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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 재자바 고려독립청년당과 세 의사 -손양섭(孫亮燮), 노병한(盧秉漢), 민영학(閔泳學) 세 의사의 영전에 바친다
안승갑 지음
1. 서 론
나는, 애국이나 효도는 누구에게 공치사받기 위하여 하는 행동이 아니요, 인간이 가진 바 순수한 정과 끓는 피가 의를 위하여 자연히 표출(表出)되는 것이라고 고집하고 싶다.
우리는 남의 나라 먼 역사까지 살펴 볼 필요없이 우리의 반만년 역사만으로도 이 고귀한 철리(哲理)를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 즉 우리의 역사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고개 숙이며 감화받고, 충격받는 것이다.
당시의 식민지 환경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질러서 끓는 피와 뛰는 가슴을 가진 젊은이들은 자살이라도 해 버리고 싶은 괴로움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였다. 그런 울분을 대의(大義)로 표현한 사람은 애국지사가 되고, 못난 짓으로 표현한 사람은 건달이 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안 중근 의사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 때, 논개(論介)가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그들은 무슨 대가를 바랐는가? 안 중근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의 가슴을 향하여 총을 쏜 것이 사감(私感)이나 영웅심 때문이었더라면 세계로부터 충의(忠義)의 표본으로 숭배(崇拜)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같이 그들은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도 자랑이나 공치사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았거늘, 오늘의 사람들은 자잘한 것까지 남에게 알리고, 칭찬 듣고, 대가를 바라고 있다.
의(義)란 큰 것만 가치가 있고, 작은 것은 가치가 없다는 오늘날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천년만년을 두고 길이 규탄받아야 한다.
고려독립청년당의 활동을 자기가 한 것으로 허위로 꾸며 잡지사와 신문사에 기고하여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적은 일을 큰 것처럼,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꾸민 가짜 애국자가 있는 데 대하여 개탄을 금하지 못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의 항일투쟁(抗日鬪爭)으로 자바(Java)에서 순국(殉國)한 세 분 의사(義士)의 영혼을 위로하고, 대중잡지 [실화(實話)]의 1957년도 2월호 별호 제 148-155 쪽에 신(新) 모씨가 허위로 고려독립청년당을 판 내용(제목 : 남방(南方) 자바를 진동시킨 항일 투쟁 - 비밀 결사조직 고려독립청년당은 이렇게 싸웠다)에 대한 분노 때문이며, 앞으로 영웅심에 의한 이런 허위보도로 애국을 도둑질하는 일이 생기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펜을 들게 되었다.
우리는 [자바에서의 투쟁실록]이 인도네시아 정부를 통하여 밝혀져서 청사(靑史)를 빛낼 날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사이비 애국자들의 허위 조작 보도에 불같은 노여움이 솟구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진상을 밝히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웅심에 의하거나 애국자로 행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밝혀 사회의 비판을 받고, 뜻을 펴지 못하고 남방 이역인 자바섬 야자수 아래서 먼저 가신 세 동지의 혼(魂)을 백분의 일이나마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내용에는 당시의 사회실정과 내가 보고 들은 바도 썼다.
살아남은 우리는 의결순직(義決殉職)한 손양섭, 노병한, 민영학 세 동지의 영령에 대한 죄가 크다. 진상을 밝히면서 세 영령에게 용서를 빈다.
자바에서의 반일고려독립청청년당 실기 원고 및 군속시절
2. 전장(戰場)의 청년들
싱가폴을 함락시키고 자바를 점령한 일본군은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인력난에 부딪쳐서 한민족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비롯한 중국 전체를 뒤흔들고 불령(佛領) 인도지나를 거쳐서 말레이지아 반도와 타일란드,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하여 지원병, 학도병, 군속등을 모집하였다. 그중 가장 골치아픈 것은 포로 문제였다. 석방을 시키자니 재기하여 덤빌 것이고, 수용하여 감시를 하자니 관리감독할 사람이 모자라고, 죽이자니 국제 여론이 무서웠기 때문에 감시요원으로 육군 군속(軍屬 = 軍務員)을 모집하였다.
1942년 6월 10일 경 전국(朝鮮)에서 시험을 보아 징용 합격된 육군 요원 3,000명은 부산진 서면에 설치된 가설(假設) 병사(兵舍) (野口部隊)에서 6월 15일부터 두달 동안 철저한 군인교육을 받았다. [차렷, 경례]부터 시작하여 일본 황국신민 교육(皇國臣民敎育)까지 받고, 8월 19일 오후 5시, 수송선단에 분승(分乘)하여 지그재그 항법(航法)으로 9월 14일 자바섬 바타비아 (자카르타) 앞바다 단종뿌리오 항구에 닿았다. 일본군이 자바를 점령한지 5개월 후의 일이다.
내가 군속에 지원한 것은 2년 복무에 초봉 48원이라는 거금이라는 미끼도 있었다. 그러나, 고등계 형사(高等係刑事)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고국에서 나는 우리 고장 어린이들에게 반일 사상을 고취하느라 소년단, 청년단 등을 조직하고, 야학(夜學)을 열어 계몽하였다. 그러나 고등계형사가 집요하게 따라붙었으므로 피하기 위하여 음성군 금왕면(陰城郡 今旺面)에 전작기수(畑作技手)로 발령받고, 거기서도 역시 지하 활동을 하였다.
