복음 |
요한복음 |
애굽 |
광야 |
가나안 |
세상 |
교회 |
거듭남 |
여호와 |
예수 |
그리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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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신분 |
종에서 해방 |
아들됨 |
넓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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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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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차원 |
영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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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을 중요시 |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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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로 얻어짐 |
타의로 주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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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문둥병자 |
돌아온 사마리아 문둥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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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를 잘 살펴보시면 성경이 한층 가까이 보이실 것입니다.
위 표를 보면서 성경에 입각한 증거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마태복음 족보에서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고 되어있습니다만 스알딜엘부터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까지는 13대밖에 안됩니다.
그리스도까지는 열네대요.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까지는 13대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세어봐도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까지는 13대 밖에 안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육체예수속에 그리스도라는 또다른 인격체가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육체예수와 말씀 그리스도를 구별하지 못하고 육체 예수에만 머물러서 믿습니다, 믿습니다만 외치면서 말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거듭나지 못한다면 광야에 머무는 것이요, 구원에 머무는 것입니다.
애굽의 구습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광야까지란 뜻입니다.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과 거듭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를 않습니까?
둔한 우리가 천국가는 길을 모를까봐 하나님은 보이는 역사로 이렇게 소상하게 펼쳐놓았습니다. 거듭남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롬1장20절=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것들 곧 그의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히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으로오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표현한 것이죠.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만 족보가 나옵니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를 봤기 때문에 처음부터 말씀으로 소개한 것이죠.
사람은 족보가 있지만 하나님은 족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예수는 이천년전에 부활승천 하셨습니다.
다시 오신 분은 육체예수가 아니라 성령으로 오신 말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라는 생명(영생)을 잉태해서 거듭나야만 합니다.
내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됩니다.
예전에 좋던 것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내가 거듭나지 않고는 말씀이라는 생명(영생)을 잉태할 수가 없습니다.
내속에 두 마음이 싸우겠지만 이겨야만 합니다.
성경을 장식품으로만 가지고 다니면서 입으로 믿습니다만 외치면서 인격은 거듭나지 못하고 물질축복과 육신의 욕구 충족에 따른 기복 기도만 하고 그곳에만 관심이 있다면 말씀이라는 생명(영생)이 내속에 잉태될 수가 없습니다.(씨뿌리는 비유 참조)
마음의 밭에 있는 가시 덤풀은 태워버리고 돌은 주어서 내어 버리고 흙만 있는 옥토로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영생)이라는 씨앗이 싹이 트고 잘 자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구원은 받겠지만 영생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교회 나온 것도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광야에 나온 것도 구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영생 노정의 비유입니다.
가나안복지는 새로 태어난 사람과 거듭난 사람들만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 모세는 왜 못들어갔을까요?
모세는 율법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구약)은 공간복음까지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눅16장16절=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세레요한)의 때까지요 그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일제통치 36년은 일본제국주의 법으로 이나라를 다스렸지만 해방후에는 우리의 헌법이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지켜져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본제국주의법을 지키면서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율법( 모세 오경)과 선지자(선지서)는 요한의 때까지요
너무 너무 명확한 답이잖아요?
그런데 왜그렇게도 구약을 합법화 시키면서 구약을 중요시 할까요?
그것은 목회자의 권위와 성전건축과 물질축복은 구약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생활하면서 자아가 부셔지고 거듭난자만이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우리도 교회생활하면서 구습과 자아는 부셔지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거듭나야만이 영생을 잉태해서 저천국에 갈수있다는 비유의 역사(출애굽)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영생노정의 비유로 보시면 됩니다.(롬1장20절)
심지어 육체 예수님도 그리스도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거듭 나야만이 생명(영생)을 잉태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2천년전에 요한이 그것을 보고 깨닫고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와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영생을 수도 없이 외쳤는데 IT시대인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육체예수에만 머물러 예수 구원만 외친다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교회 생활은 광야생활과 같은 비유입니다.
광야에서의 목적은 가나안땅 입성입니다.
