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된 조선의 선비 유박
-『화암수록花菴隨錄』를 읽고
유회숙 ≪산림문학≫ 2023년 봄호 통권49호 이 한 권의 책 원고
화암수록花菴隨錄
유박 지음 · 정민 김영은 손균익 외 옮김 / 휴머니스트
『화암수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22년 7월 ‘산림문학인의 날’이었습니다. 이상희 제6대 산림청장님께서 <산림문학TV>에 출연해 대담한 내용과 그리고 이 책의 지은이가 바르게 밝혀지기까지의 과정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화암수록』은 강희안의 『양화소록』과 더불어 조선 시대 2대 원예전문서로 꼽히는 귀중한 책이죠. 이것을 구하기 위해 인사동 고서점인 통문관 설립자인 이겸로 선생을 3년 넘게 쫓아다녀 이 필사 유일본을 손에 넣었습니다.” 내무부장관을 지낸 故 이상희 산림청장님은 보물급 희귀본을 포함해 10만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장서가였습니다. 그중 가장 아끼는 『화암수록』을 구하기 위해 돈을 빌려 1년 6개월에 걸쳐 갚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정민 교수는 이상희 청장님을 만나 화암수록의 복사본을 처음으로 건네받았고 두 달 뒤인 2003년 8월에 ≪한국시가연구≫ 제14집에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 한 부를 이상희 청장님께 건네드렸고 책의 지은이를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지은이 유박柳璞(1730~1787). 본관은 황해도 문화文化, 호는 백화암百化庵입니다. 『화암수록』과 연시조 <화암구곡>의 저자입니다. 몰락한 소북 집안 출신으로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채 황해도 배천 금곡포 일대에서 살았습니다. 화훼 취미가 남달라 거처를 백화암이라 이름 짓고 우화재寓化齋라고 이름 붙인 집에 기거하며 꽃에 깃들어 온갖 화초를 가꾸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화암수록』은 조선 후기 화훼를 살펴볼 수 있는 원예문화의 주요 저작입니다. 폭넓은 원예 지식을 바탕으로 사시사철 꽃을 가꾸고 원예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며 이 경험을 꼼꼼히 정리했습니다. 더불어 꽃을 소재로 한 다양한 글을 지어 함께 수록해 당시 백화암의 풍경과 원예문화의 수준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러 경로와 인맥을 통해 시를 잘 짓기로 이름난 사람에게 기문을 부탁하여 그들의 저서에 흔적이 남아 있어 그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은 1부에 이전의 화훼서가 주로 중국의 것을 다루고 있거나 조정에 바치는 품종만을 귀하게 여기는 점 등에 아쉬움을 느껴 화훼의 품제를 새로이 정립하고 화목에 대한 평을 달았으며, 화훼서로는 최초로 개화 시기를 월별로 정리해 기록했습니다. 2부에 연시조, 편지, 제문, 근체시 등 그리고 부록에는 정민 교수가 화암수록의 저자를 밝히는 과정에서 발굴한 다양한 자료도 실려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강희안이 이미 9품을 논하여 정한 바를 가늠하여 보태고 빼서 1등은 고상한 품격과 빼어난 운치를, 2등은 부귀함을 취하였습니다. 3,4등은 운치를 취하고, 5,6등은 번화함을 취하였습니다. 7,8,9등은 저마다의 장점을 취하여 9등급으로 화목구등품제를 서술하였습니다.
1등: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소나무
2등: 모란, 작약, 왜홍, 해류, 파초
3등: 치자, 동백, 사계, 종려, 만년송
4등: 화리, 소철, 서향화, 포도, 귤
5등: 석류, 복숭아, 해당, 장미, 수양
6등: 두견, 살구, 백일홍, 감나무, 오동나무
7등: 배나무, 정향, 목련, 앵두나무, 단풍
8등: 무궁화, 석죽, 옥잠화, 봉선화, 두충
9등: 규화, 전추사, 금전화, 창촉, 화양목
꽃마다 벗으로 표현하고, 그 꽃이 좋아하고 싫어함이 소상하게 적혀 있어 마치 꽃이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작약은 한번 성이 나면 3년간 꽃을 피우지 않는다며, 이럴 때는 똥물을 주어 분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그러냐고 묻고 싶을 만치 경험을 토대로 한 글이었습니다. 패랭이꽃을 울지 않는 어린아이, 옥잠화를 사미승으로 평한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유심히 읽은 부분은 안습제와 주고받은 편지였습니다. 무궁화를 목록에 포함하는 과정에서 토론을 나눈 글과 안습제가 쓴 편지 끝에 1772년 임진 8월 22일 연월일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글은 기록이며 그 시대를 나타내는 귀한 정보가 되기에 반가움이 더했습니다. 유박은 말합니다. “기이한 화훼가 있다면 천금을 주고라도 사겠소.” 화훼에 욕심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유득공의 <금곡 백화암 상량문>에 따르면 유박은 원예에 열을 올린 선비였는데, 말년에는 화훼 수집으로 살림살이를 탕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부록을 읽다 보면 이용휴, 채제공, 이헌경, 목만중, 정범조, 우경모, 유득공, 유련. 백화암을 직간접으로 접하며 쓴 글에는 기개와 활달함이 느껴졌습니다. 꾸짖는가 하면 염려하고 근면함을 인정하는 한편에 부러워하는 글은 백화암을 더욱 빛나고 멋지게 드러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책 속에 길을 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피로해진 일상에 변화를 꾀합니다. 적자생존이 이제는 적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말로 통용되고 또 누죽걸산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로 걷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름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아서 하는 일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줬을 때 그리고 여러 사람이 공유하며 그것들이 모이고 쌓이면서 가치화가 되는 과정에서 문화가 생겨납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전에 이어 씁니다. 백화암 또한 처음에는 어느 만큼의 공간이었겠지요. 평생에 걸쳐 스스로가 원하는 곳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그 성과로 『화암수록』의 지은이 유박은 스스로가 꽃이 된 듯했습니다. 풀과 나무 하나하나가 때에 맞춰 꽃을 피우거나 시기를 놓쳐 시드는 것이 오직 주인이 어떻게 기르느냐에 달려 있음을 말하는, 화훼에 파묻혀 세속과 멀리 있으면서도 글을 통해 소통하며 삶의 원동력으로 삼은 셈입니다. 그에게 백화암이라는 공간 자체가 삶의 전부이며 일상이었습니다.
