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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배가 고프시 답니다.
마가복음 11:12~25
I. 배가 고프다
내 생애 가장 큰 스포츠 축제는 88 서울올림픽, 2002년 서울월드컵입니다.
2002년 월드컵하면 금방 히딩크 감독이 생각납니다.
월드컵을 1년 6개월 정도 남기고 히딩크가 감독으로 부임을 합니다.
히딩크와 함께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첫 번째 승리가 가능할까?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16강에 진출할 수 있을까? 드디어 16강 진출! 8강 진출을 앞두고 스페인과 한판 승
부를 준비하고 있을 때 히딩크 감독이 남긴 유명한 말 한 마디가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하는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가신 예수님, 오늘 본문 12
절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내가 배가 고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예수님, 배가 고프시답니다”입니다.
코로나19 팬더믹시대를 보내면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매 주일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설문 조사를 대할 때마다 제 가슴은 무너지곤 했습니다.
신뢰도는 추락하고 믿음은 약화되어지고 교회들마다 경착륙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미국교회 설문조사는 우리가 미국교회 성도님들이 날라리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은 미국사회에 있는 모든 집단, 모든 공동체 가운데에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님들이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가장 건강하다는 통계를 접하게 됩니다.
얼마 전 통계에서는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에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예배 아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통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핸드폰을 보았다는 사람, 옆에 가족들하고 얘기하고 잡담했다는 사람, 부엌과 방을 오고갔던 사람, 누워서 예배 하거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복장을 갖추지 않고 예배했다는 사람 등등,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예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성장하고 그렇게 예배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앞으로 계속해서 신앙생활 할 것 같으냐” 물었더니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10년 후에 나는 교회에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위기상황을 보내는 한국교회를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가정을 찾아 오셔서 우리성도님들 한분 한분을 찾아오셔서 믿음이 약화된 내 모습을 보면서 내 배가 고프다. 너의 진실한 예배가 없어서 내 배가 고프다. 교회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려서 내가 배가 고프다. 우리 예수님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예수님 곧 십자가를 지셔야 하실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올라가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묵으시고 이튿날 아침에 나오셔서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내가 시장하다. 배가 고프다. 말씀하시고 열매를 구합니다.
그러나 잎만 무성하고 열매 하나가 맺혀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청결사건 양떼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상을 끌어 엎으시고 돈바꾸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십니다.
성에서 나오다 보니 저주한 바로 그 무화과나무가 잎사귀 줄기는 물론 뿌리부터 바싹 말라있었다 하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사님의 설교가 없으면 이해가 잘 안 되는 성경의 난해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깊이와 뜻을 깨닫지 못해서 오해하고 또 성경과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신론 철학자 버틀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그의 책에서 열매철도 아닌데 열매달라고 떼를 쓰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인격과 멘탈이 정상이냐? 그래서 나는 예수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프리카 성자로 알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도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책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당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셔서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행하신 기적은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극한의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정신과 인격이 혼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겁니다.
구태여 무신론 철학자,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에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연구해 보면 37가지 나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37가지 이적 가운데 오늘 본문에 이적 한 가지를 제외하고 나면 36가지는 모두 축복기적입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었다. 맹인이 눈을 떴다. 한센씨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았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바람이 잔잔해졌다. 어린아이가 바친 도시락 하나로 5,000명이 먹었다.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등등 모든 이적 사건들이 축복사건입니다.
유독 복음서의 마지막 이적, 고난을 목전에 두고 행하시는 소중한 기적이 축복기적이 아니라 저주의 기적이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기적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랬을 때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4:4) 거절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한편 강도는 너도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천군천사들을 동원해서 로마 부수고 우리 함께 살아나자. 그러나 예수님 침묵하셨습니다.
