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선생 – 그리스도의 향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4:16)
김교신(金敎臣, 1901∼1944)은 1901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 농업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 있는 정칙(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1920년 4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들의 노방 전도에 감동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후 하숙집 동네 성결교회에 출석하여 1920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출석하던 교회 안에 분규가 일어나 학자풍의 훌륭한 목사가 축출당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김교신은 당시 무교회주의자로 유명한 내촌감삼(內村鑑三:우찌무라 칸조)의 문하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던 내촌에게서 김교신은 그의 애국사상을 배웠고, 조국 조선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촌은 “나는 두 J를 사랑한다. 즉 Jesus와 Japan이다.”라 말했습니다. 김교신은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는 “두 C를 사랑한다. 그것은 Christ와 Chosun.”이라 말하며 조국 사랑의 정신을 표현 했습니다.
1927년 4월 일본에서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 영생여자고보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내촌의 문하생들인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유석동(柳錫東) 등과 함께 성경연구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을 그 해 7월 창간하였습니다. 그 제목에서 보듯이, 이 잡지에서는 ‘성서’와 ‘조선’이라는 두 가지 표제를 내세웠습니다.
김교신은 섭리사관(攝理史觀)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 실천하는 것을 제일의 사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교회사적 사명을 강조하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선교사들이 전수해 준 교파적 신앙을 거부하고 우리 민족 자체가 가져야 하는 민족 신앙을 주창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교사의 재정(財政)에 의지하는 의존적 교회기구를 거부하게 되었으며, 민족이 주체가 되는 독립적, 토착적 신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 사설의 필화(筆禍) 사건으로 인해 투옥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함흥 질소회사에 입사하여 노무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쓰다 해방을 서 너 달 앞둔 1945년 4월, 43세의 아까운 나이에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필자가 김교신의 생애를 간단히 설명한 것은 그의 무교회주의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의 일화(逸話)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김교신은 서울 양정고보(현 서울 양정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를 훈련시켰습니다. 김교신은 손기정이 1936년 독일 베르린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 때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지만 조선 남아의 기상을 온 세계에 드높인 마라톤 1등의 영광을 얻게 하였습니다. 손기정이 올림픽 금메달을 얻게 된 것은 바로 김교신 선생의 제자 사랑과 철저한 훈련의 덕이었습니다.
김교신은 학생들을 무척 사랑했고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모든 선생이 퇴근한 후에도 혼자 남아 학생들에게 운동을 가르쳤고, 지진아(遲進兒)를 지도하는 등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어느 해, 입학 시즌이 되어 양정고보 3학년 학생 하나가 ‘경성의전’(현재 서울의과대학)에 지원을 하여 필기시험을 마치고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의사 교수들 몇이 이 학생 면접을 했습니다. 한 교수가 입학원서를 살펴보더니,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항일투쟁에 앞장선 기독교를 몹시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수는 학생에게 “자네는 왜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있나?”라며 힐난(詰難) 섞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 학생은 서슴지 않고 “예, 저는 우리학교 김교신 선생님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저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당당히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김교신 선생은 한 번도 학생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을 한 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라고 말을 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김교신 선생의 삶과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태도에서 다른 선생들과 전혀 다른 점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김교신 선생은 다른 선생들과 달리 저렇게 희생적으로 학생들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지도하는가를 분석해본 결과 김교신 선생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교신이 학생들에게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교신 선생을 흠모하던 학생들 스스로 “나도 김교신 선생과 같은 인격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교회에 출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화 속에서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삶 속에서 학생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 향기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던 학생들은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자기들도 그런 인격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보고 나도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나온 사람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들었을까요? 나는 비록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교회 나가게 해야겠다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봐야겠습니다.
나의 삶을 보고 교회에 나온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평생 예수님 믿었는데 나의 삶을 보고 단 한 사람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일을 역(逆)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 때문에 교회 나오기를 포기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을까요? “나는 아무개 장로 사는 꼴을 보고 예수를 믿지 않기로 작정했소.” “나는 아무개 권사가 며느리에게 하는 태도를 보니까, 예수를 믿느니 차라리 부처를 믿는 것이 낫겠다.”며 교회로부터 발걸음을 돌려 절간으로 간 사람은 없었는지 심각한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곧 전도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 교회로 나올 수도 있고 교회를 등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나 때문에 교회에 나온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을 일이지만, 오히려 나 때문에 교회를 등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생명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죄악이 가벼운 일일까요?
우리는 늘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꽃에서 향기가 나면 벌과 나비는 멀리서도 찾아옵니다. 우리의 삶은 단순한 삶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는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좀 다른가? 장로, 권사, 집사의 삶은 우리와 다르겠지....
우리는 항상 우리 삶을 지켜보고 있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냄새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만만하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는 나의 삶을 보고 교회에 나오세요.”라 말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성령님 안에 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더듬어 살펴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