1940년 옥포소년단
옥포청년단통장
백옥(白玉) 소년단가(少年團歌) 안승갑 지음
1. 무궁화 꽃이 피고 종다리 우는
백옥포 우리동네 화려하다오
마당 쓸고 꽃 심자 아름다웁게
마당 쓸고 꽃 심자 아름다웁게
2. 백옥천 맑은 물에 목욕을 하고
이세상 모든 지식 모두 익히자
∥:귀엽다 우리 소년 아름답다오:∥
3. 소반재 높은 마당 올라를 가자
팔 걷고 다리 걷고 운동을 하자
∥:하나 둘 셋 소리 높여 운동을 하자:∥
4. 백옥천 고운 물에 괭이를 씻어
백옥들 넓은 땅을 모두 다 파자
∥:용감하다 우리 소년 아름답다오:∥
5. 무궁화 진달래는 우리 꽃이요
백옥포 사십 호는 우리들의 집
∥:영원하다 우리 산천 변함없다오:∥
6. 무럭무럭 자라는 우리 소년들
씩씩하고 용감한 일꾼이 되자
∥:맹세하자 씩씩하고 용감하기를:∥
7. 대한독립 만세를 힘껏 부르며
우리 소년 모두 다 발맞춰 가자
∥:기쁘도다 우리 소년 만세 만만세:∥
“부르자 소리 힘껏! 우리의 노래!“
백옥은 백옥포(白玉浦) 즉 배오개(죽전1리), 백옥천은 외천천, 백옥들은 죽전들, 소반재(질마길)는 배오개 뒤 중삼 넘어가는 언덕을 말한다.
당시는 일반행정만 담당시킨 것이 아니었다. 전직원에게 각 동네를 담당시켜 생활 전반을 지도 감시시켰다. 나는 주민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줄 좋은 기회로 생각되어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상부명령을 철저히 주지시킨다는 핑계로 담당한 내곡리(內谷里)와 사창리 (司倉里)두 부락민들을 찾았다. 그들에게 희망을 갖고, 삶의 보람을 찾으라 하고, 융합과 단결 앞에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당시 면장인 정인섭(鄭寅燮)씨는 내가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나는 변두리 벽지 부락을 먼저 계몽하고 면소재지는 뒤에 계몽하려고 하였는데 군이나 도에서 출장 나오면 신작로변만 보기 때문에 잔소리가 심하니 내일부터는 면소재지인 무극리(無極里)를 담당하여 주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곡리, 사창리 주민들에게 자립정신(=독립정신)을 기를 것을 신신당부하고 무극시장 600호를 담당하여 카드제를 통해 인구동태, 직업동태, 생활 상황 등을 철저히 통계 내었다. 남들에게는 철두철미한 친일 애국자로 보이게 그런 집단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요시찰 인물이라 고등계형사가 항상 미행하고 있던 무극리 2구에 거주하는 장기형(張基螢)씨와 비밀리에 통하고 지냈다. 그를 알아챈 주재소에서는 다시 내 뒤를 캐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1942년1월28일 금왕면 면서기들과. 왼쪽낙산선생
1941년 10월 9일 금왕면 무극리2구 부인회 벼베기
1941년 10월 9일 금왕면 무극리3구 부인회 벼베기
1941년 4월3일 금왕면 무극리 식목일 행사
우리는 왜 남의 지배하에서 살아야 하나? 우리도 우리 힘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 역설하며 집단활동에 정신을 쏟던 어느 날 주재소 장인찬(張仁贊) 순사가 나를 부르더니 지원병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내가 주민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있는 불순분자였기 때문에 군대로 쫓아 보내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미 꼬리를 밟히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 여쭤 본 후에 결정하겠노라고 한뒤 마침 남방행(南方行) 군속 모집을 하고 있기에 지원하였다. 이것은 고등계형사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넓은 세상에서 뜻을 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왜놈들을 위해 군인으로 헛되이 싸우다 죽는 것보다는 비전투요원으로 가는 것이 나에게나 민족에게 더 이득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註, 이상에 대한 증거품으로 소년단가, 선행회반령 회칙, 규약 등과 전작기수 발령장, 금왕면 활동 사진 등 보관)
3. 동지들
부산 서면 교육대에 집결하여 보니 그 중에는 돈을 벌자고 지원한 사람, 가정환경을 비관하여 지원한 사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지원한 사람, 나같이 불순분자로 몰려 갈 곳이 없어지자 지원한 사람 등이 뒤섞여 있었다.
내무반 イ(이)의 1소대 2분대에는 임헌근(林憲根), 김현재(金賢宰), 김주석(金周錫)과, 3분대에는 이억관(李億觀) 등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있어서 사상적 온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이웃 자리의 김주석 동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죄목으로 서울 불교전문(佛敎專門)을 중퇴당한 후 분을 참다 못하여 군속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군속생활은
“구두가 작아서 못 신겠습니다.”
