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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CALL 유대계 잡지(뉴욕)
“그에게 러시아 혁명은 유대인의 승리였다. 그는 이스트사이드에서 혁명의 성공을 자축하는 인파의 물결과 기쁨의 환호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고 말했다. 카한 씨는 이번 혁명은 유대민족의 대의를 위한 위대한 승리라고 거듭 말했다. 러시아의 반혁명적 수구세력은 항상 반유대적 세력과 일치했다. 특히 혁명단체의 수뇌부에는 항상 유대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제국정부는 반정부 운동의 진앙지로 유대인 사회를 지목해 왔다.” (February 5, 1918; Abraham Cahan, Upheaval in Russia is Fight for Liberty)
CHEKA 소련 비밀경찰
“혁명 직후 소비에트 정부에서 유대인이 누렸던 각별한 위상에 전세계 유대인들은 그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최고권력기구인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유대계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레닌의 영도 하에 유대인들은 혁명의 모든 양상에 관여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혁명분자들을 처리하는 가장 더럽고 끔찍한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유대주의를 근절하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공산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적색테러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혁명 직후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Louis Rapoport, Stalin's War Against the Jews, 1990)
“아마도 데르진스키를 제외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요직에 포진한 유대인들의 비율은 체카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많은 유대인 청년들을 체카에 끌어들였던 주된 매력은 분명 비밀경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절대적인 물리력이었다... 이유가 뭐였든 체카 요원들의 대다수는 유대인이었다... 체카는 러시아 민중이 볼셰비키 정권에게 느꼈던 공포를 대변하는 기관이었기에 반유대적 감정은 체카가 수행했던 적색테러의 수위와 비례했다.” (Zvi Gitelman, Jewish Nationalism and Soviet Politics, 1972)
“체카의 수중에 떨어질만큼 불운한 인간의 운명이 머리뒤에 발사되는 유대인 요원의 총 한방에 결정될 확률은 매우 높았다.” (Leonard Schapiro, The Role of Jews in the Russian Revolutionary Movement, 1961)
THE DEFENDER 1930년대 미국 기독교-보수 월간지
"마침내 유태인은 힘없는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대량학살과 고문에 대한 그들의 백일몽을 마음 것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잠든 침대에서 끌고나와 고문하고 살해했다. 유태인들은 실제로 희생자의 신체를 조금씩 썰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불에 달군 쇠꼬치로 지졌으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기기 위해 안구를 뽑아내기도 했다. 어떤 경우 희생자들은 머리와 사지가 드러난 상자에 들어갔고 그 상태에서 상자 안으로 투입된 굶주린 쥐들에 의해 몸통을 뜯겼다.
또 어떤 이들은 손과 발에 못질을 당하여 천정에 매달린 상태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쇠사슬로 바닥에 묶여있는 어떤 이들의 입에는 액화된 뜨거운 납이 부어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말에 묶여 거리에 질질 끌려 다녔으며 이를 보고 몰려든 유태인 군중이 던진 돌과 발길질에 맞아죽었다. 기독교도 여인들은 그들의 아기들과 함께 광장에 끌려나왔고 유태인 적색분자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정하라고 명령했다. 만약 여인이 이를 거부할 경우 유태인은 아기를 허공에 던졌고 또 다른 유태인이 총검으로 아기를 낚았다...
유태인들은 기독교도 임산부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그들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 혁명 당시 러시아의 많은 곳에서 공개처형식이 벌어졌는데 이중 한 사례에 관하여 미국에서 파견된 로박위원회(Rohrbach Committee)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키에프(Kiev) 체카사령부 안에 있는 한 처형실의 시멘트 바닥은 희생자들이 흘린 피로 질퍽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 수위가 3인치에 달했다. 피에는 사람의 뇌수와 두개골 파편들이 섞여 있어 괴기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처형실의 벽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어떤 곳에는 뇌수와 머리가죽의 일부가 말라붙어 있었다. 피를 빼내기 위해 만들어져 있었던 너비 25센티미터, 직경 10미터, 그리고 깊이 25센티미터 크기의 배수구 역시 피로 가득차 있었다. 일부 시신은 내장이 제거된 상태였으며 또 다른 시신들은 사지가 절단되어 있었고 또 일부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을 당한 상태였다. 일부는 안구가 없었으며 머리와 얼굴, 목, 가슴 등에 깊은 자상을 입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가슴에 말뚝이 박혀있는 시신과 혀가 없는 시신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석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많은 수의 절단된 팔과 다리들이 쌓여있었다.'" (October, 1933)
Source: Latvia, The Ghastly Years
Sir Percival Phillips 駐러시아 영국 외교관
“나는 볼셰비키 러시아에서 지옥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정권을 잡았으니까요.” (Daily Mail, October 9, 1920)
L'ILLUSTRATION 프랑스 시사주간지
“볼셰비키 정부의 주요인사 및 관료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생활하다보면 한가지 사실이 머리를 때리는데, 그것은 그들이 거의 다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절대로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쓸 수 밖에 없다.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각 지방행정구, 정치위원회, 지역 소비에트 정부, 스몰니(Smolny) 등 가는 곳마다 맞닥뜨리게 되는 이들은 유대인들이며 또 유대인들이다... 이 혁명에 대해 알면 알수록 볼셰비즘이란 그동안 러시아에서 차별적인 지위에 놓여있었던 유대인들의 체제전복 운동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September 14, 1918)
JEWISH COMMUNAL REGISTER 뉴욕시 유대인 커뮤니티 연감
“러시아의 혁명 단 한방으로 그 나라의 유대인들은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번 혁명으로 민족적인 해방이란 차원에서 이제 유대인들은 완전한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짜르의 폭정으로 신음했던 6백만명의 동포들을 국외로 탈출시키려했던 구상은 이제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1917-1918, p 1425, p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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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1917년 건국 때부터 소련 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였다. 짜르체제가 무너진 뒤 1주일 후, 레닌이 이끌었던 유아기의 사회주의 정부는 전국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했으며 지구상에서는 최초로 반유대주의를 중범죄로 규정했다... 그 어떤 형태건 모든 반유대주의는 극형을 포함하여 매우 엄중하게 처벌되었다.” (Louis Levine, Soviet Russia Today, 1946)
(로마노프 정부와 러시아 농민들에 대한 악의적인 묘사로 유명한 유태인 볼셰비키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Maurice Cohen 유대인 공산주의자 (美)
“과장할 필요도 없이 저 위대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유대인의 손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할 있다. 음울하고 억압받았던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그들만의 힘으로 과연 부르조아지들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유대인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인터내셔널의 새벽을 맛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소비에트의 대의를 위해 러시아를 이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레온 트로츠키 동지가 Red Army의 통수권자라는 사실을 환영한다. 赤軍의 일반 사병계급에는 유대인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앙정치국을 비롯한 각종 소비에트 조직들에서 유대인은 정치위원(commissar)들로서 용감하게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끌고 있다. 모든 소비에트 기관들 선거에서 유대인 동지들이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요직에 임명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수세기 동안 자본주의를 상대로 투쟁을 벌여온 유대민족의 상징은 이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상징이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붉은색의 오각별은 시온주의와 유대민족의 상징이다. 이 오각별이 행군하는 곳마다 기생충과 같은 부르조아지들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이 흘린 눈물의 대가를 그들의 피와 땀으로 치르게 될 것이다.” (The Communist, April 12,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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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의 눈을 피할 수 없는 확연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과 소비에트 정권과의 관계였다. 언제든 백군(白軍)에게 위협을 받아 적군(赤軍)이 도시나 마을에서 철수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것이 며칠이건 단 몇시간이건, 유대인들은 항상 집을 떠나 적군과 함께 행동했다... 적군이 유대인 인구에 쏟은 관심과 이들을 철수시키는데 들인 성의와 노력을 보면 누가 보기에도 볼셰비키 정권은 유대인 정권이었다.” (Lestchinsky, Between Life and Death)
S. P. Melgounov 스페인 망명 러시아 역사가
"볼셰비키 정권의 적색테러는 너무도 광범위하게 펼쳐졌기 때문에 저항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체카가 동원한 반인륜적인 수법들을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가지 자주 사용되었던 수법 중에 하나는 인질을 잡아두는 것이었다. 모든 계층에서 갹출된 인질을 잡아둔 체카는 민중봉기, 백군(白軍)을 위한 부역행위, 파업, 추수한 곡물에 대한 공출거부 등을 反혁명 행위들로 규정하고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인질들을 공개처형했다. 그러므로 페트로그라드 특과위원회의 유태인 유리츠키가 암살되었을 때 수천명에 달하는 인질들이 학살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살해당하기 전 체카사령부의 지하실에서 냉혈적인 유태인 요원들에 의해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지금 내 앞에는 다가오는 白軍을 피해 볼셰비키들이 달아난 뒤, 각국에서 파견된 연합조사단의 참관 하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하르코프(Kharkov)에서 촬영된 사진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을 담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하나는 인질로 잡혀 있다가 파업에 대한 보복으로 살해당한 공장노동자 3명의 사진으로 한 명은 눈가의 심한 화상과 함께 코와 입술이 도려내어져 있으며 두 명은 손이 절단되어 있는 모습이다...
