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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NIV]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메시지 성경 영어] “You’re blessed when you’ve worked up a good appetite for God. He’s food and drink in the best meal you’ll ever eat. 세상과 다른 복 ‘팔복’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생각을 바꾸는 일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이 다르다는 것은 복을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히스이 고타로의 [하루 한 줄 행복]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의식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소 개됩니다. 그 중에 하나입니다. ‘당신이 건물주라고 해보자. 엘리베이터가 느리다고 입주자들로부터 불만이 쇄도하고 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시카고의 어느 건물주가 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됐다. “엘리베이터가 느리다. 이곳을 나가겠다.” 입주자들의 불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어느 날, 불평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안에 거울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빠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적잖은 비용이 든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소도를 신경 쓰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해결책 을 끌어낼 수 있었다. 질문이 바뀌면 답도 바뀐다. 그리고 좋은 질문에서 좋은 답이 나온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가? ‘어째서 매상이 오르지 않을까?’ 가 고민이라면 질문을 바꿔보자. ‘어떻게 하면 손님이 좋아해 줄까?’ ‘왜 인기가 줄어들었을까?’ 가 고민이라면 ‘왜 전에는 인기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자.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 주어진 시간은 단 1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은 55분을 올바른 질문을 찾는 데 쓰고 나머지 5분 동안 해결책을 찾겠다고 말했다.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인가? 혹은 왜 나는 지지리도 복도 없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그렇게 이 세상의 인생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하늘나라의 복의 원리 다섯 번 재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네 번째까지의 의식의 전환을 생각하면서 어떤 순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는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의 문턱에 설 수 있다는 것이요, 그 후 천국 문이 열리면 그 첫발을 애통하고 회개함으로 들어가며, 천국 백성으로서의 ‘다움’은 마음의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온유함은 삶의 방향을 올바로 향하게 해 주는 데 바로 “의”를 향해 갈급한 삶을 살 게 해주는 것이죠. 여기에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우리 가 과연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갈망하는 정도로 간절히 주님의 뜻을 추구하느냐의 문제입 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되,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 리가 이런 주림과 목마름의 자세가 아니고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오래 전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흔히 지나치는 것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먼저 소주 한 병에 몇 잔이 나오는지를 묻더군요. 사실 술을 먹는 사람들도 별로 생각 없이 마시다보니 그런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듯합니다. 정답은 ‘7잔’이었구요. 중요한 문제는 그냥 한 병에 술을 담다보니 7잔이 된 것이 아니라 아 주 전략적으로 7잔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인 설명이었습니다. 두 명이 술을 마시다 보면 3잔 씩 마시고 한 잔이 남게 되어 결국 한 병을 더 시킵니다. 세 사람이 마시다 보면 모두가 두 잔씩 마시고 난 후에 세 잔 째 에는 두 사람이 모자라 한 병을 더 시킵니다. 네 사람이 술을 마시다 보면 모두 한 잔씩 마시고, 두 잔 째에 가서 한 사람만 모자라니 또 한 병을 더 시키게 됩니다. 술을 파는 사람도 참 전략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가만히 우리 주변을 살펴보세요. 물건을 파는 사람들,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 략’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망에서 보터 나오는 것이죠. 열망은 목마름과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목마른 자가 샘을 팝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의를 찾지 않겠습니까? 위에 주리고 목마름이란. . . 이제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NIV] 성경의 표현을 보면 우리 성경보다는 조금 더 명확한 것 같습니다.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의’를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세상적인 표현이 지만 명확합니다. ‘하나님께 입맛이 당긴다’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맛보지 못한 음료와 음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메시지 성경 영어] “You’re blessed when you’ve worked up a good appetite for God. He’s food and drink in the best meal you’ll ever eat.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거나,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맛보아 알지어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표현은 궁극적인 굶주림과 타는 목마름의 표현입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물을 찾거나 음식을 찾는 것처럼 의에 주린 자는 의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의’가 하나님의 본성임을 알 때, 의를 찾는 자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겠죠. 가만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역사를 보세요. 독립운동에 목말라 있던 자들은 독립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통일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은 통일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로 인해 지금 방송에는 수없이 많은 ‘먹방’이 방영됩니다. 그렇게 많이 먹는 것보고 따라 먹어봤더니 만족이 오지 않고 불편해져서 그 다음에는 다이어 트에 열중합니다. 선교에 목말랐던 이들이 선교사가 되었고 이 곳 저곳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은 우리가 무엇에 목말아 있느냐는 것이며, 우리가 목말라 있는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복된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에 삶에서 구체적으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교인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때가 많다 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기도 한데, 어떤 것이 크리스천다운 행동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 있습니다. 오래 전 그런 이름으로 나온 책도 있었지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저도 오래 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교인들이 맞닥뜨린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 셨을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일어났던 변화들을 흥미진진하게 전해 주는 책입니다. 야고보서 1:22과 2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오늘 다섯 번째 팔복의 말씀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다’는 말씀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겠습니 다. 존 맥아더 목사의 [팔복]이라는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동사는 뜻이 매우 강하다. ‘페이나오(peinao)’는 ‘궁핍하다’, ‘심한 굶주림으로 고통당하 다’라는 뜻이다. ‘디프사오(dipsao)’는 ‘진짜 목마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계속 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아주 강한 신체적인 자극들을 표현하신다. -주리고 있는 자들, 목말라 하고 있는 자들. 