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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미국, 240여년이란 짧은 역사 동안 어떻게 오늘날의 세계 최강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그 답을 찾아가는 미국 동부 역사기행, 오늘은 이 이민자의 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미국 건국의 시조를 찾아 떠납니다.
북미 대륙의 거대한 나라 미국, 그 동부지역은 이 땅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 이주민들의 정착과 식민시대, 독립혁명 그리고 남북전쟁까지 그 역사를 밟아가는 이번 여행, 첫 여정은 초기 유럽 이주민들의 삶을 찾아 플리머스에서 브리틀버로로 향합니다.
미국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은 미국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중 매사추세츠 주, 대서양에 연한 항구도시 플리머스는 미국 건국에 있어 아주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플리머스(Plymouth)-뉴잉글랜드에 최초로 세워진 유럽인 영국 정착지로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에 위치. 이곳이 바로 ‘플리머스’라고 하는 곳입니다.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죠. 1620년에 영국의 ‘필그림 파더스 (Pilgrim Fathers; 순례의 조상들)’ 라고 하는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을 오게 됩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1620년 9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실은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 그들이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66일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신전 처럼 생긴 건물이 굉장히 중요한 돌맹이 하나를 품고 있는 그런 건물입니다. 바로 이 돌맹이죠. 필그림 파더스, 즉 순례의 아버지들이라는 영국 청교도들이 이 땅으로 와서 최초로 밟았다고 전해지는 돌입니다.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1620년 ‘매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이주해온 청교도들이 상륙할 때 처음 밟았다고 전해지는 바위.
어떻게 보면 필그림 파더스가 도착한 첫번째 도시가 바로 이 플리머스 라는 곳이고요. 그중에서도 이 바위가 있는 이곳이 그들이 상륙한 바로 그 지점입니다. 미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국가가 이 작은 곳에서 시작됐다는 거죠. 초기 정착민들의 용기와 담력이 이 나라의 초석이 된 거죠.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영국에서는 ‘국교회(성공회)’라고 하는 종파가 헨리 8세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종파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조금 보수적인 가톨릭과 조금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프로테스탄트’ 신교 사이에서 중심을 잡았던 종교죠.
그런데 이곳에 왔던 청교도들은 진보와 개혁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것들을 주장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 따라서 그대로 따라야 한다. 그들이 보기에 국교회나 가톨릭은 용서할 수 없는 종파였던 거예요. 그런데 영국의 중심은 국교회 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탄압을 받았고 탄압을 견디지 못해서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곳까지 온 거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순례자들이라고 하는 필그림 파더스들이 이 뉴잉글랜드에 도착했을 때 당시 자연환경이 얼마나 가혹했느냐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증거물이 바로 눈 앞에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무덤입니다. 그들이 도착했던 첫해에 104명이 죽었고 그 104명을 이곳에 합장한 겁니다.
이곳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와 30여명의 선원은 아무 준비 없이 맞은 첫해 겨울에 추위, 굶주림 그리고 질병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도 구세주가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살던 왐파노아그 원주민들인데요. 당시 영국 청교도들에게 물고기를 잡고 옥수수 기르는 법을 가르쳐준 이들입니다. 마사소이트(Massasoit)-왐파노아그 (Wampanoag) 부족의 추장으로 영국 청교도의 정착을 도운 원주민.
그렇게 다음해 청교도들은 왐파노아그 부족과 함께 첫 추수감사절을 맞게 됩니다. 결국 원주민의 도움으로 정착에 성공하게 된 거죠. 이후에도 원주민들은 초기 정착민들에게 이곳에서의 생존법을 알려 주었는데요. 초기 정착민들은 추운 겨울에 싱싱한 채소를 먹기 어려워서 비타민 결핍 증으로 인한 병으로 많이 시달렸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원주민들이 단풍나무 수액채취하는 걸 가르쳐준 거죠. 브래틀버로(Bratleboro)-버몬트(Vermont)주 남동부의 도시로, 사탕 단풍나무의 주 서식지.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미국 북부와 캐나다 동부지방에서는 따뜻한 낮기온 덕에 겨울 잠에서 깨어난 사탕 단풍나무의 수액이 생성되기 시작하는데요. 사탕단풍나무(Sugar maple)-주로 북아메리카에 분포하는 단풍나무의 일종으로 그 수액은 메이플 시럽의 주원료가 됨. 이 수액을 채취해 생산하는 것이 바로 버몬트 주의 특산물 메이플 시럽입니다. 고마워요. 보통 2월말에서 4월까지 작업을 하는데 나무수령이 40년은 돼야 수액을 채취할 수 있답니다. 나뭇가지에서 막 나온 신선한 수액, 과연 그 맛은 어떨까요. 아무 맛이 없어요.