교회 생활하는 것은 천국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천국은 살아서 생명(영생) 얻은 자는 내 속에 있는 생명(영생) 덕분에 저절로 가는 것입니다. 유정란은 숯닭의 씨(생명) 때문에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되기 싫어도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기 때문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생활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받는다니까 세상 좋아하는 내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거듭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머물수밖에 없습니다.(세상만사는 원리와 이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영생얻는것도 원리와 이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생리현상입니다.)
성경이 온통 이런 비유로 가득 차 있는데도 구원에만 머무르다 보니까 영생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있어야 보충 할려고하고
다음 노정을 알아야 갈려고 할텐데
구원이 천국티켓이라고 믿고 안주해 버리니까
영생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16세기때 마틴루터는 신부였습니다.
당시에 천주교는 면죄부를 파는등 성경을 많이 외곡시키며 잘못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신부들은 면죄부를 파는 것이 잘못 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수가 가는길이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니까요.
우리는 이 다수결의 원칙에 쇠뇌되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도 다수가 가는쪽으로 나도 가고싶은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소수의 편입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인간의 인격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은 우리와 반대되기 때문에 맞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은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체우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체우고 싶습니다.
그것은 육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육은 배고프면 먹고싶고 좋은 것 걸치고싶고 편한데서 쉬고싶고 어깨견장붙이고 뻐기고싶고
종두고 호령하고싶고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싶습니다.
이런 것 싫은사람 누구있나요?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는 다른 삶을 살지를 않았습니까?
우리와 다른 인격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심성즉 씨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는대로 표현하자면 생명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기전에 가지고 있던 그생명과는 본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생명이 바로 영생입니다.
숯닭없이 놀다가 낳은 달걀은 무정란입니다.
그러다가 숯닭하고 놀다가 달걀을 낳았드니 유정란이 되었습니다.
무정란과 유정란의 차이는 숯닭의 씨 즉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이차이입니다.
우리신앙생활도 이와 똑같습니다.
롬1장20절에 분명히 못박았잖아요?
심지어 핑계치 못할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잖아요?
둔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상을 알려줄려니까
보이는 세상을 통해 표현하신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와 맞지를 않기때뭄에 가기가 싫은겁니다.
하지만 그길이 영생얻는 길이라면 가야만합니다.
교회생활은 광야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환난받아 그듭난자만이 가나안에 입성했듯이 우리도 교회생활하면서 옛날성질 부셔져야합니다. 원수가 미워지지 않는 체험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명령하셨잖아요?
예수밑는다고 하면서 예수님명령 안지킨다는 것이 말이됩니까?
너무어렵고 힘들고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요?
열정탐꾼은 현실을 본것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본것입니다.
광야생활하면서 역사하신 여호와의 능력을 잊지않은것이죠.
예수님의 새계명도 믿음으로 지킬려고 마음먹을 때 놀라운 능력을 주실것입니다.
설사 못지켜도 지킬려고 마음먹는순간 능력을주시고 의롭다 인정해주실것입니다.
포기만 하지않으면 됩니다.
지킬 의향이 있느냐? 포기하느냐? 그차이밖에 없습니다.
선택은 내가 해야만 합니다.
암닭이 숯닭하고 노느냐?
암닭끼리만 노느냐? 그차이 밖에 없습니다.
다수가 가는길이 진리냐? 소수가 가는길이 진리냐? 를 논하다가 설명이 길었습니다.
마틴루터신부님이 당시를볼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됐다는 것은 인식했지만 다수가 그쪽으로 가니까 그분인들 혼돈이 없었겠습니까만 그분은 성경에 입각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신것입니다.
결국 마틴루터의 판단이 옳았슴은 역사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우리의 판단기준은 성경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으리라고 봅니다.
앞에서 나열했듯이 구원의 정체가 이렇게 분명한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역사는 반복됩니다.
크게는 2천년에 한번씩 변화가 있었고요.
적게는 5백년에 한번씩 역사가 일어난답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1515년에 일어났으니까 2년후면 5백년이 됩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우리 기독교도 이제는 개혁할때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이 주어지는 댓가는 첫째는 나자신이 사는길이요. 둘째는 내가족이 사는길이요.
