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꿩 사육
오랫동안 기도 끝에 꿩 사육을 시작했다. 1990년, 일산에 있는 모 꿩 농장에서 꿩병아리 1,200마리를 한 마리에 3천 원씩 계약하였다. 6개월만 기르면 수꿩은 마리당 15,000원 이상을 받을 수 있고, 암꿩은 이듬해 마리당 약 20, 30개 정도 산란하기 때문에 부화하여 분양하면 1년에 최소 4, 5천만 원의 소득이 된다는 농장 주인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꿩 사육장 조성을 위해 향남읍 화리현리에 사는 누님의 밭 700평을 임차하였다. 나와 아내는 밭 가운데 있는 조그만 바위에 걸터앉아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기도는 나에게 신앙의 반석이 되어 이후 새벽기도로 이어졌고 화리현교회를 섬기는 계기가 되었다.
고립무원의 땅을 장비로 평탄하게 한 후 빙 둘러 기둥을 묻고 철망을 쳤다. 가운데 파이프와 천막, 그리고 보온 덮개를 이용하여 하우스를 짓고 운동장도 만들어 골프 망을 씌웠다. 축사 내엔 사료통과 물통을 준비했고, 별도로 비닐하우스를 지어 내가 기거할 방과 병아리 육추기도 손수 설치하였다. 그리고 ’가나안 농장‘이란 이름의 간판을 도로 입구에 세웠다.
수일 후 병아리 1,200마리를 12상자에 담아 르망 승용차에 실어왔다. 생물이기에 환기가 안 되거나 한쪽으로 기울면 압사할 수도 있어 조심스럽게 운전하여 12곳 육추기에 분산하여 입추하였다.
육추기에서 뛰어노는 어린 병아리의 모습은 천진함과 귀여움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서로 머리 부분의 털을 날카로운 부리로 뽑아 삼키는 게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털이 많이 뽑혀 머리가 붉어진 병아리에게 다른 병아리들이 집중적으로 덤벼들어 쪼아댔다. 놔두면 상처를 입어 폐사하기 때문에 별도로 격리하여 관리하였다. 이렇게 상대를 쪼아 서열을 정하는 습성을 ‘카니발리즘’ 이라 한다. 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비킹 (부리 자르기)을 하였다.
좁은 곳에서 약 1개월을 보내고 넓은 축사로 이동한 꿩들은 마음껏 활동하였다. 운동장 쪽으로 낸 작은 문을 열어 며칠 동안 지형을 익히게 했다. 그 후 1개월 후 “카니발리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리에 안경을 씌웠다. 이 안경은 전면에 가림막을 씌워 정면으로 쪼며 공격할 수 없게 만든 플라스틱 제품을 말한다. 이러한 조치 없이 그냥 놔두면 최종엔 서열상 강한 1마리의 꿩만 남게 된다고 한다.
꿩은 약 4개월 정도가 지나면 사료와 물 주기 외에 별로 관리할 게 없다. 그리하여 매부에게 관리를 부탁하고 서울에 가서 아내와 같이 남대문 새벽 의류 시장을 보는 등 아내의 의류 점포 일을 도와주곤 했다. 이러한 가운데 어언 여섯 달이 지나 가을이 되었다. 콩 등 좋은 사료를 추가로 주어서인지 장끼(수꿩)는 붉은 깃털과 목에 흰 띠를 자랑하고 까투리(암꿩)는 적회색 깃털을 띠는 건강한 어미 꿩으로 변했다. 그때까지 사육 수는 대략 1,000마리 정도였고 암수의 비율은 반반이었다.
이젠 수꿩을 팔아야 했다. 그러나 찾는 사람도 중간 상인도 없었다. 이러다간 사료비만 늘어날 것 같아 꿩 요리하는 식당을 직접 찾아 나섰다. 수일간 고생 끝에 식당 두 곳과 구두 계약을 겨우 할 수 있었다. 꿩의 가죽을 벗겨 비닐봉지에 담거나 살아 있는 꿩은 그물망 마대에 담아 승용차에 싣고 조금씩 납품을 하였다. 사육장엔 다음 해 봄에 산란할 암꿩과 수꿩의 비율을 5 대 1로 하여 남겨 두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월이 되었다.
서울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함박눈이 내렸다. 꿩 사육장이 걱정되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씌워놓은 골프 망이 쌓이는 눈의 무게를 못 견뎌 찢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때 꿩이 날아가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받쳐 놓은 장대를 미리 치워 놓는 등 각별한 주의를 해야 했다.
조급증을 억누른 채 서울 집을 떠나 눈길을 운전해 농장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산과 들 그리고 길까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꿩 장을 바라보았다. 상상했던 불상사가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사육장 안에 있어야 할 수백의 꿩들이 밖으로 나와 울타리와 땅바닥에 떼로 몰려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가까이 가니 야성의 꿩은 놀래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닭은 나갔다가도 돌아오지만, 꿩은 나가면 그만이다. 애지중지 기른 공도 모르고 그 많은 꿩은 사라져 버렸다.
사육장 안을 살펴보았다. 운동장 위에 씌워진 골프 망을 받쳐주는 장대가 쌓인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부러져 있다. 그 충격으로 골프 망 약 2미터 정도가 찢어져 어두운 안에서 보면 밖으로 나가는 문이 밝게 열려있는 셈이었다. 찢어진 망을 꿰매 복구하였지만 나간 꿩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근 야산에서 사냥꾼의 총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들의 총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인생의 희비를 실감했다.
이렇게 손해는 보았지만, 남아 있는 꿩이 5, 6월 중에 정상적으로 산란하였기 때문에 이를 부화시켜 약 3천 마리를 다시 사육할 수 있었다. 변두리 땅을 구해 사육장도 넓혀 지난해를 경험 삼아 사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막상 판로가 문제였다. 닭처럼 한꺼번에 팔리질 않고 거래처를 확보해 가며 조금씩 파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사양 관리는 물론 미수금으로 인해 늘어나는 사료비 등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전업해야만 했다. 그동안 물불 가리지 않고 나를 도와준 곱디고운 아내의 헌신이 물거품 된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현 시설을 특별히 보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토종닭 사육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