하면 일본 상등병은 화를 벌컥 내며
“뭐야? 빠가야로, 군대에서 발에다 신을 맞추려고 하는 놈이 어디 있어? 신에다 발을 맞추는 것이지 발에다 신을 맞추는 게 아니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군속 훈련이 아닌 군대 훈련이었다. 그는 불만을 참다 못해 고향 친구에게 편지로
“군속이라면 민간인 대우를 해 주고, 인간으로서 대접하여 줄 줄 알았더니 군인 뺨치는 강훈련과 민족정신 말살 교육 뿐이라 지쳐버렸네.”라고 썼다가 내무반장 에가미(江上) 군조(軍曹)와 고바야시(小林) 오장(伍長)에게 들켜 소대장 스즈키(鈴木) 중위에게 야단 맞은 후에 반(班)의 상등병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다시는 군속 생활의 불평을 토로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같이 개성을 말살하는 생활 속에서 누가 앞에 나서서 반항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불을 끈 후 내무반이 조용하여지고 친우들이 잠든 뒤에 김주석과 단둘이 소근거리던 기억이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제비가 어찌 봉황의 큰 뜻을 알리요.”라고 하면서 서로 미래를 더 잘, 그리고, 일본의 패망을 내다 본다고 우기곤 하였다.
김 주석은 자바에 상륙한 후에도 자신의 사상을 감추지 못하고 표현하다가 극도의 미움을 받아 태국 포로수용소로 전속되어 갔다.
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김주석에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해야 될 것을 드러나게 하다가 그리 되었네. 해륙만리 먼 길 평안히 가기 바라며, 가거든 내가 옆에 있는 것처럼 늘 생각하고, 나의 이 만만디적(漫漫的, 천천히 천천히) 정신을 본따서 심사숙고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하게.” 부탁하여 보냈다.
그러나, 태국으로 전속간지 일년만에 영국인 포로 세 사람과 공모하여 군용열차로 국경선을 돌파하여 인도로 망명하여 피신처를 찾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포로의 사역을 감시하던 틈을 이용하여 태국과 인도의 국경지대 광활한 사막 속에서 포로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고 방황하다가 일본 헌병의 추적을 받아 총격전 끝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 비보를 8월 15일 해방 후에야 듣고,
“아, 뜻을 같이 하던 애국자 하나가 가고 말았다.”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註, 태국귀환 동지들이 전언)
4. 고려독립청년당의 구성
일제가 망하기를 빌고 바라며 투쟁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하나 둘이었겠는가. 부산진 서면에서부터 싹튼 사상적 동지들은 결국 자바에 가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반일, 반일로 더욱 굳게 뭉치기 시작하였다. 내가 접선한 인물은 한 고향 친구인 임헌근(林憲根), 박창원(朴昶遠)을 위시하여, 오은석(吳殷錫), 백문기(白文基) 등을 통한 이억관(李億觀)이었고, 지마히에 있는 이원구(李元九)는 내가 접선하여 지마히 세포조직을 부탁하고 나는 반둥 지구당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림 1)
군속시절 왼쪽 낙산 뒤오른쪽 낙산
낙산 숙소 인도네시아 자바 반둥 Houtmanstr 낙산이 기거하던 방(낙산그림)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하게 된 동기는 첫째, 민족적 분노를 풀어 어떻게든 독립의 기틀을 잡으려는 생각에서였고, 둘째, 2년만에 제대, 귀국시켜 준다던 기한이 경과된 후에도 아무 변명도 없이 무한정 부려먹고, 황국신민 정신을 주입시키고, 인간의 기본 자유마저 박탈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적극적 투쟁으로 명령 불복종과, 밤에 철책을 넘어 외출하기, 상관명령 우습게 여기기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런 데에서 반일 사상이 싹터 있는 것을 탐지한 일본인 상관들은 수습책을 강구하였다.
예를 들면 보골 농장을 감시하는 독보엽전(獨步葉錢, 우리민족의 별명)들이 철책을 넘는 무단 외출이 심해지니까 철책에 전류를 가해 사무실에서 자동으로 벨이 울리게 장치하였다. 그러나 독보들은 철사 토막으로 전선을 방전시켜 밤새도록 벨이 울리게 하여 분견소장의 화를 극도로 돋구어 놓았다. (그림 2) 이런 악착같은 투쟁으로 밤마다 비상소집 없는 날이 없었다. 의장을 완비하여 비상소집으로 정렬시킨 후에는
“너희들은 도대체 개만도 못하니 어디다 쓰겠는가? 개도 ‘워리’ 하면 오고 ‘저 개’하면 가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한번 얘기한 것을 못 알아 듣는가? 너희는 차라리 개 밑에 따라 다니는 것이 나을 것인데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는 등 차마 들을 수 없는 욕과 무시로 천대를 받았다. 서서 듣기만 해야 하는 독보들은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는가.
비상소집 당하는 날 밤은 가상적(假想敵)을 설정하여 삼 개 분대로 나누어 방어훈련을 하는데 농장에서 키우는 바나나와 파파야 나무를 꺾어 부러뜨리는 것으로 대장(分遣所長)에게 욕 먹어서 생긴 분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조회에 조장이 점호를 받으러 왔는데 반장이 심드렁한 소리로
“차려, 우로 나란히, 경례.”하자 모두 훈련도 한번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구불구불 제멋대로 정렬하여 경례를 하였다.