이것을 그 나라에 들어오는 자에게만 요구되는 조건이 아 니라, 이미 그 나라에 들어와 잇는 자의 패턴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훌륭한 주석가인 렌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주림과 목마름은 계속되며 사실 채워지고 해 소되는 그 순간에 더 커진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편 23편을 썼고, 평생에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다윗이 시편 42:1-2에서는 이렇게 외쳤다. “하나 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차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 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다윗은 주림과 목마름이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나라의 참된 자녀에게는 이것이 생 활방식이다. 초기 플리머스 형제단을 이끌었던 하나님의 사람 존 다비는 이렇게 말했다. “주리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나는 정말이지 굶주려야 한다. 탕자가 주렸을 때, 그는 찌끼를 먹으러 갔다. 그러나 그가 굶주렸을 때에는 아버지에게 돌아갔 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따르면서 의롭게 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야고보서 기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믿음 안에 거하는 것과, 행함으로 사는 것 사 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차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어머니가 이야기합니다. “네가 차에 얌전히 앉아서 안전벨트를 매기 전 까지 운전하지 않을 꺼야!” 아이가 싫다고 하자 어머니는 다시 한 번 이야기 (협박) 합니다. “ 다시 한 번 말한다, 빨리 앉아서 안전벨트 매” 다시 한 번 아이가 싫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다시 협박합니다. *앉아서 벨트를 매고 내 말을 듣든지 아니면 차 밖으로 나가자, 그리고 니 엉덩이를 때려 줄 꺼야“ 어머니가 차 문을 열려고 하자, 아이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곧 자리에 앉아서 벨트를 매 기 시작합니다. “좋아” 하는 어머니의 대답과 함께 차를 운전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차에 파 묻혀서 작지만 어머니가 들을 만한 소리로 흥얼 됩니다. “ 겉으로는 앉아 있어도, 속으로는 서 있지롱!”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종”이라는 것은 쌍방 간의 조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쌍방 간의 갈등은 불순종으로 생 긴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권위에 대하여 불순종할 때 둘 사이에는 마찰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이 지시하는 방향이 옳을 것일 때, 그 결과는 잘되게 합니다. 세 번째, 복종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맞춰주는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 리는 때때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겉으로는 앉아있지만, 속으로는 서있는 거야!” 진정한 복 종이란 어떤 이의 권위에 기꺼이 복종하여 행동하는 것이지, 어쩔 수 없이 따라하는 외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기꺼이 주님의 권위와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있 느냐의 물음이겠지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니 더 나아가서 “지금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복종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어떤 권위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이겠지요. 정부의 권위에 대하여, 부모님의 권위에 대하여, 선생님의 권위에 대하여, 혹은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복종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적으로 누가복음 6장 46절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 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이것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행치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요한 복음 14장 15절에 서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시는데 다시 말하 면,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 다. 정말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주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다는 말 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다가 포기하고, 실망하고, 심지어는 신앙을 버리기까지 할까요? 예수를 믿으나 진정한 主로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뢰하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으나 전혀 주되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의 삶을 주장한다고 할 때 우리는 참 많은 부분에서 신뢰할 수 있음에도 불 구하고 우리에게서 그런 신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군목으로 함께 임관했던 친구 목사가 대관령에서 근무할 때, 한 겨울 그 집 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보았던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당시 군부대의 관사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물이 그렇게 수도꼭지를 틀면 나올 때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딸의 머리를 감겨 주려고 물을 데워서 세수 대야에 담아 방 안으로 가져 왔습니다. 무릎 위에 앉히고 머리를 감겨주는데 딸아이가 뻣뻣하게 버티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무서웠던 것이죠. 아이는 온 몸에 힘을 주고 두 손으로 문틀을 잡고는 버 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더군요. 기다립니다. 딸의 힘이 빠지기를 말이죠. 결국 아버지는 딸의 힘을 빼고 아버지에게 몸을 맡길 때까지 기다렸다, 머리를 감기기 시작합 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의에 주린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전적인 복종과 신뢰로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 다. 주님의 길에 나를 전폭적으로 맡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의에 주리는” 사람의 모 습입니다. 바로 이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삶을 control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때, 가장 깊은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저에게 중요한 결단이 무엇이었을까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고민 되었던 순간은 만나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선정해야 하는 때 였던 것 같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나의 입장을 정해야 하는 것이기에 고민이 되 었습니다. 내 인생이 내가 정한대로 된다면 덜 걱정이 될 텐데, 결정은 해야 하고 결정한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 또한 내가 결정한 대로 된다고 해서 가장 선한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문제는 결정한 대로 결 과를 얻어도 그것이 옳은 일인지를 잘 판단 할 수 없기에 더욱 고민스러웠던 것이죠. 그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능성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니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겨보자. 성경의 어떤 선지자처럼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니 확신 할 수 없는 순간에 하 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에게는 그런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막으실 것이다. 