고로쇠 물도 이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고로쇠 물보다도 아무 맛이 없어요. 진짜 맹물인데 결국은 이 맹물을 계속 단맛이 날 때까지 끓인다는 거잖아요. 수액을 뽑기 위해서 일단 구멍을 뚫어요. 1.5인치 정도되는 구멍이죠. 그리고 관을 구멍에 넣고 호스를 연결합니다. 그러면 수액이 이 호스를 따라서 주호스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지금은 좀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수액을 모우지만 사실 수액의 양과 질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이 결정합니다. 보통 일교차가 10도 정도는 벌어져야 가능하답니다.
대자연이 모든 것을 관장합니다. 자연이 모든 걸 통제하죠. 특히 수액을 잘 뽑기 위해서는 알맞은 온도가 필요한대 낮에는 40도F(약 4.5C), 밤에는 20도F(약 -6.7도C) 정도가 적절합니다. 여기 지금 수액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정말 줄줄이 오고 있습니다. 이 버몬트가 날씨가 만만치 않거든요. 지금 3월 중순인데 눈 쌓인거 보세요. 밤이 되면 (체감온도) 영하 20도입니다. 이곳에 오니까 1620년에 대서양을 건너 왔던 이 메이플라워호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정말로 이 척박한 땅에 그들은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고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런 메이플 시럽 같은 것으로 당분을 섭취하면서 살아남은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미국이 만들어지는데 기여를 했던 거죠.
진짜 이 매사추세츠주와 버몬트주는 미국의 근원이 남아있는 그런 곳이예요. 즉 미국의 초창기 역사가 간직된 그런 땅이죠. 그래서 일까요. 이곳은 마치 과거로 온듯한 느낌을 주는데요. 이제 채취한 수액으로 메이플 시럽을 만들러 갑니다. 수액이 이 탱크로 들어오는데 이 안에는 1000갤런 정도가 모여요. 1000갤런이면 약 3800리터인데 그 어마어마한 양의 수액을 이곳에서 끓여 메이플 시럽을 만듭니다. 땔감으로는 여전히 나무장작을 씁니다. 제가 갑자기 이 나무를 때는 것과 쌓여있는 장작개비를 보면서 느껴지는 건 이 뉴잉글랜드를 개척한 사람들의 강인함,
원래 이 아메리카를 개척한 사람들은 크리스토퍼 컬럼버스를 선두로 한 스페인 사람들이잖아요. 그 다음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왔고요. 그런데 뒤늦게 합류한 영국 사람들은 이 척박한 뉴잉글랜드에 와서 이 자연을 개척하면서 여기에 뿌리를 박았던 거거든요. 스페인 사람들과 포르투갈 사람들은 황금을 찾았죠. 일확천금. 누군가는 보물을 찾고 누군가는 이곳에서 삶을 개척하고 결국 삶을 개척했던 이 사람들이 이 북아메리카의 주인이 그리고 이제 이런 미국이라는 큰 나라를 만드는데 주역이 됐던 겁니다.
그런 강인함, 저는 이 나무 창고에서 느껴지네요. 4500 그루에서 나온 수액을 여기에 모아서 지금 이제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산소를 주입해서 날리고 있는 거거든요. 마치 정말 용암이 끓듯이 막 끓어요. 저도 맛 봤지만 처음 나무에서 얻어낸 수액은 당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이렇게 끓이고 졸여서 수분을 없애고 당도를 높이는 거죠. 그리고 드디어 만들어진 메이플 시럽, 그 옛날에는 이걸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요. 메이플 시럽(Maple Syrup)-사탕 단풍나무의 수액으로 만든 시럽.