유독 오늘 본문은 열매 드시지 못했다고 심술부리듯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십니다. 열매 없다고 그때 그때 저주하신다고 한다면 이 땅에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살아남을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특별히 본문 13절에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화가 맺힐 만한 때가 아닌데 무화과 열매 내놓으라고 안달하다가 예수님께서 저주하셨다 겁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사과나무 앞에서 사과 나무의 열매 없다고 저주하신격입니다. 영하 20도 혹한 속에 배나무 앞에 서셔서 “너 왜 열매없니” 나무라는 겪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가 마를 때는 잎사귀부터 마르고 가지가 마르고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뿌리가 마르지요. 그런데 이 나무는 하루 만에 저주받고 뿌리부터 송두리째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 본문 사건이 납득이 되십니까?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면 옳은가 하면 ‘야이 성경 속에, 말씀 속에 신비한 뜻이 있겠구나. 내가 알지 못하는 굉장한 의미가 담겨져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II. 본문 이해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쉽게 이해가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중해 주변 땅에서 무화과가 맺히는 그 특징들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4월부터 10월까지 건기 즉 여름철에 다섯 번 정도 무화과열매가 맺힙니다. 6개월 정도는 앙상한 가지로 우기 즉 겨울철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있는 4월이 되면 작은 잎사귀와 함께 첫 번째 조그만한 무화과 열매가 맺어집니다.
헬라어, 영어, 우리말 번역에서는 똑같이 “무화과”라고 번역이 되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어로서는 여기 첫 번째 맺혀지는 조그만한 무화과를 “파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네 번에 걸쳐 본격적으로 맺혀지는 먹을 만한 무화과를 파계가 아니라 “테에나”라고 합니다.
첫 번째 맺혀지는 파계와 둘째 셋째 넷째 다섯 번째 맺혀지는 테헤나의 무화과는 맛
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우리말 성경에서는 똑같이 무화과라고 말하니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예수님의 행동에 오해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 테에나 때는 아니지만 파계라도 얻을까 하여 무화과 나무에 가까이 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말씀을 제가 좀 알아듣기 쉽게 제나름대로 번역을 해 봅니다. 이것은 성서신학에서 사역이라 이름 합니다.
제가 번역한 것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2 이튿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저만큼 잎사귀가 제법 맺힌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그 나무에 작은 파게 무화과라도 있을까하여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잎사귀만 무성했지 파게 하나가 맺히지 아니한지라. 이는 물론 테에나가 맺힐 때는 아니었다.
14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들이 네게서 테에나는 물론 파게 하나도 얻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그 의미를 궁금해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더라.
이제 일단 본문의 흐름과 배경은 이해가 되시죠?
이렇게 이제 쉬운 내용을 우리가 용어 하나를 생략하고 넘어가니까 이런 문제가 생겼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2막으로 막이 바뀌어집니다.
마가복음 11장 15절~16절까지 예루살렘 성전청결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마지막 제3막 20절~25절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결론이 나옵니다.
성경 연구가들은 이런 본문을 마가의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합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전혀 다른 사건 하나를 끼어 넣어서 이 끼어넣은 사건과 양쪽에 펼쳐지는 사건을 서로 보완하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말라버린 이 사건과 성전청결사건은 분명히 다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의미는 같은 것이다. 그런 얘기입니다.
성전청결사건이란 안경을 끼고 보아야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 보이는 것이고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보고 성전청결 사건을 해석해야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건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 무화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닐의 교회를 말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앞만 무성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성전 종교, 이스라엘의 교권주의자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 진정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오늘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 성도들 보시면서, 야 너를 볼 때마다 내가 행복하다. 기쁘다. 만족하다. 배가 부르다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네 예배, 네 기도,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 세상에서 하는 말, 언어, 행동, 네 인생의 비전, 꿈을 살펴보니 내가 먹을 것이 없구나. 시장하다 말씀하신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의 무화과입니다.
묻습니다. 오늘 본문이 너는 앞사귀냐? 아니면 열매냐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서 바싹마른 한 그루 무화과 나무는 아니냐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메말라버린 예루살렘 성전종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예수 없는 제사를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피공로로 예배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다가 남지 않을 만큼 완전히 메마르게 될 것이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다.