“번호.”하고 인원 파악 점호의 호령을 내렸으나 동지들은 킬킬거리면서
“깨갱, 캥.”
“왕왕.”
“쾅, 쾅.”
“멍멍.”등 제멋대로 개 흉내를 내어 조장이 점호를 받을 수 없었다.
조장이 어안이 벙벙하여 무슨 일이냐 묻자 하나가
“우리가 개만도 못 하다기에 개만큼이라도 되어 보려고 개소리로 답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반둥에서는 무로이경부(宝井警部)가 사소한 감정으로 동지 박상준(별명 아히루 [집오리] 部隊長)을 서양인 억류 부녀자 면전에서 구타하여 민족적 모욕감을 주었다. 그러자 박창원, 임헌근을 비롯한 전원이 무로이 경부를 집단 구타하였다. 지휘계층은 이런 사상적 대립과, 집단행동을 막을 길이 없어서 골치를 앓다가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암바라와 군에 있는 스모오노에 교육장을 만들어 불순 분자의 재교육을 시작하였다. (註, 무로이 경부 구타사건은 당시 억류소 통역 보만 오다니 여사가 입증할 수 있다)
스모오노 교육대 건물(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IV 동남아지역에서)
스모오노 교육대로 편입된 동지는 반둥에서 무로이 경부 구타에 앞장섰던 임헌근, 오은석, 박창원, 백문기 등, 바타비아, 보골, 스마랑, 족자카르타 등에서는 이억관, 김현재(金賢宰), 이상문(李相汶), 조규홍(曺圭鴻) 손양섭(孫亮燮) 등이었다. 소위 불순분자들을 모조리 입대시켜서 정신 개조훈련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훈련의 가혹함과 엄격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예컨대, 티 하나, 개어 놓은 옷의 구김살 하나까지 간섭을 하고 사람을 기계화시켰다. 그러나, 훈련이 엄할수록 반일 사상은 더 커져서 동지들은 더 굳게 뭉쳤다.
김현재 동지는 다행히 취사장의 별실에 있었기 때문에 소등 취침 후 의기 상통한 동지들이 하나둘씩 김현재 동지의 방으로 모여 달걀이나 오리알을 사다가 삶아 놓고 위스키나 브랜디를 마셔가며 분노를 풀 길이 없어서 한숨만 쉬었으나 오히려 이를 통해 이심전심 마음이 통하도록 유대가 더 굳어졌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극적인 투쟁으로 나가자, 그러려면 뜻이 맞는 우리끼리 혈맹을 맺는 것이 어떤가?”하는 제의에 취사장에 모였던 전원이 찬성하였다. 당명은 고려독립청년당이라고 정하고 만약, 불행히 발각될 때는 당사자 하나만 책임지고 다른 당원 이름은 누설하지 말자고 하였다. 그래서 각자 손가락을 갈라 술잔에 피를 받아 마시며 맹세하였다. 1944년 12월 29일이었다. (그림 3)
스모오노 교육은 1944년 9월 30일부터 12월 31일까지 약 3개월간 실시되었다. 혈맹 후 총령에 서울 출신 이억관 동지를 선출하고, 책임비서에는 김현재, 총무에 임헌근, 비밀기본당원 손양섭, 조규홍(曹圭鴻), 오은석, 박창원, 이상문, 백문기, 문학선 등과 반둥 책임당원에 안승갑, 지마히 책임당원에 임원근, 암바라와 책임당원에 손양섭, 스마랑, 보골 스라갈타 등 각지에서도 변봉혁(邊鳳赫), 박승욱(朴勝彧), 금인석(琴仁錫) 등 추후로 정당원들을 개별 입당시켰으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여 한이 된다.
우리는 투쟁 방법과 동지규합, 비밀 보전 등에 관한 문제로 긴장된 나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기회만 있으면 토의에 토의를 거듭하였다.
나는 만만디파라 급격파를 달래며 심사숙고하여 처사하자고 정당원들에게 계속 당부하였다. 당원들도 경거망동을 최대의 금물로 규정하여 일거수일투족에 신중을 기하였다.
지긋지긋한 인간개조와 사상전환(思想轉換)을 목적으로 한 스모오노 교육대가 해산될 때 내 접선자 임헌근은 바타비아로 직행하고, 박창원 동지가 반둥에 들려 하룻밤 자고 갈 때에 목적한 거사일이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었다.
16군 사령부에서는 조선인 다루는 데 골치를 앓고 작전 방법도 변경하였다. 사상전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음인지 동지들의 집단행동을 분쇄하기 위해 자바섬 각처의 일본군 부대로 분산 배치시켜 이중감시를 하였다. (註, 분산배속된 명부 일부 보관)
5. 거사 계획
우리는 포로 9만명을 잘만 이용하면 결국 우리 편이 될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졌다. 자바 주둔 일본군인과 군속은 모두 2만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동지 일천명이 군사령부 전부와 탄약고, 무기고, 방송국 등을 점령한 후 9만명 포로를 무장시켜서 일본인들을 모두 무찌르고 자바를 우리 수중에 넣자는 계획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외출이나 출장 시에는 그런 곳의 지세, 경비 상황 등을 상세히 탐사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 신재관(辛在觀, 重光義政)의 밀고로 헌병에게 탐지당하여 임헌근, 박창원, 오은석, 문학선, 백문기 등 당의 중견 5-6명이 말레이지아 포로수용소로 전속받아 싱가폴로 떠나게 되었다.