결국은 여기에 정착했던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이런 메이플 시럽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 속에 필요한 당분을 확보를 했던 거죠. 그걸 보면 그 강인함 속에서 어떤 처절함 같은 것도 느껴지고 해서 참 예사롭지 않은 그런 시럽입니다. 대자연의 순리와 인간의 노력이 빚어낸 이 달콤한 맛은 이 땅이 선사한 선물입니다. 그 달콤한 맛을 안볼 수는 없겠죠. 이곳의 농장 주인이 선뜻 저를 집으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분이 여기 주인 할머님이세요. 팬케이크 한번 먹어 볼래요? 네, 팬케이크를 맛보기 전에 메이플 시럽부터 맛을 볼까요? 메이플 시럽과 팬케이크는 그야말로 찰떡 궁합이죠. 밀가루 반죽으로 간단하게 요리하는 팬케이크는 사실 전세계 여러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먹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패케이크는 북미 스타일인데요. 정말 완벽하게 맛있는 브라운 색이죠. 미국과 캐나다에선 두껍게 만들어 주로 아침 식사로 먹습니다. 고소한 냄새가 절로 식욕을 자극합니다. 전 몰랐는데 저희는 애플 시럽을 넣잖아요. 여기는 이걸 전자 레인지에 약간 데워요. 그러니까 이걸 따뜻하게 해서, 더 넣어요 더, 더요? 네, 더 넣어요. 먹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괜찮다고요? 이렇게 과감하게 쏟아 부어야 한다는데 더 넣을래요?
메이플 시럽 홍수 속에 팬케이크, 과연 그 맛은 어떨까요? 너무 부드러워요. 너무 부드럽고 이 버터에 약간 짭짜롭한 맛하고 메이플 시럽의 달콤한 맛이. 너무 맛있어서 다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요. 정말 맛 있어요. 특히 이렇게 방금 만든 팬케이크랑 먹는 건 정말 맛있죠. 메이플 시럽의 달콤함 속에는 초기 정착민들의 삶도 함께 녹아 있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에서 시작한 미국의 건국역사, 이제 그 여정은 세일럼을 거쳐 보스턴으로 향합니다. 세일럼(Salem)-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에 위치한 도시로 1692년의 마녀 재판과 관련된 문화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음.
버몬트 주의 브래틀보러에서 당시 동쪽으로 작은 도시 세일럼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미국 역사에서 마녀재판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명성 때문인지 도시는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듯 꾸며져 있는데요. 지금 바람은 굉장히 차지만 진짜 하늘이 청명하거든요. 그렇지만 17세기에 이곳은 이런 분위기의 도시가 아니었죠. 정말 마녀 사냥과 마녀 재판으로 암울했던 그런 도시입니다. 지금 제 눈 앞에 보이는 이 동상이 미국이 자랑하는 ‘나다니엘 호손’ 우리한테는 <주홍글씨>로 널리 알려진 작가인데 바로 이 도시 출신입니다.
미국 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나다니엘 호손은 이곳 뉴잉글랜드 지역의 청교도를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썼죠.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그의 대표작 <주홍글씨>는 19세기 미국 대표소설 중 하나로 꼽힘. 그와 함께 마녀의 도시로 기억되는 이곳엔 17, 18세기 건축물이 많이 있는데요. 그 중엔 마녀 재판의 현장을 말해 주는 장소도 있습니다. Salem Witch Museum-Witch House. 마녀의 집 (The Witch House)-1692년 마녀 재판으로 19명을 교수대로 보냈던 코윈(Corwin) 판사의 집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음.
당시 이곳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이게 매사추세츠 주의 세일럼에 있는 마녀의 집입니다. 근데 실질적으로는 마녀가 살았던 집은 아니고, 1692년에 마녀 사냥의 광풍이 불 때, 굉장히 중요한 재판관 중의 한 명이 살았던 집이라고 합니다. 지금 바로 이 집 현관에 장식돼 있는 이 인형하고 이런 신발 조각들이 1692년 마녀 사냥이 한창일 때 사람들이 집에서 발견한 그 사람을 마녀라고 몰아갈 수 있는 증거들이었거든요. 어느 날 마을 소녀들이 갑자기 일으킨 발작을 마녀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시작된 마녀사냥, 이 재판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는데요.
