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백작 부인의 조락
이자벨라 마리아(Hermynia Isabella Maria, 1883-1951)는 오스트리아 귀족 출신 외교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지적 소양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영어를 비롯해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다.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그런 지적 소양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영리하고 현숙한 부인”이 될 것이라는 숙부의 격려에 자극을 받은 후 어학 공부와 독서에 매진했다.
어린 시절 마리아는 주위 친척들이 부르주아를 멸시하는 것을 자주 듣고 이를 당연시했다. 그녀의 숙모는 이렇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부르주아란 아주 좋은 사람들이지. 신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지.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보지는 않아.”
성년이 된 후 마리아는 발트 해 독일계통의 귀족가문 청년[Viktor von zur Mühlen]과 결혼한다. 결혼 후 몇 년간은 파리와 뮌헨에 거주하다가 남편의 가문 영지가 있는 에스토니아에 정착했다. 그곳은 이전과 달리 귀족 지배가 위협받고 있었다. 소작농은 불손했고 때로는 저항했다. 언젠가는 저택이 약탈당해 그녀가 소장한 책들이 흩어졌다. 남편은 그녀에게 리볼버 권총을 주면서 항상 무기를 소지하라고 말했다.
결혼생활은 평탄치 못했고 1923년 부부는 결국 이혼했다.[이혼 후에도 그녀는 남편의 성을 계속 따랐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 여성 문필가 인명록에는 Hermynia Zur Mühlen으로 나와 있다.] 이혼 후에 마리아의 남편은 1차 러시아혁명기에 농민 소요로 죽는다. 에스토니아에서만 장원 184곳이 전소되고 귀족 90여 명이 폭동의 와중에서 죽임을 당했다.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의 혼란기에 그녀는 독일에 체류했다. 독일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인기 있는 소설들을 150권 이상 독일어로 번역해 삶을 이어갔다. 여러 권의 번역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나치 집권기에 그녀는 새로운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빈곤 속에 살다가 1951년 세상을 떠났다.
회고록에서 마리아와 그녀 남편의 결혼생활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두 귀족세계의 충돌을 보여준다. 그녀의 남편은 보수적이고 귀족 지배질서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마리아는 자유주의적이고 나중에 급진 정치사상과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리아는 세계주의적이고 현학적이며 교양 있는 삶의 세계, 오스트리아 귀족의 세계를 보여준다. 남편은 야비하고 촌뜨기 같은 속물근성에 가득 찬 발트 해 독일 귀족의 세계를 나타낸다. 마리아가 남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죽기 전에 그녀가 남긴 회고록은 19세기 후반 이후 정치적 격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유럽 구지배세력의 삶의 애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