임헌근 동지는 포로의 지휘자격인 영국인 대령과 데덜란드 대령을 비밀리에 만나 싱가폴로 이송되는 포로 중 선장 노릇할 사람과 기관사와 무전사를 탑승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발각되는 날에는 목이 달아나므로 비밀을 지켜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이송되는 700명 포로 중에 배를 몰 수 있는 사람들을 포함시키고서 승선 준비를 서둘렀다. 자바에서 거사하려던 지하공작이 탄로났기 때문이다. 자바의 거사는 남은 동지들에게 맡기고 두 번째 계획은 항해 도중 배를 탈취하여 포로와 함께 호주로 도망치자는 것이었다.
6. 암바라와 의거와 3의사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1945년 1월 3일, 암바라와 분견소에서 당원 포섭과 반란 준비 총책임자로 지하공작을 하던 손양섭 동지가 말레이지아 포로수용소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손동지는 생각하여 보니 당원 대부분이 전속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정보가 이미 놈들에게 모두 새 나간 것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사나이 태어나서 한번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구차히 오래 살다 왜놈들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이를 다시 생각해보며 포섭한 노병한 민영학 두 동지와 밤새도록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충혈된 눈으로 밤을 새웠다.
1월 3일 오전부터 동료들이 싱가폴 먼 길에 잘 가라고 기원하며 정담을 나누는 송별연이 벌어졌다. 동료들 뿐 아니라 일본인 반장과 상관들도 참석하여 취하도록 마시고 오후 2시경에 헤어졌다. 2차까지 마시고 세 동료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기 침대에다 부모와 동지들에게 유언장을 써 놓았으나 나중에 일인 장교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태워버렸다.
“이왕 큰 뜻 못 이루고 쫓겨가다가 물귀신이 될 바에는 차라리 왜놈들이나 죽이고 말자.”하며 암바라와 분견소 위병소에 보관된 비상용 탄환 수천발과 기관총을 병보(兵補) 위병 (감시인원 부족으로 인도네시아 병보를 모집하여 위병근무를 시키고 있었다)에게 뺏어서 세단차에 싣고 노병한 동지는 차를 운전하고 민영학 동지는 차 위에서 후방을 겨누었다.
손양섭 동지는 사격대회에서 백발백중의 실력으로 표창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앞을 겨누고 달려 나갔다. 그들은 포로수용소 사무실을 비롯하여 장교 관사, 형무소, 우체국 할 것 없이 일인들이 기거하는 장소는 모두 찾아 다니며 쏘아 대 삽시간에 암바라와 시가를 전쟁터로 만들j 놓았다.
난데없는 반란에 민심이 흉흉하여지고 일인들은 영문을 모르고 쥐구멍을 찾았다. 일인들은 세 동지가 말레이지아 포로수용소로 전속 명령받은 것이 억울하여 반항하는 것으로 알고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인만 보면 무조건 쏘아 대는 것을 보고 반일 항거로 깨닫고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헌병대, 포로수용소 경비원, 일반경찰(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간부후보생 합계 약 800 여명이 암바라와시를 이중삼중 포위한 생포 공격전에 동지들의 활동범위는 차츰 좁아졌다.
세 동지가 1944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벌인 싸움에서 일본인 군인과 군속, 방인(邦人) 등 12명을 사살하였고, 유탄에 원주민 몇 명도 부상하였다.
이들의 비장한 최후는 이상문 동지가 저술한 ‘자바의 추억 제1집’의 ‘암바라와 의거의 진상’과 이월출(李月出) 동지가 기록한 ‘암바라와 의거 관전기’에서 살필 수 있다.
암바라와 의거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자바 전도(全島)의 반란을 성공시켜 조국의 명예를 빛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적지 않다. 세 동지의 의거 때문에 당원이 뿔뿔이 홑어지거나 잡혀 들어가서, 반란을 실행할 기회를 일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인들에게 우리 민족을 멸시 천대하고, 영원히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하려던 계획이 헛된 것임을 일깨워주는 데 일조를 하였고, 인도네시아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도록 자극하고, 재자바 제16군 사령부가 조선인 분산배속 재감시 제도로 전략을 변경하게 만든 대사건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죽음이었다.
이들이 섣불리 행동하여 큰 일을 망친 데 대한 아쉬움은 있으나 독립을 위하여 싸운 공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46년 1월 6일 오후 3시. 자카르타 코타에서 거행된 삼의사 위령제. - 일제 강제동원 조선인 동포 1천명 운집. 여성동포들(위안부)은 소복을 입었다.