이 엄청난 사건을 주님께서 이 기적을 통하여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없는 율법은 잎사귀에 불가합니다. 예수없는 제사장, 종교 잎사귀입니다.
예수가 없는 예수 중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 중심이 아닌 우리의 신앙, 종교인 일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배가 고프시다는 말은 아니지요. 예수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II. 믿음의 기도에 배가 고프다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다. 시장하시다는 말이 도대체 어떤 말일까요
진실한 예배, 진실한 교회, 진실한 성도를 보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기도를 예수님이 보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는 믿음의 기도, 능력 있는 기도에 배가 고프시다는 겁니다.
본문 22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물었는지 23절과 24절에서 주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2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3절)
세상에 어떤 위기가 있어도 어떤 문제가 있어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하게 기도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하고 이루어질 줄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러분이 23절과 24절이 꼭 같은 말씀으로 매듭을 짓고 있습니다.
마지막 마침 동사가 똑같습니다. 그대로 되리라.
그대로 되리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이지요
창세기 1장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에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던 그 능력처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
라를 위하여 기도하면,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 재난의 시대
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대로 되리라! 할렐루야!
기도의 권세, 기도의 책임, 기도의 능력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매일 기도하고도 내 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일상으로 느끼며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우리의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내 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은혜의 사건들이, 기적 같은 일들이, 내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도가 멈추어 지면 당신이 우연이라고 믿었던 그 사건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린다는 겁니다. 내 기도가 메말라 있으면 나라가 메마르다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우리의 열정의 기도가 메말라 있으면 내가 섬기는 교회가 마르고 한국교회가 마르고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의 빛이 마르고 소금이 말라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을 위하여 진실하게 기도하면 죽었던 영혼도 살아나지만 기도가 멈추어지면 내 자식이 마른다는 겁니다. 남편의 사업을 위하여 진실하게 간절히 기도하면 천천이 쓰러지고 만만이 넘어져도 하나님의 기업이 일어나지만 믿음의 제사장인 당신의 기도가 마르면 내 남편의 사업이 마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기도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나라가 살고 죽고 교회가 살고 죽고 가정이 살고 죽고 내 자식이 살고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멈춰지면 모든 게 말라 버립니다. 나라를 살려 달라. 우국의 기도가 사라지면 내 나라가말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사람들이 위기를 느끼고 위기를 말하고 걱정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회변화가 어쩔 수 없이 세계가 함께 겪는 팬데믹 때문이라고만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눈을 들어서 보면 역사를 보면 그 모든 것이 내 믿음이 약해져서, 내 기도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믿음을 믿는 내 신앙이 메말라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배가 고프다 우리 주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메마른 것 누구 욕할 것 없다. 네 기도가 말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향해 기대하셨던 그 열매가 무엇일까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
기도의 권세와 열매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막11:23)
이게 무슨 말일까요? 왜 멀쩡한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집니까?
환경 오염되게.
우리가 기도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태산같은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11:24) 과장법입니다.
여기 “받다”라는 말은 단순 과거형 동사입니다. 과거에 이미 일어났다는 겁니다. 동사형이 그렇게 되어져 있습니다.
기도는 내가 지금 기도하고 나면 기도가 끝난 다음에 이루어지는 거지요. 정이 급한응답은 기도하는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기도하기 전에 이미 벌써 어제 오래 전에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말이 안 되는 과장법입니다. 오류입니다. 성서문학에서는 의도적인 오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과장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면, 진짜 하나님을 믿으면 과장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과장된 기도에도 응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과장된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게 이
적이요 기적이요 표적 아닙니까? 우리의 기도는 이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대로 되리라. 반드시 된다. 이미 되었느니라.
