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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를 이겨내는 신앙인
2016. 10. 24(주일낮예배) 디모데후서 4:10-12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이다. 저는 시를 잘 모르지만 서시의 해설을 보니 밤은 시대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고, 별은 희망을, 바람은 현실적 시련과 아픔을 상징하는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 놓고 마지막 소절인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를 보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어둡고 힘든 상황 속에서 윤동주는 희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향하여 나아갈 때 세찬 바람이 불어오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우리 중에 나의 삶은 늘 봄날입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때로 기쁘고 즐거운 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렵다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별을 바라보며 세찬 바람을 이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무식이 철철 넘칠 때 이 시는 연애할 때 사용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연애를 하다보면 싸우고 다툴 때가 있다. 그러면 그날은 연애의 밤이었고, 내 사랑의 별에 바람이 불어오는 아픔으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때 저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시와 전혀 상관없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는 서시를 통하여서 연애의 고통을 이겨내어야 한다고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삶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도록, 또 세찬 바람을 이길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서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시이고, 또 정말 아름다운 시이다. 시의 분류를 보면 서시가 저항시로 표기되어져 있고, 또 윤동주는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윤동주의 서시가 저항시가 되는가? 만약 서시가 선남선녀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시절에 서시가 발표되었다면 그 시는 연애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시는 일제시대 나라 잃은 고통 가운데서 기록된 시이기 때문에 저항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말하고, 역경을 이겨내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일제는 윤동주는 저항시인이다고 또 서시는 저항시다고 분류해 버린 것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상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는 세상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그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함께 힘써 노력하는 세상이다면 그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인가? 아니 우리교회는 꿈과 희망을 말하고 함께 힘써 노력하는 교회인가? 작년 10월 첫째주에 저는 마가복음 8장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벳새다로 가셨을 때 사람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소경을 고쳐달라고 부탁할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을 향하여 고쳐달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고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었는가? 마가복음 8장을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이 더 있다. 예수님이 소경을 고치실 때 무리들 앞에서 고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시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고치는 모습도 평상시 주님의 모습과 다르다.
(막 8:23-25)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리고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었을 때 소경은 네 보입니다 하고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말은 소경의 눈이 확실히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그 눈에 안수하여서 고쳐주었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침을 뱉고 눈에 손을 대고 안수하였는데도 소경은 완전히 낫지 못했겠는가? 예수님이 소경을 단번에 고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에 손을 대시고 안수하시는 것과 또 희미하게 보이게 하신 것은 소경에게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다. 믿음이 없는 소경의 아픔에 손을 대시고, 또 그 눈을 희미하게 열어주시므로 어~ 예수님이 사람들의 말처럼 능력이 있는 분이시구나! 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소경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침을 뱉고 안수를 하시는 것은 소경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분위기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다. 물론 분위기가 소경을 주께로 인도하였지만, 정말 소경이 눈을 뜨려면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분위기를 따라가는 신앙인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신앙인가? 제가 안식년에 캐나다를 잠깐 다녀왔다. 그때 캐나다에서 모교회 장로님을 만났다. 장로님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또 교회에서 장로로 한평생을 사시다가 은퇴한 후에 아들을 따라서 캐나다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장로님께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연세가 들수록 친구가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장로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로님의 대답은 제 생각과 달랐다. 장로님은 너무 편하다는 것이다. 주일에는 순번대로 공기도를 해야 하는데 다른 장로님의 기도보다 더 은혜롭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힘들게 하였고, 또 학교 선생으로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처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치하며 살았는데 캐나다에서는 편안하게 살 수 있어서 너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혹시 우리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교회에 올 때 사회적인 위치가 있으니 옷도 좀 잘 입어야 하고, 또 남들보다 더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득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른 교회는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아왔을 때 뭔가 어색한 것은 있지만,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경건과 거룩함에 어색함을 이기고 주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이러한 영적분위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분위기를 이겨내는 신앙인의 삶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있을 때이다. 그때 바울은 디모데를 속히 오라고 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 바울의 상황을 보시기 바란다.