7. 제2계획의 실패
암바라와에서 의거가 일어나자 사령부는 날짜를 앞당겨 전속명령받은 동지와 싱가폴 이송 포로를 태운 배를 출항시켰다. 물론 상관들은 사전에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암바라와 의거를 모르는 포로수송겸 말레이지아 포로수용소로 전속명령을 받은 임헌근, 박창원 오은석, 문학선 백문기 동지들은 호주로 도망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좋아하였다. 그러나 막상 수송선에 탑승하여 보니 일인 보병 일개 분대가 함께 탑승하여 분대장겸 수송사령관인 고바야시(小林) 소위가 내린 명령은
1. 포로감시는 고바야시 대원이 맡는다.
2. 포로수용소 근무자는 전원 무장 해제하고 상갑판에 올라가서 대공감시에 임한다
라는 것이었으니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동지 중에는 무장 해제 전에 그들을 모두 해치우고 예정 대로 포로 중의 선장, 기관사를 이용하여 연합군에 무전 연락을 하여 연합군 잠수함의 유도를 받아 호주로 바로 가자는 급격파 동지, 좀 더 항해하다가 시기를 보아 왜놈들이 쫓아 올 시간적 여유를 없앤 후에 거사해야 한다는 동지, 현재는 일군의 점령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1개 분대를 섬멸한다고 해도 탈출할 수 없고, 탈출한다고 해도 불과 몇 시간 내에 추격당할 것이라는 신중파가 있었다. 신중파는
“지금 거사하면 명을 재촉할 것이다. 이유는 이미 제2계획이 분명 탄로났기 때문에 저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시련이므로 때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속수무책이 되어 자포자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으나 박헌근 동지가
“싱가폴은 중국대륙과 연결되어 중경(重慶)에 있는 우리나라 임시정부와 연락할 수도 있으니 도착하고 나서 활로를 찾아 보자.”고 제안하여 싱가폴까지 끓는 가슴을 안은 채 의거의 횃불을 올리지 못하고 따라가고 말았다.
수송선이 말레이지아 포로수용소로 전속가는 동지들을 싣고 단종뿌리오구 항을 출발한 후 자바에서는 고려독립청년당의 총령 이억관 동지를 비롯한 혈맹당원들이 암바라와 의거가 있은지 3주 후인 1월 28일에 바타비아 헌병대에 체포되고, 같은 날 스타카르타(솔로) 헌병대에 조규홍 동지와 이상문 동지가 체포되었다. 그들 동지는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다른 동지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고 자기들만 죄를 덮어썼다. 그들은 2월 1일 0시 15분발 자카르타(바타비아)행 급행 열차편에 자바 헌병대 본부로 넘겨졌다. 거기에는 총령 이억관 동지가 이미 수감되어 있었다. 그들 동지는 무서운 고문을 받는 중에도 말을 맞추기 위해 쪽지로 서로 연락하여 기본당원 몇몇의 희생으로 그치고 말았다. 체포당하지 않은 당원들은 전전긍긍 잠을 이루지 못하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이를 갈며 투쟁을 더욱 다짐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8. 제3의 계획
고려독립청년당의 첫 번째 계획인 전자바 반란의 계획을 암바라와 의거가 물거품으로 만들고, 배를 빼앗아 포로와 함께 달아나려던 두 번째 계획도 실패한 후, 총령을 비롯한 중추인물들은 체포됐지만 싱가폴에 상륙한 임헌근 (총령)을 비롯한 동지들은 세 번째 계획으로 중경 임시정부와 연락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포로수송이 끝난 후 2개월간 병참여관(兵站旅館)에 묵으며 중국어에 능한 임헌근 동지가 중국인 화교를 찾아 중경 연락의 길을 찾으려 외출을 자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병참 사령부에서는 다른 동지나 일본인 병졸의 외출이나 공용 외출증은 잘 내 주지 않는 데 반해 임헌근 동지에게만은 공용, 사용 가리지 않고 외출증을 모두 내 주었다. 덕분에 임동지는 동지들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중경 연락로를 개설하려고 화교의 상점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임동지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니 어제도 그제도 본듯한 사람이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들어 유심히 본 결과 미행당하고 있었다. 임동지는 그때부터 조심하느라고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런 와중에서 암바라와 의거 소식을 듣고 통쾌해 마지 않았으나 그 사건 때문에 당의 내막이 탄로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1일 오전 새벽 기상나팔을 불 시간이 아직 한참 남은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하니까 몇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전등을 켜고 싱가폴 주재 헌병사령부의 헌병신분증을 보이면서
“물어볼 것이 있으니 미안하지만 헌병대까지 가셔야 되겠습니다.”고 공손히 말하였다.
동지들은
“암바라와 의거와 관련한 조사인가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안심이다.”라고 나름대로 안위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헌병대에 출두하자 무조건 2개월 감금한 후 자바 헌병대의 체포요청 때문에 체포한 것이니 자바로 가라고 하였다.
“체포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으나
“우리는 모른다. 자바 헌병대의 의뢰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동지들은 제3계획의 실마리도 못 잡고 싱가폴 헌병에게 감시 호송되는 선상에서 암바라와 사건은 모르기 때문에 관련 없다고 하자고 말을 맞추고 1945년 5월 19일(재판 관할상) 자바(바타비아) 헌병대로 인계되어 군법회의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암바라와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고, 비밀결사조직인 고려독립청년당에 관한 것이었다.