1692년 5월부터 10월까지 185명을 체포해 19명이 교수형을 당하는 등 모두 25명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죠. 여기 굉장히 재미있는 게 있네요. 지금 여기 이 서류에 재판관들이 사인했는데 보시면 이 집 주인인 ‘조나단 코윈(Jonathan Corwin)’이 있고 그 위에 ‘존 호손 (John Hawthorne)’ 이라고 하는 사인이 보이거든요. 이 존 호손이 바로 <주홍글씨> 작가인 ‘나다니엘 호손’의 고조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굉장히 아이러니컬한 일인데 나다니엘 호손 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고조 할아버지가 이 마녀 재판의 주요 재판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에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게 평생 본인이 풀어야 할 어떤 숙제 같은 것,
우리 할아비지가 그런 말도 안되는 마녀 재판의 재판장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속죄의 마음으로 <주홍글씨>를 썼다는 평가가 대부분 이죠. 사실 이 마녀 재판은 중세 유럽에서 이단을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게 싫어서 이곳까지 오게된 청교도들이 또다시 자행한 종교적 탄압, 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계기가 됩니다. 근데 결과적으로 미국이라는 사회가 왜 자유의 세계를, 자유의 사상을 가지게 됐느냐. 이런 종교 재판들과 마녀 사냥이 많은 양심 있는 사람들과 지식인들한테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된 거예요.
결국은 이런 게 잘못됐다는 걸 깨닫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로 돌아가자고 하는 근본적인 목소리를 내게 되는 거죠. 결국은 청교도 주의가 쇠퇴하고 미국은 종교의 자유가 확립된 국가를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국의 역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자유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걷다보면 여전히 그 악명 높았던 마녀재판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녀의 도시 한 복판에 공동묘지가 있으니까 정말 세일럼 이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제 앞에 놓여있는 이 공간이 1692년 마녀재판 당시에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추모공간입니다.
1992년에 그러니까 마녀사냥이 있고 나서 300년 뒤에 그 당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이런 일을 다시 되풀이 하지 말아야겠다는 세일럼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서 이 추모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거죠. 호손이 말했던 우리 역사에서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인 마녀재판, 이곳에서 그 역사의 교훈을 다시 새겨봅니다. 세일럼 마녀 재판 희생자 추모공간 (Salem Witch Trials Memoriel).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 신대륙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그들은 본격적으로 식민지정책을 추진해 마침내 18세기 중엽까지 13개주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됩니다. 하지만 식민지로써 발전한 신대륙 미국은 점차 본국인 영국과 갈등을 빚게 되고 결국 독립혁명을 하게 되는데요.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이 바로 미국 독립혁명을 이끈 도시입니다. 보스턴 도시 중심엔 붉은 선으로 표시된 프리덤 트레일, 즉 자유의 길이 있습니다.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보스턴에 위치한 16개의 유명한 역사 유적지들을 하나의 코스로 엮은 길. 이 길을 통해 미국독립의 주요 역사 현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보스턴에 있는 프리덤 트레일은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라고 하는 우리한테 잘 알려진 자유를 향한 투쟁을 의미하는 사건. 그 사건을 계기로 전후에 일어났던 아주 다양한 분쟁이랄까요. 그런 계기들이 된 장소들을 모아놓고 그걸 이동하기 쉽게 한 줄로 쭉 엮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독립 전쟁 초기의 모든 것들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거죠. 지금 제 눈 앞에 보이는 저 황금 돔이 이 매사추세츠주, 그리고 보스턴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1798년 완성된 이 매사추세츠 주의사당(Massachusetts State House)은 보스턴 출신의 건축가 찰스 볼핀씨가 설계한 것인데요. 이후 이 중앙돔이 미국의사당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이 됩니다. 그렇게 프리덤 트레일은 미국의 자유와 독립, 새 국가에 대한 희망이 이어져 있죠. 그 길에서 저는 미국 독립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한 장을 만났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의 선박과 박물관 (Boston Tea Party Ship and Museum). 지금 제 눈 앞에 보이는 저 배가 바로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졌던 그 배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독립혁명이 바로 저 배 위에서 차를 이 바다에다 던지는 거로부터 시작된 거죠. 지금 보스턴 차 사건의 바로 그 역사적인 현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18세기에 이 작은 배를 타고 런던에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12월에 몇몇 보스턴 시민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영국선박에 난입해 차 상자를 바다에 내던진 사건입니다.