그다음은 인류가 사는길이요. 그다음은 우리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아닐까요?
저는 신앙생활 9년차(29년전)에 새번역을 통해서 갈라디아서를 정독하면서 율법의 정체를 알게 되고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귀하도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성경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양의문은 공관복음에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너무 중요한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이 아니고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의 문이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영생에 들어가는 문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이 영이요 생명(영생)이라고 분명히 못박았습니다.
무정란과 유정란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구원과 영생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무정란이 외치기를 21일 후에 나는 병아리가 될거야 될거야 될줄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천국에 갈줄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무리 외친들 미안하지만 생명(영생)이라는 씨가 없이는 못 가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구원은 얻을지라도 영생은 잉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은 대단한 착오이며 때는 늦으리입니다.
애기를 잉태한 산모는 무조건 10달 후면 애기를 낳습니다.
순산이냐 난산이냐 그것만 걱정하면 됩니다.
남자의 정자를 받지 못한 여자는 산모도 아닐뿐더러 애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사람은 이런 여자와 같은 것입니다.
영생은 살아있을 때 얻는 것이지 죽어서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거듭나야 됩니다.
거듭난다는 말씀도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이것도 우연일까요?
성경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전부 필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말씀의 씨인 영생을 잉태해야 됩니다.
잉태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거듭나는 것입니다.
즉 육의 소욕은 버리고 영의 소욕을 가지는 것입니다.
육이 좋아하는 것은 멀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죠.
입으로 시인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연구하고 본받고 예수그리스도처럼 마음을 비우는 삶을 살라는 뜻이겠지요?
지금까지는 보이는 것을 중요시했다면,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육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이니까요.
이 대목을 소상하게 풀자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다음으로 미루고요.
예수님께서 언제 욕심을 부렸나요?
예수님께서 말타고 다니셨나요?
예수님께서 두벌 옷이 있으셨나요?
예수님께서 명예를 좋아하셨나요?
예수님께서 권력을 탐하셨나요?
예수 이름만 불러도 구원 얻는다고 하니까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행위가 어떤가요?
입으로 시인만하면 된다고 가르치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사상과 철학 인격은 관심 밖이죠. 또 내가 좋아하는 것과 너무나도 거리가 머니까 닮기가 싫은 거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려고 노력을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이 모든 게 영생을 안 가르치니까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너무너무 심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장,6장에서 옛사람에게 말한바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율법과 새계명을 갈라놓고 마태복음 7장에서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논하셨습니다.
흔히들 넓은 문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요, 좁은 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고 설교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무리 중에는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넓은 문이란? 앞에 나열한 옛사람에게 말한 바의 율법을 일컫는 것이요,
좁은 문이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한 새계명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새계명은 좁은문으로써 지키기 힘들지만 그 길이 영생 얻는 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율법은 한 가지라도 안 지키면 정죄가 따르지만 새계명은 지킬려고 마음먹는 순간 의롭다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복음이죠.
구약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열 정탐꾼은 현실을 봤지만 여호수와와 갈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본 것이잖아요? 똑같은 것입니다.
믿고 행하려고 나가기만 하면 지킬 능력을 주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법퀘를메고 여리고성을 믿음으로 돌 때 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것을 보여준 보이는 차원의 비유입니다.
법꿰는 여호와의 능력을 의미하잖아요?
신약에서는 뭡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잖아요?
예수그리스도의 새계명은 우리상식으로는 도저히 지킬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능력에 의지해서 지킬려고 나아갈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비유입니다. 부디 포기하지마시고 영생의 말씀을 잉태하는 체험하시기바랍니다.
손양원목사님은 자기두아들을 죽인자를 용서하고 양자까지 삼았잖아요?
이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할까요?
예수님 말씀은 지킬 수가 없어 하고 포기한다면 열 정탐꾼처럼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구원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생활=교회생활)
믿음의 눈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진군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에 입성할수가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은 너무 힘들고 어려워 도저히 나는 닮을 수가 없어 라고 포기해버리고 입으로만 믿습니다, 라고 시인만 한다면 구원은 얻겠지만 결코 영생은 없을것입니다.
