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천여중 학생들에게 남기는 말
-이별 노래-
“선생님, 다 들었어요. 선생님이 인수인계하는 거 다 들었어요. 선생님, 가지마세요. 지금 막 눈물이 나오려고 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고, 목소리가 울먹거리고 단호해 깜짝 놀랐습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2학년 5반 00 이가 전장에 나가는 장수같은 비장한 얼굴로 우뚝 서있더군요. 눈가에 물기가 어려서인지 두 눈을 연신 껌뻑거리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이라, 순간 무어라 답을 해야 할 지 난감했습니다.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 말이 지금 생각해도 참, 싱거운 소리입니다.
“그래, 1학기 끝날 때까지 같이 공부한다.”
“저어, 선생님한테 편지 썼어요.”
“아니,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해야지, 뭔 편지를 쓰냐.”
“어제가 아니고 얼마 전에 썼어요.”
“그럼, 가지고 와라. 이번엔 꼭 답장을 써주마.”
이것은 새로 부임하는 한문 선생님한테 2학기 수업 내용과 방향을 전해준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7월 4일 목요일 교무실에서 있었던 일이니, 벌써 두 주가 지났습니다. 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에도 00 이한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때 답장을 쓰지 않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 일로 답장을 써주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인천여중 학생여러분!
오늘은 여름방학이 시작하는 아주 즐거운 날입니다. 방학(放學)은 놓아버릴 방, 배울 학이라는 한자(漢字)풀이 그대로, 꽉 짜인 학교공부를 멈춘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한 달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맘껏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이 날을 기다렸습니까?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의 방학을 축복하고 축하하고자 합니다.
상인천여중 학생여러분!
저도 여러분의 방학에 맞춰 정년퇴직이라는 방학으로 들어갑니다. 1985년 3월 1일부터 2019년 오늘까지 34년 반이라는 긴 세월을 학교에서 보내고, 오늘 이 시간 이후로 학교를 떠납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실행하지 못했던 몇 가지 일들을 맘껏 펼쳐보려 합니다. 이 또한 좋은 소식이라 여겨, 여름 방학을 맞는 여러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상인천여중 학생여러분!
우리 선조들은 헤어질 땐 꼭 이별시를 주고받았습니다. 관례에 따라 “이별 노래”란 이별가를 불러봅니다.
떠나가는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이별은
그냥 이별인 게 좋습니다.
남은 정 때문에
주저앉지 않고
갈 길을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움도 너무 깊으면 병이 되듯이
너무 많은 눈물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됩니다.
차고 맑은 호수처럼
미련 없이 잎을 버린
깨끗한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이별하는 연습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이별 노래, 이해인 지음,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2』, 조동일 엮음)
상인천여중 학생여러분!
우리는 겨울나무의 무위(無爲)를 본받아야 합니다. 미련 없이 나뭇잎을 떨궈버리는 겨울나무의 무욕(無欲)을 깨닫고 실천해야합니다. 겨울나무는 작렬하는 태양아래 자신을 감싸주었던 나뭇잎들을 조금의 미련도 없이 훌훌 벗어버립니다. 그리곤 가지와 줄기만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채 매서운 추위와 바람을 꿋꿋이 견딥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도 나무와 같이 자연의 일부입니다. 우리들 모두 빠르고 늦는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갈라지고 떨어지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자연의 이법(理法)인 것입니다.
상인천여중 학생여러분!
헤어짐은 그냥 헤어지는 것으로 족합니다. 서러워 눈물을 흘릴 것도 없고, 가지 말라 붙잡을 것도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지면서 “미완의 이별”이란 유별가(留別歌)로 안녕을 고하고자 합니다.
새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을 두고 가다니
아깝다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는
사람들 두고 떠나다니
안타깝다
사람의 일이란 언제나 부질없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끝 날은 오게 마련
눈 녹은 물을 먹고 피어나는
천사의 꽃들이여
하늘이여 하늘 닿는 나무들이여
새로운 만남을 위해
이별을 짓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여행은 마감되어야 한다
안녕 안녕 떠나면서
손 흔들어 인사를 한다
부디 잘들 있거라 (미완의 이별, 나태주 지음,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2』, 조동일 엮음)
상인천여중 학생여러분!
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학교 교가 가사를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높은 뫼 기운차게 뻗어 오르고
큰 바다 아롱지는 푸른 인천항
장하게 피어오른 꽃송이들이
대한의 여학도로 여기 모였네.
상인여중 만만세 영원토록
그 이름 반석 위에 빛나리니
단아하고 매운 절개 오직 한길로
온 누리에 그 향기 퍼져 가리라.
단아하고 매운 절개 오직 한길로
온 누리에 그 향기 퍼져 가리라.
그동안 부족한 저를 온전히 믿고 따라준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과 해맑은 모습을 간직한 채, 저는 저의 길을 떠납니다. 부디 여러분의 앞날에 행복과 영광이 무궁하기를 바라면서 고별사를 마치려 합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십시오.
2019. 7.19(금) 산목 현금서 근서.
추기: 7월 19일 방학식 하는 날, 정년퇴임식을 같이 했습니다. 그날 저와 두 명의 학생이 연단에 서서 교환창으로 읽었습니다. 굵은 글씨는 학생 둘이 나눠서 읽고, 가는 글씨는 제가 읽었습니다. 퇴임식 마지막 순서로 전교생이 “스승의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연단에 서서 하염없이 흐느끼던 전교학생회장이 두 팔을 벌리며 제 품에 파고들었습니다. 제 교직생활 중 잊기 어려운 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퇴임식이 끝난 후, 교정에서 마주친 여선생님이 했던 말을 아래 남깁니다.
"선생님, 지금까지 학교생활 하면서 이렇게 감동적인 퇴임식은 처음입니다. 너무 많은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는데, 저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제가 정년퇴임할 때 이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2019.7.24(수), 22:10, 山木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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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로만 읽어도 감동, 눈물입니다. 어떻게 이런 농밀한 삶을 살아오셨는지, 살아오신 세월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지금까지는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셨지만, 이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감동을 주실 것입니다. 감동의 밭에 수많은 분들을 초대하실 것입니다. 먼저 초대받아 감동을 나누는 행운을 누립니다.
우리학교 학생들의 품성이 순수하고 따뜻해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따릅니다. 학생들 덕에 못난 선생이 빛이 난 것이니, 빚을 갚기 위한 교사 생활이 오히려 갚아할 빚을 늘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학교 학생들한테 빚을 갚을 길이 없으니, 다른 데서라도 빚을 갚을 방도를 찾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