동지들은 그런 비밀이 샐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이다. 동지들은 당혹해하면서도 무조건 부인하였으나 취조관은 이미 고려독립청년당에 대하여 상세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어서 결국 자기 자신의 죄만 얘기하였다.
당원은 대부분 자바 고등군법회의에서 오니구라 (鬼倉典正) 검찰관 법무소위가 일본헌병 치안유지법 제1조를 적용하여 구형한 형식적인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판결받아 구로독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억관 (총령) 15년 구형 10년 선고 김현재 (총서) 10년 구형 8년 6개월 선고
임헌근 (총무) 10년 구형 8년 선고 오은석 (기본당원) 8년 구형 7년 선고
조규홍 (기본당원) 8년 구형 7년 선고 박창원 (기본당원) 8년 구형 7년 선고
이상문 (기본당원) 8년 구형 7년 선고 백문기 (기본당원) 8년 구형 7년 선고
문학선 (기본당원) 8년 구형 7년 선고
이것은 당사자로서는 억울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가혹한 형량은 이들이 일본에 대하여 끼친 해가 컸기 때문에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들로서는 재심을 청구할 방법도 없고, 변호사도 살 수 없는 망국의 한 속에 탄식만 하며 인권이란 완전히 말살된 수감 생활을 하였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무릎을 꿇고 앉아 정면만 바라보며 반성하라고 하였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간수에게 심하게 맞았다.
이마에 파리라도 앉으면
“간수님.”
“뭐야.”
“이마에 파리가 앉았는데 잡아도 됩니까?”
“좋아.”하는 승낙을 받아야 했다.
승낙 받지 않고 파리를 쫓으려고 움직이면 심하게 맞았다. 이런 인간 이하의 대접에, 피끓는 청년들의 민족혼이 어찌 독립운동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체포당한 동지들에게 감사한 것은 자신의 죄만 자백하고 다른 당원들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아 스마랑, 반둥, 지마히, 보골, 암바라와 등에 있던 정당원들이 잡히지 않도록 한 점이다. (註, 鬼倉典正씨는 현재 일본 동경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으므로 군법회의 공판장을 입증시킬 수 있음)
9. 정당원 체포 이후
정당원들 태반이 형무소에 수감된 후 나는 반둥에서 투쟁방법을 변경하였다. 나는 지하벳 억류소 내 억류자 2만여명에게 반항의식을 고취시켰다. 열 세 살 이하 아홉 살 이상의 어린이들에게는
“너희들은 커서 자립할 토대를 닦기 위하여 노동을 배워야 한다.”하면서 화원을 개간시켜 부족한 과실과 채소를 재배시키고, 빵 한 조각씩을 더 주었다. 이를 통해 포로들의 실력 배양에 힘썼다. 그러나, 제16군 사령부가 반둥으로 이전되어 왔으므로 전복책(顚覆策)을 강구하느라 주야로 고심하였다.
당시 반둥 포로수용소 제1분견소에 근무하던 김만수, 조남형 동지들은 반항의 방법으로, 포로들의 외부 연락과 실력 배양에 힘썼다. 이것은 네덜란드 칸나벡 백작이 입증하여 주었다. 현재 김만수 동지가 자바에 다시 건너가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다.
일인 상관들은 내가 실시한 억류자 통솔, 질서유지, 식량 자급생산 등에 만족하여 파란 헝겁 조각에 별 하나 달린 정려장(精勵章)이라는 기장을 수여한다고 하였다. 나는 통지는 받았으나 억류자의 점호를 취한다는 명분으로 시상식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자 집합하여 기다리던 가와미나미 (河南) 중좌(中佐)를 비롯한 직원 모두 화가 잔뜩 났다. 다음날 나는 소네(曺根) 조장(曹長)에게 한참 야단을 맞았다.
나는 남에게 직접 대들지 않는 성격이라 듣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야단친다 하더라도 내가 그 정려장이라는 것을 달고 다니겠는가?(註, 이 사실은 姜炯烈 입증)
이렇게 생활하던 중 하늘은 무심하지 않아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드디어 우리 민족에게도 태양이 빛나게 된 것이다.
전부터 나는 일본이 패망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의 야마모도이소로구(山本五十六) 제독의 전사 뒤의 잇달은 패전과, 집에서 보내오는 소식에서 국내 고갈 상황이 심각한 것을 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은 미국의 방송이었다. 7월 어느 날 라디오 다이알을 돌리다 보니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오래 된 일본 음악이 나온 뒤
[일본인 여러분, 다음에 말씀드리는 10개 도시에 살거나 친척이 있는 분들은 바로 피난 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난 가도록 알리기 바랍니다. 군수공장을 폭격할 예정이고, 폭탄에는 눈이 없어서 여러분 집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난하여 목숨을 건지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고 군수공장만 파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음 10개 도시 주민들은 반드시 피난가야 합니다. 나고야, 오사카, 교토, 요코하마, 히로시마, .....]