소작농이었던 아파니아수크씨와 프로크포비치씨의 시신은 머리가죽이 벗겨진 상태이며 신체의 요소에 불에 달군 칼에 의한 듯한 화상을 입고 있다. 군 장교였던 보브로프씨는 혀와 한쪽 손이 절단되어 있으며 그의 왼쪽 다리는 가죽이 벗겨져 있다... 또한 일부 사진에는 어떤 예리한 금속성 흉기를 사용해 벗겨낸 듯한 인피(人皮)들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하르코프시 소비에트 특과위원회 건물의 지하를 수색하던 중 발견된 시신들을 촬영한 것이다. 퇴역장성으로 인질로 잡혀있던 중 살해당한 폰티아파씨의 시신은 오른 손의 피부가 벗겨져 있으며 성기가 훼손되어 있다. 또
한 가구수리 사업을 했던 이바노브나 부인과 지주인 콜포바 대령의 카롤샤하 부인의 시신들도 심하게 훼손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들의 가슴은 칼자국이 난채 그 안이 비어있었고 성기에 화상을 입고 있었는데 그 부위에서 석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 명의 농부 인질들, 본다렝코, 푸크히클, 세베네트리, 그리고 시도리페후크의 시신은 모두 얼굴이 지독하게 난자되어 있었으며 성기부위에는 고환이 거세되어 있었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집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 수술로 이들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적색테러의 와중에서 자행된 온갖 패륜적인 만행들을 이 책 한 권에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태인 사엔코가 악명을 떨쳤던 하르코프 체카는 희생자의 손가죽을 장갑처럼 벗겨내는 특별한 기술로 유명했다... 보로네즈에서는 안으로 많은 대못이 박힌 드럼통에 벌거벗긴 희생자를 가둔 다음 언덕에서 굴렸으며 희생자들의 이마에 달군 쇠로 오각별을 지져 넣기도 했고 짜리친(Tsaritsin)과 카미신(Kamishin)에서는 톱으로 사지를 잘랐다. 케이프(Keif)에서는 희생자를 썩는 시체가 들어있는 관에 합장했다가 30분 후에 다시 꺼내 심문을 다시 시작하곤 했다. 이런 일을 몇 차례 되풀이 당한 사람들은 대게 정신이 돌아버렸다." (El Terror Rojo En Rusia 1918-1924, tomo II; Editorial Caro Raggio, Madrid, 1927)
Source: Latvia, The Ghastly Years
(Now you know why Hitler called jews sub-human)
Clare Sheridan 미국 공산주의자, 트로츠키 측근
“공산주의자들은 유대인이며 러시아는 지금 그들이 통치하고 있다. 행정, 사법, 입법, 언론 등 모든 정부기관의 요직에 앉아있는 그들은 모든 곳에서 진짜 러시아인들을 몰아내고 있다. 지금 러시아에서 급증하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책임이다.” (New York World, December 1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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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정부 유대계 비율표
총인원 / 유대인 / 유대계 비율
인민위원회의 22 / 17 / 77.2%
전쟁 정치위원회 43 / 33 / 76.7%
외교 정치위원회 16 / 13 / 81.2%
재무 정치위원회 30 / 24 / 80.0%
법무 정치위원회 21 / 20 / 95.2%
선전홍보 정치위원회 53 / 42 / 79.2%
사회조력 정치위원회 6 / 6 / 100.0%
노동 정치위원회 8 / 7 / 87.5%
해외 볼셰비키 대표부 8 / 8 / 100.0%
지방 정치위원회 23 / 21 / 91.3%
언론위원회 41 / 41 / 100.0%
(The Dearborn Independent, September 25, 1920)
AMERICAN HEBREW 뉴욕 유대계 일간지
“그 운명의 해였던 1914년부터 어어져왔던 불안과 소요는 러시아 혁명의 완결로 막을 내렸다. 혁명은 1세기 전의 프랑스대혁명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지구상의 그 어떤 집단보다 그 뿌리가 견고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극악무도했던 전제적인 러시아 황정을 마침내 타도하기에 이르렀다. 1차대전의 핵심적인 결과이자 가장 위대한 과업의 완성으로 역사에 기록될 이 혁명은 유대민족이 인식한 부조리와 이에 대한 유대민족의 치유법,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의 재구축을 염원하는 유대민족이 가진 의지의 산물이었으며 유대민족의 이상주의가 맺은 결실이었다... 러시아에서 대과업을 성취하게 한 유대민족의 역사적 자질과 정신, 그리고 열정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동일한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September 10, 1920)
JEWISH TRIBUNE 시카고 유대계 일간지
“독일혁명은 유대인의 업적이다. 많은 수의 유대인 정치가들이 자유민주주의적 정당들을 이끌고 있으며 바이마르 정부에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July 5, 1920)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 태생 유태인이 독일에서 혁명을?)
(룩셈부르크의 오른팔, 유태인 리쁘끄네히트)
1918년, 독일은 1년 전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맑스주의자들이 주동하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미국의 참전으로 서부전선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패색이 짙어가던 상황에서 독일 사민당(SPD)은 패배주의 여론을 조장하면서 카이저 정부를 흔드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사민당과 연계된 좌익단체들의 책동으로 1918년 11월3일 키엘의 독일해군기지에서는 수병들의 무장폭동이 일어났고 유대계 유력 일간지들의 선동적인 보도 하에 유혈소요사태를 동반한 총파업이 독일 전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극도로 불안해진 정국을 감당할 능력을 상실한 빌헬름 2세가 마침내 11월9일 퇴위를 선언하자 사민당은 기타 맑스주의적 정당들과의 연대 하에 독일 사회민주주의 공화국(바이마르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독일인들에게 곧 ‘등 뒤에서 비수꽃기’로 불려지게 되었다.) 공화국 선포 이틀 후 연합국과의 휴전에 서명한 신정부는 또 한편 군대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로인해 독일은 남은 군사력을 담보로 평화조건을 협상하는 대신 베르사이유 조약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많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영원히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해산을 명령한 사민당의 정치인들을 “11월의 범죄자들”이라고 불렀다.) 일단 군대의 해산으로 잠재적인 반혁명 세력이 제거되자 유대인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쁘끄네히트, 쿠르트 아이스너, 레오 조기쉬스, 프란츠 메링, 클라라 제트킨 등의 급진파가 표면으로 부상하여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전철에 따라 혁명장악을 시도했다.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은 룩셈부르크와 리쁘끄네히트의 스팔타쿠스단(Spartakusbund)은 1919년 초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폭력형명은 우익장교단이 지휘한 Freikorp(해산된 군인들로 구성된 시민의용군)와의 시가전 끝에 격퇴되었고 주동자인 룩셈부르크와 리쁘끄네히트는 체포후 처형되었다. 이들 사후 제3차 인터내셔널은 독일 공산당(KPD) 당수로 유대인 칼 라덱을 임명했고 그의 뒤를 이어 역시 유대계 여류 공산주의자 루스 피셔가 1924년까지 KPD를 이끌었다.
