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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시호를 받으신 역사인물 12명
고려시대
1. 지용수 [고려의 명장 경주지씨]
2, 박병묵 [고려 평장사. 나주박씨]
3, 최필달 [강릉최씨]
조선시대
4. 조영무 [한양조씨]
5, 남 이 [의령남씨]
6, 이 준 [전주이씨]
7, 이순신 [덕수이씨]
8, 김시민 [ (구)안동김씨]
9, 이수일 [경주이씨]
10,정충신 [금성정씨]
11,구인후 [능성구씨]
12,김응하 [철원김씨(안동김씨)]
1)지용수 [池龍壽, ?~?]고려의 명장. 시호 충무(忠武). 개성 출생.
본관은 경주, 호는 월송이며 태어난 해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주지씨 시조 대학자 문성공 지원부의 손자이다.공은 생존연대는 1270~1280년대 사이에 태어났나고 합니다. 또 어떤기록 1300년대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이것 잘못된 기록입니다.
공은 충의공 지용도의 동생이며 청백리 최만리의 외조부이다. 공은 매제인 성여완(1309~1397)의 조부 성공필이다. 131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목왕때 현응직에 보임되시고 공민왕 때 안우등을 따라 옹건적을 쳐서 서울을 수복하였으므로 일등공신에 오르셨다. 이어서 판적객시사를 제수하고 전공판서로 옮기고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다.
전객시는 뒤에 예빈사로 바뀌었는데 나라의 손님이나 왕족, 재상에게 대접하는 연화, 궁중의 제사 드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판사는 이의 가장 으뜸벼슬로서 당시에 정삼펌의 서열로 보하였다. 전공판서도 인조의 공종판서에 해당되는 벼슬로 오늘날의 장관급이며 공신의 호는 그때그때 공적에 따라 뜻을 붙여 이름을 삼았다.
공민왕1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경북 안동으로 옮겼던 왕의 일행이 난이 편정된뒤 환도하던중에 개경남족의 흥왕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근신 김용이 원나라에 머무르던 최유등과 내응하여 행궁을 침범하였는데 왕이 몸을 피하여 실패하더니 최유가 다시 워나라 순제의 왕후가 되었던 기씨들 달래어 순제를 움직여 공민왕을 폐하고 당시 원나라에 가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을 옹립하려고 요양의 군사를 몰아 국경을 침범하였는데 충무공 지용수꼐서 최영, 이성계 등과 더불어 이를 물리쳤으므로 다시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추가하여 받고 동지밀직사사에 오르셨다.
그뒤로 첨의평리, 지문찬성사를 지내시더니 이어서 서북면상원수겸평양윤이 되었다.
공민왕 18년에는 원나라가 중국에 새로 일어난 명나라에 쫓기어 개평으로 옮긴 뒤 원나라 평장이란 벼슬로 있던 고려인 기새인첩목아란 자가 지금의 만주땅 개원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본국을 침범하려함으로 공민왕이 옛 고구려땅 요동을 회복하려는 야망으로 이들을 친다는 명목을 붙여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충무공 지용수를 서북면상원수로 삼아 군사를 일으켰다. 시중 이인임이 도통사가 되어 안주에 진을 치게하고 만호 정원비, 최혁성, 김용진 등으로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게 하니 말서너필이 함꼐 건설수 있는 정도였다. 원수들이하 모든 장졸들이 차례로 건너는데 사흘이 걸렸는데 그날밤에 뇌성벽력이 치고 큰비가 내리는 모두 심히 의아하며 두려워 하거늘 병마사 이구가 말하기를
"길한 징조인데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모든 장수들이 영문을 몰라하므로 이구가 다시 말하기를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뇌성벽력이 있기 만련인데 지금의 지용수께서는 그 이름이 용(龍)자이니 강을 건너는 날 뇌성벽력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이것은 싸움에 이길 징조다."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군사를 내몰아 요성에 까지 이르러 반역군들은 처부수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편안히 살게하고 돌아오는데 충무공 지용수꼐서는 반드시 추격군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뒷편 경계를 엄히 하였더니 과연 며칠 뒤에 적장이 추격해오다가 우리군사의 방비가 엄한 것을 보고 그 놀라운 작전과 경비에 넛을 잃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개선하여 귀국한 뒤 다시 일등공신에 올라 정일품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문하시중찬성사겸 평장사가 되시었으며 왕이하 여러 대신들도 하늘이 내린 최고의 명장(名將)이라 극구 찬양하였다.