이곳에 있던 세 척의 영국 무역선에는 총 342개의 차 상자가 있었는데요. 이는 결국 영국의 과도한 세금에 항의해 벌어진 사건입니다. 미국의 독립혁명 이라는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거대한 목표에서 시작된 게 아니거든요? 사실 출발은 굉장히 작은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세금문제죠. 18세기 내내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두고 전 세계에서 경쟁을 벌여요. 결국은 영국이 승리를 거두지만 큰 빚을 지게 되죠. 그 빚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영국정부는 이곳 식민지 사람들한테 세금을 매긴 겁니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구호가 나옵니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대표없이 과세없다.” 결국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뜻인데요. 우리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못하는데 왜 우리가 세금을 내야 하느냐. 우리에게는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다. 거기에 대해서 식민지 사람들이 저항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저항이 바로 이곳 보스턴 항구에서 바로 이 배에서 차를 바다에 던지는 거로 나타난 거죠. 이로써 미국 독립혁명의 불을 지핀겁니다. 지금 이 분들이 저희한테 퍼포먼스를 대행해 주실 분들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브리비버 호에 타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 이름은 데이비드 브래들리입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 기쁘군요.
영국에서 온 찻잎을 버릴 준비가 되셨나요? 그럼요, 준비됐어요. 저희를 도와서 찻 잎을 함께 버려 보실래요? 좋아요, 일을 시작해 보죠. 여기 일을 도와줄 제 친구들도 와 있습니다. 다 함께 찻 잎을 버리기로 하죠. 친구들, 어서 일을 끝내버리자고! 지금 이 분들이 차를 던지는 건데 사실 장난삼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로 분노와 애국적인 열정으로 정말 이분들한테 그런게 느껴지네요. 저도 함께 던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던져 볼까요? 상자를 하나 드세요. 준비 되셨나요? 셋을 세면 던지겠습니다. 하나! 둘! 셋! Hurrah (만세)!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대표 없이 과세 없다). 감동적이지 않나요?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정말로 모든 시민 사회혁명의 원천이 되는 구호입니다. 여기서 또 이런 걸 들으니까 굉징히 감회가 색 다른데요.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경험 이셨길 바랍니다. 이곳에선 한가지 체험을 더 할 수 있는데요. 지금 이곳이 그 보스턴 티 파티가 열렸던 그 장소 2층에 만들어진 작은 티룸이거든요. 역사적이었던 그날 바다에 버려졌던 5가지 티를 마련해 놓고 맛볼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그 날밤 보스턴 시민들이 티 파티가 있었던 보스턴 항구는 사실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이렇게 한적해 보이지만 1770년대 미국이 독립혁명을 일으키던 그 당시만 해도 런던으로부터 가지고 온 수많은 차가 쌓이던 가장 중요한 선착장이었죠. 단순한 기호식품이었던 차가 어떻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일까요. 미국이 혁명을 일으키던 그 당시만 해도 이게 향신료 만큼이나 귀하고 미국인들이 거의 매일 같이 마시던 그런 일상품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다가 세금을 매긴다고 하니까 미국인들이 느끼기에는 영국 정부가 이 차를 수입하는 동인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들의 일상 속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이 차를 버리는 보스턴 차 사건으로 저항의 표현이 나타나게 된 겁니다. 근원을 따져보면 그래서 ‘스타벅스’ 같은 제국이 미국에서 탄생하게 된 겁니다. 이때부터 미국사람들은 영국을 반대하는 의미로 차 대신에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커피산업이 미국에서 발달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하나의 기호품이 세상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는게 재미 있습니다. 맛도 있고요. 보스턴은 자유를 향한 투쟁, 그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역사도시입니다. 그런데 보스턴 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제가 지금 보스턴이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집이 생각보다 굉장히 소박한데요. 존 피처랄드 케네디 국립 사적지 (John Fitzgerald Kennedy National Historic Site). 올해가 마침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탄생 100주년 입니다.
존 F. 케네디 (1917~1963) 미국 제35대 대통령. 반갑습니다. 고마워요. 반갑습니다. 이곳은 1914년 케네디의 아버지인 죠셉 패트릭 케네디가 구입한 집으로 케네디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입니다. 2층으로 한번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곳이 바로 케네디 대통령이 태어난 방입니다. 지금 이 두 침대가 비슷해 보이지만 제가 잡고 있는 이 침대가 케네디 대통령이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00년 전에 1917년에 태어났던 침대입니다. 태어난 침대는 이렇게 작은데 작은 아이가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맨 윗줄이 지금 케네디 보다 두 살 위였던 형 ‘조셉 케네디 2세’ 사진들이고요.