(FreiKorp의 병사들)
(쿠르트 아이스너)
Kurt Eisner 유대인 볼셰비키 (獨)
“뮌헨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주동했으며 그 결과로 탄생한 바이에른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쿠르트 아이스너는 승리에 도취하여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그의 동지이자 내각에 임명된 아우어(Auer)에게 말했다, ”11인의 왜소한 사나이들이 이 위대한 혁명을 달성했소!” 그럼 이 “위대한 혁명”을 성취했다는 “11인의 왜소한 사나이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자.
그들의 이름은 맑스 로웬베르크, 쿠르트 로센펠드, 가스파르 볼하임, 맥스 로스차일드, 칼 아르놀트, 크라놀트, 로센헥, 비른바움, 레이스, 그리고 카이세르로 10인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들과 함께 쿠르트 아이스너 밴 이스라엘로비치는 바이에른의 사회주의 혁명정부를 이끌었다. 11인은 예외없이 프리메이슨들로 모두 뮌헨 Briennerstrasse 51번지에 있었던 11호 비밀롯지 소속이었다.” (Monseigneur Jouin, Le peril Judeo-Maconnique, 5 Vols. 1919-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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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부터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까지 독일의 유대인 인구는 전체 독일인구의 1퍼센트 미만(정확하게 .50-.75 퍼센트)을 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정당 소속의 유대계 정치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요직을 독식했다. 다음은 바이마르 시대의 주요 유대계 인사들이다:
에버트(Ebert, 바이마르 초대 대통령), 프로이스(Preuss, 바이마르 헌법 성안자, 내무장관), 프룬트(Freund, 내무장관), 란쯔베르크(Landsberg, 재무장관), 힐퍼딩(Hilferding, 재무장관), 카우츠키(Kautski, 재무장관), 쉬퍼(Schiffer, 재무장관), 그바이너(Gwiner, 독일중앙은행 총재), 에두아르 번슈타인(Eduard Berstein, 주정부 국고담당 비서), 코헨(Cohen, 정보부 부장), 허쉬(Hirsch, 내무장관), 로센펠드(Rosenfeld, 법무장관), 푸트란(Futran, 교육장관), 아른트(Arndt, 교육장관), 브렌타노(Brentano, 산업, 무역, 교통 장관), 시몬(Simon, 프로이센 주정부 재무장관), 카스텐베르크(Kastenberg, 과학예술부 장관), 스트라트겐(Strathgen, 국가개발부 장관), 마이어-게어하트(Meyer-Gerhart, 식민지국 국장), 부름(Wurm, 식량문제 담당비서), 코헨(Kohen, 독일 勞兵평의회 의장), 언스트(Ernst, 베를린 경찰총장), 바이스(Weiss, 베를린 경찰총장), 신츠하이머(Sinzheimer, 프랑크푸르트 경찰총장), 레비(Lewy, 헤센주 경찰총장),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바이에른 공화국 대통령), 야페(Jaffe, 바이에른 재무장관), 탈하이머(Talheimer, 뷔르템베르크 지사), 하인만(Heinmann, 뷔르템베르크 지사), 풀다(Fulda, 헤센주정부 각료), 디어도어 울프(Theodor Wolf, 베를린 유력지《Berliner Tageblatt》편집장, 기타 사회문화계 주요인사: 메르츠(Merz), 바일(Weil), 카첸슈타인(Katzenstein), 스턴(Stern), 로웬베르크(Lowenberg), 프랑켈(Frankel), 슐레진저(Schlesinger), 이스라엘로비츠(Israelowitz), 셀리그손(Seligsohn), 루벤하임(Laubenheim), 맥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바이마르 헌법 성안자 유태인 휴고 프로이스)
Bela Kun - Aaron Cohen 유태인 공산독재자 (헝가리)
“헝가리의 공산화를 위해 순탄대로를 닦고자 했던 인물은 유대인 측근들에게 둘러 쌓여있었던 프리메이슨 카룔리(Karolyi)였다. 카룔리 정권은 어린세대의 좌경화를 위해 교육부와 학계의 요직에 유대인을 비롯한 프리메이슨 지식인, 학자들을 대거 투입했다. 전통적 교육질서를 전복하고 대대적으로 수정된 교과서들을 도입한 그들은 저격수의 조준솜씨로 헝가리 어린이들의 영혼을 겨냥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아이들의 도덕과 애국심을 파괴했고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음해하고자 했으며 난삽한 그림들이 삽입된 교재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러한 ‘진보적인 교육’을 선사한 카룔리 정권에 대해 학부모들의 원성은 끊이질 않았다...
카룔리가 선물한 것과 다를바 없는 벨라 쿤의 공포정치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그는 레닌처럼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위원들로 스스로를 둘러 쌓다. 32인의 주요위원들 가운데 25명이 유대인이었으며 이 비율은 러시아의 그것과 비슷했다. 이들 중에서도 최고의 권위을 지닌 최고위원회의 5人 가운데 네 명이 유대인들로 그들은 유대계 실명이 각각 코헨(Cohen), 바이즈(Weiss), 슈와츠(Schwartz), 쿤슈테터(Kunstatter)인 벨라 베이가(Bela Vaga), 조셉 포가니(Joseph Pogany), 시기스몬트 쿤피(Sigismond Kunfi)였다. 또한 유대인 알파리(Alpari)와 스자무엘리(Szamuelly)는 헝가리의 애국자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적색테러를 전개해나갔다.” (Cecile de Tormay, An Outlaw's Diary, 1923)
1919년 유대인 벨라 쿤은 러시아 다음으로 헝가리에 두 번째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일찍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했던 그는 합스부르크 왕정의 붕괴와 함께 득세한 ‘진보’ 성향의 카룔리 정권과의 교감하에 헝가리의 권력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호르티 제독이 이끈 민족주의세력에게 축출되기 전까지, 흔히 ‘벨라 쿤의 100일 천하’로 불리는 1919년 3월21부터 8월1일까지 벨라 쿤 정권은 그 포학성에 있어 러시아를 능가하는 잔혹한 공포정치로 온 헝가리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강대국의 틈에 끼어 많은 외침을 경험한 헝가리의 국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게 가장 극심한 시련을 안겨준 집단은 벨라 쿤의 정권을 지지했던 유대인 이웃들이었다. 런던에서 발행된《1919 Yearbook》(Dodd, Mead, Co., p.587)에 의하면, “벨라 쿤 정부와 관료층은 전적으로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혁명정부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온건좌파 성향의 사민파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러나 벨라 쿤은 이념적 색채와는 별도로 정부를 구성함에 있어 요직의 인사들을 헝가리의 유대인 사회로부터 조달했다.”
