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성은 천주교도들이 피 흘린 순교성지이다(1)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방화수류정 천장의 십자가 모습. 정약용이 설계하고 중 굉흠이 공사를 담당했다. (사진=김충영 필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된 배경엔 마태오릿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가 있었다.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수 있다는 '보유론(補儒論)'은 진리를 목말라하던 소수의 실학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17세기까지는 지식과 사회문화운동의 대상이었을 뿐 실천적 신앙의 대상은 아니었다. 건국 이래 조선의 지도 이념이었던 주자학이 18세기 후반에는 그 긍정적 역할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에 지식인들 사이에 성리학의 가치를 대체해 줄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서학 즉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기초한 이론은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활력소가 됐다. 천주교가 학문으로서 연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인권과 평등사상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이벽, 정약전, 권일신 등은 중국의 교리서를 통해 몸소 신앙을 실천했고, 주어사를 중심으로 강학을 시작하다가 마침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교리를 더 깊이 배워 오게 했다.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교회가 성립된다. 이벽은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가지고 연구한 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1789년 윤지충에 의해 조상 제사 문제가 생기자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생긴 양반층들이 떨어져 나가고 하층계급의 서민들에게서 더욱 순수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수원화성과 천주교와의 인연은 정약용으로부터 시작됐다. 정약용은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현 남양주시 마재)에서 부친 정재원과 모친인 고산 윤선도의 5대 손녀인 해남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큰형 약현, 약전, 약종과 정약용 그리고 누이 한명으로 5남매였다. 정약용과 천주교와의 인연은 누님의 남편인 매형 이승훈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큰형 약현의 처남인 이벽과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가환, 매부인 이승훈과 친하게 지냈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성호 이익의 종손이자 이승훈의 외삼촌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정약용은 1783년 문효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했다. 22세에 진사가 돼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되는데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1789년(정조13년) 대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왼쪽은 화성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거중기. 오른쪽은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거중기전도. (자료=화성박물관)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 배다리 만들기에도 참여했다. 1792년에는 정조의 지시로 화성의 기본계획인 성설(城說)을 작성했다. 성설을 정조에게 올리자 정조는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임금의 화성기본 계획)으로 발표하게 된다. 정약용은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의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서산 해미로 유배됐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 홍문관 등지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 이후 암행어사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됐으나 천주교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 등의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되는 사건에 휘말려 그 해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됐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정약용이 곡선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백성들이 생존권을 위협하는 10여조를 들고 나오자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천금을 줘야 한다고 했다. 국가가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항의를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했다. 1799년 형조참의가 됐는데 탄핵을 받자 자명소(自明疏, 자기의 죄가 없음을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퇴했다.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해서 강경론을 주장하자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였다. 하지만 1800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천주교 예식으로 모친 장례식을 치른 진산사건(珍山事件,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나자 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탄압하게 된다. 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됐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됐다.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됐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됐다. 다산초당 모습.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돼 집필 활동을 하던 곳. (사진=네이버지도 참조)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숨졌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로서 화성설계를 담당했다. 그리고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대부분의 저술 활동을 이 기간 동안에 했다. 둘째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천주교는 여러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받게 된다. 그 중에서도 네 차례의 큰 박해를 겪게 된다. 박해의 원인은 첫째 사상적 원인이다. 유교사상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의 충돌이었다. 둘째는 사회적 원인으로 조상 제사문제에 기인했다. 셋째는 정치적 원인으로 남인에 대한 박해의 수단이었다. 첫 번째 박해는 1791년에 일어났다. 정조는 천주교에 관대한 정책을 펴서 한 때 신도의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조모인 정순왕후가 실권을 잡고 전시대의 실권자인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시파와 가까웠던 신도들을 탄압하게 된다. 이 때 주문모 신부와 300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두 번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했다. 순조가 죽고 헌종이 즉위하자 헌종의 외조부이며 벽파였던 조만영이 전 정권의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다시 천주교를 탄압했다. 또 외국인 성직자들이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천주교를 탄압했다. 이때 성직자 세 명과 신도 200명이 순교하게 된다. 세 번째는 1846년 병오박해가 발생했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이 때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순교했다. 네 번째는 1866년 발생한 병인박해이다. 헌종이 죽은 후 즉위한 철종은 천주교에 너그러운 정책을 펼쳤다. 이에 신도 수가 2만3000여 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외국세력에 대항하여 천주교를 탄압했다. 대원군의 탄압으로 9명의 성직자와 8000여 명의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이때 수원지역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Tag #수원일보#김충영#수원현미경#마태오릿치신부#천주실의#보유론#주자학#천주교#성리학#서학#이승훈#수원화성#정약용#정조#규장각#성설#어제성화주략#진산사건#신유박해#자산어보#기해박해#병오박해#병인박해#대원군 저작권자 © 수원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