돌아가신 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공민왕 때로 추측되며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으로 내려졌다.
시호란 나라에 공이 큰 대신들이 죽고난 뒤 왕이 내리는 호로써 당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며 그 가운데서도 충(忠)자나 문(文)자가 든 것은 으뜸으로 삼았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충덕면 풍양리 천도봉에 있고 충무(忠武)의 광주 병천사(秉天祠), 해주(麗水)의 충민사(忠愍祠), 개성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지충무공전서(池忠武公全書)》가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2)박병묵 [朴炳默, ?~?]
나주 박씨 시조 박병묵(시호 충무)은 고려때에 평장사를 지냈으나 그의 선조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다. 박병묵은 나주에 오래동안 살아온 선비집안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3) 최필달 [崔必達, ?~?)]
강릉최씨 시조 최필달(시호 충무)은 고려 때에 삼중대광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을 역임한 후 경흥군에 봉해졌다. 그의 선조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다.
4)조영무 [趙英茂, ?~1414]
본관 한양, 시호 충무(忠武)이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정몽주(鄭夢周)를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殿中寺判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중추원상의사(中樞院商議事),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그후 문하부참찬사(門下府參贊事)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삼군부참판사(三軍府參判事) 때, 왕명으로 사병(私兵)의 혁파(革罷)가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府尹)으로 나갔다. 1405년 우정승(右政丞),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5)남이 [南怡, 1441~1468]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태종의 외증손(外曾孫)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 때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속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1818년(순조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6)이준,구성군 [龜城君, 1441~1479]
본관 전주(全州). 자 자청(子淸). 이름 준(浚). 시호 충무(忠武).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의 아들. 1466년(세조 12)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사도병마도총사가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이 해 적개공신 1등이 되고,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특진되었다. 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 2등에 훈봉되었다. 1470년(성종 1)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으로 경상도 영해(寧海)에 안치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숙종 때 신원되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역시 조카였던 18세의 소년 귀성군(龜城君)을 「함길강원평안황해사도(四道)병마도총사」에 임명해 진압의 총책을 맡겼다.
『문(文)에는 영순군이, 무(武)에는 귀성군이 쌍벽을 이룬다』고 매양 칭찬하던 세조는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다음해인 세조 14년(1468)에 귀성군을 일약 영의정에 발탁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열아홉살의 홍안 소년이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7)이순신 [李舜臣,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져서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실격하였다. 32세가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분쇄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의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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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 전해오는 충무공 남이장군 이야기
남이 장군은 세조 때 뛰어난 장수였다.
그는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꾸민 어이없는 사건으로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 무속에서는 구천을 떠도는 그의 영혼을 불러 신으로 받드는 남이 장군 신이 아직까지도 이어내려 오고 있다.
남이 장군은 태종 이방원의 외손자로 태어나서 1457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무과에 장원급제했다. 그는 당시 왕이었던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다.
남이는 세조 때 최대의 국난인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이 되어 적들을 토벌하였다.
이런 공으로 남이 장군은 나라에서 최고가는 공신이 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나라 서북 변에 살면서 자주 못된 짓을 하던 여진족을 토벌했다.
그의 직책은 날로 높아만 갔다.
이런 계속되는 승진으로
1468년 오위도총부총관(현 참모총장)에 이르러 곧이어 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병조판서(현
국방부장관)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가 소년 시절에 큰 길에 나가 놀고 있었다.
어느 작은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보자기 위에 요사한 잡귀가 붙어 있었다. 남이 장군은 슬그머니 그 사람 뒤를 따랐다.
그 하인은 재상 권람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문 밖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있으니까 집 안에서 구슬픈 곡성이 들렸다.
남이 장군은 집안사람들에게 어찌된 영문인가 물었다.
"하이고, 세상에 별 일도 다 있지 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네."
남이는 잡귀의 짓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집 하인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 그 처녀를 살리겠소!"