Louis K. Birinyi 헝가리 법조인
“헝가리인들이 마침내 유대인의 만행에 대항하기 시작했을때 이 나라에서 “백색테러”가 자행되고 있다는 뉴스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변할 힘이 없었다,”는 텔레키 백작의 고백처럼 유럽 주요국들의 여론을 제단하는 언론은 유대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건너온 저 유대인들은 일요일 오전 교회에서 나오는 기독교인들을 끌어다 나무에 매다는 식으로 그들 내키는대로 우리 국민을 살해하고 학살했다. 그러나 헝가리 밖에 사는 그 누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가. 반면 한 헝가리인이 실수로 유대인의 발가락이라도 밟게되면 그 유대인은 너무도 큰 소리로 요란을 떨기에 전 세계는 그 유대인의 비명을 듣게 되는 것이다.” (The Tragedy of Hungary, 1924)
윈스턴 처칠
“... 일부 애국적인 유대인들의 이러한 노력에 맞서 국제유대인의 폭력적인 음모가 그 마각을 드러낸다. 이 음험한 모의에 가담하는 자들은 대게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았던 나라에 살았던 유대인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내세에서의 영적인 구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자들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정치운동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스팔타쿠스-바이스하웁트의 시절부터 칼 맑스를 통해 러시아의 트로츠키, 헝가리의 벨라 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미국의 에마 골드만에 이르기까지, 문명사회를 전복시키고 억압된 성숙, 시기와 질투에 근거한 악의, 그리고 도저히 불가능한 평등이라는 토대 위에 인간사회를 재구축하려는 유대인들의 전 세계적인 음모는 꾸준히 그 세력을 불려왔다.
이 시대의 저술가인 웹스터 부인(Nesta Webster)도 자신의 저서를 통해 설득력있게 입증했듯이 이러한 음모는 프랑스대혁명의 비극에서도 분명히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후 19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모든 체제전복 운동들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과 아메리카의 대도시에서 암약해왔던 이 특출난 일당은 마침내 러시아 국민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사실상 이 광대한 제국의 절대군주들로 등극했다...
볼셰비즘의 탄생과 러시아 혁명의 실현과정에 있어 이 세계주의적이며 무신론적인 유대인들의 역할은 과장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 혁명에서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요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레닌을 제외하고 절대다수의 혁명지도자들은 유대인이며 이들에게 사상적 영감과 이론을 제공한 이들도 유대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유대계 비율은 더욱 놀랍기만 한다. 특히 반혁명세력에 대한 테러조직의 역할을 수행하는 체카에서 여성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주도적인 위치는 괄목할만 하다. 벨라 쿤이 헝가리를 잠시 통치했던 기간에도 적색테러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이런 사악한 역할은 다를게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바이에른에서는 패전으로 무기력과 실의에 빠진 독일국민을 표적으로 삼은 이러한 광란극이 한동안 연출되기도 했다. 전체인구에서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을 감안할 때 유대인들이 이들 국가의 볼셰비즘 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충격적이다.” (Zionism Versus Bolshevism: A Struggle for the Soul of the Jewish People, Illustrated Sunday Herald, London, February 8, 1920)
Oscar Levy 유대인 의사, 작가 (英)
“이 세상에서 유대인보다 더욱 불가사의하며 치명적인 민족도 없다. 유대인과 그들이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은 과거와 오늘을 이해하는 열쇠이며 모든 진실의 근원으로 유대인문제는 모든 정직한 사상가들에 의해 논의되어야 할 주제이다... 당신들은 당연하게도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자본과 산업이 유대인들에 의해 독점됨으로서 생겨나는 병폐에 대해서, 그리고 유대인이야말로 반란과 혁명을 주동하는 주된 불순세력임을 지적한다. 당신들은 또한 막대한 부(富)를 손끝에 부리는 유대국제금융의 집산주의(集産主義)가 민주주의를 내건 칼 맑스와 트로츠키의 국제공산주의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적 차원에서 이 모든 극악한 상황과 비참한 현실에 대해 당신들은 그 원인을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으로 추슬러 올라간다... 실로 근대유럽에서 일어난 일들 가운데 그 근원을 유대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 얼마전에 끝난 세계대전을 한번 예로 들어 보자. 과연 그 전쟁의 기원과 명분이 무엇이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해 보라...
“당신들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이 세상의 영적인, 그리고 물질적인 종말을 가져올 유대인의 쌍두마차임을 지적한다. 이론과 실천, 이상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정치와 철학에 있어 모세로부터 맑스까지, 유대인은 언제나 그들만의 명분과 목표에 열정적으로 헌신해왔던 족속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그런 명분과 비전은 그릇된 것’이라고 당신들은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한번 둘러 보라. 유대인이 이 세상을 어떤 지경으로 몰고 왔는지. 지난 300년 동안 그렇게 분란을 일으켜왔으면서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당신들에게 이런 세상을 강요당하고, 또 당신들에게 시달려야 하는가?’...
이에 대해 나의 대답은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당신들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성은 누가봐도 정당한 것으로 이러한 의견일치의 토대위에서 나는 당신들과 기꺼이 악수를 나눌 준비가 되어있으며 당신들이 단순한 인종적인 증오에서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당신들이 만약 반유대주의자라면 유대인인 나는 당신들보다 더한 반유대주의자임을 나는 고백한다. 동포여,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도 아주 중대한 잘못을. 그동안 세상의 구원자로 자처해왔던 우리는 오늘날 인류의 화근이요 유혹자이며 파괴자이고 사형집행자 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다.
당신들에게 새로운 낙원을 약속했던 우리는 당신들을 새로운 지옥에 끌어다 놓았다. 그 동안 진보란 것은 없었고 특히 인류의 도덕적인 진보같은 것은 더 더욱 없었다. 그리고 인류의 참된 진보를 가로막았던 것은 바로 우리의 파괴적인 도덕과 세계관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보며 그 음침함에 몸서리를 친다. 그리고 그 영적인 집필자의 정체를 알기에 나는 더욱 격렬하게 몸서리를 칠 수 밖에 없다... 볼셰비즘은 종교이자 신앙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 혁명과 반란의 전문가인 유대인들이 이끄는 칼 맑스의 붉은 십자군과 어떻게 대적할 수 있을 것인가?” (Dr. Oscar Levy, Preface to the World Significance of the Russian Revolution by George Pitt-Rivers, 1920)
George Pitt-Rivers 영국 언론인
“그 동안 러시아의 짜르정부를 상대로 악의적인 중상과 비방을 전개해온 나라는 국제유대인의 본거지인 이곳 영국이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짜르정부를 세계 역사 초유의 폭압적인 전제정권으로 선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전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스테픈 그래함씨와 같은 영국작가는 러시아를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러시아는 영국에 비해 훨씬 덜 상업화된 나라이다. 그리고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이자 유대인의 천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대인은 단순하고 순박한 농경생활에 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민족이다. 그보다는 무제한적인 산업의 팽창과 그로인해 급증하는 대도시 인구, 계산이 빠른 중간상인으로서 유대인들의 제약없는 상업적인 착취, 이윤, 그리고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소유한 재물의 크기로 인간의 평등을 가늠하는 잣대, 또한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란 이름아래 자행되는 모든 수준의 하향 평준화야말로 유대인들이 오늘 이 시대 전 세계에 전파하는 컬트(cult)이다. 민주주의란 이름아래 유대인의 물질숭배와 상업주의에 맹종해왔던 지난 300년간의 전통을 지닌 영국이란 나라가, 비록 부족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박하고 선량한 농경백성과 가부장적인 정부를 꿈꾸었던 알렉산더 3세의 통치이상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The World Significance of the Russian Revolution, 1920)
Alfred Rosenberg 독일 국가사회주의 이론가
“러시아는 국가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진보’로 위장된 국제유대인의 책략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던 유일한 유럽국가였다. 러시아 국가의 정점에는 의회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절대군주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밑에는 기독교적 신앙심과 러시아의 정치적 전통으로 중무장한 귀족관료층이 버티고 있었다. 또한 상당한 독립적인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이들에게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유대자본은 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유대인의 공직임용과 유대인이 군대에 진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광대한 영토와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지배층은 막대한 가치의 부동산과 삼림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유대인의 금권(金權)에 의존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풍성했고 시베리아와 우랄산맥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금광으로 국가의 금(金) 보유량도 넉넉했다. 또한 국가는 가용 금속자원도 40억 마르크에 달하는 분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황실과 수 많은 교회, 수도원, 그리고 민간자산 등, 러시아의 國富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비록 러시아는 산업생산량에 있어서는 아직 개발이 미흡한 국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이미 오래전 자급자족의 국가적 역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미 서유럽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던 유대국제자본 네트워크에게 러시아의 이러한 경제적 잠재력은 그들의 세계지배에 대한 크나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러시아는 혁명 전까지 유럽에서 기독교와 보수적 원칙들의 수호국 역할을 해왔고 그 어떤 대대적인 무장반란도 국가의 강력한 군대에 의해 타도되었다. 자국 안에서 분란과 소요를 획책할 만한 비밀결사들을 제도적으로 금지했기에 유대인의 기만적인 선전과 선동은 기대했던 것만큼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사항을 염두에 두면 왜 국제유대인이 러시아를 무너뜨리는데 그와같은 총력을 기울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Weltkampf, 1925)
오토 칸 유대인 국제금융가 (美)
“그 곳에는 민족세력이 주도한 쿠데타의 성공 이후 헝가리를 탈출했던 일단의 유대인 혁명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미군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듣자하니 미국정부가 중부유럽 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 윌슨 대통령은 그들의 보고와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대게 여러국가의 주요인사들이 참석하는 만찬은 외교에 있어 절호의 기회이기도 한 동시에 예상치 못한 암초가 될 수도 있다. 그날 나는 내 옆자리에는 앉은 꽤 거물로 보이는 한 인사와 기억에 남을 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오토 칸이었다. 그는 볼셰비키 정권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는 뉴욕의 한 거대투자은행의 경영자로 막 취임한 인물이었다...