이 방송을 처음 들었을 때는 심리 작전이려니 하였으나, 같은 방송을 일 주일 이상 계속하던 중 8월 9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일본은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는 8월 15일 일본천황의 특별 방송이 있은 후 옥중에서 8개월 내지 5개월간 고생하던 동지들을 속히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절차가 있으니 기다리라고 한 후, 수감된 동지들에게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것은 알리지 않고 자바 군정감부선표부장(軍政監部宣漂部長)인 허영(許泳, 日夏英太郞)을 시켜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유대가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양국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며칠이나회유하였다.
마스기(馬彬,) 참모는 아예
“너희들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들 몇몇이 그까짓 당이나 결사대를 만들어서 떠들어 보았자 성공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보건대 너희들은 세 사람이 모이면 3당을 만드는 민족이기 때문에 결국 또 분열되므로, 우리 야마토민족(大和民族 = 일본 민족)이 돌보아 주지 않았으면 벌써 망해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좋으니 죄를 뉘우치고 공존공영(共存共榮)함이 좋지 않겠느냐.”며 오만하게 협박과 멸시를 하여 울화통에 불을 질러 놓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단점도 있으니 가슴은 더 터졌다.
제16군 구류소에서 복역중이던 동지들은 연합군 명령으로 1945년 9월 4일 구출되어 재자바 조선인민회 바타비아 본부에서 간호하였다. 그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이 노랗게 되고 부어 있었다. (사진 7)
당원들은 투쟁 대상이었던 일본이 패망하였기 때문에 당을 재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중에는 당적 체계로 귀국하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국내에는 이미 370여 개의 당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까지 다시 당을 하나 더 만들면 숫자만 늘리므로 그만 두자는 주장이 우세하였다.
우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濟家治國平天下)의 이념으로 실질 생활을 통해 조국에 이바지하고자 개인 자격으로 분산 귀국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려독립청년당의 공훈이나 내용은 한 마디도 공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정부에서 의사나 열사를 발굴하여 국가 정기를 바로 세우는 마당에 자바 암바라와에서 의거하여 순사한 세 동지의 업적을 밝히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만분의 일이라도 투쟁 기록을 발표하는 것이 세 영령을 위로할 수 있는 길로 여겨 나는 펜을 든 것이다.
손양섭, 노병한, 민영학 세 동지가 암바라와에서 의거한 기록과 입증서류, 자바에서의 활동 입증서류는 내가 모두 보관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계기관의 요구에 언제든지 제시할 수 있다.
고려독립청년당의 정강정책 등은 성문화하지 않았으나, 1 반일, 2 항일 독립, 3 결사독립이었다. 우리는 자바의 추억 제1집에 수록된 당가(黨歌)와, 구호(口號)인 결사독립만으로 행동의 통일과 체계를 유지하며 2년 이상 결사 투쟁하였던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재자바 조선인민회 반둥지부에서 발간한 ‘活報’ 속에 게재되어 있으나 귀국시 스크링 캠프에서 뺏겼다. 그러나 반둥 화교에게 서너권 보관되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찾아다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끝맺음에 즈음하여 세 동지의 영령 앞에 진상을 너무 늦게 알리게 된 점을 사죄하며 이제는 독립된 고국의 품에 고히 잠들기 바란다.
(註, 손양섭, 노병한, 민영학 세 의사의 유골은 바타비아 일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낙산이 스케치한 구로독 수용소
1945년 12월 16일 재자바 조선인민회 반둥지부원 사진(지부장 안승갑선생)
둘째줄 ←8번째 선그라스낀 사람 낙산
1945년 12월 16일. 낙산이 반둥(공과)대학 교정에 세운 독립기념비와 낙산안승갑선생
후기
뒤에 안 일로, 충북 제천 출신의 신재관(辛在觀, 重光義政)이라는 사람이 고려독립청년당을 밀고하였다. 그는 매일 우리에 대한 정보를 헌병대에 알리고, 당간부 대부분이 체포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이 패망하고 독립이 되었기로 그 사실을 불문에 부치고 말았다.
나아가, ‘實話’지에서 신모는 고려독립청년당의 활동을 김모와 자기네의 업적으로 꾸몄다. 우리는 동맹통신에 있던 신경철을 통하여 싱가폴로 연락한 일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개탄을 금할 길 없다.
글을 마무리하려는 데 조국에는 제3공화국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영령들이여 다시 한번 살펴 보시라
1957년 2월 잊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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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슬프네요ᆢ
가슴이 아파오고....
이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ᆢ라는 문구가ᆢ가슴이 메어오게하네요ᆞ그리고 잊혀지지 않은 날들에 대한 그 지난세월들을ᆢ그 아픔들을 어찌 보내셨을지ᆢ
우린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런지요ᆞ
아들되신 안용근 교수님 심정을 생각하니ᆢ
말문이 막힙니다ᆢㅠㅠ
'일제 강제동원 조선인 동포 1천명 운집. 여성동포들(위안부)은 소복을 입었다.' 이 사진과 말을 보고나서 지금도 보상을 못받고잇는데 거기에대해 반감이 들었다.
잘보고갑니다.
당시 사회에 대해 잘 알았으며, 독립청년당과 세 의사에게 감사드린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적 자료 감사드립니다.
독립청년당분들이 계시기에 저희가 이렇게 잘 살고있는것 같습니다.
독립 청년당분들 너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