그 말을 전해들은 재상집에서는 어처구니 없었으나 행여나 하는 마음에 남이 장군을 들어오도록 허락하였다.
남이가 처녀의 방에 들어가 보니 과연 어여쁜 처녀가 숨을 거두고 죽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까 보았던 잡귀가 처녀의 가슴에 눌러 앉아 있었다.
그 잡귀는 용맹한 어린 남이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는 처녀의 가슴에서 황급히 일어나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처녀가 차차 소생하였다.
그러나 남이가 나오면 처녀는 또 숨을 거두게 되고 남이만 다시 들어가면 처녀는 다시 소생하곤 하였다.
"그 보자기에 싸온 물건이 무엇인지요?"
남이가 그 처녀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건 홍시네만...
그 걸 먹자마자 기절하였네."
남이는 아까 보았던 잡귀의 이야기를 권재상에게 하고 적합한 약을 처방하게 하였다.
그래서 남이는 죽었던 처녀를 살려냈는데, 그 처녀가 바로 권재상의 넷째 딸이었다.
권재상은 자신의 딸을 살려준 남이 장군이 이를 수 없이 고마웠다.
그는 남이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
병조판서까지 오른 남이 장군의 권력을 오래가지 못했다.
용맹하고 강직한 남이를 남달리 총애했던 세조가 얼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신세력으로 등장한 남이장군에게 위협을 느낀 한명회 등 조정에서 기존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남이 장군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느 날,
지중추부사 자리에 있던 한계희를 통해 당시 왕이었던 예종에게 이렇게 고했다.
"남이는 그 사람됨이 좋지 못하여 우리 군사를 다스릴 자가 못되는 줄 아뢰오."
예종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는 편이었다.
결국 남이 장군을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남이에게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예종의 집권 기간에 '남이의 역모사건'으로 최대옥사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남이가 궐내 숙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 혜성을 보고 남이는 혼잣말을 하였다.
"혜성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로다."
이때 이 말을 유자광이 엿듣고 말았다.
그리고 왕에게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을 하였다.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의금부에 문초를 받게 되고 말았다.
그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라고 말을 보태어
거짓 진술을 하였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남이는 결국 역모사건을 시인하게 돼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계략에 뛰어났다.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를 시기하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할 계략을 세웠던 것이다.
남이가 그렇게 죽자 유자광은 익대공신 1등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폭정을 도와 나라의 정사를 어지럽힌데
앞장섰던 인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세조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남이를 시기하던 예종이 훈구대신들의 비판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해임한 것이 아니냐는 뒷말도 무성하지만, 과연 믿을만한가 하는 문제도
회의적이라는 견해다.
북한강 자락에 있는 강원도 춘성 군에 '남이섬'이라는 섬이 있다.
예로부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사실도 아닌데 남이 장군이 이 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해 내려왔다.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는 남이섬에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남이 장군의 무덤은 화성군 비봉면 남전 2리에 부인과 나란히 쌍분으로 묻혀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간악한 간신배로 유자광이 비판되면서 남이의 역모사건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다.
순조 18년(1818년)에는 그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관직과
벼슬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는 젊은 나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 맺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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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征歌(북정가)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석 마도진)
頭滿江水 飮馬無(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돌은 칼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말리리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뒷날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남이 장군의
북정가(北征歌)에서 개가(開歌)의 영적(靈的)인 영감(靈感)을 얻었다고 보여진다.
여러 보도에 의하면,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현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 안창호, 김인식, 민영환, 남궁억, 최병헌 등 다양한 설이 있으나 결정적인 근거나 사료가 제시되지 못하여 작사자는 현재도 미상으로 남아 있다.
애국가의 수면(首面 ; 첫장), 서두(序頭 ; 첫머리)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는 남이 장군의 북정가 '백두산 돌을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의 대비에서 초입(初入) 부분인 두만강수와 동해물이 대체되어 떠오른 영감으로 작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애국가 개가(開歌 ; 가사가 열리는 들머리) 부분에 남이 장군의 북정가의 웅지(雄志 ; 웅대한 뜻)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남이 장군의 북정가는 애국가 작사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다.
충무공 남이장군 용산구 사당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