만찬 참석자들 가운데 한 명은 국제자본이 어떻게 그들의 타도를 외치는 볼셰비즘 운동을 후원하고 보호할 수 있는 지를 그에게 물었다. 유럽의 배고픈 이들을 먹이기 위한 자선사업단을 이끌고 있었던 그는 큰 잔에 담긴 헝가리산 토카이 백포도주를 들이킨 뒤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5프랑의 금화는 족히 들었을 법한 거대한 여송연을 한모금 빤 뒤 말했다:
(뉴욕 투자은행 Kuhn & Loeb 회장)
‘우리와 소비에트의 동맹관계에 대해 놀라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도 가장 국수적이며 민족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오래된 민족이자 가장 강하게 결속되어 있으며 또한 가장 배타적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 오랜 세월의 끔찍한 박해와 고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유대인의 가장 영웅적인 민족주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또한 우리의 민족주의야말로 가장 순수한 민족주의라는 것을 잊습니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가장 영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수백년 동안의 모멸과 수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대구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사람들의 얘기를 아십니까? 내가 뉴펀들랜드에 낚시휴가를 갔을적에 들은 얘긴데 그들의 얘기는 소금을 너무 많이 쓰면 생선이 부식되고 너무 적게 쓰면 썩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은 교훈은 마땅히 이 세상의 사람들(고임, Goyim)과 그들의 정신적 사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유대인은 소금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지혜를 현명하게, 적재적소에, 알맞은 분량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 소금을 인간들이 소비하는 빵에 섞습니다. 우리는 짜르시대의 러시아와 같은 부도덕한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할 경우에만 부식을 일으킬 만한 분량의 소금을 사용합니다...
당신들은 맑시즘이 자본주의의 안티테제라고 말하지만 우리에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거룩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며 그로인해 우리는 양극을 잊는 이 세상의 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뜻보면 상반적인 존재들과 같이 보이는 볼셰비즘과 우리는 인터내셔널에서 그 동질적인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현실과 그 교리에 있어 정반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富를 무기로 사회의 상층부로부터 아래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와 민중혁명을 무기로 사회의 하층부에서 위로 작용하는 공산주의는 이 세상을 우리들의 뜻대로 재구축하고자 하는 의도에 있어 그 궁극적인 목표와 종착점이 합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상에 새로운 율법을 반포하고 새로운 神을 창조하는데 있습니다. 아니 창조한다기 보다는 그 신의 개념이란 것을 정화하여 때가 오면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신을 스스로 메시아가 된 이스라엘 민족과 동일시함로서 그 신의 개념을 정화시킬 것입니다. 새로운 신의 선포는 이스라엘의 최종 승리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러한 구상이야말로 우리들의 신약성경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왕과 선지자들에게 합당한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건데, 혁명은 富와 특권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 황금송아지를 살찌우는 것은 자본의 창출도 아니요 자본을 이용한 착취도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황금송아지를 살찌우는 것은 자본의 유통과 흐름이요 이와 결부된 투기의 영혼입니다. 자본의 주인이 바뀌면 바뀔수록 그 자본은 우리의 수중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래에 대해 수수료를 받습니다. 우리는 자본의 흐름을 통제합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세계의 수많은 교차로들에서 전 방향으로 이동하는, 마치 ‘이름없는 방랑자’와도 같은 자본에 대한 세금징수인과도 같습니다. 그 자본의 이동이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일어나건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역동성은 파괴의 힘과 창조의 힘에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하기 위해 파괴합니다...
우리가 조직한 볼셰비키 혁명은 그 파괴력의 증거요, 또한 우리가 만든 국제연맹은 우리가 지닌 창조력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제공할 동력에 대해 볼셰비즘은 가속페달, 그리고 국제연맹은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진 것입니다. 만국에 흩어져 있지만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는 민족의 신앙으로 이어진 유대인은 이 사명의 주체입니다. 우리는 모든 국가의 요소를 담고 있는 세계정부요, 이스라엘은 미래 제국의 씨앗입니다.’” (Saint-Aulaire, Auguste Fllix Charles de Beaupoil comte de. Geneva versus Peace, 1937)
Vicomte Leon de Poncins 프랑스 반공저술가
“혼란과 파괴의 상징, 이 볼셰비즘(유대교)은 그 무엇보다 反기독교적, 反사회적 개념이다.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붉은 광기는 오직 한 민족적, 그리고 종교적 개체에게만 이로울 따름이다. 그들은 바로 유대인이다. 이 혼란과 광기의 기원이 국제유대인이건, 프리메이슨이건, 아니면 유대인의 민족주의건, 혹은 부를 독점하기 위한 유대 대자본의 음모이건, 유대인이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등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혁명을 통한 기존질서의 전복이 유대인에게 과연 뭘 의미하는지는 자명해진다. 양대 진영을 구분짓는 대결의 선은 날이 갈수록 극명해져가고 있다. 러시아를 손아귀에 넣은 혁명적 유대세력에 대해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보내는 공개적인 갈채와 성원은 이 대결이 기독교 대 유대교, 그리고 민족국가 대 세계주의, 아니 세계주의로 위장한 유대 국제권력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내준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헝가리의 애국정부는 자국의 프리메이슨 단체들을 해산하고 법으로 금지시켰다. 헝가리의 프리메이슨들은 10월 혁명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정통성이 없는 벨라 쿤 정권에 부역했다. 유대인들이 퍼뜨리는 독소적 사상의 영향아래 이 자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반민족적, 반국가적, 반사회적 교조를 전파하여 헝가리 정부와 국민들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반국가적 교리는 그 나라의 진정한 국민들에게 해악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것이다...” (La Dictature des Puissances Occultes)
Lord Eustace Percy 영국 외교관
“국경에 근거한 영토적 주권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질서 속에서 유대인이 생존, 번영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다른 민족들의 민족국가란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특정한 영토에 자신들만의 민족적 주권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동부유럽에서 볼셰비즘과 시오니즘(Zionism)은 서로와 발을 맞춰가며 성장한다... 유대인이 이러한 이념들에 헌신하는 이유가 이방민족 국가들의 발전과 안녕에 기여하고자 함은 물론 아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를 떠나 그 어떤 비유대인들의 권력체제도 유대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Henry Ford, Aspects of the Jewish Power, The International Jews)
(유태인 Bernard Baruch, 월스트릿 투자은행가로 FDR의 돈줄, 워싱턴포스트 사주이자 세계은행 초대 총재였던 유태인 Eugene Meyer는 바룩의 동업자였다)
THE GLOBE 런던 일간지
“볼셰비즘은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정치, 경제적 침략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다. 볼셰비즘의 확산으로 자본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손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이념적 경계를 너머 서로간의 상부상조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그 어디에서건 군림할 것이다. 오늘날 국제유대인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두 곳은 뉴욕과 러시아이다. 세상에서 제일 많은 숫자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도시란 타이틀과 함께 뉴욕의 가공할 국제금융자본은 물질적인 차원에서 세상을 호령하고 만사를 농단한다. 또한 지구의 반대편인 러시아에서 유대인은 사상 초유의 반란적 기질과 무자비한 음모로 그 광대한 제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저 디어도어 헤르츨이 말했던 유대인의 ‘끔찍한 돈의 힘’과 반란과 혁명을 선동하는 공산주의는 오늘 이 시대 거대한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모태로했던 앙시엥레짐의 말살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목표의 공유뿐만 아니라 언뜻보면 적대적인 두 진영이 인류의 눈이 감지할 수 없는 막후에서는 실제로 긴밀하게 협력, 공조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존재한다.” (George Pitter Wilson, April, 15, 1919)
JEWISH WORLD 영국 유대계 일간지
