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전후 출생한, 그러니까 세상에 나오자마자 식민지 국민이 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분들 중 역설적으로 우리말 글쓰기 전범(典範)을 보이는 문인이 두드러지게 많습니다. '바다와 나비' 시인 김기림이 1908년생, '날개 잃은 천재' 이상이 1910년생, '모던 보이' 백석이 1912년생입니다.
스스로 나라를 만들어갈 수 없는 현실에서 감수성 민감한 엘리트 청년들이 문학에 침잠한 때문일까요? 과거 시험 준비하느라 억지로 한문 공부할 필요 없고, 나라 빼앗긴 못난 선배들 권위에 짓눌리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겠지요. 대개 문장(文章)이라는 보검(寶劍)은 비극적 현실에서 더 날카롭게 벼려지는 법이니까요. 이들이 20대 청년 시절 일궜던 1930년대 문학은 지금도 쉽게 이르기 어려운 준봉(峻峰)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필 '인연'을 쓴 피천득 선생이 1910년생이더군요. 비교적 최근(2007년)에 돌아가신 때문에 역사적 인물인 이상과 동년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 선생 수필집 '인연'과 시집 '창밖은 오월인데'(민음사)가 함께 나왔습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수필')
돈 버는 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국제 정세나 정치 현실을 풀어주는 책도 아닌데 세대를 이어 끊임없이 재출간되는 까닭은 결국 글의 힘일 뿐입니다.
나라 안팎이 복잡하게 돌아가지만 책 읽기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창밖은 오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