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동헌(泰仁東軒) 청녕헌(淸寧軒)>
태인의 무게가 그대로 담긴 듯하다. 단청하지 않은 민무늬의 처마와 문살이 햇빛 속에 오히려 찬란하다. 피향정에 가려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피향정은 문화의 무게 민의 무게라면 동헌은 역사의 무게, 관의 무게이다.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351-9
방문일 : 2021.12.26.
1.살펴보기
*소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정면 6칸, 측면 4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 조선시대 태인현의 치소(治所)로 쓰이던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중종 때 건립되었고 1816년(순조 16)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내부의 공간구성이 매우 다양한 점이 주목되는데, 남쪽 전면에 툇간이 一자로 있고 그뒤에 우측으로 대청, 좌측으로 온돌이 있으며 그 위에 다시 북쪽으로 툇간이 있다. 이 북쪽 툇간에는 우측 2칸을 대청보다 바닥이 높은 마루로 꾸미고 나머지는 흙바닥으로 처리하였다.
이것은 동헌의 다양한 기능을 한 건물 안에 모두 집어넣은 것으로 뛰어난 공간구성이 돋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동헌을 지은 장인(匠人)은 전주관아인 선화당을 지은 사람으로, 1,000냥만으로 동헌을 지으려는 현감을 꾀어 3,000냥에 집을 짓도록 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동헌건물 가운데 규모는 큰 편이 아니지만, 공간구성이나 세부의장에서 뛰어난 기량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태인 동헌 외삼문
동헌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한 동이지만 공간구성의 효율성으로 매우 다양한 조선 후기 건축내부 양식을 볼 수 있다. 마치 세상을 다 품고 있는 듯하다.
다만 뒤로 보이는 태인초등학교 체육관인 듯한 초록색 반원형의 건물 지붕이 많이 거슬린다. 초등학교인데 뭔가 문화재를 위한 배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동헌 건물에는 고색창연한 현판이 걸려 있다. 淸寧軒이라는 현판은 드물게도 건물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비껴서 걸려 있는데, 아마도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보아 그 가운데 걸어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또한 공간 구성의 의미에 대한 인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닫힌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소통을 중심에 둔 사고가 아닌가 추론해본다.
2. <동헌 ‘청녕헌(淸寧軒)’ 명칭에 담긴 의미 (연경)>
조선왕조실록 ‘태종 6년 병술(1406) 4월 9일(기사) 해온정을 창덕궁 동북쪽에 짓고 명명하다’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이제 새 정자(亭子)가 이룩되어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였더니, 청녕(淸寧)으로 명명(命名)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저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天淸地寧]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적당하지 못한 듯하여, 내가 해온(解慍)으로 고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정궁인 경복궁과 달리 사저의 성격이 있는 창덕궁의 정자에 의미가 크고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청녕정’이라는 이름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해온(解慍)은 풀어녹여 따뚯하게 하는 것이다. 해온풍(解慍風)은 남풍(南風)을 말한다. 마음 편하게 쉬고 싶은 정자를 원한 것이지 사람의 도리나 정치를 생각하며 긴장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청녕(淸寧)은 대개 ‘건곤(乾坤)청녕(淸寧)’, ‘천지(天地)청녕(淸寧)’ 등의 사자성어로 건곤과 천지와 함께 짝을 이루어 사용하였다. 의미는 똑같이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는 뜻이다. 성종조 안암사 중창의 부당함에 대한 상소문의 ‘지치(至治)가 극진하면 천지가 청녕(淸寧)하고 일월(日月)이 정명(貞明)하며, 시국이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곡(百穀)이 홍부(紅腐)하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가 잘 되면 천지 청녕이 이루어진다 하였다. 지치(至治)는 이상적으로 잘 다스려진 정치를 말한다.