“우리는 한 종교로서 기독교가 우리 유대인들에게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반추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가 번창했던 지난 2천년은 우리 유대인에겐 망명과 유배를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비극의 세월이었다... 때때로 기독교가 우리에게 내밀었던 우정의 손길도 실은 우리의 개종을 유혹하기 위한 미끼였을뿐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교회의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유대인의 수난은 그 도를 더해갔다. 오직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했을 때나 약했던 곳에서만 유대인은 삶을 꾸려갈 수 있었다. 반유대적 폭동, 그리고 반유대주의적 운동들의 기원도 사실상 모두 기독교가 심어놓은 유대인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심과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기독교란 종교에 호감을 갖거나 기쁜 마음으로 반길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December 22, 1920)
“독실한 유대인은 유대교가 反기독교적 신앙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March 15, 1924)
* * *
“유대인들은 레닌의 죽음을 각별한 비통함으로 애도했다. 이는 단지 혈연으로만 유대인들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독실한 유대교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 학교의 어린이들은 장례행렬을 따랐으며 히브리 예술극장(하비마, Habima)에서는 유대민족의 언어로 표기된 플래카드를 봉헌하기도 했다. 여기에 적힌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그대는 국가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야콥 마이스 모스크바 수석랍비와 함께 이 도시의 유대인 단체들은 레닌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문을 일제히 발송했다. 또한 유대인작가동맹은 이디시어로 꾸며진, 레닌의 업적을 추모하는 특별호를 발간했다.” (January 21, 1924)
버트란드 러셀
“볼셰비즘은 철저히 패쇄된 관료계층의 폭압정치이다. 인민에 대한 감시체제는 짜르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무자비하다. 소련의 신흥 지배계급은 무례하고 냉혹하며 미국식에 익숙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말과 행동에 있어 자유란 찾아볼 수도 없다. 마치 거대한 쇳덩어리에 짖눌린 듯 나는 침울함과 착잡한 마음뿐이었다.” (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1975)
Nesta Webster 영국 역사가
"외국인의 제약없는 유입, 특히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한 무제한적 수용은 항상 노동당의 주요 정강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 또한 유대인 자본가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그들은 영국인 기업가들에 대해서는 격렬히 비난하고 공격하면서도 유대인 백만장자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투쟁과 관련하여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자본가들에도 두가지 부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민족주의적 산업자본가이다. 이 부류의 대다수는 비유대인들로 이들은 뛰어난 두뇌와 정력으로 맨손에서 시작하여 번창하는 사업을 일군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국제적인 자본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는 금융자본가들이다. 물론 비유대인도 찾아볼 수 있으나 이들의 절대다수는 유대인들로 이들의 본질적인 수입원은 생산이 아닌 고리대금업과 투기다. 사회불안과 혼란이 첫 번째 부류의 자본가들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악재(惡材)인 반면 두 번째 부류의 자본가들에게 모종의 경제공황이나 소요사태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된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그토록 맹렬하게 공격하는 자본가들은 전쟁과 혁명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부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자본가들은 오히려 그들의 사업으로 국가의 번영에 기여하는 동시에 수백만의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민족적인 산업자본가들에게 공격을 집중함에 있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은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대신 단순한 일일 식량배급제 등, 삶의 필수품을 국가로부터 제공받는다는 공산주의 체제의 궁극적인 청사진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당한다면 국가를 지배하는 관료층은 마치 노예를 부리는 농장의 주인처럼, 또한 지금 러시아에서처럼, 그들의 근로자들에게 그 어떤 열악한 조건이나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의지대로 강요할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물론 그 관료지배층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민족사이에 존재하는 일체감과 단결력으로 그들은 빠른 속도로 고위요직들을 독점할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 독일에서도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세계는 결국 유대인이 지배하게 될 것이란 관념은 랍비적 유대교(Rabbinical Judaism)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을 이룬다... 유대민족의 종교는 오늘날 구약성경보다는 탈무드를 더욱 신봉한다. 나는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이며 반국가적인 이 탈무드를 맹신하는 유대인들이 사회의 정직한 구성원들로서 이 나라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직접, 간접적으로 그들이 사는 나라에 불안과 소요와 혁명을 불러왔다. 그들은 가장 사악하고 교활한 술수로 그들을 받아준 동료 인간들에게 파멸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유대인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원인은 인간의 도덕적 행실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할 세계관과 인간관을 간과하는 유대교의 성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유대인이 주도하는 세계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주의 세상도, 공산주의 세상도 아니며 현재의 경제체제를 변혁시키는 것도 아니며 세상의 물질적인 멸망도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혁명이다. 그들은 그들이 조성하는 가치관과 관념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상태를 통해 1900년 동안 이 세계를 지탱해온 토대를 전복하고 그 모든 명예로운 전통을 짓밟으며,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적인 이상향을 말살하려고 하는 것이다.” (Secret Societies and Subversive Movements, 1924)
Rabbi Lewis Browne 유대인 작가 (美)
“우리는 젠타일(Gentile, 비유대인)들을 재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혁명가들이 지금 러시아에서 수행하고 있는 과업이기도 하다.” (How Odd of God)
“유대인의 역사책은 칼 맑스라는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정신은 백날 입으로만 떠드는 자들보더 훨씬 더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에 신실한 것이었다.” (Stranger Than Fiction)
미국 공산당 (Communist Party of USA, CPUSA)
"1921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유대인이 차지했던 비율은 33.5퍼센트였으며 평당원 수준에서는 40퍼센트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여러 민족 출신들 중에서도 매년 탈당자보다 입당자의 수가 많았던 민족은 유대인 뿐이었다...” (H. Klehr, Communist Cadre, 1978)
“1950년대를 거쳐 5만명에 달했던 미국 공산당에서 유대인은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으며 이들에 있어 입당자의 숫자는 항상 탈당자의 숫자를 상회했다. 다른 민족출신들에 비해 인구비례상 유대인의 공산당 입당율은 10배가 넘는 것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비슷한 숫자의 유대인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좌경급진주의자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Nathan Glazer, The New Left and the Jews, 1969)
1920년대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 특히 급진적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던 유대계 지식인들은 소련을 인류역사 초유의 이상적, 진보적 사회로 선전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을 “어둠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홀로 외로운 빛을 발하고 있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 묘사하는 것은 가장 상투적인 표현법이었다. 1934년 미국의 한 유대인 공산주의자는 그가 지은 詩에서 소련을 “러시아에 내려온 천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이 국가사회주의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했듯이, 이들 유대인들에 있어 소련은 국제사회주의야말로 반유대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입증해 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따라서 이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유대인에게 이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으로부터 1941년 6월 독-소 개전 전까지의 기간만 제외하고 서구의 유대인들은 전후에도 소련과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공산권의 존재가 유대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1920년대 초반부터 미국 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미국 내에서 소련의 입장을 옹호하고 소련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지하에서는 소련 비밀경찰의 지령에 따라 미국에 대한 간첩임무도 수행했다. (1947년 소련에 원자폭탄 비밀을 넘긴죄로 처형된 유대인 로젠버그 부부 역시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심어놓은 공산주의 지하세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1947년 스미스 법안에 의해 기소된 공안사범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유대인의 운동이었던 공산주의를 만인 보편적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미국 공산당의 유대인 수뇌부는 간부들을 상대로는 그들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외부의 눈에 띄는 직위에는 항상 지방출신의 비유대계 인물을 배치했다. 이 때문에 자신이 본질적으로는 유대인 정당과 다를바 없는 조직의 포장지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비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의 탈당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Source: H. Klehr, Communist Cadre, 1978; N. Glazer, The New Left and the Jews, 1969; K. Kann, Joe Rapoport, 1981; Klehr, Haynes & Firsov, The Secret World of American Communism, 1995; A. Liebman, Jews and the Left, 1979)
