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曹植) <산천재와 남명매> 그리고 기념관
이황과 더불어 경상좌 우도의 두 산인 남명 조식의 산천재이다. 기념관은 물론이고 서원 등등 그의 흔적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나 산천재는 당시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 단청을 보니 최근에 다시 수리한 것이다. 이전 사진을 보니 지금과는 색깔이 다르다. 이렇게 수없이 변하며 오늘에 이르렀으리라. 하지만 뼈대는 옛날 남명 그 시절의 건물이고, 무엇보다도 집 앞의 매화는 그때 남명이 심은 것이라서 그때의 기운이 바로 느껴지는 듯하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산천재, 남명매,
위치 :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1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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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식(曹植,1501〜157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선 중기 이황과 함께 영남유학의 지도자였던 조선의 학자. 1548년 전생서 주부를 시작으로 종부시 주부, 사도시 주부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됐지만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해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로 인해 명성이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고 정인홍, 하항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해 지리산 기슭에 산천재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다음백과 전재)
2) 산천재
1) 산천재 주련
<德山卜居>(덕산복거)
春山底處无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산 아래라도 향기로운 풀이 없으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상제 사는 곳 가까운 천왕봉을 사랑한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와 무엇을 먹나 하나
銀河十里喫有餘(십리은하끽유여) 은하수 십리이니 마시고도 남는구나.
자연을 사랑하고 지리산 높은 천왕봉을 사랑하며 은하수를 먹으며 살겠다는 초탈한 기개를 보여준다. 왕이 몇 차례나 불러도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은 자세는 세상이 그의 높은 뜻을 담을 수 없다는 대붕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세상을 초월해서인지 남긴 글도 많지 않다.
<학기유편 學記類編>은 창작이 아니라 글을 읽으면서 기록한 구절로 후인들이 편집한 것이고, 그의 문집 <남명집> 에 합산되어 있다. 그의 사상을 알려면 학기유편을 봐야 한다고 하나, 정작 이 책은 창작이라기보다 이해를 위한 비망록으로 알려져 높은 뜻에 비해 실제로 지은 직접적인 저술은 많지 않은 듯하다.
3) 남명매(南冥梅)
선생이 61세에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청에는 이외에 원정매, 정당매의 2매가 더 있어 산청3매라 일컬어진다. 원정매는 고려말 원정공 하즙(1303~1380) 선생이 심은 것으로 원정공의 고택이 있는 남사예담촌 하씨고가 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정당매는 고려 말 대사헌과 정당문학을 지낸 통정공 강회백(1357~1402) 선생이 어린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중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령이 640여 년인 노거수로 2014년 완전고사해 접목으로 번식을 시도해서 관리하고 있다.
충남 아산의 맹사성 고택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 고택으로 알려져 있다. 맹사성은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 은행나무가 엄청난 크기로 지금도 정정한데, 집과 인근 정자 구괴정을 포함하여 맹씨행단으로 불리며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공자 강학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를 심어왔다. 서원이나 향교에 가면 대부분 은행나무가 있다. 이곳은 은행나무가 아닌 매화이다. 61세에 이곳에 안착한 그 해에 조식이 바로 심은 나무가 은행나무가 아닌 매화인 것은 그의 학문세계와 연계해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은행나무가 유교나 공자나 강학을 상징한다면 매화는 그보다는 고결한 심사를 먼저 떠올리게 해 매란국죽 4군자의 하나로서 선비들은 시와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시습의 호가 매월당인 것도 유교적 분위기보다 산천을 의지하며 떠돌던 방외인으로서의 마음을 더 잘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은하수 십리나 뻗어 있으니 먹을 것 없다고 염려하지 말라는 주련시는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는 유학보다 고결한 매화의 자연을 더 가까이 생각하고 기상을 높인 모습과 더 상통한다. 선비들이 사랑한 두 나무, 은행나무와 매화나무는 각각 세상과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황이 매화를 사랑한 것 또한 그의 내면을 상징할 것이나, 남명이 마당 한 가운데 상징으로 심은 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 싶다.
광양 매화, 선암사 매화 등이 유명하지만 그곳은 매화 군락으로 아름다운 곳이고, 오랜 역사와 마음의 향기를 담은 매화를 찾으려면 이곳에 오는 것이 더 적절할 거 같다.
4)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정진하던 산천재(山天齋)
산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들과 마루가 높다. 조식이 처음 이곳으로 옮겨오던 1561년(명종 16)에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1584년(선조 17)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세워졌다.
산천재 (山天齋)의 산천(山天)이란 주역 대축괘(大畜卦)의 괘상으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 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굳이 주역의 괘를 빌려 풀이하지 않아도 산천을 벗삼아 살고픈 마음을 담은 재라고 풀이하면 어떨까. 아니면 산천과 같이 마음 비우고 스스로의 원리로 살고자 한 마음의 표현이라면 어떨까. 실제 주련의 문구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은 마음도 자연의 뜻을 실천하며 살려한 의지가 아니었나 한다. 이 또한 주련에 담긴 마음이다.
조식 남명문집 목판. 목판을 보관한 건물로 보인다
*선조대왕 제문비
*남명선생 시비
2) 남명시
請看千石鍾 천석의 큰 종을 보시게나.
非大扣無聲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爭似頭流山 다투는 것이 두류산과 같아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구려. (연경 역)
* 두류산은 지리산의 이칭
남명은 스스로 이황과 비교하여 "내 글은 비단을 짜서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한 필을 이룬 것."이라 하였다. 뜻이 높고 커다란 재목인 자신은 정작 써놓은 글과 주장이 많지 않아 이룬 것이 없으나, 이황은 재목은 별로 대단하지 않으나 그 나름의 업적이 있다고 한 것이다. 위 시와 상통하는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명기념관 입구
기념관 출입문 성성문
2004년에 문을 연 기념관
남명 조식과 신도비 및 상소문비
조식 동상
기념관 앞 마을
인근에서 멀리 바라본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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