두번째 줄에 있는게 ‘존 F. 케네디’의 사진들입니다. 9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를 대통령으로 키운 건 바로 그의 어머니 로즈 케네디 입니다. 아더 왕 전설 (Arthurian Legend)-아더 왕과 그의 기사들의 영웅적인 모험 이야기, 기사도의 미덕이 드러나는 내용이 주를 이룸. 로즈 여사는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을 중시했는데요. 케네디는 특히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과 같은 모험담을 즐겨 읽었죠.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보면 기사도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이상과 꿈이 있고 뭔가 성배를 찾아가는 과정, 어떻게 보면 케네디가 이상적인 정치가였거든요.
현실 속에서 이상을 꿈꾸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린 시절에 이런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런 정치적인 상상력과 이상을 갖게 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머니의 독서교육이 중요하다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국 정치계에서도 유명하기로 소문난 케네디家 뒤에는 어머니 로즈 여사의 열정적인 교육이 있었답니다. 제가 아까 들어오면서 이 집이 생각보다 굉장히 소박하다 그랬었는데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들어와 보니까 이 작은 화장실 안에 어떻게 보면 20세기 최첨단의 시설들이 다 있어요. 수세식 변기부터 시작해서 세면대, 욕실에다가 라디에이터까지 어떻게 보면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최첨단 문명이 이 화장실에 집약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100년 전에 결국 케네디 라는 사람이 20세기 미국의 국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21세기 때 태어나서 그 부와 문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으면서 자라난 세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자기 국가와 문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이제 냉전기간 동안 소련에 맞서서 인류의 어떤 자유,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확신을 하게되지 않았을까 라는게 태어난 곳에서 느껴집니다. 당시 미국의 풍요로운 환경과 부모님의 열성적인 교육을 통해 케네디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케네디 집을 둘러 보니까 케네디가 얼마나 부유한 가운데 현대적 물질문명의 혜택을 보면서 자랐나 하는게 잘 느껴지거든요. 그러면 왜 2017년에 케네디일까. 어떻게 보면 케네디가 대통령을 하던 1960년대 초반은 미국이 케네디 입을 통해서 자유를 얘기하고 세계의 인권과 진보를 얘기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57년이 지난 오늘날의 미국은 only America (오직 미국만) 미국만을 얘기하고 미국의 번영과 일자리만을 얘기하는 그만큼 미국이 변했다는 거죠.
문제는 미국이 변하면 세계가 다 변해야 한다는 것, 이제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겁니다. 케네디가 얘기했던 뉴 프론티어(New Frontier, 새로운 개척정신), 인류는 다시 뉴 프런티어에 섰다 이런 의미가 있죠. 자유를 향한 갈망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개척정신, 이것이 여전히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 갑니다. 끝. (EBS 세계테마기행 제217회 에서발췌).
(1). 1980년 의정부 한미야전사 장군식당 (CG's Mess Hall)에서 식사할 때 점심 메뉴로 팬케이크와 시럽이 나와서 먹은 일이 있었다. 그 시럽이 300년전 청교도들이 최초로 미국 버몬트주 브래틀버러에서 춥고 척박한 땅에서 인디언의 도움을 받아 생존을 위해서 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한 활동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생산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기쁘다
(2). 1620년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1692년에 세일럼에서 종교를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다 보니까 여자 19명을 사소한 증거로 마녀라는 누명을 씌워 재판을 해서 죽게했다는 것은 종교적인 큰 충격이었고 실수였다. 그로 인해 미국에서는 법으로 누구나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주홍글씨로 유명한 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증조할아버지가 17세기 마녀재판에 참여 서명한 판사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3). 비슷한 맥락에서 1761년 10월 13일에 프랑스의 칼라스 집안에서 어느날 장남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다음날 그의 아버지가 살인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유는 부자지간에 종교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은지 3년후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노력으로 칼라스의 무죄가 밝혀졌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유럽에서는 사형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또 1927년 미국연방 대법원의 캐리벅 사건재판도 같은 맥락에서 판사의 잘못된 판결이었다. 어느날 한 법대생이 캐리벅 사건을 신문뉴스로 보고는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처벌하는 어려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