(원자탄 비밀을 소련에 넘긴 유태인 로젠버그 부부)
(CPUSA 당원, 릴리언 헬만, 유태인)
(유태인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 CPUSA 비밀당원, 1930-1960년대, 헐리우드는 용공세력의 온상이었다)
(아서 밀러, 유태인 작가, CPUSA 당원)
(록펠러가의 家臣 해리 홉킨스, FDR 측근으로 친소련 정책 주도, CPUSA 물주)
(용공 언론인, 월터 리프먼, 유태인)
(UN헌장 성안자, 얄타회담 주도, 소련 스파이 알저 히스)
(국무장관 딘 애치슨: 애치슨과 알저 히스는 열렬한 시온주의자였던 유태인 대법원 판사 브랜다이스와 프랑크푸터의 protege였다. FDR 행정부가 1933년 소련을 공식 승인하기전까지 브랜다이스의 주선으로 워싱턴 소련대표부의 수석법률고문으로 일했던 애치슨은 히스와 함께 금융재벌 시온주의자들이 미국 연방정부에 심어놓은 용공인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국동란 발발시 美국무장관)
(유태인들이 요직을 독식했던 FDR 행정부 출범과 함께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용공세력 - 실은 금융자본과 맑시즘으로 무장한 시온주의 세력 - 의 미국 정부 침투를 국민들에게 경고했던 미국 애국자 조셉 맥카시 상원의원: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흑막을 폭로하려다 의문사 당한 제임스 포레스털 해군성 장관과 비슷하게 그 역시 불투명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다. 오늘날 미국 유태인들에게 그는 히틀러 못지않은 증오의 대상이다)
('맥카시 선풍' 당시 용공세력을 조사하는 닉슨)
"The only two non-Jews in the communist conspiracy were Chambers and Hiss... Every other one was a Jew and it raised hell with us." (Statement of President Richard Nixon in 1971, as recorded at the White House on tape and released by the National Archives in 1999; quote in New York Times, October 7, 1999)
Henry Waton 유대인 공산주의 이론가 (美)
“공산주의는 인류의 미래이다. 만약 하나의 진정한 사회학의 경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오직 유대인만이 이런 책을 쓸 수 있다... 유대인은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뛰어난 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유대인에게는 전 인류를 복속시키고 이 세계의 주인이 될 권리가 있다. 유대인은 전 세계의 군주가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국가들을 그들의 통치하에 둘 것이다. 물질적인 영향력이나 폭력이 아니라 빛과 지식, 이해, 인류애, 평화, 정의, 그리고 진보를 통해서...
아리안 인종은 오직 유대인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세상을 개선하고 아름답게 할 것이다. 그 틀이란 바로 공산주의와 인터내셔널리즘이다...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는 러시아에서처럼 혁명을 통해 아래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고 미국에서 그러할 것이듯 위로부터 이루어질 수도 있다... 유대인은 이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며 그 외의 모든 민족과 인종은 아예 지상에서 사라지거나 유대인이 될 것이다.” (A Program for the Jews, 1939)
Reinhold Niebur 유대교 학자 (美)
“마르크스주의는 유대교의 신이 내린 계시의 현대적 발현이다.” (In a Lecture before Jewish Institute of Religion, New York, October 3, 1934)
(불가리아 유태인 재벌2세 / 맑스-레닌주의자 라코프스키)
Antonio Garcia de Tuy 스페인 성직자
“작금의 스페인 내전은 적그리스도, 유대교가 그리스도와 카톨릭 교회를 말살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가장 무자비한 전쟁이다. 인류의 역사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는 이때 국제유대인은 두 개의 막강한 군대를 이용한다. 첫 번째는 비밀에 쌓여있는 프리메이슨이며 두 번째는 손이 피로 물든 공산주의자들과 이들과 연계되어 있는 각종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혁명세력들이다.” (Revue Internationale des Societes secretes, July 15, 1937)
* * *
“스페인 내전 동안 공화파의 붉은여단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총 85,940명에 달했다. 여기에는 5,255명의 신부, 2,492명의 수도사, 283명의 수녀, 249명의 나이어린 수사, 그리고 12명의 주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게 좌익폭도들의 만행은 새디스트적인 잔혹성을 동반했다. 나발모랄 관구의 한 신부는 옷이 벗겨진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채찍질을 당했다. 또 다른 신부는 나무 십자가에 묶힌채 가시면류관을 쓰고 식초를 마시도록 강요받았다. 현장에 모인 폭도들은 그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예수의 이름을 모독하라, 그럼 우리가 너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에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들을 용서하며, 당신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자 술에 만취한 한 폭도가 신부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야엔의 주교와 그의 여동생은 마드리드 외곽에 모여든 2천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호성을 지르는 좌익폭도에게 총살당했다. 그들을 직접 처분하는 “영광”은 광신적인 반기독교주의자로 소문난 여류 혁명가이자 유대인인 라 페코사의 몫이었다. 마드리드의 암파로 수녀원을 점거한 폭도들은 그들이 사로잡은 수녀들에게 모종의 성행위를 강요했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그 자리에서 그들을 쏴죽였고 나머지는 집단적으로 욕보였다. 쎄르네라에서는 폭도들이 한 수도사의 귀에 묵주알을 넣고 뇌를 뚫을 때까지 꼬챙이로 밀어넣어 죽이는 일이 벌어졌고 다수의 신부들이 산채로 불태워졌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무덤에서 파헤쳐진 수녀들의 시신 19구가 성당의 정문 계단 앞에 전시되었으며 다른 남녀 성직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파도록 강요당한 뒤 생매장 당했다. 또 일부는 투우장에 던져져 소떼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었다. 성직자인 두 아들을 둔 한 여성은 그녀의 목에 십자가를 쑤셔넣은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와함께 어린이들을 포함, 모두 800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폐광에 생매장되었다. 붉은 폭도들은 양민을 학살할 때 항상 “자유를 위해 교회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프랑스대혁명의 참상도 아마 이것에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학살과 만행과 테러의 배후에는 그 누구도 아닌 에르노 게로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1919년 벨라 쿤의 공산정권이 한동안 헝가리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시절 스페인에서와 비슷한 적색테러를 주도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활약상은 공산주의와 유대교 안에 존재하는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아니할 수 없다. 중산층과 함께 스페인의 노동자계층은 소련 초창기의 볼셰비키 살인자들을 본떠 만들어진 비밀경찰에 의해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마드리드에만도 26개의 분소가 있었으며 이들의 공포정치는 3년 뒤 내셔널리스트/팔랑헤 당이 승리함으로서 스페인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Dr. E.R. Fields, Reds Sought to Kill All the Christians of Spain, The Truth At Last, Issue No. 357)
(유태인 에르노 게로)
“특히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영국 대중은 소위 ‘주류’라는 유태인 언론사들의 왜곡보도에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이들 언론은 프랑코에 대한 우호적인 소식은 모조리 억누르는 한편 그와 내셔널리스트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기사들은 발 벗고 보도했다. 그러나 같은 언론에 따르면 유대인 맑시스트 인간백정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영국의 거의 모든 언론은 이들의 피비린내나는 활약상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고 스페인을 살육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는 광란의 유대 볼셰비즘을 “민주주의”로 포장하여 선전해주었다. 러시아는 소수 유대인들의 희생양이라는 독일 총통 히틀러의 발언을 보도한 1937년 9월14일자 News Chronicle 기사에는 신기하게도 “유대인”이라는 낱말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인쇄되어 있다. 비록 같은 신문의 다른 기사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뚜렷하게 인쇄되어 있었음에도 말이다.
