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첫 출산
1972년은 너무 힘든 한해였다. 영주철도국 산하기관인 묵호, 영주전기사무소의 통폐합으로 2년간 근무했던 묵호를 떠나 영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나는 그 때 고민하였다. 왜냐하면 아내가 곧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서둘러 이사하지 않으면 아내가 묵호에서 출산을 할 것이고 그러면 나와 떨어져 얼마간 두 곳 살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힘들지만 영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장모님이 아내를 돌봐주셨기 때문에 나는 먼저 영주로 가서 방 두 개 달린 조그만 전세 방을 마련하였다. 이삿짐은 먼저 열차 수하물로 부치고 1972년 3월 11일(토) 밤 9시 묵호 역에서 강릉 발 청량리 행 열차에 세 식구가 올랐다. 열차는 복잡했다. 장모님보다 벌써부터 만삭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가 큰 걱정이었다. 다행히 어느 젊은이가 양보해 줘서 아내는 의자에 앉게 되었다. 6시간이나 걸려 이튿날 새벽 3시경에 영주 역에 도착했다. 끝까지 인내해준 아내가 너무 대견했다. 역 앞 여관에 들러 잠시 잠을 잔 뒤 근처 식당에서 아침으로 국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우리가 살 집으로 갔다.
우리가 살 집은 바깥채인데 콘크리트블록 건물로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엔 두 세대가 세 들어 있었다. 건물에 대하여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벽이나 천정에 단열재처리 없이 시공되어서 겨울은 방에서도 손이 시리었고, 여름에는 서향이라 오후 늦게는 너무 더워 벽에 물을 끼얹으면 무럭무럭 김이 나는 찜질방 같았다. 더구나 바로 뒤 공동으로 사용하는 재래식 화장실의 불결함은 새색시의 자존감을 깎아내려 어쩔 수 없이 일 년 동안을 지내면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두자 폭의 긴 툇마루에 걸쳐 나란히 안방과 뒷방이 있다. 두 방이 한 아궁이로 연결되어서 연탄불의 공기구멍을 아무리 열어놔도 온기는 뒷방의 구들까지 미치지 못하여 겨울에 냉방 그대로였다. 안방의 출입문은 창호지미닫이였고 방바닥은 묵은 비닐장판에 벽은 도배한지가 오래되어 보였다. 이사를 하면 제일먼저 이웃과 인사부터 하는 인사성 바른 아내였건만 밤새 열차에 시달리다보니 아무 것도 못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누워버렸다. 다행히 장모님이 짐정리를 도와주시고 식사를 해결해 주셔서 천만 다행이었다.
임신 후 단 한 번도 산부인과에 가본적도 없는 아내는 남들이 모두 쌍태라고 말할 정도로 몹시 배가 불렀다. 아내는 피곤과 괴로움 속에서도 잘 참아내며 장모님이 마련해 준 점심과 저녁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주일 밤이었다.
아내의 진통은 서서히 다가왔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진통은 밤이 깊을수록 점점 심해졌다. 자정이 되었다. 아내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이웃의 누구하나 아는 체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출산을 저주했다. 아침에 장모님이 공동수도 가에 나가보니 닭의 목을 비틀어 놓은 것을 발견하셨다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채에 사는 여인이 곧 해산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방책이었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되었다. 아내는 점점 큰 고통에 몸부림쳤다. 옆에서 지켜만 보던 나는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옆에서 손을 꼭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새벽통행금지가 해제되는 4시까지가 왜 그리 시간이 더디 흐르는지 조급함뿐이었다.
이윽고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렸다. 황급히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를 찾았다. 초행인데다가 시골의 희미한 가로등 밑에서 공중전화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할 수없이 영주시내 쪽으로 약 500미터를 뛰었다. 시내 변두리에 이르자 도로변에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띄었다. 공전식 송수화기를 들고 교환원을 호출하여 산파를 연결해 조급히 말했다.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 위치를 알려주고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오는 40-50세의 산파를 만나 집에 이르니 아내의 비명소리가 이전보다 더 크게 들렸다. 방에 들어가니 양수가 이미 터져 좁은 방안은 엉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어리석었다. 택시를 불러 아내를 산부인과나 조산원으로 데려가지 못하고 왜 산파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산파가 도착하여 분만을 맡아 도와주니 마음이 놓였다. 왜냐하면 산파가 오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때 부터가 정작 산고의 시작이었다. 산파는 누워있는 아내의 몸 중간에 가림 대를 놓더니 나보고 아내의 머리맡에 있으라 했다. 아내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내 가슴을 울렸다. 그럴수록 아내의 두 손을 잡아 주면서 무어라고 계속 나는 말했던 것 같다. 장모님은 산파의 모든 심부름을 하시면서도 딸의 산고를 자신의 경험으로 느끼며 안타까워하셨다.
시간은 더디 갔지만 어느덧 아침 7시가 되었다. 산파가 온지도 벌써 두 시간이 넘었다. 금방 분만하게 되리라는 나의 생각은 잘못이었다. 그 동안 아내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몇 차례 혼절과 멈춤이 있자 나는 아내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스쳐갔다. 옛 왕실에서 분만하다가 산모가 죽는 드라마를 보았던 것들이 자꾸 생각났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 생각이 자꾸 뇌리를 스쳐갔다. 계속되는 아내의 진통은 나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고 그것은 내 마음에 아내의 소중함과 숭고함으로 스며들었다.
산파는 해낼 수 있을까? 양수가 미리 터져 마른 채 분만하느라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아내에게 용기를 주며 분만을 유도할 수 있을까? 산파도 내 마음처럼 초조했으리라. 만약에 잘 못되면 산파라고 별수 있겠는가. 별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나는 아내의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여보! 힘을 내!”라고 말했다. 그 때도 병원에서는 촉진제나 진통제를 썼겠지만 아무 주사도 없이, 거기에다 산통과 무거운 몸으로 이사하느라 고생한 아내에겐 너무 힘든 출산의 시간이었다.
너무 힘들어 혼절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아내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분만에 실패하면 어찌된단 말인가! 아니야, 아니지,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이 얼빠진 놈아! 너 정신 차려라.”
나는 아내의 두 손을 다시 꼭 움켜쥐고
“여보! 정신 차려! 힘을 내!”를 반복했다.
산파도 조바심이 있었으련만 이마엔 땀이 범벅인데도 매서운 눈초리로 아이의 머리를 보며 소리쳤다.
“힘을 써, 힘을 내”
기절했던 아내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을 맞바꾸기라도 하려는 듯 비장함으로 작은 체구지만 자신의 온 몸의 뼈마디를 늘리며 아이를 밀어냈고 버거운 듯 정신을 잃었다. 4.3Kg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었다,
산파가 아이의 볼기를 살짝 때리니 “으앙”하는 큰 울음소리가 나서 보니 아들이었다. 1972년 3월 13일 아침 7시 25분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산파는 뒷정리를 끝내고 아기를 산모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내는 조금 전의 모든 고통도 잊은 채 밝은 미소를 지으며 첫아기를 안아보며 평안을 되찾았다. 아들의 이름을 떨치는 별이란 뜻으로 진규(振奎)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