성경은 크게 나누라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말씀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육은 보이는 것이요,
영은 안 보이는 것입니다.
돈 많은 장로님들 보십시오,
십일조는 하나님 것이니까 철저히 받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머지 아홉은 내 것이라는 해석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호화호식하며 온갖 부를 누리며 아주 잘 삽니다.
거리낌 전혀 없습니다.
입으로 시인만 해도 구원 얻는데 십일조까지 하니까 구원받고 천국까지 무조건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구원만 받은 것이지 영생은 없습니다.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지를 않습니까?
영생은 거듭나야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장로님들 거듭난 것일까요?
구원은 쉽고 간단해도 영생은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축복의 개념이 보이지 않는 인격이 기준이 돼야 성경이 풀립니다.
물질이나 명예 권세 같은 외적인 보이는 것을 축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성경은 난해절 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주권을 내가 쥐고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는 사람은 육의사람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육의 소욕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주권을 주께 맡기고 주의 인도하심 따라 가는 사람은 영의 사람 영생입니다.
내 속에 계신 말씀의 인도하심따라 사는 삶은 영생입니다.
욕심과 영생은 물과 기름입니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는 말씀이라는 영생을 잉태할 수 가 없습니다.
옛 사고는 버려야 됩니다. 내가 변화 받아야 됩니다.
거듭남이 없이 영생이 잉태되지를 않습니다.
영생은 내 뜻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면 상속이 없었습니다. 다 비유입니다.
영생이 중요하지 않다면 요한은 그렇게 영생을 많이 다루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깊이를 모른다면 성경은 수박 겉 핧기가 될 것입니다.
일제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일파였습니다.
독립 운동가는 소수였습니다.
결국해방이 되었고 운명은 독립운동가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소수 편이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수도 없이 많이나옵니다.
사람들은 본질이 육의 소욕을 좋아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쪽으로 많이 갑니다.
영의소욕은 반대니까 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주인공인 하나님은 항상 소수의 편이었습니다.(마7장13절 참조)
영의 소욕은 육의 소욕과는 반대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영생이 있다면 우리는 가야만 합니다.
갈려고 마음먹기 까지가 어렵지 첫발만 디디면 쉽습니다.
아주 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양복을 입으면 멋있고 외적으로 보기는 좋습니다.
남들도 우러러 봅니다.
반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작업복 입은 사람은 아주 편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삶이란 이렇게 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는 본을 보였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믿어 축복받고 구원얻는데만 관심이 있지 그리스도의 삶을거울삼아 그리스도의 인격을닮아 거듭나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마7장21절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다들어갈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말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하셨잖아요?
성경은 전체적인 흐름의 줄거리와 하나님의 골격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알려고해야만
보이는 것입니다.
단어하나 소절하나에 치우치다보면 전체를 못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성경을 읽다가 내생각과 상반되는 내용을 발견했을시는 지금까지 내가알고있는 것 들었던 관념은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인 판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필자는 힘주어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내가 살았을 때 주님가신 그곳에 나도갈줄 믿습니다. 라고하는 뜻의 고백이지 입으로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하는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생명과 식구들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문제로써 신중하게 고민해볼 때가 아닌가싶습니다.
육은 보이는것이므로 욕심을 쫓아가는것이요
영은 안보이는것이기에 마음을 비우는것입니다.
육을 좇아가면 사망이 기다릴 뿐이요
영을 쫓아가면 영생이 기다릴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저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구원은 육의특성이요
영생은 영의특성이 있습니다.
구원은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영생은 보이지않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두가지 비유와 원리로 나열되어져 있습니다.
다 비유로써 우둔한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교과서로 주어졌슴니다. 할렐루야!
아버지의 유전자가 없다면 아들이 될수가 없지요.
아주 정확한 비유가 아닐까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내 행위와 심성이 그리스도와 다르다면 나는 그리스도와 다른유전자를 가졌다는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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