영국 파시스트 연맹에 보낸 1937년 6월26일자 서한에서 프랑코 장군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본인은 여러분의 고귀한 조국과 동포를 우롱하는 유대인 언론의 교묘한 프로파간다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영국 국민들이 스페인 내전의 진정한 본질에 눈을 뜨게 될까봐 두려워 합니다. 그럼 이 내전의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국제유대인의 마수로부터 기독교문명을 수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Arnold Leese, Jewish Press Control, 1939)
Adrien Arcand 캐나다 언론인, 정치가
“공산주의는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유대인의 음모라는 것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물론 유대인에게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의 약속이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세계의 적화를 위해 광분한다. 공산주의는 유대인이 발명하고 유대인이 주도하며 유대인이 확산시키고 유대인이 돈을 대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유익한 것이다.
바로 이런 진실을 당당하게 공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이제것 세계 각지에서 그 세를 불려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변증론자를 자처하는 좌파 지식인들이 쳐놓은 연막과 싸웠을 뿐 실제로 공산주의로 득을 보는 배후 조종세력인 유대인들에 제대로 맞서본 일이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과 비유대인들은 유대인을, 그리고 진실을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또한 유대인들이 퍼뜨리는 패러독스적 구호들에 마비되어 있다... 공산주의는 어떤 정치, 경제적 교조나 원칙의 묶음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오직 추잡한 범죄음모일 뿐이다. 공산주의는 신과 인류에 대한 범죄이다...” (Le Gogul, November 23, 1937)
Stephen S. Wise 미국 수석랍비
“어떤 이는 맑시즘이라 부르지만 나는 유대교(Judaism)라고 부른다.” (Jewish Chronicle, London, November 24, 1926)
JEWISH LIFE 뉴욕 유대계 잡지
“유대교와 일상의 모든 면을 감안하더라도 오늘날 소련에서 유대인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큰 규모의 유대인 인구가 살고 있음에도 소련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정치, 사회적인 것이든, 유대인 문제가 가장 시급한 국가적 이슈로 대두되지 않는 지상의 유일한 국가이다. 바로 서쪽 국경을 넘어 폴란드에 가보면 상황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나치독일이나 병합된 오스트리아 등의 파시스트 국가들에 비한다면 U.S.S.R.은 가히 유대민족의 유토피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유대민족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July, 1938)
('크레믈린의 늑대' 유태인 라자 카가노비치, 스탈린 처남)
GIORNALE D'ITALIA 이탈리아 일간지
“볼셰비키는 국가의 산업과 광산을 노동자들에게 선물하고 그들을 ‘나라의 주인들’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소위 이 ‘사회주의화 시대’에서와 같이 노동자계층이 빈곤과 기아에 허덕였던 적도 없었다. 이전의 지배계급은 신흥 부르조아지 관료계층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00퍼센트 유대인으로 구성되어있다. 실제로 혁명이 일어난 뒤 러시아를 떠난 유대인 자본가들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러시아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스탈린의 최측근 조언자인 유대인 라자 카가노비치(Lazare Kaganovich)의 각별한 관심아래 특별한 대접을 받고 산다. 절대다수의 노동자 계층이 ‘경제의 주체’라는 허구적인 거짓말로 사탕발림을 당하는 동안 큰 산업체나 공장, 군수물자, 大小 돈벌이 사업들은 사실상 유대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유대인 당간부들의 가족은 값비싼 차와 시골별장을 소유하며 기후가 좋은 크리미아와 코카서스에 있는 호사스런 해변휴양지에서 겨울을 난다. 그들의 부인들은 값비싼 아스트라칸 코트를 입고 파리에서 들여온 의상과 보석, 금팔찌, 금반지 등으로 몸을 치장한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혁명으로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는 노동자들은 비참한 현실속에서 연명한다. 볼셰비키들은 러시아 인민에게 완전한 자유와 자율을 약속했었다...
그럼 우크라이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한 번 보자. 이 지역을 통치하는 권력기관은 거의 모두 유대인이나 모스크바에서 내려온 스탈린의 주구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수탈과 부패, 그리고 농업에 관해서라면 눈꼽만큼의 지식도 없는 무능 탓으로 과거 비옥하기로 유명했던 이 지역의 주민들은 오늘날 거의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February 17, 1938)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 총통 (1939-1975)
스페인 내전에서 내셔널리스트 세력을 승리로 이끈 프랑코는 1939년 5월19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전승축하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잠시라도 안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동안 스페인 정복을 획책해온 대자본과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이 유대적인 괴수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Nehemiah Robinson, The Spain of Franco and its Policies Toward The Jews, 1953)
아돌프 히틀러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당 당수
“11월(1918년), 수병(水兵)들이 트럭을 타고 몰려와 우리에게 폭동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다. 소위 ‘우리 조국의 자유와 아름다움, 그리고 존엄성’을 위한 이 투쟁에 나설 것을 선동한 주동자들은 유대인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전선에 나가 싸웠던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독일혁명을 교사하고 배후에서 끈을 잡아당기는 자들은 다름아닌 국제유대인이다... 혁명은 안정과 질서를 원하는 세력이 아닌, 폭동과 강도, 분탕질을 꿈꾸는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나는 차차 사민주의 계열의 언론사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조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만드는 신문들 중에 진정 민족주의적이라 할 만한 신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손에 닿는 대로 사민주의 팜플렛들을 모아 저자들의 이름을 올려다 보았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대중의 무지함과 우리 지도층의 안일함 탓으로 사람들은 유대인의 거짓말 공세에 쉽사리 농락당한다...
나는 1919년에 이르러 유대인 칼 맑스의 이론과 그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가 되서야 나는 그의 ‘자본론’과 함께 사민주의가 어떻게 국가의 경제를 파괴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사민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제자본의 독점과 지배를 불러올 토양을 마련하는데 있다... 실제로 국가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 노동조합을 이용해 유대인들은 비유대인 국가의 경제를 파괴한다...
러시아를 손아귀에 넣은 국제유대인은 독일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독일은 러시아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될 포식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서방의 소위 민주주의란 것은 맑시즘의 바로 전 단계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없이 맑시즘적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하다... 맑시즘이란 신흥종교의 도움으로 유대인이 만약 세상의 만국을 정복한다면 그들의 왕관은 인류의 무덤 앞에 바쳐지는 조화가 될 것이다...” (Mein Kampf)
국제자본과 맑시즘이라는 이름의 Judaic serpent
끝
출처 : 다음블로그 "유대인에 대한 진실" http://m.blog.daum.net/midshipsnake/3?tp_nil_a=1
첫댓글 이 책에서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초점을 맞춰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과 시오니스트는 다른 것이다. 이 점들은 다음 장에서부터 풀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