‘천지(天地)청녕(淸寧)’은 이러한 정치적 의미 때문에 궁궐의 건물 명칭으로 많이 쓰였다. 북경 고궁 자금성의 2궁은 건청궁(乾淸宮), 곤녕궁(坤寧宮)인데, 교태전(交泰殿)과 함께 3궁으로 칭해진다.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기 전 후금 시절에 수도 심양에 북경의 고궁을 모방하여 지은 고궁에도 청녕궁(淸寧宮)이 있다.
우리는 조선전기에는 궁궐 이름으로 사용한 거 같지 않다. 조선 말엽에는 이 이름을 사용하는 궁궐이 나타나는데, 경복궁 후원에 있는 건청궁(乾淸宮, 1873)과 그 내부 건물인 곤녕합(坤寧閤, 1900)이 그것이다. 중국와 조선의 위상의 변화와 관계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건청궁 안의 다른 건물 옥호루(玉壺樓, 또는 옥곤루(玉壼樓))는 명성황후 시해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곤녕합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일반 동헌의 명칭으로는 태인 외에 충주의 경우에 보인다. 충주청녕헌이 그것인데, 충주는 청주와 함께 충청북도의 이니셜문자로 사용된 충청도의 대표도시로 4대사고(四大史庫)가 있던 곳이고 관찰사가 있던 곳이다.
태인은 충주보다 규모가 작은 지역으로 신라조에는 정읍현을 관장한 군이었으나, 1914년에는 정읍군 아래 태인면이 되었다. 하지만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용 판각본인 방각본이 처음 나온 곳이어서 서적 출판 등 문화적 의미가 중시되는 곳이다. 태인본은 영리출판이라고는 해도 주로 유교 역사 전적 및 생활정보 전적 등이어서 주로 소설로 널리 알려진 방각본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성서원 앞에 2018년 개설한 태인방각본전시관이 있다.
최치원이 태인현감 시절 세웠다는 피향정, 호남제일의 정자로 각지에서 시인묵객이 몰려들었다는 피향정 또한 태인의 위상을 보여준다. 피향정은 지면을 달리해서 살핀 바 있다.
한편으로 ‘청녕헌’은 태종이 궁궐 정자의 명칭으로서도 꺼릴 정도였기 때문에 한 지방의 동헌 명칭으로는 조금 의미가 거대하다는 느낌도 있다. 그러나 동헌을 지은 장인(匠人)이 전주관아인 선화당을 지은 사람으로, 1,000냥만으로 동헌을 지으려는 현감을 꾀어 3,000냥에 집을 짓도록 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였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건물을 지어보려는 대목장과 제대로 선정을 펼쳐보려는 현감의 의도가 만나, 태인을 맑은 하늘ㆍ편한 땅의 고을로 만들어 보려는 높은 뜻을 가지고 작명하였다면 그 또한 기릴 만하지 않을까 싶다. 거꾸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태인은 그만큼 크고 당당한 고을이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淸寧'이 우리의 건물명으로 쓰인 것은 모두 1800년대 이후라는 거다. 태인 淸寧軒 중수 시기는 1816년이다. 궁궐 이름은 그보다 더 늦다. 중세를 지난 이행기 1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중세의 보편주의 사상이 무너지고, 중국 중심의 사고가 약화되는 시기, 민족이 중시되는 시기이다. 문학에서는 자국어 문학이 확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소하지만 '淸寧軒'이 쓰인 배경은 이와같은 이행기적 사고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태인 동헌 청녕헌은 고래의 태인의 위상, 백성들이 가진 태인의 위상이 반영된 동헌임이 분명하다. 태인의 의미 강화가 조선과 민족과 나의 강조, 중심과 대등한 주변의 강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멀리까지 생각해본다. 아직도 정정한 동헌 건축물에서 그 기백을 읽을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건물 내부 구조와 구석구석의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미가 공간 이용의 슬기와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준다.
지금은 한 공간으로 터져 있지만, 이 대청은 천정에서 내려진 철봉으로 보아 겨울에는 공간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가림막이 쳐져 보온을 이룬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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