오늘 한국교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다음세대 위기입니다. 그러나 이 자녀들
또한 우리가 기도하면 새벽이슬 같은 젊은 친구들이 내일의 한국교회와 내일의 우리
가문과 내일의 사회를 이끌어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IV. 나무 벌레 –용서하지 않음
오늘 본문 마지막 25절을 보십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11:25)
오늘 본문 마지막 25절 이 구절은 오늘 본문에 성전청결사건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마
른 사건과 아무런 연결점이 없는 이물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가 졸다가 다른데 써야 되는데 여기 갖다 붙인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역시 이물감을 느끼면서 이거 이상하다. 그러면 신비한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겠지요.
기도에 또 다른 기적 하나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기적입니다. 용서라는 이 개념은 우리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다. 이것은 이미 기적이라는 겁니다.
내가 누군가를 깨끗이 용서했다. 이것은 이미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불가능한 하나님의 사건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거지요.
예수님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절 우리가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 할 영적과제 중 하나는 용서하는 일입니다. 성전청결사건이 뭘까요? 성전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여기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살면 네 영혼이 성전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나님이 사시는 그 집에 지금 응어리가 있다는 거예요. 상처가 있다는 거예요. 원한을 풀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치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태산처럼 나의 모든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막고 있습니다. 은혜를 막고 있습니다. 행복을 막고 있습니다. 건강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성전청결사건은 내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응어리가 십자가 보혈의 바다에 던져 지는 것입니다. 상처가 깨끗이 씻김 받는 것입니다. 병든 육체가 치료 받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모든 가슴 속에 있는 더럽혀진 영혼의 성전이 깨끗해지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능력있는 기도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용서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응어리 풀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 속에 수많은 상처와 미움을 끌어안고 행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이 시간 예수님께서 예배드린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무화과나무입니다. 우리에게 맺혀진 작은 열매라도 있으면 “그래 참 좋다” 주님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열매가 없으면 “내가 너 때문에 배고프다” 말씀하실 것입니
다. 어떻게 주님께 그 열매를 나누어 드리시겠습니까?
고백하고 싶지도 않은 내 인생의 뼈아픈 후회사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아침에 간밤에 남은 찬밥을 물에 말아서 후딱후딱 먹고 서둘러서 학교를 갑니다. 대문을 막 열고 나왔는데 대문 앞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걸인이었습니다. 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시더니 “나 배고파. 김치하고 밥! 김치하고 밥!” 그래요. 그런데 아뿔싸! 우리 집에 밥도 없고 김치도 없습니다. “할아버지 어떡해요. 오늘은 다른데서 드시고 내일 오세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로 달려왔습니다.
하루종일 교수님의 강의는 들리지 않고 그 할아버지의 동그란 눈과 김치하고 밥! 김치하고 밥이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내가 김치하고 밥을 그 할아버지에게 꼭 드려야지. 그래서 밥을 좀 여유있게 했습니다. 앞집 집사님에게 얻어서 김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밥을 짓다 말고 대문을 열어봐도 할아버지는 없었습니다. 밥을 먹기 전에 상을 차려놓고 또 대문 열어봐도 그 할아버지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45년이 흘러갔습니다. 45년 동안 단 한 번도 우리 집 앞에서 그 할아버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면서 “나 배고파. 김치하고 밥!” 밥 달라고 손 내미는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45년동안. 그 분이 예수님이면 어떡하지? 단 한 번 찾아오신 예수님이면 어떡하지? 배고프다 말씀하신 그 예수님 다시 한 번만 와주면 좋았을텐데.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찾아오셔서 나 너 때문에 배고파! 등 돌리고 오시지 않으시면 어떡하면 좋아요. 세상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린 다시 한번 주님 앞에 열매를 준비해야 될 때, 열매를 드려야 될 때, 내가 맺은 작은 파계 무화과 열매 하나라도 맺혀서 교회를 살리고 내 자식 살리고 내 가정 살리고 한국교회 내 민족을 살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 배가 고프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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