사실 2002년 [우리가 꿈꾸는 교회]라는 책을 내고는 만나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나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꿈, 열망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세습이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이 싫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빛이 많은 교회이지만 이 큰 덩치의 교회를 탐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여기에서 물었다는 말 가지고는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참 치열하게 고민하며 물었습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를 떠나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고, 교회에 남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에게 교회를 떠나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내 스스 로 나의 능력으로 목회를 해 보고 싶은 마음. 교회를 떠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제가 교회와 교인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 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저에게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인 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이런 말을 나눴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목회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떠나라는 사인을 주시면 장렬하게 떠나 자!” 그래서 당시 부목사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당시 김우영목사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목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가 대신 1년 정도를 대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모든 리더들과 “꿈꾸는 교회”에 대 한 비전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죠.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요? 자신의 앞날도 불확실한 사람이, 그리고 자신이 담임 목사도 아니면서 “꿈꾸는 교회”의 비전 을 나눈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딱 한자기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것. 적어도 제가 목회자로서 이런 교회가 되어야 겠다는 마음이고, 그런 교회가 되지 못한다면 저 는 이 교회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만나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그 때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었던 마음이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에 저의 미래와 ‘의’가 아닌 것을 가지고 타협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떤 리더십들과 지위를 놓고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 말이죠. 사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에 하나가 ‘타협’이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들이 사라져 버리면 의가 아닌 것에 우리의 마음이 가죠 가는 것들이 죠.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NIV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저에게는 이른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로 채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배부 를 것이다’라는 것을 세상 것으로 배부르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세상적인 것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의 의로움 가운데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는 부요함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난 해 5월 몽골의 박관태 선교사가 말씀을 전하며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삶을 드려보라는 것이죠. 백배나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 그러나 박해가 따르리라는 말씀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드렸으니 백배나 축복을 받는다면 세상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 드려지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기 때문에 이렇게 무 모한 하게 ‘백배’라는 말씀을 사용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 백배의 축복은 ‘박해’와 함께 우리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는 인생이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박해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시는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 다. 저는 마태복음 26장에서 참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7절 이하에 보면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제자들 중 하 나가 당신을 팔 것을 예언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다 보니까, 제자들 중 가롯유다 가 예수님을 팔게 되는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신 말씀에 제자들이 근심 하여 묻습니다. “주여 내니이까” 모두 근심하여 묻는 이 물음에 오직 유다만이 다른 물음으로 묻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25). 즉 다른 사람들 은 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데,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아직 도 “랍비” 즉 선생님으로 밖에 고백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생겨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삶 의 주인이 되셔야 완전한 복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심과 복종은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 인이 되셔야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의에 주린 자가 복된 삶을 살게 되는 이유! 이제 중요한 말씀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채워지는 것이 축복일까요? 적어도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까요? 우리는 이것을 사명자의 삶이라고 말하죠. 의에 주린 자가 의로운 선택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의 마음에 합한 자를 쓰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는 히브리서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의에 주린 자와 욕망에 주린 자의 삶에는 다른 가치가 작용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인생 을 살아갈지에 대한 가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람은 현재의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진하 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직 부 족하여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이 부족하여서 갈급하다고 하면, 우리는 무 한한 가능성의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빌 립보서 3장 12-14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러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은 “배부를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과연 배부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배부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족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만족은 음식을 먹는다고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 래적인 갈급함이 해결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즞 자는 영 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라라 또한 요한복음 7장 37-8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축복들과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 속에서 살아가는 축복들은 삶의 가치가 변화된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뀌 것만으로도 축복인데, 그들의 삶의 열매가 아름답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 로 평생을 살았던 사도바울을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러게 편지 합니다. 고후 6장 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맘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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