(딤후 4:10-11)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이 복음 사역을 할 때 함께한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순교의 자리에 섰을 때 바울의 동역자들은 다 떠나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동역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는 신약성경에서 3번 이름이 나오고 있다. 로마로 압송되어서 2년된안 감금생활을 하였다. 그때가 AD 61-63년이었는데 바울은 그때 옥중서신이라고 불리우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빌립보서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옥중서신 중에 빌레몬서와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데마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데마가 나오는 성경구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골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바울은 빌레몬서를 기록할 때는 데마의 이름을 누가보다 앞서 기록하고 있고, 또 나의 동역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골로새서를 기록할 때는 누가에 대하여서는 사랑하는 의사 누가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데마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순교할 순간에 데마는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마의 모습이었다. 처음에 데마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바울의 동역자로서 사역을 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계속되는 핍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열정은 점점 식어져 갔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서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데마만 가진 것은 아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 그레스게는 성경에 오늘본문에만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에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디도는 알 수 있다. 디도는 바울의 사역에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맡긴 것처럼 디도에게는 고린도교회를 맡겨서 교회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두어서 그레데의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바울에게 소중한 동역자였던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버렸고, 그레스게와 데마마저도 바울을 떠나버렸는데 그런데 바울 곁에서 바울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누가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순교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바울이 끝까지 곁에 있는 누가를 볼 때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서울신문 1월 11일에 혼전순결, 프리섹스 시대의 작은 반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그 신문을 보면 20-39세 남녀 성인 각각 500명씩 1천명에게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설문조사에서 혼전순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다. 이 질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9.1%였다. 그리고 71.4%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응답하였고, 심지어 1.1%는 절대로 지키면 안된다고 응답하였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나는 아닐지라도 나와 결혼할 사람은 지켰으면 좋겠다고 반응한 사람은 18.4%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성관계를 가진 파트너의 수는 몇 명인가? 하는 질문에 남자는 8.3명이고, 여자는 4명이나 성관계를 하였다고 응답하였다.
지금 이 설문결과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나라는 이제 혼전순결을 지키는 것은 독특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사항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결혼을 하기 전에 신부가 드레스를 맞추러 가면 임신 몇 개월이니 거기에 맞는 드레스를 달라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제가 결혼할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제가 결혼할 때도 임신 중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고를 쳐서 결혼을 하게 되면 임신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고 하였다. 이것이 20-30년 전의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혼전임신을 너무 당당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이러한 시대에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연예인들의 이름을 서울신문을 기록하고 있다.
보컬그룹 노을의 강균성, 아이돌그룹 인피니트의 호야, 당구선수 차유람, 뮤지컬 배우 손준호의 공통점은 혼전순결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스타들이다.
특히 노을이라는 그룹의 가수 강균성은 여자친구를 사귀면 반드시 자신은 순결서약을 했기 때문에 결혼 전에는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해서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지킬 것은 지킨다는 생각에 혼전순결서약을 이야기하고, 또 그것이 옳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눈에 혼전순결을 지키는 이들이 예뻐보이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바울을 떠나갈 때 바울과 함께 한 누가는 정말 아름답고 귀한 동역자의 자리에 섰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정말 귀한 동역자는 분위기에 따라 가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안에 굳게 서서 함께하는 그 사람이 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네덜란드의 화가 야콥 드 위트가 그린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이 있다. 그 그림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대로 세례요한과 예수님, 그리고 천사와 비둘기와 성부 하나님의 모습이 다 나온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면 세례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연약하다는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그 장면에서 예수님의 얼굴에 광채가 빛나고 또 그 몸에서는 힘이 솟아나는 그런 모습을 그렸으면 좋겠는데 야콥 드 위트는 예수님을 세례요한이 붓는 물에 쓰러질 듯한 약한 모습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을 이렇게 연약하게 그렸겠는가? 야콥 드 위트는 공생애기간 동안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앞으로 겪게 될 많은 고난 앞에서 연약함과 겸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연약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놀라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놓으신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주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