칠언절구를 음미해 봅니다. 모르는 한자는 중간중간 찾아보고 다시 읽고 싶은 곳은 표시하며 299페이지를 어려움이 없이 읽었습니다. 시를 감상하면서 마치 백화암의 향기와 꽃잎이 피고 지는 소리가 마음에 머무는 듯하였습니다.
우연히 읊다 偶吟
근년 들어 병 많아도 화초 욕심 더 강해져 多病年來草癖强
열 그루의 꽃나무로 향기가 넉넉하다. 十株花木足芬芳
옆 사람아 화목에 탐닉한다 웃지 마소 傍人莫笑耽紅綠
티끌세상 옳고 그름 따짐보단 나을 테니. 猶勝塵間設否藏
또 又
낮에 냇가 향해 가서 낚시 파해 돌아와선 日向溪頭罷釣歸
꿈속에 나비 되어 꽃 둘레를 날았다네. 夢爲蝴蝶繞花飛
골짜기 새 울음에 깜짝 놀라 일어나니 谷鳥一聲驚起坐
석양의 산 그림자 사립문을 건너온다. 夕陽山影度關扉
‘계溪’ 자는 본래는 ‘기磯’ 자다. 溪字本磯字
책장을 펼쳐놓은 채로 눈을 감고 길을 따라 내 유년의 꽃밭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정성껏 꽃밭을 가꾸셨고 자연스레 우리 집을 꽃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웃들을 위해 외할머니께서는 대문을 살그머니 지쳐 두었습니다. 내게는 소꿉놀이터이기도 했던 꽃밭, 분꽃이 피면 씨방이 있는 부분을 살짝 돌려 꽃술 끝에 꽃이 대롱대롱 매달리는 예쁜 귀걸이와 호박 덩굴을 번갈아 꺾어서 목걸이를 만들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꽃밭에 숨으면 어머니께서는 알고도 모르는 채 넘어가 주셨습니다.
이제 곧 봄이 옵니다.
봄이 오면 괜스레 설레고 나른해지기도 합니다. 봄을 탄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날은 길을 나섭니다. 되도록 도로를 피해 골목을 걷곤 합니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풍경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슴골 보일락 말락 문득 리본이 풀어지는,
봄의 난간에서 나비가 피워 올리는,
환한 곡선으로 도시의 거친 호흡들 꽃잎이 되는,
주위를 살피는가 싶더니 나비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날개의 반점 점점 넓히며 맘껏 가슴을 부풀리는,
꽃은 꽃대로 나비의 배경이 되는,
푸른 고요도 한 송이 걸음 멈추는,
아직은 사거리 꽃집을 떠날 수 없는,
굉음과 속력이 질주하는,
빌딩숲과 근린공원을 접고 그 찬란한 순간을 접는,
저만치 나풀나풀 나비를 좇아가는,
사거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나비와 나와 꽃의 보폭
- <나비의 비행> 전문 / 유회숙
<나비의 비행>은 강북구 솔샘로를 걷다가 화분 주위를 맴도는 나비를 좇아 꽃집이 있는 사거리까지 걸어가며 봄기운에 취하여 저절로 생명을 노래하는 시가 써졌습니다. 한걸음 옮기기도 전에 대지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고 조금만 기다려주면 새싹이 얼굴을 내밀 것 같아 멈추게 되고 행마다 쉼표를 찍은 것은 봄을 한꺼번에 걸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때 쓴 시를 백화암 백 가지 꽃이 핀 길에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외람되이 이 글에 부칩니다.
글을 마치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화암수록』의 저자가 화암이 아니라 송타라고 적혀 있는 책자가 있는가 하면, 『화암수록』에 나오는 이야기를 『양화소록』의 내용으로 잘못 알고 인용한 예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를 바로잡기까지, 그 과정을 따라가며 읽는 것도 의미 있고 흥미 있었지만, 막상 얼마나 많은 노고와 시간을 할애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잘못된 경위를 소상하게 밝혀 『화암수록』 전문을 번역하고 각종 문집에서 찾은 백화암 관련 자료를 수록하게 되었다고 하니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님을 비롯한 글을 옮긴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서설을 통해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책 읽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책장을 덮기 전에 5페이지 “새로운 자료와 해후하는 것은 학자의 큰 기쁨이다.” 서문 첫 문장을 상기하며, 독자로서 이 책을 읽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유회숙 프로필
《자유문학》 시 등단. 한국편지가족 고문,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산림문학회 이사 등.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외. 지식경제부장관 표창 외. 시집 『흔들리는 오후』 『꽃의 지문을 쓴다』 『나비1 나비3』 『국수사리 탑』 저서 『편지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